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전후맥락을 부연하자면 이렇다.

 

예전에 고대문화 홈피 자유게시판에 들렀더니

"블뤼허"라고, 고대 재학생이라는데,

 

아무리 옳은 소리고 요구라 해도 시민들한테 교통체증 등의 불편을 끼치는 건 자가당착이며

되려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가만 보고 있다가,

얄팍한 소리 참 팽팽하게도 한다 싶어 '투정'은 좀 곤란하잖겠넀더니,

""또"" 당신만 옳다는 거냐며 그런 당신관 더는 얘기 못 하겠다느니,

심지어 날더러 초보수적이라느니 해가며 버럭, 하길래,

나 또한 아래의 장광설(게시글+댓글)을 늘어놓게 됐더라는 이야기.- -;

 

아래서도 얘기했지만, 아니,

투정을 투정이라고 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요.

 

내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나원 참.- -;

 

***

 

블뤼허님.. 운은 님이 먼저 띄우셨잖슴까.. 전 그에 대해 초간단 코멘트를 날렸을 뿐인데, 더 이상 코멘트 달지 않겠다니.. 제가 보기엔 님 주장의 옳고그름을 떠나 그것부터가 온당치 않아보여요.

님이야 애써 공들여 한 얘길 투정이라고 비난(?)한 게 이유라시지겠지만, 글쎄요, 고작 그런 이유로 논전을 그친다는 건 제 경험으론 넘 나약해 보여서..ㅎ; 온라인 바닥에서 제대로 얘기하시려면 이 정도 코멘트는 간지럼 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아셔야 할 거유. 그런 간지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논지를 잡아내고 자기주장을 펼칠 근성이 있어얀단 거죠. 님에겐 그게 별로 없으신가 본데, 뭐 암튼 그건 그렇다 치고..ㅋ

그럼 일단, 제가 님의 '주장'을 투덜거림으로 규정한 게 비난인가(따라서 잘못한 건가)부터 따져봐야 겠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비난은커녕 적절한 지적이라고 봐요. 따라서 사과할 맘도 없구요. 중요한 건 물론 그 이유일 텐데, 왜 그런 소릴 했는지 보고서 계속 발끈하셔도 좋잖을까 싶어 몇 자(?) 끄적여봅니다그려. 다만 님 논리를 고대~로 따르자면 저도 님 덕분에 ‘피해’보고 있다는 거나 알아두시구랴. 저도 님 글 안 봤으면 투정하구 있다는 코멘트를 날릴 일도 없었거니와, 이런 글을 써야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ㅋ

그러니, 디따 장황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님의 권리 행사가 제게 끼친 불편(게다가 이거 쓰는 데 든 시간;;;)에 대해 응당 져야 할 책임이라 생각하시고 읽어 보셨음 싶군요. 님의 권리론이란 게 그런 것 같으니, 일관성을 지키시란 얘깁니다. ㅋ


제가 왜 님 얘길 투정이랬느냐면.. 적어도 저한테 님 얘기가 이렇게 들렸거든요. 예를 들어  봅시다. 난데없이 군사지역으로 지정돼 살던 땅서 쫒겨나게 된 농민들(아니면 지자체/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자기네가 살던 데가 핵폐기물처리장으로 지정당한 시민들)이 있다 칩시다(다 실제 상황이었죠ㅋ). 이리 되면, '대체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릴 적절한 언로는 막히기 마련입니다.

말로는 그렇게 언론‘자유’를 중시하던 주류언론선 이런 사람들을 ‘묻지마 기사’ 형식으루다 집단이기주의나 님비라는 상투적인 프레임 속에 쑤셔넣기 일쑤니까요(이게 다, 주류언론서 말하는 언론의 ‘자유’란 게 까놓고 보면 언로의 자유가 아니라 언론‘사업business’의 자유라서 그런 거겠슴다만..ㅎ).

