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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2
    김형기 교수 노동운동10대과제에 대한 비판(2)
    하이하바
  2. 2004/11/08
    광릉수목원 단풍길
    하이하바
  3. 2004/11/01
    반(反)한 단체 혹은 반(半)한 단체"
    하이하바

김형기 교수 노동운동10대과제에 대한 비판

전태일기념사업회 주최로 5일 오후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대회의실에서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학계 등 각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 '한국 노동운동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 하나-전태일 정신으로 비추어 본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주제로 토론회에서 김형기 교수가 한국 노동운동의 10대 과제를 명제 형식으로 발표했다.

 

심각하게 우려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부족하나마 이에 대한 비판을 해보고자 한다.



<명제 1> 노동계급의 힘을 강하게 하는 운동노선이 노동계급적이다.

 

그동안의 노동운동 논쟁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반성을 촉구하는 주장에 대해 노동자 계급성이 없다든가, 노동계급적 관점이 없다든가 하는 비판이 빈번히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노동계급적 관점이고 어떻게 하면 노동자 계급성을 높이는가?

노동계급의 힘을 강하게 하는 운동노선이 노동계급적이다. 어떤 특정의 고정된 이데올로기를 지지해야 노동계급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맑스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곧 노동계급적 관점이거나 노동계급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념들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킨다면 더 이상 노동계급적이 아니다. 앙상한 계급성, 고립된 계급성은 진정한 계급성이 아니다.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는 운동노선은 반노동계급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노동계급의 힘을 ‘실제로’ 강하게 하는 이념과 정책만이 노동계급적이다. 이런 이념과 정책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가변적이고 공간적으로 다양하다. 노동계급의 힘을 강하게 하는 고정된 이념과 정책, 운동노선은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구조변화, 세계사와 한국사의 변화에 대응하여 노동계급의 힘을 강하게 할 운동노선을 부단히 모색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도(道)는 결코 불변의 고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누가 노동자인지, 무엇이 노동계급적인지에 대해 고정불변의 정의는 없다. 불변의 ‘추상적 프롤레타리아’(abstract proletariat) 개념에 기초한 노동운동 노선은 잘못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老子)

 

[비판적 주석 1]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하게 하는 이념과 정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김형기 교수의 핵심 주장은  마지막에 이야기한 추상적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기초한 노동운동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형기 교수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확고한 이념적 정립이 노동운동에 필요하다.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운동은 계급의 힘을 강화하기 전에 노동해방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가져야만 한다. 정치적 이념이 없는 계급의 힘은 실리주의, 경제주의, 집단주의 이상 아니다.

김형기 교수의 첫 번째 명제는 추상적 프롤레타리아론을 비판하고 있기보다는 은연중에 계급의 힘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회주의,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한 지향이 앙상한 노동계급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지적이다. 오히려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출발로 돌아가서 확고한 노동해방의 이념, 사회운동과 결합하는 노동운동을 만들 때 노동계급의 힘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이 정규직 중심주의, 경제주의에 빠진 노동운동을 치료하고 사회변혁이념을 선도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길이다.


<명제 2> 노동계급의 힘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의 총화이다.

노동계급의 힘은 파업투쟁과 같은 물리적 힘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힘은 단기적으로는 강하게 표출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사라지고 경우에 따라서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소모적인 파업투쟁은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기는커녕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은 노동자들의 집합적 힘이 그 기초가 되지만 노동자 개인의 정치의식과 노동운동 리더들의 정치력, 전략적 행동 능력, 교섭력, 사회적 대화 능력 등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과 능력을 높이는 것이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길이다.

노동계급의 경제적 영향력은 노동자 개개인이 선진적 생산력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에서 IT, BT, NT, CT 등 신기술에 대응하는 경영능력과 노동능력이 높을수록 노동계급의 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된다.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생산력의 주된 담당자가 되지 못하면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문화적 영향력은 노동자들의 지적 도덕적 능력에 달려 있다. 철학, 사회과학적 지식,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감수성, 자기수양이 노동자들의 지적 도덕적 능력을 높인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은 노동계급의 학습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노동계급의 힘은 투쟁능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에서도 나온다. 노동자들의 학습능력을 높이는 활동이 파업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양화되고 있는 21세기 문화의 세기에서는 오히려 갈수록 그 중요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

진정한 힘은 힘의 사용을 절제하는 데서 나온다. 파업할 힘이 있어도 파업하지 않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을 남용하면 힘이 아니라 폭력이 되고 마침내 힘의 효과가 없어진다. 파업투쟁 일변도 때문에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면 노동계급의 힘은 약화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孫子兵法).

