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scrum님의 [희한한 인용과 주석] 에 관련된 글.

 

 

[원래는 댓글을 달려다가, 자꾸 길어진 관계로.ㅜ;;]

 

 

일단, 에드워드 사이드씨에 대해선 비판적이더라도 다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나쁜 점만큼이나 좋은 점도 있으니, 이 점을 감안해서 파먹도록 하자는 얘긴 물론 아니구요. 자기모순에 주목해 그의 미덕을 지양해내자고 할까요.ㅋ

 

박홍규 교수가 단 주석을 (다시) 보니 문득, 좀 난데없는지 모르겠지만, 김민웅 교수가 생각나더군요. 민주노동당이 쪼개지려 하던 무렵, 제가 보기엔 사실상 좀비화된 엔엘 정파, 즉 경기동부·울산지역 등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파와 범좌파가 정녕 아름다운 하나됨을 추구할 수 없겠냐고 했는데, 전 이 말이 그 알흠다운 취지만큼이나 무척 허술하고 심지어 한심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까 지역위 활동을 전혀 안 겪어봤다는 얘기란 거죠, 그렇게 호소할 수 있는 건. 어딘가에서 (좌파정당도 아닌) “진보”정당이 잘 되길 그냥 두 손 모아 바랬을 뿐이라는 방증으로도 읽힐 만하다 싶었구요. 송영길 등 소위 민주화운동 출신들 목구녕에서는 FTA 시리즈가 "역사진보"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라는 견해도 진지하게 흘러 나왔던 판국에 말예요.

 

살짝 좀 얘기가 샜습니다만ㅋ 암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 근까 이 대한민국이란 데서 맑스의 저술들은, 그게 근대 세계의 ‘지적 토대’라 할 오리엔탈리즘(혹은 이와 겹치지만 그렇다고 같달 순 없을 유럽중심주의 패러다임)과 어떻게 연루돼 있고 또 어떤 점에서 그런 연루를 스스로 전복하는 힘을 동시에 지녔던 건지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한다고 보는 쪽입니다. 이런 ‘이중적 긴장’의 끈을 아예 끊고 (박홍규 교수처럼) 전자로 말려들어가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른바 ‘정통파’ 맑스주의자들처럼) 후자로만 말려들어가도 안 된다고 할까요.

 

이리 보면 박홍규 교수는 전자에만 꽂힌 나머지 사실상 후자의 여지를 없애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버린 셈임다. 물갈이해야 한다며 거기서 펄덕대야 할 물고기들마저 갈아버린 거죠. 무엇보다도, 몇몇 텍스트가 맘에 안 든다고 맑스 텍스트의 ‘극복’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100 이른 정황이기도 하고요(이르지 않대서 쉽사리 극복될 만한 건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요ㅎ). 일단 이 점을 전제로, 몇 가지 다른 생각을 밝혀볼까 합니다.

 

 

 

먼저, <18일>에서 인용된 “그들”이 계급형성 여건이 열악한 농민이라 해서 이들을 “동양인” 내지 비유럽권역 사람들로 확장시키는 게 전혀 터무니없진 않은 거 같어요. 제가 알기로, 사실 자본주의적 지배 블럭에서 구사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은 (농업)노동자/이주민/비백인/여성 등등 일국적-세계적 규모를 넘나드는 “서발턴”을(그람시) 겨냥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서발턴들은 일반적으로 특정국가의 국민으로 편제된, 농민(이라 불리는 농업노동자)에서부터 비유럽권역의 (피지배)주민이나 "민족"들 전체에 이르기까지 (동심원적으로?) 계열화될 수 있지 싶은데요.

 

오히려 문제는, 아닌 게 아니라 근데 왜 하필 저 인용문을 끌어들였을까 하는 거겠죠.ㅋ 특히나 맑스가 쓴 저 구절은, 자신의 가치판단은 일단 접어둔 채로, (지배블럭의 가치판단이 개재된) ‘사실’에 대해 분석한 걸로 읽어야 하는 건데도요. 근까 “..대변돼야 한다”는 당위진술은 저들에 따르면, 이란 얘기지 맑스의 생각이 아니란 거죠. 근데 왜 이걸 끌어왔을까?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것 같어요. 굳이 사이드씨 편을 들자면, 그런 줄이야 사이드씨도 모르지 않는데, 보나파르트의 공화국파로 상징되는 그 당시 근대유럽 세계의 진보적 부르주아지들의 “심상지리”를 드러내려 한 것일 뿐이거나.ㅋ 아니면, 맑스의 저술도 이런 자유주의적 세계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길 하고 싶었거나.

