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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시인지, 산문인지 모르나 허접한 감성을 상념을 그때 그때 옮겨봅니다

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4/25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6)
    하이하바
  2. 2009/07/27
    쌍용자동차를 바라보는 사회적 자세
    하이하바
  3. 2009/01/20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이하바
  4. 2009/01/14
    경범죄 2MB에 적용 가능할지도!
    하이하바
  5. 2008/01/07
    내가 밀고 가는 것 나를 밀어주는 것! (3)
    하이하바
  6. 2007/11/22
    콩나물을 사다
    하이하바
  7. 2007/07/04
    7월 장마 어느 날
    하이하바
  8. 2007/06/14
    사람에 대하여
    하이하바
  9. 2007/06/13
    삶에서 운동을 찾아야 하는가, 운동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가
    하이하바
  10. 2007/05/17
    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오월
    하이하바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인권 '제로섬-게임'을 넘어]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집행위원장)

 

 

사농공상과 노비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신분을 넘어설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신분을 탈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분간의 사랑에도 모진 형벌이 가해졌다. ‘사농공상’과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상들의 삶은 인간 이하였고, 인간이기 위한 탈출의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신분의 벽이 무너진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신분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계급마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근대 이후의 밑바닥 신분은 노동자 계급이 차지했고, 인간 이하의 이들은 언제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자로 불러지지도 못하고 ‘공돌이’, ‘공순이’로 불러졌으니 말이다. 계급적인 관점에서야 ‘노동자’가 자랑스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적인 관점이고, 힘의 관계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누구도 노동자란 불림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 게다. 하물며 자기 자식이 노동자로 살길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 모두 ‘홍길동’이었는지 모른다. 부모가 노동자인 것은 말하기 부끄러워하고, 자식이 자기와 다른 신분을 얻길 원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가 미치도록 교육에 투자 했을 터다. 신분의 탈출은 본인의 노력과 함께 신분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노력이 결합되었던 것이고, 자식 대에 마저 무능과 노동자 인생을 물려주는 것을 주위에서도 달갑게 보지 않았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네 모습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굴레’ 마저 시기하는구나!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의 세습과, 천한 노동자 신분의 세습을 시기하고 질타하는 진풍경을 만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유명한 장관 자녀의 특채야,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지배 계급의 이런 신분 세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터!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을게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자녀들이 정규직에 응시할 때, 가산점을 부여하는 요구안을 제시했다고 해서 말이 많다. 이른바 특혜채용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 자동차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은 곳은 없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자기들만의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는 현대차 노동조합을 비난해 왔던 터라 이번 사건은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슬프지만, 유래 없는 고용불안 청년실업의 시대에 현대자동차가 도를 넘어선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은 좌우를 넘나들며 시대를 공감(?)할 수 있는 ‘아이콘’이다. 이 비판에서 현대자동차 노조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현대자동차 노조가 보여준 모습은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만 챙기기 위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0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에 대해서도 정규직 노조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자동차가 사회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비판은, 좌파적 입장에서야 십분 공감하게 된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의제에서 멀어지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투쟁에 함께하지 않을 때 노동조합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해온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과는 절대 연대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 지키는데 급급해 하는 노동조합의 모습은 결국 정권과 자본의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꼭두각시 노조로 가는 수순일 뿐이다.

 

그렇지만 현대차 노조를 비판하는 사회여론은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보자면 낯설기 그지없다. 보수언론이 주도하는 비판의 핵심은 결국 노동자가 자식에게 노동자 신분을 세습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천한 신분의 ‘내리 흐름’을 특권이자 최악의 이기주의라는 게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의 신분을 세습할 경우 과연 어떤 삶을 살까? 2008년 기준 현대자동차 생산직 초임은 115(기본급)만원이었다. 생산직 전체 평균 기본급이 158만원이었다. (한겨레21 794호 참고) 얼마 전 만난 현대차 전주공장의 40대 노동자는 “지난 달에 일을 별로 못했더니 110만원 나왔다”고 했다.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물론 수당을 합치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야특근에 개인의 삶이 없고 골병드는 댓가에 비할 수 있을까!