 

 

[비판적 주석2]
도무지 노동운동 위기 탈출을 위한 명제로까지 언급될 내용인지 의심스럽다. '파업 남용'이나, '파업투쟁 일변도'라는 문제제기가 노동운동 전술이 다양하지 못한 문제, 힘의 집중과 분산이 안 되는 문제,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중요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힘의 남용을 언급하고 파업투쟁일변도의 투쟁이 사회적 고립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하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라고 하는 것은 개량의 극치다. 싸우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인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이 선진적 생산력을 주도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동자 계급은 자기노동의 자기소유라는 노동해방사회를 만들기 이전엔 완전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없다. 그 과정으로 가는 길이 계급투쟁이고 계급투쟁의 다양한 방식 중의 하나가 노동조합운동-노동조합의 파업이다. 그리고 방식의 조건이 문화적, 감성적 능력을 키워 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또 김형기 교수는

" 노동계급의 경제적 영향력은 노동자 개개인이 선진적 생산력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에서 IT, BT, NT, CT 등 신기술에 대응하는 경영능력과 노동능력이 높을수록 노동계급의 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된다.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생산력의 주된 담당자가 되지 못하면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한다

신기술을 노동자계급이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중 하나가 지적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이다. 즉 우월한 지적능력과 그것의 재생산을 지배계급과 중간계급이 독점하고 피지배계급을 생산의 단순한 부속물로 떨어트리는 것이다. BT, NT, CT, IT 등 신기술에 대응하는 노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 신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의 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거기에 노동자 계급이 경영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상식이하의 말이라고 본다. 노동자계급이 경영에 참여한다고 해서 김형기 교수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가 오는 지 묻고 싶다.
김형기 교수의 말은 시작은 좋으나 결말은 정 반대로 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학습과 정치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한 것은 올바른 사회의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 운동에서 간부나 지도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할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형기 교수의 주장은

 

공부해서 노동자 자신의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또 파업을 강력한 노동자의 무기로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이 없는 것을 비판하고 다양한 투쟁 전술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옳지 무작정 힘의 남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첫 번째 명제에서 김형기 교수가 이야기한 '계급의 힘'은 김형기 교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투쟁을 통해서 나온다. 정해져 있는 (노동)계급은 없으며 않으며 투쟁을 통해서만이 계급으로 완성된다. 다양한 투쟁전술을 개발하고 생산현장 만의 투쟁을 넘어서 사회적인 투쟁을 벌일 때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명제 3> 노동계급의 집합적 힘은 연대와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노동계급의 집합적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수의 힘이다. 나아가 그 수의 결집력이다. 보다 많은 수가 강하게 결집하려면 다차원의 강한 연대가 필요하다.

우선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가 필요하다. 성, 인종, 연령, 학력, 기업규모별, 고용형태별로 노동자들이 이질화되고 분할되면 노동계급의 힘은 약화된다. 노동시장과 노동과정, 노동력 재생산의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집합적 힘을 강화하는 길임은 자명하다. 현재 대-중소기업간, 정규직-비정규직간 노동자의 심각한 분할을 극복하는 것이 노동계급 내부 연대의 당면과제이다. 연대임금정책(solidaristic wage policy)과 연대숙련정책(solidaristic work policy)은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를 축소하여 집합적 힘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다른 계급계층 및 그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연대는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중심성론이 기각되어야 하며, 다른 계급?계층과의 대등성 인정, 다양성 인정, 관용이 필요하다. 과거와 같은 노동계급 중심적인 통일전선론으로는 더 이상 힘을 결집할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위계적 조직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조직을 통한 집합적 힘의 형성을 위해서는 노동자들과 다른 사회주체 사이에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다른 사회주체와 사회운동을 대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신뢰받고 파트너로서 협력 대상으로 인정받을 때, 노동운동과 다른 사회주체와 사회운동 사이에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고 따라서 노동계급의 집합적 힘이 강해질 수 있다.

