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오님의 [○○○ 지부장님께...] 에 관련된 글.

 

 

 

 

귀속감각, 또는 '우리'를 (재)형성·확장한다는 것

 

_ 장문석씨라고, 파시즘 시대 피아트 기업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임. 이 사람, 논문자료 확보차 이탈리아에 갔을 때 정년퇴임했다는 철학 교수를 어쩌다 만났다고 함. 박사논문 주제가 뭐냐고 묻길래 알려주자, 그 노인은 “반색하며 대뜸 1939년 피아트 노동자들의 “전설적인 침묵”을 아느냐고 물었다”는. 모른다고 하니 “그는 이 침묵의 의미에 대해 이미 다 마셔버린 커피가 너무 아쉬울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주고, 이 “침묵으로 파시즘에 저항한 토리노 노동계급의 전통을 자랑”했다고. 그러니까, 1939년 무솔리니의 피아트 방문을 싸늘한 침묵으로 맞이한 토리노 노동자들의 저항은 “결국 파시즘의 몰락을 야기한 1943년의 총파업으로 이어졌다는 것”. 아울러 자신이 “좌파”라고도 하더라는.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좌파가 기억하는 토리노 노동자들의 ‘전설적인 침묵’이 저항인 동시에 분명 침묵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장씨에게 계속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

 

이상은, 올해 여름호 <역사비평>에 실린 것으로, 이탈리아 구술사가 루이자 파세리니에 대한 (아주 재미난) 장문석의 글 “구술사로 본 20세기 민중문화” 말미에 나오는 내용. 장씨가 이 글에 인용한 것으로, 미국식 대중문화가 득세하는 오늘날 민중문화 내지 ‘사회주의문화’의 자율성이 유지될지 회의적이라는 어느 대담자에게 파세리니가 대꾸했다는 다음 진술도 눈여겨 볼 만. “중요한 것은[그러니까 문제는] 전통문화로 이해되는 민중문화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조명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구조화되지도 않는 문화투쟁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성상 ‘정치 이전’의 것이고 그런 만큼 ‘모호한’ 성격을 곧잘 드러내지만 어엿하게 존재하는” “민중문화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는” 것.

 

_그래서 무슨 얘길 하고픈 거냐? 일단,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고도 왠지 빨갱이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금새 저렇게 ‘친(절)’해질 수 있다는 데 대한 흐뭇함, 또는 부러움.ㅋ 그러면서 한편으로 좌파-사회주의자라는 자긍심은 어떻게 형성되면 좋겠느냐는 물음이 떠오르길래. 바꿔 말하면, 그같은 자기긍정을 형성·지속시키는 실천감각의 근거, 그리고 이 근거의 현실화이기도 할 귀속감각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느냐는 것.

 

 

‘가족’과 ‘사업장/기업’에서 탈피하는 귀속감각이란 어떤 것일까?

 

_투쟁의 규모나 강도를 떠나, 현행 자본제하의 이윤합리성이 만들어낸 다채로운 불합리들에 맞서는 소수자들(…-이반-장애인-유·청소년-이주-여성-남성노동자)이 각종 투쟁에서 승리한다거나 했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아니, 무슨 뜻이어야 할까?

 

_고용안정, 또는 비정규직 철폐? 당면한 상황에서 이 구호가 지닌 전술적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크게 불충분해 보임. 대단위 노조에서 내건 고용안정 혹은 ‘총고용 보장 쟁취’라는 슬로건은 지금, 때론 기업경영진과의 암묵적 공모관계 아래, 사실상 훨씬 더 광범위한 규모로 조성되는 사회적 불안정을 댓가로 한 기업별 교섭사안 정도로 그 의미가 쪼그라든 상황이므로.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소속기업(혹은 사회적 관계인 자본) 본연의 시혜적-가족주의적 경쟁 논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귀속감각을 형성·강화할 근거와 유무형의 토대를 갖추지 못하는 한, "승리"를 총고용보장/원직복직과 동일시하거나 한정짓고 마는 건 노동운동의 중장기 전망을 방기하는 거나 마찬가지.

 

_이 와중에 노동자들의 자기긍정은, 이른바 민주노조가 존재하는 경우마저 특정 기업소속과는 자율적인 독자적 귀속감각으로 고양되지 못한 채 소속 기업에 대한 애사심과 모호한 자부심으로 포섭·굴절돼 버린 듯. 이를테면 현대자동차를 먹여살린 건 실은 정씨문중이 아니라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라는 식의 투쟁 논리는, 어느 시점/국면부터 결과적으로 현대자동차를 자본가그룹인 정씨문벌보다 노동자들이 더 사랑하게 하거나 민주노조들조차 ‘사업장 유지’와 결부된 ‘경쟁력 강화’ 논리를 스스로 수용하게까지 만드는 실천상의 자기족쇄가 된 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이때 말하는 사업장 유지=경쟁력 강화 논리가 ‘가족’을 지키는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노동자상 강화와 꾸준히 공명해왔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 ‘(정상)가족’은 성차를 막론하고 노동자들의 독자적·자율적 귀속감각 형성에 보탬은커녕 해악에 가까웠던 셈?

 

요컨대, 민주노조 운동이라는 틀거리 속에서 일정하게 형성됐던 노동자들의 자긍심은 실은 애초부터 그 존립근거가 취약했거나, 혹은 일정 정도 있었다 하더라도 독자적인 귀속감각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거나. 민주노총의 문건·보고서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계급정치’라는 용어는, 어쩌면 이런 난점 혹은 지체 상황을 관습적으로 은폐하고자 쓰여온 수사적 알리바이가 아닐까.