 

비천하고(?) 고된 삶을 대물림하겠다는데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코메디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민중들의 삶이 고되다는 증거다. 월급이 많건 적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행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느냐는 비판이 들려온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 그 조건이면 나는 군말 없이 일하겠다며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자식에게 같은 삶을 물려주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글을 쓰는 이유는 현대 자동차 노동조합을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비판꺼리가 많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해서 “함께 살자”는 가치가 없다고 비판한다면야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최근 벌어진 논란은 그런 의미 있는 비판은 아니었다. 시기이자 질투지만,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매도할 수 없는, 빈곤과 불안으로 몸부림치는 대중의 절규다. 그렇기에 슬프다.

 

이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은 맘이 편할지 모르겠다. 노동자들은 신분을 넘나들지 않고 그 자리를 세습하겠다고 한다. 감히 가진 자들, 권력 있는 자들의 경계선 안쪽으로 얼씬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사법고시 합격률에서 강남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뉴스는 뉴스가 아닐지 모른다.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는 조소조차도 사라질지 모른다. 거기에 같은 노동자들끼리, 가진 자들이 보기에 미천한 신분을 서로 갖겠다고 공격하니 말이다.

 

노동하는 것이 부끄러워 세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는, 고통스러운 대중의 현실을 어떻게 끌어내야할지 몰랐다. 자신도 고통스러웠던 그 착취의 굴레를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그 순진함이 문제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계급을 물려주는 것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것이 깨질 때 해소될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계급투쟁은 현재 더 많이 나누기 위한 것이고, 후대에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현대 자동차 노조의 결정은, 고통 받는 계급과 함께 현실의 착취를 끝내는 연대와 나눔의 투쟁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착취당하지 않는 삶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에 역행한 것이다.

 

아울러 현대자동차 노조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비판하지 않는 현실은, 노예의 삶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아귀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2011년 현금 배당금으로 정몽준이 574억 7천만원, 이건희 510억 8천만원, 문제의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구 399억 4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회에서, 하루 12시간 휴일마저 반납한 노동의 삶을 물려주겠다고 하는 쪽이나 그것을 특혜라고 비판하는 쪽이나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소롭지 않겠는가!

 

현대 자동차 노조여! 당신들이 가진 특권(?)을 반성하지 말고 노예의 삶을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순응을 반성하라.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거든 계급을 유지하지 말고, 철폐하라!

2011. 4. 25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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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를 바라보는 사회적 자세

쌍용자동차를 바라보는 사회적 자세

:폭력과 갈등의 쌍용자동차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7월 22일에는 경찰은 4일째 공장 안으로 진입해 농성중인 노동자들과 충돌했다. 그날 저녁 공장 진입에 맞서던 노동자의 얼굴에 테이저 건으로 추정되는 철심이 박혀 긴급한 치료와 이송이 필요했으나 회사에서 119와 의료진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노동자와 회사 그리고 정부 사이에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명예퇴직한 직원의 자살이 이어졌고, 얼마 전에는 농성 중이던 노동자의 아내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첨예한 대립과 노동자들의 고립 상태에서 공권력 투입할 경우 자칫 처참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25일에는 쌍용 사측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거부해 사태를 더욱 더 파국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쌍용자동차는 물론이고 대부분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인정한 적은 없다. 이 말은 결국, 현 쌍용자동차의 부실 책임은 쌍용자동차 사측에 있다는 얘기다.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쌍용 자동차는 이 문제를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중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로 치자면 쌍용자동차는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온당하게 스스로 져야 한다. 그러나 회사가 공중분해 되지 않고, 법정관리를 받는다는 것은 쌍용자동차 문제가 결국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함에도 사측과 일부 언론에서는 노동자들만이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들의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은 뒤로 숨기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거의 포화상태다. 따라서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일 게다. 그러나 그 기본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여력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실업율이나, 경제성장율과 같은 수치로 판단할 수 없는 전 사회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자산을 상실하게 된다. 이 사회적 자산은 그 사회가 어떤 생산체제를 가지느냐와 별개로 항상 중요시 되어야 할 문제다.

