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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22
    김프 강좌 연습 ㅜ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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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7/23
    쌍용자동차 고공농성
    하이하바
  3. 2009/05/25
    신영철 대법관 사태와 법원이 가야할 길
    하이하바
  4. 2009/01/07
    고전에서 찾은 명박에게 보내는 글(5)
    하이하바
  5. 2008/12/30
    발명박에 맞서는 발정치
    하이하바
  6. 2008/11/20
    1월 이후(2)
    하이하바
  7. 2007/07/06
    팬더, 바보짓 하다(1)
    하이하바
  8. 2007/07/06
    송파구청 비정규직 투쟁(1)
    하이하바
  9. 2007/07/01
    화내고 말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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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6/05
    [현장정신14호]독재의 망령이 신자유주의로 되살아 날 때! 당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이하바

김프 강좌 연습 ㅜㅜ

김프 강좌 숙제.

흠 웹자보라 언제 제대로 만들까? 어째든 숙제는 해야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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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고공농성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독립문 앞 고가도로에서 정리해고 철회, 공권력 투입 반대를 외치며 고공 농성 중이다. 이 노동자는 곧바로 구조대가 아닌 경찰에 의해서 쫓기다 고가도로 아래로 떨어졌다.(2009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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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 대법관 사태와 법원이 가야할 길

[인권 :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
신영철 대법관 사태와 법원이 가야할 길


아직도 사법부가 시끄럽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과 사퇴 불가를 놓고 벌어진 이번 사태는 부끄러운 사법부와 희망 있는 사법부를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 기회였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우리 사법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몇몇 소수의 생각만은 아닐 게다. 한국 법원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신영철 대법관 문제는 한국의 법원이 다시 서기위한 과제 중 일 부분일 뿐이다. 오늘 법관들이 느끼는 위기감과 윤리의식이 알량한 ‘직업의식’과 자존감이라면 아직 우리 법원의 미래는 어둡다고 할 것이다.


법원 관계자들이 동의를 하던 안 하던 지금껏 법원은 권력과 자본의 지배아래 있었다. 인혁당 사건이 그랬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사건, 조작된 간첩 사건이 그랬다. 심지어 내란은 성공했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 지금껏 재벌과 정치인들은 법 앞에 특권을 누렸다고 한들 어느 누구하나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위기는 사실상 권력에 눈 감았던 과거의 진실이 던지는 때 늦은 복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 법원의 고민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신영철 대법관 사태에서 머물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법원을 위해서 법원이 가져야할 관점은 법원의 도덕성에서 법원의 ‘비판성’으로 그 고민이 옮겨 가야 한다. 법원과 판사들은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의 판결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비판적 자기 역할을 상실한 지 오래라면 법원을 걸어보지 못한 비판의 길로 나가야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 사회는 공안통치, 경찰국가로 나라 전체가 시간이동을 해버렸다. 경찰과 검찰이 법리적 판결을 내리고 난후 결제를 내리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 아니어야 한다.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통제를 잃어버린 법원이 오늘 걷고 있는 길은 행정부의 부속기관이라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소신 있는 판사들이 그토록 지키려 하는 법관의 정신은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험난한 길 대신 택했던, 도덕성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한 직업윤리였을 뿐이라고 하면 과도한 표현일까!


