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신영철 대법관 사태와 법원이 가야할 길

[인권 :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
신영철 대법관 사태와 법원이 가야할 길


아직도 사법부가 시끄럽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과 사퇴 불가를 놓고 벌어진 이번 사태는 부끄러운 사법부와 희망 있는 사법부를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 기회였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우리 사법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몇몇 소수의 생각만은 아닐 게다. 한국 법원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신영철 대법관 문제는 한국의 법원이 다시 서기위한 과제 중 일 부분일 뿐이다. 오늘 법관들이 느끼는 위기감과 윤리의식이 알량한 ‘직업의식’과 자존감이라면 아직 우리 법원의 미래는 어둡다고 할 것이다.


법원 관계자들이 동의를 하던 안 하던 지금껏 법원은 권력과 자본의 지배아래 있었다. 인혁당 사건이 그랬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사건, 조작된 간첩 사건이 그랬다. 심지어 내란은 성공했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 지금껏 재벌과 정치인들은 법 앞에 특권을 누렸다고 한들 어느 누구하나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위기는 사실상 권력에 눈 감았던 과거의 진실이 던지는 때 늦은 복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 법원의 고민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신영철 대법관 사태에서 머물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법원을 위해서 법원이 가져야할 관점은 법원의 도덕성에서 법원의 ‘비판성’으로 그 고민이 옮겨 가야 한다. 법원과 판사들은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의 판결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비판적 자기 역할을 상실한 지 오래라면 법원을 걸어보지 못한 비판의 길로 나가야 한다.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 사회는 공안통치, 경찰국가로 나라 전체가 시간이동을 해버렸다. 경찰과 검찰이 법리적 판결을 내리고 난후 결제를 내리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 아니어야 한다.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통제를 잃어버린 법원이 오늘 걷고 있는 길은 행정부의 부속기관이라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소신 있는 판사들이 그토록 지키려 하는 법관의 정신은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험난한 길 대신 택했던, 도덕성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한 직업윤리였을 뿐이라고 하면 과도한 표현일까!


또 앞으로 법원이 가야할 길은 정의와 공명정대함 이전에 '소통'과 '이해'다. 이는 법원 상부와 일선 판사들 사이의 소통을 말함이 아니다. 지금까지 법원의 판결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법관이 법이라는 제도로 밝힐 수 있는 영역은 태생적으로 한계적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한계적 영역을 지금껏 당연하게 포기해 왔고, 심지어 그 이상을 권력과 자본에게 양보해 왔다. 법의 완성은 바로 낮은 곳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처벌되었던 수많은 사람들,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거리로 나서고 화염병을 던졌던 많은 사람들, 공산주의자, 주사파, 법으로 판단하자면 대부분 실정법 위반임은 확실하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많은 노동자들의 파업도 한국에서 합법인 경우는 없다. 멀리 가지 않고 건당 30원의 운송료 인상을 요구했던 택배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 용산의 가슴 아프고 참혹한 사건이 법률에 갇혀 판단하면  합법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이해란 오히려 법원의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낮은 곳에 대한 이해"와 "인권"을 지향하는 정치성을 가져야 한다. 법의 눈으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 눈 감기는 쉽지만 법의 귀로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기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법원이 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텐가? 그러나 법원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과거 법원이 걸어 왔던 오욕의 역사뿐만 아니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만은 더더욱 아니다. 구속영장 발부와 관련해서 보더라도 법리 판단이 아닌 검찰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검찰과 경찰이 정치적이니 그 반대편에 서 달라는 의미로 해석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불법이라고 부르기 전에 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절박한 인간의 삶이 있고, 마지막까지 내몰린 이들이 적법한 절차를 밟을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 있다. 현실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정치적 역할을 길러 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법이 인권이 아닌 재산권에 바탕을 두기에 이에 도전하는 행위는 대부분 위법이다. 하여 아무리 법관이 무조건 법을 넘어선 판결을 할 수도 없으며 사람에 대한 이해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능성과 시도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다.


법의 눈으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 눈 감기는 쉽지만 법의 귀로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기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법관들이 이해하고 들어야할 목소리들이 오늘도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대부분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진실은 1차적으로 법률에 의해서 가려지겠지만 그 여백은 법관의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보충되어야 한다. 오늘 법관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맺어야할 열매는,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법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울분을 법관이 나서서 바로 법관의 정치적 책임으로 헤쳐 나가는 직업의식의 전환이어야 한다.


택배노동자의 죽음을 둘러싼 행동들에 대한 법률적 판단, 기륭전자를 비롯하여 몇 백일에서 수년에 걸쳐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용산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재판에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 결사의 자유를 둘러싼 재판에서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성숙하게 넘긴 당신들을 기다려 본다.


아직은 법치주의가 인권의 시대를 보장하지 못하기에 더욱 더…

 

-'인권연구소 창'에 게시한 글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