사회 각계각층으로 연결되는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가지는 개방적 네트워크를 통한 노동운동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의 동원은 노동운동의 힘을 증대시킬 것이다.

 

 

[비판적 주석 3]
<명제3>은 노동계급운동의 중심성을 넘어서 사회운동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노동계급운동이 사회운동과 연계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 또한 사회운동일 뿐이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별도의 존재기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조합주의를 넘어서 사회운동을 자기 활동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또 정규직-비정규직, 대공장-영세사업장, 남성-여성, 내국인-이주노동자와 같은 노동자 내부의 분활 상황의 책임과 원인에 대한 분석 없이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해결해야할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맞지만 자본의 노동통제 및 노동력 관리 전략을 애써 무시한다면 김형기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는 해결 될 수 없다. 노동운동 내부의 각성이 중요한 만큼 자본의 노동분할 전략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명제 4> 'One Big Union' 정신에 따른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큰 노조 정신에 따라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이 필요하다. 지금 노동조합운동 통일의 가장 큰 계기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이 될 것이다.

현재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사실상 이념이나 정책에 큰 차이가 없다. 과거 역사의 차이는 있지만 미래지향적으로 볼 때 그 차이는 사소할 것이다. 따라서 양 노총이 대통합을 못할 이유가 없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은 노동운동에 ‘Big Push’ 요인으로 작용하여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를 높이고 현재의 교착과 침체상황을 크게 반전시키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은 노동정치가 국가정치보다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통합의 전제조건은 'One Big Union' 정신을 저해하는 분파주의, 편협한 정파지향성을 지양하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노동운동 내부에 이를 공론화시키고 대중토론을 진행함과 동시에 통합추진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판적 주석 4]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이념, 정책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맞다. 한국노총의 반 자본의식이 높아졌기보다는 민주노총의 반 자본 의식이 낮아졌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차이가 별로 없다고 하면 너무나 슬픈 일인데 김형기 교수의 판단이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노총과 통합 문제는 중요할 수 있다. 김형기 교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은 노동운동에 ‘Big Push’ 요인으로 작용하여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를 높이고 현재의 교착과 침체상황을 크게 반전시키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은 노동정치가 국가정치보다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

 

 이라고 보고 있다.

김형기 교수는 <명제3>에서는 수의 결집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One Big Union을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형기 교수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조직률이 얼마인가 하는 것이다. 두 조직이 통합한다고 해도 전체 노동자의 조직률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조직의 통합이 조직률의 근본적이고 급속한 확대를 가져올까 하는 것은 계산조차 되어 있지 않다.

진정한  big push를 이루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두 노총의 통합을 통한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다 노동자들에게 외면 받는 이유와 스스로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고 해결하는 것이다. 극복 과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가 중소영세사업장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를 진정한(?) 조합원으로 '조직할 것이냐', '할 수 있냐'의 문제다. 이것이야 말로 김형기 교수가 이야기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 '노동의 정치의 위상'을 높이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따로 가건, 1국1노조가 되건 새로운 조직화의 전망과 실천을 만들어야만 희망이 있다. 그러지 않고 진행하는 통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며 뒷걸음치기 일뿐이다.

이런 고민 없는 통합은 오히려 거대노조의 관료화 중앙집권화를 가져올 것이다. 더군다나 민주노동당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정치주의자들이 통합 산별노조 중앙에 득세할 것이다. 노동조합 마저 '철새' 도래지가 될 것이다.