그러니 어쩌겠슴까? 상황을 제대로 알릴 입이 막힌 농민/시민들로서야 천상 '시위/집회의 자유'를 통해서밖엔 자신들이 맞딱드린 상황의 부당성을 알릴 수 없기 십상이겠지요(그래서 부안사태 같은 경우엔 주민들이 나서 직접 매체를 만들기도 했죠). 이렇게 봤을 때, 때때로 (님 주장에 따르면) 이 일과 ‘무관’하다는 시민들이 입는다는 ‘불편함’이라든가 ‘교통대란’을 시위 주체 탓이라고 하는 건 아주 손쉬운 판단일지는 몰라도 피상적이라는 소리까지 피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문제의 뿌리는 농민/시민들을 사실상 까라면 까는 줄 아는 우수운 존재쯤으로 취급한 정부부처의 하향식 의사결정방식(이건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구한 말부터 시작해 그 전통이 유구한 겁니다만ㅋ)에서 연유한 거니까 말이우. 간단히 말해, 이렇게 엉망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았음 시위·집회할 일이 왜 생겼겠냔 건데..

이런 상황에 견주어, 님이 하는 주장은 어떻게 들리냐면 원인과 결과를 뒤집고선 시위하는 사람들을 근엄하게 꾸짖는 걸로 비칩니다. 이를테면 지나가다 "아, 시끄러. 이렇게밖엔 못 하나? 짜증나네. 이러니까 외면을 당하지." 라고 든 생각을 그냥 ‘느낀 대로’ 쏟아낸 걸로 읽힌단 거죠. 님이야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믿겠지만요(누군들 생각이 없겠어요. 문제는 그 생각의 길이, 그리고 결과 질이겠지요.ㅋ).

해서, 그 생각이 온당한 건진 차치하서라도 일단 님의 주장이 저한테 그렇게 "읽혔다"는 데 주목해야 할 듯싶소만. 님의 열받음을 촉발한 투정이란 표현(또는 규정)을 하기 전에 '투덜거림'이란 말을 먼저 사용했던 것도 이래섭니다. 제가 투덜댐/투정이란 표현했다고 욱하기 전에 시위집회하는 사람들을 향해 투덜거린 건지 아닌지부터 분명히 하자구요. 투덜거린 거, 맞잖아요. 그쵸?^^ 전 그걸 투정이라고 코멘트한 거고요.

투덜거려선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란 건 잘 아시리라 믿어요. 투덜거릴 수, 물론 있어요. 저만 해도 만약 약속이 잡혔는데, 어느 집회 때메 돌아가야 하거나 길이 많이 막히면 아놔~ 이거 참, 하고 난감해할 수 있죠, 충분히. 근데, 예를 들어 (반북-반김 부흥기도집회 때문도 아니고ㅎ) 반fta 집회가 열려서 그렇다고 하면(물론 실제론 그 자리에 없기보단 있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ㅋ), 난감은 해도 님과 같은 짜증 섞인 투덜거림하고는 차원이 다를 것 같거든요.

제가 님의 주장에 대해 찍어누르기보다는, 그냥 투정이라고 나름 세심하고도 상냥하게ㅋ 규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뭐냐면, 님의 논지가 부당해서가 아니라, 외려 너무나너무나너무나너무나.. '지당한' 소리로 들려서거든요. 특히 님의 주장을 보면 사회 구성원들 각각이 동등하고 각기 떨어져 있는 원자들마냥 자리해 살고 있는 것처럼 거의 당연한 듯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세우는 주장과 대의가 공익을 말하고 옳은 소리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말짱 도루묵인 거아니냔 주장을 님께서 펼치시는 것도 다 이런 전제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사회운동 단체들을 전경련이나 경총 같은 이익집단과 동렬에 놓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굳이 덧붙이자면 (미국)주류 사회학계에서 창안해낸 기능주의적 접근법이기도 한데..ㅎㅎ

근데말이죠, 이 현대 세계를 ‘실제로’ 살아가는 개개인들이란 게, 공장에서 찍어내는 동일규격의 당구공 내지 고립된 원자 같은 건 전혀 아니거든요. 이건 단순한 제 생각이기 이전에, 뭣보다 사회‘과학’적 접근을 할라치면 이 점을 빼놓곤 사회(현안)을 논하기 힘들단 점 때문이지요. 단적인 예로,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씨나 대추리 이장 김지태씨가 '다 똑같은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가지 경웁니다. 너무나너무나너무나 순진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런 순진함을 가장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전혀 똑같지 않죠. 물론, 삼성이씨 가문에서야 실소를 머금고 비교 자체를 불쾌해 하며 이걸 질문이라고 하고 앉았나 하겠슴다만.. 저 역시 "똑같지 않다"고 한 게, 이런 차이(실은 위계)를 인정하자고 한 뜻이 전혀 아니란 거야 두말함 잔소릴 테고요..ㅋㅋ