또 앞으로 법원이 가야할 길은 정의와 공명정대함 이전에 '소통'과 '이해'다. 이는 법원 상부와 일선 판사들 사이의 소통을 말함이 아니다. 지금까지 법원의 판결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법관이 법이라는 제도로 밝힐 수 있는 영역은 태생적으로 한계적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한계적 영역을 지금껏 당연하게 포기해 왔고, 심지어 그 이상을 권력과 자본에게 양보해 왔다. 법의 완성은 바로 낮은 곳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처벌되었던 수많은 사람들,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거리로 나서고 화염병을 던졌던 많은 사람들, 공산주의자, 주사파, 법으로 판단하자면 대부분 실정법 위반임은 확실하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많은 노동자들의 파업도 한국에서 합법인 경우는 없다. 멀리 가지 않고 건당 30원의 운송료 인상을 요구했던 택배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 용산의 가슴 아프고 참혹한 사건이 법률에 갇혀 판단하면  합법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이해란 오히려 법원의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낮은 곳에 대한 이해"와 "인권"을 지향하는 정치성을 가져야 한다. 법의 눈으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 눈 감기는 쉽지만 법의 귀로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기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법원이 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텐가? 그러나 법원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과거 법원이 걸어 왔던 오욕의 역사뿐만 아니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만은 더더욱 아니다. 구속영장 발부와 관련해서 보더라도 법리 판단이 아닌 검찰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검찰과 경찰이 정치적이니 그 반대편에 서 달라는 의미로 해석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불법이라고 부르기 전에 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절박한 인간의 삶이 있고, 마지막까지 내몰린 이들이 적법한 절차를 밟을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 있다. 현실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정치적 역할을 길러 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법이 인권이 아닌 재산권에 바탕을 두기에 이에 도전하는 행위는 대부분 위법이다. 하여 아무리 법관이 무조건 법을 넘어선 판결을 할 수도 없으며 사람에 대한 이해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능성과 시도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다.


법의 눈으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 눈 감기는 쉽지만 법의 귀로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기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법관들이 이해하고 들어야할 목소리들이 오늘도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대부분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진실은 1차적으로 법률에 의해서 가려지겠지만 그 여백은 법관의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보충되어야 한다. 오늘 법관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맺어야할 열매는,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법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울분을 법관이 나서서 바로 법관의 정치적 책임으로 헤쳐 나가는 직업의식의 전환이어야 한다.


택배노동자의 죽음을 둘러싼 행동들에 대한 법률적 판단, 기륭전자를 비롯하여 몇 백일에서 수년에 걸쳐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용산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재판에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 결사의 자유를 둘러싼 재판에서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성숙하게 넘긴 당신들을 기다려 본다.


아직은 법치주의가 인권의 시대를 보장하지 못하기에 더욱 더…

 

-'인권연구소 창'에 게시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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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찾은 명박에게 보내는 글

중국 춘추전국시대 민초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리 21세기에 왔던 것은 아닐까!

『시경』에 나오는 큰 쥐라는 시는 현재 명박이에게 전하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지배자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어느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약 3천여년 이전에 쓰여진 싯구가 우리의 가슴에 이렇게 다가올 줄 누구 알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내 놓아도 아주 시의 적절한 풍자시가 될 수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시경』-큰 쥐-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나의 동양고전 독법-강의-』, 신영복,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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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박에 맞서는 발정치

발명박에 맞서는 발정치

 

국회에서 소위 MB악법이 통과되고 나면 이런 표현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사이버 모욕죄 처벌 대상이니까! 그러나 안 할 수 없고 법안 통과 이전에 해야겠다. 최근 인터넷에서 누리꾼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 특히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말인데 “발***”다. 주로 연기를 못하는 연기자에게 ‘발연기’라는 표현을 하며 거기에 심할 경우 이름까지 붙여준다. 알고 있거나 눈치 챘겠지만 연기를 발로해도 그것보다는 잘하겠다는 의미다.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2MB를 보고 있으면 역시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발로 정치를 해도 MB보다는 잘하겠다는 것이다. 정치는 단순하게 본다면 관계와 소통이며 국가체제를 가동시키는 시스템의 면에서 놓고 본다면 적절한 통치다.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던지 계급관계로 보던지 결국 정치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닌 상황에서 국가의 통치란 거짓을 드러나지 않게 하며 진실을 왜곡하고, 특정한 계급의 이익을 위한 교묘한 술수가 동원된다. 때로는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고, 때로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총칼을 내세운다.

 

이런 행위의 성패는 동일한 계급 사이에서 작은 차이는 적절한 안배를 통해서 해결하고 적대적 계급에게는 유화책이나 유인책을 쓰면서 자신의 통치를 관철시키는 것에 있다. 무릇 아무리 철권통치를 하는 독재자들도 대중을 철저하게 속이든지 타협할 수 있는 카드를 제시하던지 둘 중 하나를 쓴다.