 

언제나 그렇듯이 구조조정이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노동현장에는 영원한 ‘적’만이 있을 뿐이다. IMF 이후에 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 구조조정의 칼날은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를 내몰았다. 97년 당시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거리로 내몰 정도로 참혹했다. 그와 같은 영혼의 유린 속에서 노동자들이 배운 것 중 하나가 ‘가족 같은 회사,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보장하고 평생 일자리를 약속하는 회사’는 없다는 의식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배움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공포심으로 나타났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자들의 연대를 약화시켰으니 유효적절한 성공이었겠지만, 사회적 입장에서 보자면 공존과 공동체라는 커다란 사회적 자산의 유실이다.

 

자본을 위한 합의가 아닌 사회적 자산을 남기기 위한 합의와 협력은 이제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정리해고에 반대해 싸우는 967명의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쌍용자동차의 일부였다. 그들이 주장했던 정리해고 없는 임금삭감, 교대제, 일자리 나누기 등은 강경하고 원칙적인 노동운동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노동운동 내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자구안은 회사와 정부 측에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쌍용자동차는 애초 사측이 제시한 2,670여명 혹은 그에 상응하는 정리해고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순차적으로 해고라는 살인은 반복될 것이며, 생존권을 상실한 노동자들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공포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공포가 전 사회에 만연하게 되리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이미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마주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나의 삶을 위해 동료를 저버리는 행위는 결국 미래의 표적이 되기 위해 앞서서 달려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 정부와 쌍용자동차 사측이 대화를 거부한 채 일방적인 정리해고와 공권력 투입을 준비하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 이전에 사회결속에 대한 거부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경쟁만이 최고’ ‘승자독식’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불투명한 자본주의 기대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회적 자산, 공동체라는 우리 모두의 사회를 유린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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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론

체게바라

 

노동자들이여,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

자본가들이여,

열심히 착취하면 성공한다!

 

그 노력과 착취로 성공한 대가가 바로

굶주림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다

독재와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성공은

어떠한 행복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 성공은

남의 실패를 짓밟고 올라온 성공이요, 그 행복은 남의 불행을 짓밟고 올라온 행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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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을까

영상 뉴스를 보는게 아니었는데....

아침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상황이라도 알아보려 회의를 다녀온 후

 

긴급하게나마, 성명서라도 썼습니다

 

그리고 착잡한 마음에 인터넷을 클릭하다

화재 영상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 사람이 있었을텐데

그 불길 속에 살려달라는 이들의 절규가

울려퍼졌을텐데

 

자꾸 자꾸 생각이 납니다

 

할일없이 아랫층 사무실에 다녀오고

속절없이 다시 앉았지만 찔금 찔금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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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범죄 2MB에 적용 가능할지도!

2MB 경범죄 위반처벌 가능할지?!



이제는 하다하다 경범죄까지 건들이고 있다. 스토킹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처도 불심검문 불응하면 경범죄 위반이란다. 하도 어의 없어 경범죄를 찾아보니 2MB도 경범죄 위반으로 의심해 볼만한 짓을 많이 했다. 진짜 위반에 해당하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라! 아직은 그가 경범죄 범칙금 받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있는 법이나 잘 지키지 뭐하러 쓸데없는 더 만드는지 모르겠다.