요컨대 노무현 또는 이건희란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을 놓고 이들과 ‘동등하게’ 맞서 싸우려면 김지태 이장 한 분만으로는 어림 없단 얘기죠. 사회과학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금 대한민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가 김지태 vs 이건희/노무현이라는 1대1 대결을 가당찮게 하고 있단 겁니다. 왜냐. 간단하죠. 이건희는 그냥 원자적 개인 이건희이긴커녕 삼성으로 상징되는 경제권력과 더불어, 이런 경제권력의 욱일승천(이걸 혹자는 거칠 것없는 자본축적이라고 합니다만 ㅋ)을 음양으로 후견하고 싶어하는 법-정-관-학-언 네트워크의 주요 노드이기 때문임다.

행여 이게 다 이건희(또는 삼성이씨 집안)의 출중한 능력과 자질, 럭셔리한 품격 덕분이라곤 하지 맙시다. 김지태씨는 대추리 주민들을 대표해 자기 살던 땅에서 계속 좀 살게 해달라는데도 심지어 징역까지 사는데, 이건희씨는 법-정-관-언을 축으로 한 끼리끼리네트워크 강화사업차 돈다발 살포해가며 각 분야 엘리트들을 멋대로 길들여왔는데도 “국민경제”의 안위를 위해 옥체보존해주는 쪽으로, 게다가 이건희씨가 굳이 나서지도 않았건만 그렇게 가닥이 잡히는 게 정말 김지태 이장의 개인적 능력과 자질이 떨어져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죠. 그런 차이가 설사 있다 해도, 그게 앞서 말한 '결과의 판이함'을 만들어낸 이유인 것도 아니고요. 가만 따져 보면, 대추리 주민 김지태와 삼성그룹의 대빵 이건희씨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는 이렇듯 어처구니 없이 비대칭적여서 그런 거라고 해야 할 겁니다. 저처럼 사회과학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비대칭적인 사회 관계가 지속적이어야 하고, 심지어 ‘정상적’인 것이어야 하는 양 만들어내는 경제적-문화적-정치적 기제를 파고들어가야 하는 까닭도 그래서겠지요. 한가한 사람들이야 “적법절차”에 따라 소송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건희-김지태의 재판과정과 그 결과가 '판이한' 것도 법률적 절차의 부당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비대칭성 때문이란 거고요.

주류언론서 김지태의 ‘배후세력’이라고도 했던 사회단체들이 결합하고 지지성명서 내고 시위-집회-문화제라는 형식을 통해 대추리 상황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하는 건, 이렇듯 김지태와 이건희씨가 동등한 개인으로서 마주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바라볼 문제여서죠. “적법질서 준수”라는, 달리 말해 “아무리 그래도 타인에게 피해주지는 말아야 한다”는 지당한 말만 갖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하는 게 우스꽝스런 이유도 여기 있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규정해온 경제·문화·정치적 권력관계를 제어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권력관계가 지속하고 싶어하는 사회형태와는 다른 사회(들)을 열어젖힐 방도에 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하는 것도 그래서인 거구요.

제 말의 요진 그러니까 이겁니다. '공공성' 내지 공익을 빙자해 특정 그룹 내지 세력이 자신을 살찌우는 과정서 초래되는 온갖 유형의 문화적·구조적 폭력(꼭 몽둥이를 들고서고 때리고 피를 흘려야만 폭력이라는 정의가 쓸모가 없는 이유기도 합니다)은 “적법”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지장 없다는 이유로 선선히 용인되면서, 정작 그런 상황을 바꾸고자 이뤄지는 집단적 행동 내지 결사행위들에 대해선 너무나 지당한 말루다 '불편'만 끼치고 과격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공격하는 게 과연 ‘균형잡힌’ 태도냔 거죠. 블뤼허님께서 언뜻언뜻 비치듯, 그런 ‘산술적인 균형’ 감각으로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고 봐요. 그러면서 “까놓고 얘기해 니들 좋자고 시위하면서 꼭 그딴 식으로 해야겠어?” 하며 훈계조로 지적하셔봐야 힘차게 헛스윙이라는 검다.

