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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안일을 깰 자는 누구

 
조현 2014. 11. 17
조회수 219 추천수 0
 

 

 

부처와 조사를 죽일 자, 살릴 자, 과연 누군가

 

 

평화운동가이자 세계적 불교 지도자인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88) 스님이 노환에 뇌출혈로 위독하다. 밀리언셀러 <화>의 저자로 우리나라도 방문한 그는 베트남전 때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다 1973년엔 남프랑스에 플럼빌리지란 명상공동체를 세워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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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

 

역사학자 토인비는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서양과 불교의 만남’을 들었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그 만남의 양대 주역이 바로 틱낫한이다. 선(禪)불교의 스즈키 다이세쓰와 스즈키 슌류, 숭산 스님도 견성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삶의 일상에서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으로 서구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지만, 틱낫한과 달라이 라마는 ‘고통에 응답하는’ 참여불교의 실천적 자비심과 ‘열린 태도’로 더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16살에 임제 선사(?~866)를 따르는 베트남의 선(禪) 사찰에 출가한 틱낫한은 조계종에 각별한 형제애를 표했다. 조계종의 옛 이름이 바로 임제종이다. 그가 2003년 임제 가풍의 서옹 스님(1912~2003)이 있던 백양사를 찾았을 때다. 그곳엔 “틱낫한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선 3배를 안 하면 안 될 것”이란 고압적 분위기가 지배했다. 틱낫한은 방에 들어서자 서옹 방장에게 공손히 3배를 올렸다. 그리고 수십명의 제자들에게도 절을 시켰다. 틱낫한이 77살, 서옹 스님이 91살로 사제뻘이었다. 그런데 열반을 앞두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노장을 방패처럼 앉히고 그 뒤를 둘러싸고 앉은 연하의 스님 수십명은 맞절도 하지 않은 채 틱낫한과 그 일행의 절을 받았다. ‘그런 오만이 한국의 선풍이냐’는 한국인 불자들의 탄식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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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 스님

 

틱낫한이 만든 플럼빌리지의 새 계율에 담긴 건 하심이다. 첫 계율은 ‘모른다’이다. 둘째 계율은 ‘지금 아는 지식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틱낫한은 ‘자신만 진리를 독점하고, 타인은 틀리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평화를 깨고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고 했다. 또 “소통이야말로 이해심과 자비심과 평화의 길”라고 했다. 불교가 내적으로 깊지만, 외적인 관계나 배려, 포교, 고통 구제 면에서 미약한 데 대한 응병여약(병에 맞게 약을 줌)으로 소통을 제시한 것이다.

 

얼마 전 틱낫한과 동갑내기인 대표적 선승 송담 스님이 조계종 탈종을 선언했다. 세 곳의 선방을 두고, 강화도에 참선센터와 승려요양원까지 지어 용화선원 스님들은 편한 시설에서 걱정 없이 수행만 할 수 있으니 분가하겠다는 것이다. 세속적 명리를 탐하지 않는 수행자상을 지키는 것도 부패한 승가의 희망이랄 수 있다. 스님들도 각자 스타일이 있으니 애초부터 은둔의 길을 택한 노승에게 다른 길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의 많은 제자까지 외부와 소통을 끊어버리는 은둔의 길을 가야 할까. 오직 자신의 수행과 안일만을 모색하는 것은 중생 구제라는 출가 명분을 망각한 것이자, 대승이 비판한 소승의 길이라는 게 승가의 공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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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의 모습

 

 

 

서옹 스님이 늘 제시한 것이 임제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이를 한국의 선가에선 ‘머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는 앞 구에 무게를 뒀다. 선어로 아만을 뒷받침한 셈이다. 선이 수승한 수행법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선 외엔 열등하다’는 독선으로 문을 닫아걸고, ‘자신만이 주인공’이란 유아독존적 아만으로 브라만이 되어, 대중을 노예처럼 하대하며 군림하는 태도가 과연 승가와 선승의 참모습일까. 임제라면 ‘아만을 놓고 깨어 고통중생 속으로 들어가라’고 다시 일러주지 않을까.

 

임제는 창조성 없는 앵무새 같은 모방과 답습을 가장 경계했다. 고정된 틀을 깨고 창조적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부처와 조사라도 죽이라고 했다. 늘 “할!”이란 한마디 외침으로 법(진리)을 표현한 임제가 열반 전 제자들에게 “내 법을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고 물었다. 시봉하던 제자가 “할!” 했다. 그러자 임제가 신음 같은 한마디를 뱉고 몸을 벗었다.

 

“저 눈먼 당나귀에 의해 내 법이 끊길 줄 누가 알았으랴.”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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