 

 

<명제 5>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둘이 아니다(‘勞市不二’)

임노동 재생산은 노동과정(일터), 노동시장, 노동력재생산(삶터)이란 3역의 순환계열상에서 이루어진다. 그 3영역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주체형성은 이 3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노동과정에서 삶의 질(노동생활의 질)이 향상되었으나 노동력재생산(소비생활, 주거생활, 육아/양로, 교육, 문화) 과정에서 악화된다면 전자는 무효화될 수 있다. 주체형성은 노동과정에서만이 아니라 노동력재생산 과정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운동(임투, 단투, 파업)과 노동력재생산과정에서의 노동운동(노동자 삶의 질 향상운동)은 전체 노동운동 중 주요한 두 부분이다. 소비자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등 시민운동은 또 다른 형태의 노동운동 즉 노동력재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운동이다. 노동자의 시민으로서의 주체형성은 노동력재생산 영역인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새로운 노동운동’(New Labor Movement)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그 표현형태의 차이만을 보고 다르다고 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 갈등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노동운동의 잘못된 관점을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한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분리되면 두 운동은 함께 약화된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및 문화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특히 시민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시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의 진정한 의미이다.

 

 

[비판주석 5]
<명제5>에서 이야기하는 주체형성이 어떤 주체인가? 자본의 지배 안에서 새로운 주체, 혹은 투쟁의 주체를 형성하겠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시도 안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주체형성이 노동력 재생산과정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체제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브뤼노프가 이야기하는 데로 '화폐재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다. 그중 노동력 재생산이라고 하면 자본에 의해 상품으로 규정된 노동력의 재생산을 말한다. 즉 노동자가 스스로 소유하고 통제하는 자신의 노동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인 노동력 재생산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착취당하는 주체로서 노동자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 주거, 문화가 나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결코 나아질 수도 없다.

또한 시민운동에 대한 언급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 우선 시민운동을 과거 계급운동에서 이야기했던 방식으로 편협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시민성을 획득하는 운동과 시민운동은 차이가 있다. 근대 시민혁명에서부터 브루주아가 독점한 시민성을 이제 노동자계급이 되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형기 교수처럼 무비판적으로 시민운동의 개념을 남발하는 순간 시민성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폄하되는 것이다. 사실 시민운동은 벌써 하나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체제내적인 NGO운동이 시민운동이다. 이들의 운동은 소브루주아적인 운동이며 한국정치지형에서는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개혁세력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김형기 교수가 언급한 인권, 여성, 교육, 환경 등은 시민운동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운동(즉 변혁성을 지향하는)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현재에도 두 가지 지형이 공존한다. 이런 차이점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운동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김형기 교수는 이런 차이를 혼동했기보다는 NGO운동으로 시민운동을 사고했다. 그 증거는 그가 중요하게 거론한 시민운동의 영역 중 소비자 운동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는 대부분 노동자임과 동시에 노동자계급, 노동조합운동과 대치적 관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에 포섭된 이데올로기 계층일 뿐이다.


<명제 6> 사회코포라티즘 전략과 시민사회 전략의 결합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을 주장해온 논의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노동권 실현을 중심으로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를 지향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권 실현을 중심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결합하려는 경향이다. 전자를 사회코포라티즘(social corporatism) 전략, 후자를 시민사회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코포라티즘 전략은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고, 시민사회 전략은 문화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산업별 노조 건설과 산업별 교섭체계의 확립, 노사정의 중앙교섭 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 도출 등을 지향하는 경향은 사회코포라티즘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등을 지향하는 경향은 시민사회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를 보면 집권, 위계, 타율의 조직원리를 가지는 대량생산경제에 기초한 포디즘(Fordism) 시대의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코포라티즘이 비교적 유효하였으나, 분권, 네트워크, 자율의 조직원리를 가진 지식기반경제에 기초한 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 시대의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코포라티즘(거시 코포라티즘) 전략의 효과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서구의 노동운동은 점차 시민사회 전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경제에서는 1997년을 계기로 포디즘이 결정적으로 붕괴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여전히 포디즘 시대의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산업별 노조와 산업별 교섭체계는 포디즘의 대량생산경제에 적합한 노조조직 형태이며 노사교섭형태이다. 또한 한국경제도 이미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량생산경제에서 지식기반경제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코포라티즘 전략의 유효성이 점차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기업별 노조체제에 있고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의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사회코포라티즘 전략 강화의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코포라티즘 전략과 시민사회 전략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비판주석6]
비판할 필요성조차 느끼기 어려운 부분이다. 김형기 교수는 진정으로 사회적 코포라티즘이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한 과제라고 보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런 분이 어째서 새로운 사회의 주체형성을 고민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자 하는가? 노동운동에 일말의 애정이 있다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적 코포라티즘을 권하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에 그대로 투항하라는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노동권을 편협하게 사고하고 있는데 노동권 실현을 위해서 사회적 합의를 지향하려고 한다는 것은 노동의 법적인 권리를 말하고 있는 것 이상 아니다. 노동권은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아닌 고유한 노동자의 권리다. 봉건체제 이후 근대사회가 출발하면서 왕족과 귀족, 성직자 권력을 대신할 주체로서 브루주아는 '소유권'을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권'을 주장했다. 브루주아의 권력장악 이후 자기노동의 자기소유라는 노동권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의 법적인 권리 수준으로 떨어진 이후 김형기 교수처럼 노동권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실현하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노동권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에서 노동자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김형기 교수가 노동해방을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명제 7> ‘전국-산업-지역-기업’을 연결하는 노사관계 틀 형성이 필요하다

