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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짤렸다.

공부를 하겠다고 도서관에 박힌지 얼마 안되서, 하루에 세 마디 하는 생활이 싫어져서

의자를 박차고 사교육에 진출한지 2개월만에 짤렸다.

무한한 노동력 착취에 혹독했던 비정규직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청년실업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파트타임으로 애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 공부를 할 것으로 계획했었다. 학원에 출근하는 시간은 오후 3시, 퇴근은 9시 반으로 내가 입을 열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살아있는 것을 느끼기에는 적절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도 교통이 좋아서 임금은 낮지만 용돈 벌기에는 적당한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내 생각은 출근 첫 날 부터 삐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면접을 볼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막상 첫날 출근을 해보니 강사들이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이리저리 청소를 해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인계를 해주기 위해 앉아있는 전임 선생에게 넌지시 청소를 해야되냐고 물어보니,

자세한 이유는 나중에 친해지면 해주겠다면서 청소를 해야한다고 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이유야 별거 없었다. 건물 관리인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지불하느니 강사들에게 싸게 청소를 시키는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청소는 물론 시작에 불과했다.

 

한 달정도 묵묵히 일을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했다.

길에서 우연히 다른 파트 선생들을 만났는데, 어제 사회 파트 선생이 일한지 한달만에 짤렸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사회 선생이 짤린 이유야 나중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장이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고, 그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가 유독 퇴근시간을 칼같이 맞춰서 갔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비정규직 인생이 위태로운 줄에 매달린 인생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한낱 파리 목숨조차도 되지 않는 대우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가 가졌던 분노와는 별 다르게, 이 사실은 다른 강사들에게도 적용되어

원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 짤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짤리지 않기 위해

성심성의껏 일을 하게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원장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들어갔고, 4월 중간고사 기간에 들어서면서

선생들은 새벽 2시까지 아이들을 쉼없이 굴리는데 동조했다.

새벽엔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가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또 새벽2시까지.

전임선생들은 그렇게 2주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일요일 휴일도 없이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계속 말이다.

 

당연히 강사들의 불만은 계속 쌓일 수 밖에 없었지만 분출되지는 못했다.

애석하게도 선생들은 세 패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크게는 원장의 애제자들과 제자가 아닌 피고용인, 그리고 후자는 또다시 전임과 파트직.

나야 물론 가장 불안정한 자리인 제자도 아닌 피고용인으로서 파트직에 속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야 어느 누구하나 모자랄 것 없는 좋은 선생들이었지만

업무 분담과 권한에 있어서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사람이 많으니 제법 말도 많았다.

 

권한의 차이는 확실히 어느곳에서나 발생했다.

시험기간에 아이들이 '빛나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이 시험감독을 도맡아했다.

물론 어디에서나 악역은 필요하다지만,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이들 위에 군림했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때렸다. 수업 시간에 조금이라도 떠드는 기색이 보인다하면 밖에서 창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가 문을 벌컥 열며 아이들을 끌고 나갔다. 나는 그것이 너무 싫어서 한번 따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물론 반응은 그럼 왜 애들이 시험기간인데도 소란스러워보이냐는 태도였고,

수업시간에 벌컥 문을 여는 일은 수그러들었으나, 멀뚱하니 밖에서 내 수업을 지켜보곤 했다.

 

빛나리 아저씨의 정체는 어느 학생의 아버지라는 이야기에서부터 점점 밝혀져

원장 부부가 경영하는 다른 두 곳의 학원 가운데 초등부 선생님이며

더욱이 여자 원장의 친 오라버니라는 사실까지 나왔다.

알고보니 나는 감히 대들수 없는 상대에게 눈을 부라린 셈이었다.

내가 순응하지 않았던 댓가는 물론 아이들에게 왔다.

단체기합을 주며 체벌을 가하는 기겁할 만한 모습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던 일까지 있었으니.

 

내 임금을 결정할 당시 학원이 많이 어렵다는 변명을 늘어놓던 원장 뒤에는

가까운 곳에 영어와 수학학원을 포함해  총 세 곳의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곳에는 각각 친오라버니, 올케, 외사촌의 친척과 아끼는 제자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으니,

도서관을 박차고 나간 선택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짤리게 된 오늘, 원장은 파트선생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 놓고 월급봉투를 주며

학생들이 시험을 많이 못봐서 인원이 적어졌다.

그래서 학생수가 적으니 반을 줄이고 전임으로 구할 예정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다른 파트 선생님들과 함께 일괄처리되어 학원을 나서면서 다른 파트 선생님은 오히려 그만두게 해줘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내심 나 역시도 그러했던 것 같다.

 

내가 짤리게 된 것을 뒤늦게 안 전임 선생님은  금방 전화를 해서는

몇몇 선생님들도 이제 그만두고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또 다시 그 자리를 채우게 될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연신 제길 제길을 외쳤다.

 

 

 

쓰다버린 치약들 셋이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힘껏 짜이고 나서는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주린 배를 채우고 집으로 각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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