 



1. 11조 위반

“11조: (허위광고) 여러 사람에 대하여 물품을 팔거나 나누어 주거나 또는 일을 해줌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잘못 알게 할 만한 사실을 들어 광고한 사람”


2MB는 선거 시절 747 공약을 내세우며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 있으면서도 “‘외환위기는 없다’--->‘외환위기는 끝났다’ : 도대체 없는 위기가 어떻게 끝나나?” 암튼 둘 다 허위사실이다. 국민으로부터 세금으로 임금을 받고 국가운영을 책임지는 일을 해줌에 있어서 국민을 속이고 사실을 잘못 알게 한 사실이 인정해야 하는거 아닌가?. 사람들을 속이고 잘못할게 한 것이고 대대적으로 알렸으니 광고에 해당한다. 따라서 11조 위반 여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2. 12조 위반

“12. (업무방해) 다른 사람 또는 단체의 업무에 관하여 못된 장난 등으로 이를 방해한 사람”


수시로 되지도 않는 악법을 시행하려하여 시민 사회단체는 2MB에 대한 대응에 거의 모든 업무를 할애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운하 문제와 같이 대운하를 한다고 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안한다고 했다. 그런데 곧바로 이름만 바꿔서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고 하고, 그것이 대운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대운하는 확실히 안 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시민 사회단체 사람들을 심히 혼란스럽게 하였다. 어떻게 대응할지 시민사회의 의견을 어떻게 모아낼지 어려워 업무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자기가 수행하는 정책은 대부분 사람들이 반대했는데 하고나면 다들 좋아할 것이라고 하는 등 장난기가 도가 지나쳤다. 계속적인 말 바꾸기는 의도적으로 시민 사회단체의 업무를 방해하기 위한 장난으로 볼 수 있다.


3. 14조, 22조 위반

“14. (음료수 사용방해) 사람이 마시는 물을 더럽히거나 그 사용을 방해한 사람”

“22. (수로유통방해) 개천이나 도랑 그 밖의 물길의 흐름에 방해될 행위를 한 사람”


4대강 정비가 대운하로 이어지면 4대강을 파괴하여 전 국민의 식수원을 더럽혀 사용을 방해한 행위와 다르지 않으므로 14조 및 22조 위반에 해당한다.


4. 19조 위반

“19. (단체가입강청) 싫다고 하는데도 되풀이하여 단체가입을 억지로 청한 사람”


서울 시민의 의도와 무관하게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함으로써 억지로 기독교에 가입시킨 것은 19조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5. 24조 위반

“24. (불안감조성)정당한 이유 없이 길을 막거나 시비를 걸거나 주위에 모여들거나 뒤따르거나 또는 몹시 거칠게 겁을 주는 말 또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나 귀찮고 불쾌하게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이용하거나 다니는 도로·공원등 공공장소에서 고의로 험악한 문신을 노출시켜 타인에게 혐오감을 준 사람”


경찰의 최고 책임자에 대한 임명권자로서 경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24조 위반에 해당한다. 경찰은 촛불 문화제 촛불 산책에 집단적으로 모여들어 참여자들을 불한하게 하고 확성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참여자들을 귀찮게 하고 행사를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 또한 도로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경찰들의 구령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있으므로 24조를 넓게 적용하여 2MB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여 노파심에 관계기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미네르바 하나 잡았으면 됐지 이런 자잘 구레한 것까지 수첩에 담아주진 마세요. 제가 법을 몰라서 법리해석을 부탁한 거니까요?  나중에 사이버 모욕죄 도입 이후에는 제가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ㅜㅜ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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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밀고 가는 것 나를 밀어주는 것!

 

내가 밀고 가는 것 나를 밀어주는 것!


2008년 1월 7일

-하이하바-


나는 무엇에 밀려가고, 무엇을 밀고 가는가!

어느 시인은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고 했다

슬픔은 분노를 밀고와 후회에 떠밀려간다

혁명은 시대에 떠밀려오지만 사람만이 밀고 간다.