현재 노동운동은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산업별 노조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업별 교섭 체제에서 산업별 교섭체제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이는 기업-->산업-->전국으로 이어지는 단일 경로의 집권적 교섭체계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나 교섭비용의 감소를 위해서나 교섭체계의 집권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일 경로의 교섭체계만으로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주체형성의 과제를 포괄하기 어렵다. 기업에서 산업으로 확대되는 축은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직업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는 다른 경로의 교섭체계가 필요하다.

즉, 기업<-->지역<-->전국으로 연계되는 분권적 교섭체계의 경로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지역별 교섭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하는 기업은 어떤 산업에 속하지만 동시에 어떤 지역에 속한다. 대기업의 경우는 몰라도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기업이 입지한 지역경제의 상황에 따라 고용과 임금 등 노동자의 노동생활의 질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지역노사정협의회와 지역혁신협의회, 지방의제 21지역협의회 등 현재 존재하는 지역 3대 거버넌스(governance)에 적극 참가하여 노동, 혁신, 환경 관련 지역정책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가올 지방분권 시대에,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명제와 함께 ‘지역경제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명제가 더욱 절실히 다가올 것이다. 지역경제 위기 속에서 노동운동과 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간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지역경제 재도약을 주도하여 지역 내 노동운동의 정치적 영향력도 확대한 독일 Stuttgart 지역 금속노조의 실천 사례는 벤치마킹 할만하다.

 

[비판주석7]
기업, 지역, 전국으로 연결되는 교섭체계는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이유가 오히려 지역노사정협의회와 같은 사회적 합의기구로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는 시작과 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다. 지역경제를 살려 노동운동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자는 주장은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정치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하자는 이야기와 같다.

기업, 지역, 전국으로 연계(좀더 정확하게는 기업의 독자적인 행동권과 산별-지역-지부 교섭 병행)되는 교섭체계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이유는 단순한 교섭체계의 문제가 아니다. 보건의료 노조 사례에서 보았듯이 산별교섭 과정에서 중앙으로 권한이 집중되면서 나타난 문제들이다. 지역, 지부조직을 무력하게 하는 산별의 권력독점과 관료화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별노조 체계는 기업별 노조를 뛰어넘는 비정규-영세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담당해야 하고 노동조건을 하향평준화가 아닌 상향평준화 시켜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 의해 독점되는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부-지역의 자유로운 투쟁을 지원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김형기 교수의 주장은 이와 같은 필요성으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제 8> 노동계급의 이익과 사회의 보편이익을 일치시키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좁은 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 노동자들은 고임금을 받으면서도 과도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지나친 파업투쟁을 일삼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국민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민이 불편한 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기 위해 소모적인 파업을 한다고 배척당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주된 요인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직업적 이익에 집착한 결과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대립시키고 있는 데 기인한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퇴영적이게 되면, 노동운동은 결코 사회발전을 주도할 수 없다. 맑스는 ‘혁명적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일치시키는 계급이다’고 하였다.

노동자들이 노동력의 상인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인간으로서 사회발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면, 사회 전체의 이익, 국가 전체의 이익, 국민경제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면서 자신의 직업적 이익을 실현하는 운동 윤리를 가져야 한다.