 

박홍규 교수의 주석이 아예 없었다면, 이를 놓고서 비판적인 검토를 하기가 더 나았을 듯싶은데, 주석 자체가 허술했던 바람에 이런 여지가 아예 없어져버린 건 아닌지 싶기도 합니다. 뭐 물론,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사이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좌파 계열 논자들이 있긴 하지만요. 게다가 맑스가 맹아적으로 정초했던 “아시아적 생산양식” 테제는 오리엔탈리즘을 반영·강화한 게 아니라 되려 유럽적인 자본주의 이행 경험으로는 설명불가능한, 다양한 사회적 이행 계기들이 깃들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 외려 오리엔탈리즘 비판의 단초라고 해야 할 텐데.. 박 교수는 외려 이를 맑스 비판의 근거라 한 것도 있겠고요.

 

어차피 맑스도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는 걸 꼬집어 줘야 했다면 <18일>이 아니라 <영국의 인도 지배의 장래의 결과>가 차라리 더 좋았겠다 싶어요. 이 글이야말로, 자본축적 운동의 문화적 표현형인 이른바 “문명화 효과”에 대해 맑스가 보인 미묘한 (그래서 실은 엉켜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ㅋ) 견해를 담고 있으니까요. 이런 독해가 유용한 성과를 거두려면 유념해야 할 게, 제가 보기엔 이런 것 같습니다. 맑스라는 아저씨는 (그 스스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인 만큼) 어쩔 수 없는 ‘계몽주의적 진보 시대’의 후예였으면서도, 이런 시대성의 추악한 모순을 드러내고 그 숨통을 끊어놓으려 한 ‘지적 (계승이나 완성과는 거리가 먼) 패륜아’였다. 바꿔 말해, 자신이 연루된 시대성의 자장 안에서, 다시 말해 주어진 사회적·역사적 제약 속에서 반시대적 시공간(=공산주의적 세계혁명)의 잠재력과 이에 필요한 지적·실천적 경로를 탐색한, 참, 볼수록 경외로운 아저씨로 읽어낼 필요가 있겠다고 할까요.ㅋ;

 

피터 오스본이 쓴 <하우투리드 맑스>를 보니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결과>에서 맑스는 본의는 아녔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식민주의적 이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인도의 역사는 소홀히” 함으로써 “정치 분석의 세계사적 양식이라는 문제적 유산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요. 맑스 자신이 계몽시대의 후예란 점 말고도, 오스본에 따르면 이는 그의 삶과 활동이 펼쳐지는 지리적 기반이 자본 운동 자체의 ‘전지구성’을 감안할 때 늘 국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과 관련을 맺습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와 영국을 넘나드는 범유럽권을 무대로 했다 쳐도, 당시 지구 전역으로 뻗치고 있던 자본주의 근대세계의 지리적 규모에 비하자면 이 또한 국지적인 거였으니까요.

 

결국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관건은 자칫 “심연으로 커질 위험도 있”는, “정치적 행동의 영역과 세계사의 영역” 사이에 생기기 십상인 이런 틈새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접붙일 거냘 텐데요. 오스본은 맑스의 저술들을 “유럽중심주의 성향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런 (손쉬운) 정리(나 섣부른 청산의 체스쳐)가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와 그것의 계속되는 영향을, 동일한 세계사적 규모에서 좀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대한 답일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도전은, 맑스가 계몽시대의 아들이기에 알 수 없었(거나 볼 수 없었)고 반시대적인 지적 패륜아였어도 ‘활동의 국지성’ 탓에 미처 접하지 못했던 “더 광범위한 경험적 지식과 정치적 지혜의 이점을 활용”하는 일이겠다면서요.

 

 

 

 

사실 맑스 스스로 1860년대 중반을 전후해, 아일랜드 감자기근 사태를 접하고 난 뒤부터 <효과>에서의 접근법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했다고도 하죠.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맑스적인 (자기)비판의 방법이 역사적으로 어쩌다가, 언제부터, 어떻게 과학주의적 역사법칙론 내지는 “지적으로 불모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유해한” 발전단계론 따위로 왜소화됐는지 되새김하는 일이 아닐까 해요. 오스본의 적절한 지적처럼, “사회가 코뮤니즘적이 되기 전에 자본주의적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자본주의에 민족적 부르주아지가 필요하다면, 전에 식민지였던 사회에서는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형성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게 코뮤니즘 정당의 아이러니한 과업이 될” 게 더더군다나 아니라면 말이죠.

 

저로선 이게, 계몽시대의 자식으로서 그 시대성을 살해하는 데 전력했던 맑스의 패륜적 면모를 살리긴커녕 계속 순치시켜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만. 이 점을 고려하자는 게, 맑스의 저술들을 곧죽어도 지켜야 할 ‘정전’으로 만들자거나 ‘순결한 맑스씨’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것하고 일절 무관한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겠죠.ㅋ 굳이 덧붙이자면, 맑스 텍스트를 구성하는 내적 긴장의 컨텍스트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얘기니까요.