 

현 정권이 100여개가 넘는 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법안이라는 것이 대 놓고 특정 계급을 위한 것뿐이라는 점은 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일방통행이다. 부자들을 위한 감세, 부자들에게 감세를 해주고 모자라는 세원을 노동자 서민들에게 받아내려는 정책들, 금융위기의 주범인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특혜를 베푸는 법안들, 반생태적인 건설사와 강부자들을 위한 부동산 정책, 그리고 국토를 절단 내는 대운하 말을 하자면 끝이 없다.

 

법 자체의 비합리성, 정치자체의 몰상식은 정치를 상실한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야당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하물며 노동자 민중들과는 어련하겠는가! 갈등과 저항은 모조리 힘으로 돌파하겠다는 생각도 어처구니없지만, 자신들의 부조리함에 이다지도 떳떳한 정치인과 정권은 본 일이 없다.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한 말이 다르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기어코 아니라고 우기면서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진행한다. 부자들을 위한 감세법안이 재정적자를 초래할 것이 뻔한데 경기부양책을 쓰겠단다. 돈이 어디서 생기냐고 하면, 없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받을 궁리를 한다. 참으로 정치의 기초를 모른다. 이런 상태는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도 작동하지 않는다. 정책이 관철되는 것은 오로지 힘에 의한 것일 뿐이다.

 

노동자 민중들에게 눈에 보이는 분노를 던져준 것은 군사독재 시절 잔혹한 학살 이후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면 96년 노동법 날치기였을 것인데 2MB는 앉아서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소. 열 받든 말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구려!’하는 양상이다. 이러니 누군들 마음을 돌리지 않겠는가! 이렇게 지배정권 스스로 정치 행위를 통해서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것이 발로 하는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촛불 정국에서 초등학생하고 싸우는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은 2MB지만 발로 정치를 하다 보니 말의 앞뒤도 맞추지 못한다.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소통을 제대로 못한다면 경제라도 나아져야 하고 경제 상황에 대해서라도 솔직해야 한다. 그런데 결코 없다고 하던 외환위기가 끝났단다. 도대체 없는 외환위기는 어떻게 끝나는가. 이런 상태면 국가 운영도 발로하는 셈이다. 그러니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반대하는 강만수만을 경제 수장으로 앉혀 놓고 경제위기를 일으킨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명 프로선수들이 거액의 연봉을 받고 다년 계약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명 FA라고 하는데 종종 그 FA 시장에서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이는 선수가 있다. 소위 몸 값을 못하고 구단에는 큰 손실을 입힌다. 이름 하여 “먹튀”라고 불린다. 2MB가 딱 그 꼴이다. 노무현과 비교되면서 경제위기의 해결사를 자청했고 그래서 거대한 표를 얻으면서 화려하게 등극했지만 결과는 ‘먹튀’만큼이나 초라하다. 747은 고사하고 정치의 후진성과 미숙함이 그렇다.

 

가슴 아픈 것은 2MB의 발 정치에 사회가 만신창이가 되면서 거기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겨울 우리는 뼈저린 경험을 되풀이 하고 있다. 발로 하는 것만도 못한 정치에 고통 받고 있으며, 분노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찬 바람 부는 거리에 앉아 있다.

 

2MB가 ‘발정치’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우리 역시 ‘발정치’로 맞서야하지 않을까! 다만 우리의 발정치는 발로하는 것만도 못한 것이 아니라 발로 거리를 뛰는 정치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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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이후

1월 이후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

참, 한 번 멈춘 소위 '불질'-뭐 이런 용어가 낯 설지만-이 다시 붙기까지 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게으름, 소심함, 답답함도 있었지만 역시나 근 1년 간 활동을 정지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리 개인적인 글쓰기이지만 이 또한 공식적인 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주저했던 것이 1년여 시간이 흘렀다. 남들 처럼 의미 있는 내용, 남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은 아니지만 내 나름의 글쓰기 훈련을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불로그에 관심을 가져 볼까 한다. 자유로운 사회운동가들은 이런 '불질'을 자기 (다양한)욕망의 배출이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정화효과를 얻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기까지는 아니어도 예전에 노력하다 실패한 나를 표현하는 훈련(?)에 좀 더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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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 바보짓 하다

 

 

바보짓



....회의 땜시 서울본부에 갔는디.