물론 노동운동은 지구적 범위에서 인권 실현이나 반전, 생태계 보전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실천해야 한다. 이런 인류적 관점과 함께 국민경제적 관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데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국제경쟁력 향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지금 부각되고 있는 제조업공동화문제에 대한 노동운동의 적극적 대응은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경제의 경쟁력 향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운동노선,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운동노선을 정립해야 한다. 이런 노선에 설 때, 지방을 살리려는 지방분권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날 수 있다.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지역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지방분권운동은 곧 지역의 보편적 이익 실현을 위한 운동이다. 또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생활정치가 전개되는 지역에서의 밑으로부터의 정치, 즉 지역정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까닭에 지방분권운동과 노동운동은 둘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풀뿌리 주민자치운동과 결합하고 지역혁신운동과 결합함으로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지방분권운동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비판주석8]

나는 김형기 교수가

 

 "맑스는 '혁명적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일치시키는 계급이다'고 하였다."

 

를 인용을 하면서 또 다시

 

"노동자들이 [....], 사회 전체의 이익, 국가 전체의 이익, 국민경제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면서 자신의 직업적 이익을 실현하는 운동 윤리를 가져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혁명적 계급이 경계해야할 부분이 바로 애국주의다. 국가경쟁력강화 이데올로기, 사회통합이데올로기로 당해왔던 수많은 역사를 김형기 교수는 애써 잊고 있는지 묻고 싶다.
사회 보편적 이익, 인류 보편적 이익이 노동자 계급이 추구해야할 근본 노선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위해서 김형기 교수와 같은 논리를 펴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명제 9> 대안적 발전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과거 변혁적 노동운동은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지향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세계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거의 모든 국가의 노동운동에서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한 이념으로 추구되고 있지 않다. 대신 사회민주주의가 현실적 노선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가 등장함에 따라 과거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노동운동도 활력을 잃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나? Antonio Negri 가 주장하는 것처럼 제국(Empire)에 대항하는 ‘반제국’(Anti-Empire) 운동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반글로벌화(Anti-Globalism) 운동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종래와 같은 반제국주의나 반자본주의 운동을 해야 할 것인가?

Anti운동으로서는 이러한 운동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것도 별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나? 우리가 Utopianist(이상주의자)가 아니고 진정한 Realist(현실주의자)라면 무조건 북극성만 바라보고 항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멀리 북극성을 지향하면서도 우리의 배는 제주에서 부산에 이르는 항로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진보적 노동운동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가능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여기서 대안적 발전모델(alternative development model)로서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인간의 얼굴을 한 글로벌화’와 참여(participation), 연대(solidarity), 생태(ecology)의 가치를 지향하는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Post-Fordist Coordinated Market Economy)를 상정해 볼 수 있다.

탈포드주의는 ‘분권-네트워크-자율’의 원리를 가진 작업조직과 생산시스템, 기업조직을 말하며, 조정시장경제는 ‘참여-연대-생태’의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시장경제를 말한다. 여기서 참여는 참여민주주의를 말하고, 연대는 복지국가 혹은 복지공동체를 말하며, 생태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주의적 삶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1987년 이전의 개발독재와 19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를 넘어 ‘제3의 길’을 한국적 조건에 맞게 이러한 발전모델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유럽강소국 모델, 네델란드 모델, 덴마크 모델 등도 어디까지나 참고사항 일뿐 우리의 역사화 문화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 한국 독자적인 대안적 발전모델을 실천 속에서 모색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절실한 과제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고비용-저효율의 대안적 발전 모델, 고비용-저효율의 진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비판주석9]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진보의 가치마저 죽어야 하는가? 실패한 사회주의든 죽은 맑스주의든 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가치는 인간해방이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해방의 필요성이 사라졌는가?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인간을 억누르면서....

김형기 교수가 이야기하는 제3의 길에서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인권이 보장되는 진보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김형기 교수는 진보를 비용과 효용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경제학에 무지한 나는 김형기교수가 말하는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으나 시장경제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진보의 가치도 비용과 효용의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시장경제 안에서 '복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지 의문이다. 시장경제 안에서는 아무리 위장하고 포장해도 경쟁과 착취가 최고의 효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를 꿈꾸기보다는 노예해방이 이루어지는 봉건제를 꿈꾸는 것이 쉽다.