 

따지고 보면, 사실 이른바 비판적 지지론의 변주로서 요즘 민주노동당을 비롯해 일각에서 바람잡는 중인 ‘민주대연합’ 노선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 혁명노선으로 연합파 같은 엔엘계에선 아직도 내심 실천적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양인 통일전선-전민항쟁론, 그리고 한때 사노맹에서 추구했다는 (대외적 종속성 혁파 후 사회주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2단계)혁명 노선도 이런 단계론에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었던 셈일 텐데요(어떤 면에선 근대 부르주아지가 유럽권역 특유의 봉건적 사회구성체를 허문 ‘긍정적인’ 역사적 행위자였다는, 다시 말해 ‘역사발전’에 공헌한 이들이었다는 뉘앙스를 물씬 풍기는 <공산주의 선언>의 역사서술 방식에도 기댔을 테고요).

 

앞서 말했던 되새김질이 그저 ‘하면 좋고 아님 말고’인 일일 수 없는 건, 이런 지난 경험이나 지금의 정세를 놓고 봐도 분명하겠다 싶슴다.

 

 

 

p.s.

요즘 저는 사이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프란츠 파농의 저술을 지금 다시 읽는 게 중요하겠다 싶더라구요. 이를테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 실린 (“폭력에 대하여”도 그렇지만) “민족의식의 함정” 같은 글은, 의도와는 별개로 자꾸 “다문화주의”적으로만 소비될라구 하고 (트랙백한 글에서처럼) 그런 빌미를 일정 정도 스스로 주기도 하는 사이드 텍스트와는 달리 뭐랄까요, 쩡~, 한 느낌도 더 강렬하고ㅋ 우리가 흔히들 세상이 바뀌었다느니 달라졌다느니 하거나 그렇다고 들어온 상황이란 게, 실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변주된 지속일 뿐이라는 점을 새삼 음미하기에도 유용하다고 할까요.

 

물론, 예전과 다를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자는 게 아니라, 좋고 나쁘고를 막론하고 정말로 바뀐 건 뭐며, 그럼에도 참 징하게 지속중인 건 뭔지 준별하는 힘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겠다는 의미에서지만요. 현 지배계급의 반동적 투쟁이 그만큼이나 매혹과 잔혹을 분간하기 어렵게 지랄맞아서든, 반체제운동(들)의 새로운 짜임새가 이에 효과적으로 맞서기엔 아직까지 신통치 않아서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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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16:12 2010/01/05 16:12

 

Commentary No. 271, Dec. 15, 2009


흑인 대통령 오바마

("Obama as a Black President")


 


미합중국 의회 흑인의원연맹(이하 연맹)의 오바마에 대한 인내가 바닥을 드러낸 가운데, 이같은 정치적 긴장이 언론을 통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연맹 회원들이 느끼기에, 오바마는 작금의 경제적 곤경이 아프리카계 주민들과 그밖의 소수자 그룹에게 국내 인구 중 그 어느 부류보다도 엄청난 여파를 끼쳐왔다는 사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을 상대로 특단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공화계인 에마뉴엘 클리버는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는 의식적으로 인종과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애써왔고, 이는 우리 모두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 실업자 수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한테 주의와 자원을 돌리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할 만하다.”

 

버락 오바마가 흑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그가 2007년 대통령 후보경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로 줄곧 주요하고도 잦은 토론거리가 돼왔다. 미국의 흑인 정치인들한테서 오바마가 처음부터 열렬히 지지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들 다수는 힐러리 클린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아프리카계 미국 언론매체에서는 오바마가 “충분히 흑인답다고 할 만한지”를 놓고서 상당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렇게 주저하던 태도가 급격히 바뀐 건, 2008년 1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오바마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두면서부터였다. 아이오와 주는 백인 비중이 압도적인 곳이었다. 그런 데서 오바마가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계 정치인들에게 그가 경선에서 이길 수 있겠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흑인이 드디어 미합중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인까지 포함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고려요소였다는 게 밝혀졌다.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빈부와 노소를 막론하고 사실상 미국 내의 모든 흑인들한테서 열정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들이 흘린 기쁨의 눈물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아프리카계 초중생들은 각자가 스스로 바라는 그 어떤 목표도 열망할 수 있겠다는 것을 그의 당선이 입증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가 유권자들한테서 어떻게 지지를 이끌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아프리카계 흑인들만으로 그가 선거에서 이기기란, 설령 분별력 있는 유권자가 모두 투표를 했더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바마는 민주당을 든든히 받쳐주는 핵심 지지자들 말고도, 예전까지만 해도 불확정적이던 세 부류의 유권자들에게서 표를 얻었다. 첫 번째 부류는 여느 때 같았으면 투표소에 가지 않았을 이들로, (대체로 학력이 상대적으로 짧고 빈곤층인) 다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흑인과 백인을 망라한) 젊은 친구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중도파 유권자들인데, 통상 교외에 위치한 커뮤니티에 속해 있고 백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 번째 부류는 백인 숙련노동자들로, 지난 십수년 간 사회문제를 보는 관점을 이유로 민주당을 외면해(왔고 인종주의적 감수성을 자주, 공공연히 드러내)온 이들이 되겠다.