 

커피 자판기가 있고 자세히 보면 동전 교환용 컵이 있다. 여기서 동전을 교환하고 자발적으로 돈 넣고 커피 뽑아 먹으라는 말씀. 사실 이 자판기를 한 두번 써본게 아니었음.

 

그런데 그날 따라, 나라는 놈은 동전 교환용 컵에 200원을 넣고 커피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기다리다 "어 왜 안나와 이거"?????

 

동전 투입구는 컵 밑 기계에 있는디..죄 없는 기계한테 화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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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청 비정규직 투쟁

 

 

7월 6일 송파구청 앞에서 송파구청 비정규 노동자 사업종료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비정규법이 시행된 이후 정말 많은 노동자들이 잘려나가고 있다.

구청은 사업종료라고 말한다.

 

정확한 개념은 더 알아봐야 하겠으나 정말 둘러대는 논리, 방식도 가지가지다.

 

롯데월드, 석촌호수 옆, 부유한 아파트들이 늘어서고 넓직한 도로를 자랑하는 서울의 부유한 동네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에 대한 학살은 한국사회의 현재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송파구청 비정규노동자의 자신 있고 꾸밈없는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난다.

 

노동자들은 와 주어서 고맙다고 힘이 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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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고 말았다

욕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이해하고 조언하려 노력해왔는데

받아들여지는 감정 그대로 반응하고 말았다.

 

아직 정진의 길은 멀었다.

내가 나를 질타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분명하게 제기하고 이야기해야할 것이 있음도 분명한데

마음의 노여움을 벗어내고 이야기하는 방법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동지에게

사람에게

상대방에게

 

얼마나 더 진솔해야 하는가!

얼마나 더 다가갈 수 있는가?

 

내가 나늘

 그들이 나를 얼마나 이해해줄 수 있을까

 

여전히 풀기 힘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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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정신14호]독재의 망령이 신자유주의로 되살아 날 때! 당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윤보다인간을-현장정신에 쓴글]

 

독재의 망령이 신자유주의로 되살아 날 때!

당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87년의 추억을 간직한 선배들께 드리는 글



1. 우리가 찾아야할 것은 87년의 추억이 아니라 ‘역사’

87년 사진 속․영상 속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을 찾는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기성 정치인들이 아닌 87년의 함성, 87년의 거리, 바로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미디어에서 찾고 있다. 이 추억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혼란 속에서 87년 20주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것이 변했다. 그 때문일까! 여러 인터뷰나 글에서 사람들은 20년 전 그날의 격정과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오늘의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세상을 이만큼이나 바꿨다는 그들의 감동이, 자꾸 멀게만 느껴지는 건 내가 87년 그 거리에 있지 않아서일까!


일반적으로 달은 밤에, 해는 낮에 볼 수 있다. 그래서 해가 져야 달이 뜬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둘이 서로 다른 운동주기를 가지고 있고 햇빛에 가려 낮에 달을 잘 볼 수 없을 뿐이다. 해와 달이 그렇듯이 독재의 시대는 가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는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은 온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87년 세대에게 고함!

87년 투쟁의 직선제 쟁취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질적․양적 성장은 이후 우리 사회가 한 발 전진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87년 이후의 역사도 그리 순탄하게만 달려 온 것도 아니다. 91년 열사투쟁, 97-98년 총파업투쟁과 IMF, 2003년 열사투쟁 그리고 현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들의 투쟁은 치열한 생존의 역사이자, 투쟁의 역사다.