님이 시위가 그렇게 불편하시다면, 외려 '복합적 균형'의 감각을 발휘하면서 때론 ‘과격’하다 싶을 정도의 움직임이야말로 이른바 ‘균형’을 잡는(그리하야 궁극적으로 님께서 그리도 싫어하시는 시민피해형 시위의 종언을 이끌어낼ㅋㅋ) 모멘트로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냔 건데요. 제가 보기엔, 그렇게 해야 (고식지계용 '봉합'이 아니라) 제대로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테니까요. 이런 점에 비춰보면 님 얘긴 아무리 잘 봐줘도 역시나, '투정'으로밖엔 안 보인다는 거죠. 어쩌겠어요? 해결의 실마리 찾는 덴 사실상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힐난성 얘기일 뿐인데, 투정이라고 하는 수밖엔요.

나름 ‘균형’감각을 발휘한답시고 얘길 하셔서(그리하야 투정부린단 제 얘기에 욱하셨겠다싶어서) 하는 말입니다만, 쉽게 말해 오른쪽으로 휠대로 휘어 있는 막대기를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험을 해본 바로도 그렇지만, 산술적으로 ‘중간’을 겨냥하고 바로잡으려 해봐야 계속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지 않던가요? 왼쪽으로, 그것도 빡세게 왼쪽으로 벡터를 잡아도 바로잡힐까 말까 할 때가 더 많은데.. 뭐, 이런 식으루다 님께서 짜증스러워하시는 집회-시위의 의미를 ‘재발견’해 보심 어떨까 싶슴다. 간단히 말해 집회-시위의 과격함을, 그 자체 원인으로 속단하기보다는 사회적 공공성 내지 삶의 질이 붕괴하거나 빈곤하다는 걸 알리는 어떤 ‘징후’로 읽어보심 좋겠단 거죠.

뭐, 그렇게 보시고도 이건 아니자나 하심 뭐 제가 별 수 있겠어요? 생각이 짧고 길건 간에, 그냥 그렇게 생각하나부다 하는 거죠.ㅋ 다만, 한 번이라도 그렇게 보려고 ‘노력’하신 적이 있는지 싶어 드리는 말씀임다. 그러지도 않고서 집회시위가 님을 비롯해 ‘시민들(님같은 분들에 따르면 이들은 정부나 자본이 뭘하든 적법하기만 하면 일단 따르고 봐야 하는 유순한 주체들로 상정되기 일쑤인데요, 지금 이런 시민 개념도 얼마나 넝마처럼 너덜해졌는지 국내외적 상황을 둘러보심이 좋을 듯합니다)’에게 불편'만'을 안겨준다고 하시니, 그렇담 그건 투정이라고 본거고요. 백 번을 되물어도 이건 투정입니다. 투정을 투정이라 하지, 그럼 투쟁이라 하겠슴까?ㅋ

(아닌 게 아니라, 시위가 그저 내보이는 형식이 아니라 시민들과 어우질 수 있는 형식으로 진화해야 한단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근데 이걸 가로막는 게 뭘까요? 헌법으로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마저 자기들 취향에 따라 검열하는 경찰 및 정부의 과격하고도 협애한 법적용 방식임다.ㅋ 시위가 왜 불편을 초래하는진 이런 점을 빼놓고는 제대로 말할 수 없지요.)

대가 저같은 사람들더러 님같은 분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뭐 갈등을 조장한다지만, 저같은 사람이 문제삼으려 하는 이분법적 구도와 갈등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부터 좀더 찬찬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제 깜냥으론 자본의 기본메커니즘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회를 늘 그런 갈등과 분열 구도로 몰기 일쑤더군요. 서유럽은 그래도 좌우파를 떠나 좋든 싫은 이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있는데, 우린 거꾸로 자본의 권능을 강화하면 할수록 이런 갈등과 문화적·경제적·정치적 분할선이 사라지리라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구라가 전문가의 입과 권세를 빌어 버젓이 횡행하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님께서 투덜대시는 갈등과 연이은 시위·집회의 파노라마는 근절되기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격한’ 걸까요? 집회·시위를 통해 경제적·문화적 분할선의 골까지 파진 말자고 요청하는 쪽일까요, 아니면 그거야 어찌 됐든 자본의 엔진으로도 모자라 터보 장치까지 달자고 막나가는 기업가를 위시한 우리 사회의 주류 엘리트들일까요? 함 생각해 보시길. 심지어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적법한 노동쟁의 행위에 대해 깡패들 동원해 ‘처리’하려는 과격함을 보여줬던 게 울나라 기업사였단 점을 알아두시길. ‘반기업 정서’ 때메 이곳 살림살이가 힘들어질 거라 협박까지 할 때도 있지만, 이런 기업사를 기억하는 쪽에서 보면 웃기는 얘기지요.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된 김승연 회장의 ‘완력’과 조직동원 능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란 얘기기도 하고요.ㅋ