 

오바마가 (공화당을 등지라고 꾀어냈던 중도파-교외거주 유권자들과 백인-숙련노동자들인)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한테서 지지받았다면 그건 바로, 그가 “성난 흑인”이 아님을 해당 유권자들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다시 말해 아주 “차분한” 품행을 갖춘, 출중한 학력에다 실용적이고, 중도성향을 가진 정치인으로 자신을 앞세웠다. 그는 대선 유세 기간뿐만 아니라 당선 이후로도 이같은 모습을 유지했다.

 

이제 아프리카계 정치인들은 깨달아 가는 중이다. 자신들이 파우스트가 그랬던 것과 같은 거래를 (오바마와) 했다는 점 말이다. 그들은 흑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미합중국 최고위 선출직에 둘러쳐졌던 인종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가치를 획득했다. “작심하고 인종(관련 쟁점)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자 해온” 흑인 후보를 말이다. 오바마가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두 가지다. 부분적으로는 그게 바로 그의 진정한 모습이자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그런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점도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2012년 대선에서 자신이 재선되고 자신의 입법 의제를 통과시킬 민주당 의석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여겨서다.

 

이게 어디까지나 오바마의 문제이자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상의 문제라면,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은 사실, 세계 전반에 걸쳐 좀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쟁점 중의 한 사례일 뿐이다.

 

상징적인 약진은 세계 정치에서 주된 요소를 이룬다. 어느 나라에서든 대통령 같은 자리에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부류에 속한 누군가가 앉게 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당장,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에보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으로, 여성들이 여러 무슬림 국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뽑혔던 기쁨과 진보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라. 버락 오바마가 미합중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뽑힌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사건들이 지닌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상징적 승리는 실질적인 변화에 관한 번역을 거쳐야 하는데, 안 그럴 경우 이런저런 상징적 승리란 쓴맛으로 남게 마련이다. 상징적 승리를 거둔 지도자가 얼마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는, 부분적으로 그/녀 스스로 상정해둔 우선순위에 달려 있지만, 해당 국가가 안고 있는 특정한 제약들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에게 주어진 운신의 폭은 매우 좁다. 흑인 입장에서 그가 반응했던 몇몇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정치적 지지를 잃었다. 그의 유세기간 중 그의 정신적 지주로, 시카고 트리니티 교회 목사인 제레미아 라이트가 한 몇몇 “선동적인” 발언이 부상하면서였다. 이에 대해 오바마가 처음 보였던 반응은, 미국적인 삶에서 인종이란 화두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세련된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연설에서 그는 “백인인 내 할머니와의 연을 끊을 수 없는 만큼이나 [제레미아 라이트와의 연을] 끊을 순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고서 얼마 있지 않아 오바마는 후퇴해야 했고, 트리니티 교회에 발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지주와 정말로 절연했다.

 

이런 일은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헨리 루이스 하버드대학 교수가 말썽이 난 자기 집 현관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갔다가 체포됐을 때도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고 난 뒤 백인 경찰관한테 검문을 당했고, 상당 정도 댓거리가 오고간 후에 “질서문란 행위”로 체포됐다. 오바마의 첫 반응은 해당 경찰관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반발이 뒤따랐고, 그리고 나서 오바마는 우호적인 하나됨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루이스와 해당 경찰관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오바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명백하다. 그에게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흑인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처신을 할 만한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인즉슨, 정치적 관점이 동일한 백인 대통령이라면 거리낌 없이 했을지 모를 행동과 발언을 오바마는 제약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맥락에서, 아프리카계 대통령이라는 건 상징적 성취인 동시에 정치적 핸디캡임이 드러난 셈이다. 이 점을 오바마는 깨달았고, 흑인의원연맹에서는 알아차리고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오바마나 흑인의원연맹에서, 설사 무언가 있다고 한들, 그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할 수가 있겠냐는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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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3 03:24 2010/01/03 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