하지만 숨 가쁘게 달려 온 열정의 20년 뒤에는 87년 투쟁을 추억으로 바라보는 세력이 존재해 왔다. 그들은 ‘추억/을 밑천으로 정당으로 국회로 달려갔다. 그리고 점점 그들은 오만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했다. 혹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제도 정치 안에서도 한국사회를 진보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역할이 그 곳에 있다고 말했던가! 이제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자신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민주화운동과 진보는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노동자들이 기득권자가 되어 양보할 줄 모른다고, 온갖 파렴치한 언사를 쏟아 붇고 있다.


87년의 사람들 또한 이제 자신이 할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지 새로운 독재의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말을 한다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해가 뜨기 전에 떠 있는 달을 볼 수 없고, 태양이 항상 그 자리에 있어도 밤에는 볼 수 없듯이 세상이 돌아가는 하나의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바로 ‘계급에 의한 계급에 대한 착취’다.


 그리고 착취의 모습은 87년의 선도적이고 양심적인 열정적인 시민들이 민주화에 만족할 때, 당신들이 군부독재를 몰아냈다고 환호하며 자신의 생활 속으로 돌아가서 안주하고 있을 때,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독재로 태어났다. 신자유주의 독재는 더 세련되고 더 교활하고, 더 악랄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민주주의를 배고픔과 착취를 분쇄하는 원칙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세대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87년 이후의 민주화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 이외에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오늘 노동자 민중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파탄 내는 비정규직법안이나 FTA 문제가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전쟁기지 확장을 위해 주민을 내 모는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독재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노동자 민중이 신자유주의의 반 민주성에 대해서 사고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독재가 지배하고 있는 87년 민주화체제다.


3. 당신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슬픈 자화상이다. 87년을 거리에서 보냈고, 청춘을 바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선배 그리고 동지들의 행진곡은 더 이상 메아리치지 못하고 슬픈 노래로 마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민주화 이후의 비 착취 대안사회를 구상하지 못했고, 민주화체제 이후의 착취체제로서의 자유주의를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 체제 이후에도 착취체제는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민주화체제 이전․이후에도 커다란 틀에서 자유주의 체제가 지배해왔고, 87년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독재가 민주화의 간판을 달고 착취를 정당화 하고 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쓰다버리는 소모품 취급을 받고 있다. 여전히 돈이 없으면 치료받지 못하는 사회, 배우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아직도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농어민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가는 비율이 3%인 사회, 신분이 대 물림되는 사회가 87년 민주화체제 이후 (신)자유주의 착취체제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87년 세대와 87년 세대의 후광을 입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만족하고 있는가?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가? 왜 우리는 다시 분노할 수 없는가? 87년 세대여! 당신들은 너무 늙어 버렸는가? 87년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방송에 출현하며, 신문에 칼럼을 쓰며 87년을 회고할 정도로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아직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면 다시 사회변혁운동의 전선에 나서야 한다. 당신들이 있어야 할 곳은 방송국도 아니고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도 아니다. 어느 정당, 386 정치인의 후원행사 자리는 더욱 아니리라!


87년 20주년 그 첫 포문을 열었던 6월 항쟁이 다가온다. 당신이 진정한 87년 세대라면 더 이상 만족하지 마라! 다시 분노해야 하며 다시 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당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어도, 87년을 거리에서 보낸 당신들의 심장에 새긴 “분노와 희망”이라는 시계는 예전 그대로 이지 않은가? 87년 당신들의 피와 땀을 먹고 성장한 한국사회가, 민중들의 피와 땀을 가로 첸 어제의 386세대 오늘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텐가?


이제 87년과 같지만 다르게, 다시 당신이 나서야 한다.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 문제에서, 계급투쟁에서 그리고 여성문제에서, 환경과 생태, 인종주의 문제에서, 반전평화운동에서 전 사회적인 변혁운동을 신자유주의 독재체제에 맞서 싸우는 사회운동항쟁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군사독재에 맞서서 새로운 신자유주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양식의 싸움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적을 타도하는 투쟁에서 착취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찰하는 투쟁, 비착취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주체의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난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꿈꾸는 자에게는 추억이면 족하다. 그러나 미래를 원한다면 행동하자!


왜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싸파티스타의 구호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로 대신할 수 있으리라. 아직 아무것도 달라 진 것 없는 이 시대에 바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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