이른바 ‘선진화’됐다는 서유럽 지역의 경험만 봐도 정 반대거든요. 자본의 권능을 최대한 봉인하지 않는 한 삶의 질은커녕 내전과 전쟁의 불씨만 도처에 널리리라는 게, 근대 자본주의의 원조 서유럽 쪽 사람들이 경험한 역사적 교훈이란 겁니다. 지금 대학에서 전공과목만 열심히 들으시면, 이런 얘긴 한 번도 안 듣고 졸업하실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 섣불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회운동이나 집회·시위‘만’ 붙잡고 공격하는 건 그야말로 본말전도라는 것만 알아두셨음 좋겠어요. ‘만만하다 싶은 것’만 건드린다는 힐난서도 자유롭기 어렵겠지만요.

대한민국 탄생 이후 이 나라의 행정부-주류 엘리트분덜께서 내세워온 '공공'과 '공익'이란 게 기실 특정한 부류의 이해관철에 필요한 알리바이였다고 지적하신 데 대해선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근데 그 지적이 계속 빛을 발하려면 여기나 저기나 다 똑같다고 도매급하기보다는, 서로 내세우는 공공성 내지 공익의 결과 논리가 어떻게 다른지부터 구분하시는 게 아닐까 싶군요. 물론 운동한다는 단체 중엔(특히 시민운동 같은 경우가 그런데요) ‘국가의 외피’나 다름 없을 정도로 국가와 별차이 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여타 시민사회운동 단체도 죄다 똑같다고 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비약이자 오류입니다. 사회운동 단체를 이익단체로 손쉽게 규정하는 것도 그렇고요.

실제로 접해보면 이런 규정은 좀체 감당하기 힘들 텐데, 님이 하고 있는 주장이 바로 그래요. 해서 얘깁니다만, 님께 일단 필요한 건 시위가 불편하다거나 맘에 안든다고 하기 이전에 “균형감각”, 그러니까 산술적 균형점이 아닌 복합적 균형점부터 먼저 찾아내시는 일이 아닐까 싶슴다.

글구 뭣보다 님이 (의식하고 계신진 몰겠지만) 채택하고 있는 접근법, 공부하는 바닥선 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하고 더 넓게는 자유주의라고도 하겠슴다만.. 어쨌거나 그 접근법이라는 게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경우조차 제한적인 타당성을 전제해야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심하게 말하면 시한부 내지 사실상의 사망 선고를 받았달 수도 있겠지만, 아직 님처럼 그런 방법론을 채택하는 분들이 (아직은?ㅎ) 상당수인 상황이니, 그렇게까지 말하긴 좀 뭐하군요. 그냥 님이 쓴 말 고대로 받아쳐, 안쓰럽다고 해둡시다. 그것도 몹시요.ㅋ

암튼지간에 현 사회체제가 ‘실제로’ 어케 굴러가고, 또 그 안에 사는(또는 그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이 사회와, 또는 타인들과 어케 관계맺으며 주요한 사건들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피기에 님 주장을 떠받치고 있는 방법론이 얼머나 고리타분한 걸로도 모자라 해악적인지나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어요. 사실, 지금 고대도 그렇겠슴다만, 소위 잘나가고 못나가골 떠나 대학교에서들 가르친다는 ‘교양’이 대개 그런 방법론으로 뒤범벅 돼 있다는 게 뭣보다 씁쓸한 일이겠지만요. 대학 건물이 아무리 번듯하대도, 거기서 가르치는 지식의 내용까지 번듯하고 실하리라는 생각은 부디 마시길. 아마 그게 몸과 마음에 훨씬 좋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안 그러면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게 될 걸요? 말하자면, 명색이 잘나가는 학교 나왔다는데, 그랬다는 거 말곤 내세울 게 없어지는 상황이랄까요..ㅎ

 

근데 참, 아무리 봐도 투정부리는 글에다 투정부린다고 했다고 "초보수적"이라거나 하날 보면 열을 알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얘길 들어야 하다니..;;; 살다 보니 제가 초보수주의자란 소리도 듣는군요.

