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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외압', 이건 박근혜 정부의 범죄다

 

[편집국에서] 공소장으로 말하려는 윤석열이 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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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22 오전 8:04:17

 

'고작' 73건.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는 '박근혜 선언'의 기초였다. 여권 인사들은 하나같이 인터넷 댓글 73건 때문에 대선에서 졌냐고 야당을 몰아붙였다. 국정원으로선 일부 직원들이 선거 개입 행위를 한 게 사실이더라도, '종북 대응' 활동 중에 빚어진 의도하지 않은 일탈일 뿐이라고 발뺌할 수 있는 근거였다.

최후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무려' 5만5689건. 국정원은 SNS 전담팀을 꾸려 조직적으로 여론조작을 자행하는 방식으로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문재인의 주군은 김정일", "안철수는 박쥐XX" 등 막말 뒤섞인 인신공격은 예사였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을 이끈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21일 "선거 사범 중 유례를 찾기 힘든 중범죄"라고 규정했다.

국정원의 지난해 대선 개입 방법과 규모도 충격적이지만, 정작 놀라운 건 '중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수사팀에게 가해진 '외압'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과거 일에 국한되지 않는, 박근혜 정부가 바통을 이어 자행하고 있는 범죄의 연속성과 진행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윤 지청장은 21일 외압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4명을 거론했다.
 

▲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서울지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오른쪽)과 윤석열 여주지청장(왼쪽)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조영곤

윤석열 지청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번 수사의 지휘 책임자인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은 새롭게 밝혀진 국정원의 범죄 혐의가 지난 6월 검찰이 기소한 내용에 추가되지 않도록 수사팀을 막았다. 그는 수사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들고 집으로 찾아온 윤 지청장에게 노기를 보였다.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 야당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하겠느냐, 정 하려고 하면 내가 사표 쓰거든 수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윤 지청장은 "수사를 책임져야 할 분이 보고를 받고도 전혀 못 받은 것처럼, 불법인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은 법원에 제기된 공소를 취소시키기 위한 과정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황교안

지난 5월 말 채동욱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사팀은 원세훈 원장 등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고 구속기소하려 했으나 황 장관이 이에 반대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의혹은 윤 지청장이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다. 황교안 장관과 무관치 않다"고 증언함으로써 사실에 가까워졌다. 법무부가 통상의 권한 범위를 넘어 외압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또한 수사팀이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계정 확인을 위해 미국의 서버 조사에 관한 법무부의 사법 공조를 요청했으나 법무부는 비협조로 일관했다. 윤 지청장은 국정원 직원 체포 및 압수수색영장 청구 과정에서도 "법무부가 이걸 알면 지난 선거법 적용과 마찬가지로 허가를 신속히 안 할 게 너무 자명해 보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재준

검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는 국정원 직원들에게 남재준 원장이 "진술을 하지 말라"고 공문을 통해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윤 지청장은 수사 검사들에게 "(진술 거부 지시가) 범죄 혐의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수사 검사가 공문을 전달하느냐"고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입회한 변호사들이 (국정원 직원들) 옆에 앉아 남 원장의 진술 불허 지시를 반복해 주입시켰다"고 했다. 윤 지청장은 남 원장의 진술 거부 명령이 직권남용 아니냐는 지적에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국정원의 수사 방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윤 지청장에 따르면 수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댓글 작업을 벌인 직원들의 명단조차 국정원으로부터 제공받지 못했다.


윤상현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0일 기자간담회에서 "(5만5689건의 트위터 글 가운데) 2233건만 직접적 증거로 제기됐지 나머지 건에 대해서는 국정원 소행으로 추정한다는 것일 뿐 직접적 증거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며 "2233건의 글도 효력을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2233건은 윤 부대표가 말하기 전까지 어디에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는 "상식과 언론 보도 내용을 토대로 유추한 내용"이라고 했으나 검찰로부터 전해 듣지 않고 이 같은 구체적 수치를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윤 지청장은 수사 정보가 유출된 경위에 대해선 말을 아꼈으나 여당 실세의 수사 '가이드라인' 외압에 대해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전방위적인 외압 사태를 여권은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검사의 항명, 하극상으로 몰아가려 한다. 일부에선 검찰 내부의 공안통과 특수통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소장으로 말하는 검사가 국정감사장에 불려나와 "이렇게 된 마당에 사실을 다 말씀드리겠다"며 내막을 털어놓았다면, 정권의 정통성 방어를 위해 총동원된 '윗선'의 그물망 같은 사건 은폐 시도를 의심하고 그걸 걷어내는 게 우선이다. 외압의 실체는 경찰 수뇌부의 국정원 사건 수사 축소를 폭로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좌천 발령하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찍어낸 보이지 않는 손과 일치할 것이다.

윤 지청장은 "싸울 만큼 싸웠고 할 만큼 했다"며 직무배제 조치에 추가로 대응하지 않을 뜻을 밝혔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갖은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그가 관철시키고자 하는 유일한 목표는 국정원의 추가 혐의를 반영한 공소장 변경 허가신청일 것이다. 마지막 임무인 공소장을 지키려는 윤 지청장은 그래서 검사다. 검찰 수뇌부가 이를 철회하는 무리수를 밟지 않는다면 공은 법원으로 넘어간다. 재판부는 공소장 변경을 허가할지를 오는 30일 결정한다. 채동욱과 윤석열을 찍어낸 외압의 무게도 그때 가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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