 

 

<명제 10> 한국 노동운동은 지금 사회적 대타협을 능동적으로 도출해야 한다

노동운동이 대안적 발전을 지향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장기적으로 하락시킨다면 물론 이런 타협을 지향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탈포드주의적 조정시장경제’라는 대안적 발전모델이 중장기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실현되려면 몇몇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따라서 대안적 발전모델에 이르는 과정은 주요한 계기들을 포함하는 점진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노동운동이 대안적 발전모델에 이르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로드맵을 가지고 사용자 및 정부 및 시민과 사회적 대화를 통해 대타협에 도달하는 실천을 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은 경제위기와 정권을 잡은 개혁세력의 정치위기가 결합되어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노동운동대로 사회적 고립의 위기에 빠져있다. 경제위기, 정치위기, 삶의 위기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위기가 지속되면 파시즘과 같은 심각한 반개혁적 반전이 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태 발생을 막고 우리사회의 민주개혁의 흐름을 지속가능하도록 하여 마침내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능동적으로 역사적인 대타협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대타협은 대안적 발전을 지지하는 각계각층의 연합 즉 ‘대안적 발전 연합’(alternative development coalition)을 구축함으로써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연대’는 비록 졸속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대안적 발전에 이르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새롭게 추구할 가치가 있는 연대라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은 지금 노사정간의 정치경제적 교환을 통해 이루어질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하기 위한 의제설정과 전략수립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김형기/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비판주석 10]

[....]"사회적 대타협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장기적으로 하락시킨다면 물론 이런 타협을 지향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명제10>첫 번째 문단에서 김형기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회적 타협(사회적 합의를 말하는 것인 듯!)에서 자본이 얼마나 많은  배신을 했는지,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했는지를 김형기 교수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지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다.

김형기 교수가 노무현정권을 개혁세력으로 보고 있는 순간 아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노무현이 추구하는 정책은 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일 뿐이다. 지배세력의 위기와 대안세력의 전망이 부재할 때 파시즘이 창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의 위기를 노동운동의 기회로 삼지 못한다면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중도우파의 장난으로 기만당한 민주주의의 역사 또한 만만치 않다.  모두 수구, 우익, 파시즘에 대한 경고를 근거로 했다. 이제 힘을 얻은 중도우파 세력은 신자유주의 선도자로서 민중의 자유권적 기본권만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권적 기본권마저 유린하고 있다.

실업, 빈곤, 고용불안의 총체적인 사회위기가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김형기 교수는 대답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악마성은 노동자계급이 양보하고 타협한다고 회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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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 단풍길

11월 5일 모처럼 시간내서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광릉수목원인데, 이미 제철 지난 단풍이지만 그래도 볼만 했습니다. 늦가을 - 끝물 단풍구경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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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한 단체 혹은 반(半)한 단체&quot;

"반(反)한 단체 혹은 반(半)한 단체"
:모든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보수정치권을 바라보며~

 

최근 국정감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반한 단체 구성과 테러조직 연루설이 제기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13일 국정감사에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등의 자료를 인용해서 지난 4월 반한 단체 조직(원)을 적발해 이중 3명을 강제출국 시켰다고 밝혔다. 또 나머지 조직원에 대해서도 수사를 펴고 있으나 나머지 조직원은 잠적했다고 밝혔다. 김재경 의원의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슬람 테러조직과 연관성을 거론해서 가뜩이나 테러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인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리고 이 발언의 여파는 단순한 긴장감을 넘어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이주노동자 단체(조직)을 모두 테러조직, 반한 단체로 보는 편향된 시각을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김재경 의원의 주장은 전혀 다른 현상을 '침소봉대' 해서 본질을 왜곡하는 지나친 비약이다. 이것은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발언 이후에 곳곳에서 쏟아지는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언급하고 있는 반한 단체의 구체적인 내용과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테러조직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국가정보원에서는 외교문제를 고려해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이 반한 단체라고 지적하고 테러조직과 연계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예로 들었던 방글라데시 단체는 아주 평범한 방글라데시 친목모임 일 뿐이다. 또 4월경 강제 출국시켰다고 하는 반한 활동가들은 반한 활동가가 아니라 바로 노동조합활동을 한 평범한 노동자였다. 오히려 그들은 노동조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노동자일 뿐이다.