혁명이든 정욕이든,

밀려온 그것을 아침 안개 속에 밀고 갈지

황혼 속에 그것에 끌려갈지

선택하는 것은 또 다시 내 몫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다가

갈대에 밀려 거목을 밀어내는 바람처럼

스스로 움직이지 않지만 거대한 변화를 끌어내는 바람처럼

 

그렇게 밀리고 밀어내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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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을 사다

 

콩나물을 사다

-하이하바-

어제 홍제역 지하도에서 콩나물을 샀다.

매번 지나치면서도 항상 다른 생각에 휩싸인다.


‘콩나물 질은 좋을까! 중국산은 아닐까! 농약은 없을까! 아니면 저걸 내가 다 먹을까.’

생각을 하다보면 귀찮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쯤이면 이미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어느 날 역무원에게, 공익에게 물품을 정리 당하는

그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들의 삶에 지친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항상 지나치기를 반복하던 그 모퉁이에서 어제는

콩나물을 사고야 말았다


유난히 추워보이는 아주머니!

며칠 전 코스콤 동조단식에 참여하면서

겪은 추위의 매서움이 볼을 후벼 파고 들어왔다.

매번 보던 얼굴인데, 언제나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얼굴인데

어제는 왜 그다지도 더 눈길이 갔을까!


어줍지 않은 연민으로 빨리 팔고 들어가시라는

마음이 동했는지, 그 아주머니 돌아가서 손 녹일 아랫목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라도 마음 쓰지 않으면

왠지 발길이 무거웠으리라!


그렇게 달랑 콩나물 천원어치 사들고

돌아가는 나에게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머니 속에 지갑 왈 “니 앞가림이나 잘해!”


내 앞가림이 뭔지 떠오르지는 않지만

지갑을 톡!톡!치고 달래면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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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장마 어느 날

 

7월 장마 어느 날


이른 아침 비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충돌하듯 들려왔을 골목길에

오늘은 비소리만이 들려온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다 품어 버린 채

들리는 빗소리는 고요함과 적막함

그 어딘가 판단내리기 어려운

곳에서 태어났지.


사무실에서 눈을 뜨는 아침

비 소리에 눈을 뜨면 좋으련만

오히려 ‘왜 이리 어둡지’라는

의식과 감각의 혼돈 속에 잠이 깨는구나


그리고 나서야 ‘아! 비가오는구나’되뇌이네!


빛이 잠을 깨우지 못하고

어둠이 잠을 깨운 상황은

길이 아닌 곳에 밟 걸음 옮기며

길을 만들어 가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지!

그도 아니면 내 정신세계의 현실은 아닐지!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거짓 인 듯도 한데


그러나 진실은 밝힐 수 있고

거짓은 언젠간 드러나듯이


우리는 진보와 진리를 거부하는

자본의 가시밭길에 계속 발 걸음을 올려 놓을 수밖에 없다


비소리에 잠을 깬 아침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대를 느끼고 싶고

빛이 잠을 깨운 아침

그대의 환한 미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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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회색의 서울 하늘도 푸를 수 있다는 건

서울 안에 숨겨진 희망이 있다는 거다

어둠과 탁함의 일상을 휘돌아 간혹 피어오르는 하늘의 진실은

입가에 머물다 순간 사라지는 미소만큼이나 잔잔한 즐거움이다


서울의 이 짧은 푸르름이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순환과 순환을 거쳐 또 다시 반복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이 짧은 미소가 서울 하늘을 자연으로 호명하리니

그 순간만큼 도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도시의 힘에 밀려 다시 잿빛으로 돌아서는 단절이 거듭되더라도

하늘이 자연이고자 하는 에너지는 이 짧은 순간에서 연원 한다


사람이 사람이고자 하는 에너지는

의학이 정한 사람이라는 개념 밖에 있을지 모른다.