 

 

_이와 관련, 2004년에 작성된 일본 프리타일반노동조합 결성 취지문의 다음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커 보임. “...프리타는 어디에 가도 비슷비슷한 저임금이고, 또한 기업의 복리후생 제도나 노동조합으로부터도 배제되고 있는 케이스가 압도적으로 다수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직장이나 기업에 대한 소속 의식이 낮은 이유로 직장 단위에서의 조직화가 극히 곤란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프리타 조직화’가 곤란한 이유입니다만, 이 원인은 바꾸어 말해 기업에 대한 소속의식에 속박되지 않는 만큼, 자유롭게 싸움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요컨대, 특정 사업장에 대한 귀속의식 부재·약화라 는 현 시기 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해 수세적 대응을 넘어서는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얘기. 기업별 노조 조직화방식이 처한 딜레마에서 자유로운 지역별 사회노조(혹은 유관조직들 간 연합) 형태가, 노동자-지역주민의 독자적 귀속감각 형성·강화라는 측면에서 지닌 실천적 잠재력에 주목하자는 것. 이때 독자적·자율적 귀속감각 형성의 정치는 어떻게, 어떤 유무형의 자원을 토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이를 현실화하고 지속·확장시키는 데 적합한 조직화의 근거와 문법은?

 

_살맛은 고사하고 생산과정의 매순간이 죽을맛인 노동이 끝난 뒤, 피씨방 모니터에 떠 있는 아리따운 김태희로부터, 그나마 형편이 좀더 낫다고 해본들 기껏해야 낭만화된 ‘정상가족’ 이미지로부터 안식을 얻는 게 최대치인 현실. 노동자들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긍정·재발견하는 데 유효한 귀속감각은 어떤 마주침과 교류의 동선을 통해 두텁게 형성될 수 있을까. 중소영세사업장 조직화 토론회 후기에서 밝혔던 바, 당사자-노조-센터-지역주민의 지역별 최적 조합은 이같은 귀속감각 자체이자 형성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_그럼, 성차/젠더에 민감한 조직화 형태와 지역적 맥락을 머금은 ‘다른 노조’란 어떤 것일까? 이를테면 사회노조라 할 ‘노조’(들)과 거점 지역별 ‘센터’가 평행발전하는 것? 그러니까, ‘(투쟁)당사자’와 지역주민 간에 가로놓여 있는 유·무형의 장벽들을 허무는 한편, 상호중첩된 영역들을 좀더 포괄적 투쟁 의제로 (재)형성·공론화하는 ‘연합의 힘’은 어떻게 커질 수 있을지.

 

_일상세계의 자본주의적 식민화에 맞서, ‘지역’과 ‘문화’를 노동자들의 독자적·자율적 귀속감각 형성에 필수 조건으로 재인식하기.이로써 이른바 민주노조 양식, 즉 사업장 규모와 안정성, 사회적 평판도 등에 사실상 적대적으로 의존하면서 남성성에 기초한 조직형태가 일반적인 조직화 양식에서 탈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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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10:00 2009/11/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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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밀리오 2009/11/11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먼가 제 머리가 딸려서 잘 소화가 안 되는거도 있지만 배우고 갑니다 +_+

    덧) 근데... 그 사람은... 소위 말하는 선진노동자도 뭣도 아니였어요. 처음부터요 OTL...

    • 들사람 2009/11/12 0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구, 무슨 말씀을. 제 글쓰기 능력이 딸려서라고 해야겠죠. 워낙에 완결된 글이라기보단 일종의 메모 같은 생각쪼가리들에 훨씬 더 가까운 거라, 다른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먹어 주시길 바랄 따름임다.ㅠ

      저로선 마침 메모를 남기던 중에 님 글이 올라왔길래, 통하는 구석이 있구나 싶어 트랙백을 했더랬어요. 근데 제가 보기에, 어떤 노동자가 애초부터 (별로 맘에 드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선진/후진적이었느냐가 사태의 본질은 아니지 싶어요. 외려 중요한 건, 곧잘 주어지게 마련인 그런 조건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꿀어낼 조직 편제와 이에 조응하는 귀속감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라고 할까요. 이 부분이 애매한 채이다 보니, 님께서 겪은 그런 씁쓸한 경험도 그렇고 소위 민주/어용노조 간 경계도 갈수록 트미해지고 있잖냐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뭐 이게 바로 답이다 할 건 안타깝지만 저한테도 없고, 뭐여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수준여서. 누군가 혼자서 영웅적으로ㅋ 풀어낼 만한 것도 물론 아니겠지만요.

      여하간, 다른 데도 아니고 노조라는 데서 그런 경험을 하셨으니, 맘고생이 더하셨겠어요.;

    • 에밀리오 2009/11/12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으하하 ^^ 저도 그 선진노동자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죠 ㅠ_ㅠ 단지... 그 아저씨(?)는... ㅠ_ㅠ 으엥... 이지요 ^^; 암튼간에, 구조를 바꾸거나, 현재 구조의 문제점을 규명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ㅠ_ㅠ 그럴 내공도 없지만요 ㅠ_ㅠ;; 머... 그렇지요 ㅠ_ㅠ;;;

  2. 들사람 2009/11/12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괄호 친 물음표는, 솔직히 아저씨도 과분하고 실은 꼰대더라, 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어도 될라나요?ㅋ 꼰대라 하니, DJ DOC의 노래 <포조리> 도입부가 생각나네여.ㅋㅋ 개인적으론, 집회-시위에 짭새떼들 창궐할 때마다 이 노래 쏴줘도 좋겠다 싶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