비록 한때, 그니까 유년기 시절 국민(혹은 이의 대내적 표현으로서의 시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긴 했다지만 보수를 넘어서려 했다면 또 모를까.. 그게 초보순 아니죠? ㅎ

여하간 참 재밌는 것이, 정작 배제의 극단을 달리는 초보수적인 목소리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풍경이예요. (미국과의) fta도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스런, 그니까 시장이 명령하는 삶의 방식 외엔 그 어떤 삶의 방식들도 (그게 설령 삶의 질 제고에 도움이 될 때조차!) 용납불가하는 함의를 지닌 사안인데 말이죠.

그런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오오- 이에 대해 우리 자랑스러운 글로벌 일류명문대학 고려대학교 재학생들의 50여%가 하면 추진하믄 좋은 거아니냐구 하는 거 보란 말이지요. 아마도 명문 일류대 출신이 될 것이므로, 사회 전반에 몰아칠 태풍의 눈 속에 자기들은 있을 거란 생각이어설까요. 그래도 그렇지, 대한민국 정부가 자리한 이곳이 풍비박산나불면 그게 다 뭔소용일까 싶은데.. 글로벌 감각을 함양해서 그런가? ㅋ 하긴 멕시코만 봐도, 사회 전체가 두 쪽이 날 땐 나더라도 fta로 재미보겠단 쪽이야 곧죽어도 재밀 보겠다는 판이니.. 우리 사회의 '엘리트'로 자리잡을 고대 재학생들 절반도 그런 생각인 모양임다이.

시민사회 활성화 필요성을 인정하다지만, 자본과 국가가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사회와 다양성이란 애초부터 관변운동이자 골라먹는 재미뿐인 무늬만의 다양성일진대, 그건 또 뭔 소용인가 싶고.. (시민)사회운동(내지 본디 반체제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궤적에 대해 알고서나 울나라 쪽 시위 양태에 대해 언짢아하는 건지도 의문이고요.

그럼 얼마전 프랑스 같은 데서 대졸 앞둔 젊은 친구들이 일테면 우리나라의 비정규직법 적용범위 확대 반대한다고 파리 시내 교통 마비시켜 시민들한테(근데 이 시민은 누구..?ㅋ) 불편을 초래했던 건 프랑스인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 게 되는 셈인데,,ㅋ; 실제론 물론 교통대란을 일으킨 시위 덕에 프랑스의 삶의 질이 그나마 유지된 거였자나요? 뭐 엄밀히 말함 이런 깜깜함이 블뤼허의 글에 짙게 드리워 있어 투정이라고 한 걸 갖고 말이죠, 뭘 그렇게 발끈할 것까지야.. 자기 얘기가 굉장히 견고한 줄 알았단 거 아녜요, 그런 섣부른 착각서 벗어나게 됐음 다행인줄을 알아야지 도리어 화를 내니 뭐 이건..;;

뭐, 이런 깜깜함이야 엄밀히 말함 블뤼허만의 잘못이라기보단, 이런 깜깜함을 걷어차낼 수단이 공식적으론 대학(커리큘럼) 안에 없다시피해서겠지만..

이러고도 어윤대 전 총장은 그런 커리가 하버드대학서 운용하는 거랑 같다며 뿌듯해하라고 했죠? 글로벌이고 나발이고, "비슷한 건 가짜"라는 연암의 말뜻만 새겨도 좋아하긴커녕 참담해할 소린데... 해맑은 동안이셔도 겉보기완 달리 보수주의적 감성으로 속이 꽉 찬 한승주 총장서리께서야 달리 암것두 하시는 게 없겠지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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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2 23:52 2008/03/1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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