수 많은 찰나의 연속 속에서


수많은 찰나는 느끼지 못할 뿐

사회와 호흡하는 우리 몸속에서,

머리에서 언제나 요동친다


우리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다 역류하는

36.5도에서 멈추지 않고

넘쳐 끓어 흐르는

몸 속 실오라기 붉은 줄기 들이

우리를 사람이게 한다.


찰나의 시간 속에

다시 서울 하늘이 잿빛으로 돌아 설 때

사람다운 사람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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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운동을 찾아야 하는가, 운동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가

 

늦은 밤 이 공간에 있노라면 '삶'이 그리워진다

삶이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지 알아가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나만을 위한 것도, 남들 혹은 사회를 위한 것만도 아닐지니

그것은 밤 하늘 구름 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있어도 알 수 없는 심연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것일 게다

 

요즘 들어 특히 쾌락이 아닌 삶의 즐거움을 알고 싶어 하는 뒤 늦은 고민은

삶의 고민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역설에 다름 아니다

 

아직도 내가 아닌 남의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여전히 나를 끊임없이 멀리하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려고 하지만, 아니고자 하는 그 한 발을 내 딛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 것 아닌 한 족장 차이가 '삶'이 아니라 '삶'의 지향을 바꿀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다.

삶을 삶 자체로 추구하지 못하면, 삶에서 운동을 보상받고자 할터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을까

 

운동을 보상받는 잔인함은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처절하다

내 스스로 그 굴러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면

내 인생의 절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잘나지 못하고 잘 날 수 없음에 자책할지라도

잘 남을 보상 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이것을 잃지 않고 다시 한번 나의 삶을 찾아가고 싶다

망상일까 사치일까 그도 아니면 우문일까?

 

그러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나의 현답은

걸어 온 것 만큼 바라보고, 걸어온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운동을 포기 하지 않는 삶의 즐거음을 누릴 수 있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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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오월

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오월

:오랫만에 조문익 동지를 생각하며




아카시아 향기 퍼져나가는 오월입니다.

조문익 동지 생일도 있었네요.

이제 곧 518인데, 살아 생전에는 정신없이 뛰어 다녔을 5월을 이제 무얼 하고 계신가요?


얼마 전에는 참세상 동지로부터 예전에 찍은(찍히신)사진 한장을 받았습니다.


한 겨울 파병반대 투쟁으로 기억되는 곳에서 서 있던 동지의 모습이 새삼 새롭습니다.


이제 낯 설지도 않고, 가슴이 찡하지도 않네요.

그냥 빙그레 웃음이 나오네요.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은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는 걸까! 세월이 흐르는 걸까!

둘 중 하나겠죠. 자연스러운 망각이거나 세상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좋은 본능을 체득하는 것일 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이라는 삭막한 도시에서도 아카시아 향기가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집근처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제가 서울에서 살던 곳 근처 혹은 집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목에는 곧 잘 아카시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행운이라면 행운이겠죠. 어린 시절 고향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아카시아 향기는 저에겐 작은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뭔가 특별함이나 추억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1년여의 반을 지내오면서 서서히 지쳐갈 때 진한 아카시아 향기는 잠시 생각을 잊게 하거든요.


막 봄이 무르익을 무렵 퍼지는 진한 라일락 향기도 좋지만 이제 세상이 푸른 빛으로 뒤덮히기 시작할 무렵 더위가 올 것을 직감할 무렵 느끼는 아카시아 향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깊이가 있어요.


5월의 피 맺힌 역사, 수많은 열사, 그리고 수많은 투쟁이 있지만 지치지 않았던 우리 들의 삶의 에너지는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들, 우리가 흘려버렸던 세상이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해요.


이제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아카시아 향기는 메말라가겠죠. 그러나 그윽하게 뿜어냈던 아카시아 향기는 대지에 사람들 가슴속에 스며들어 또 다시 1년을 버티고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노동하는 인민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가 그렇고, 그것을 만들고자 했던 선배님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돌아도듯이 말입니다.


비록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 또 다시 소박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에 도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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