 



사실 반한 단체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며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나마 언론에 자극적인 주제를 터트리지 못하면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국회의원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과대 포장되어 다시 한번 등장했을 뿐이다. 반한 단체에 관해서 보도되었던 내용은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에서 반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니 해외여행을 조심하라' '반한 단체가 한국 내에도 존재한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체와 활동 내용은 단 한번도 들어 난 적이 없다. 아니 존재한 적이 없다.

반한 단체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게도 원죄가 있다. 일반인들의 경우 반한 단체라는 개념과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한 단체가 만들어진다고 경고하면서,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한 단체는  하나의 예였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자극적 목적의식'을 가졌을 뿐 증명된 실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등장한 반한 단체라는 개념은 TV토론회 각종 인쇄매체와의 인터뷰, 기고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양날의 칼이 되어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호에 대한 인식이 향상되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반한 단체가 기정사실화 되어 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반한 단체는 그 실체를 의심하게 하는 존재였고 이주노동자들에 의한 어떠한 반한 행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수우익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한 단체 운운하며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을 위협요소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는 전 민중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한 이라크 파병 때문에 테러위협이 증가하자, 오히려 반 이슬람정서를 조작하면서 모든 이슬람 노동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자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철군의 당위가 아니라, 안보강화라는 구시대 이데올로기를 찾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이주노동자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이 문제를 접하면서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는 반 이슬람 정서를 조장이다. 이것은 이주노동자를 모조리 테러리스트로 몰아 가려고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음모다. 그리고 이 음모는 우선 한국군의 이라크 철군보다는 안보강화의 명분으로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 이런 반 이슬람 정서는 더 넓게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의 구실로 이어질 것이다. 민주노총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활동가들을 탄압했던 경우와 같이 한국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주)노동운동가들을 탄압할 때 적절한 구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탄압의 근거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여론 조작을 통한 테러방지법과 같은 악법을 통과시키려는 의도가 지금보다 더 거세질 것이다.

우리는 이주노동자 지부 활동을 하다가 출국 당한 비두, 샤말과 같은 노동자들이 한국정부에 의해서 테러리스트로 둔갑되었던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번 국정감사에서 예로 들었던 추방당한 반한 단체조직원은 진짜 반한 단체 조직원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다. 앞으로 강제추방반대 농성이나 노동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테러리스트들, 반한 조직이 개입한 불순한 투쟁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권과 자본에게 적절한 탄압의 구실이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다.

결국 이런 악 선동은 이주노동자들과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대해서 시민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테러방지법과 같은 반 인권 악법 제정이 힘을 얻을 것이다. 아직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출입국관리법에 의한 탄압을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또 다른 편견과 싸워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정의와 인권,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험난한 길에서 수많은 갈등, 혼란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혼란의 많은 부분은 우리 내부를 분열시키기는 것이다.  노동자계급 내부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번에 발생하고 있는 "반한 단체, 테러조직연관 가능성"이라는 혼란은 단순하게 보수정치인의 '아니면 말고!'로 그칠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자칫 반전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대중의 의식 속으로 안보강화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혼란을 안고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와 단결해야할 노동자운동 내부의 또 다른 분열의 싹을 제공할 수도 있다.
혼란을 탈출하느냐 그 혼란에 빠지느냐는 앞으로 우리의 활동에 달려 있다. 노동자운동 내부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 차별을 없애기 위한 투쟁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하며, 이주노동자운동단체와 조합, 그리고 자치적인 조직들에 대해서 테러단체, 반한 단체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투쟁해야 한다. 또한 반전평화투쟁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 모두가 한국인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이 노동하고 생활하는 한국의 민중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10여년 한국에서 생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한국을 이해하면서, 한국에 동화하면서, 또 나름대로의 문화를 지키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종교모임과 친목모임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반한 조직이고 테러조직이라면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불의와 억압에 저항해온 한국노동자 운동, 민중운동의 전통을 알아 가는 가장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반(反)한 단체가 아니라 반(半)한 단체다". 이제 지배권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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