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50, Feb. 1, 2009

 

 

미국을 재건한다는 것: 오바마라는 모호한 대상

("Remaking America: The Ambiguities of Obama")

 

 

 

 

지난 1월 20일, 미국 사람들 대다수와 나머지 지역 사람들의 성원 속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연설에서 그는 “미국 재건에 다시 나설 것”임을 약속했다.

 

세계 언론매체들이 머릿제목과 분석에서 인용한 이 짧은 구절 속엔, 오바마의 약속에서 풍기는 온갖 모호함이 응축돼 있었다. “재건”이란 말은 아주 다른 사태를 뜻할 수 있다. 즉, 지금보다 더 좋았던 옛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 말이다. 미국 시민들에게 “더 나았던 우리의 역사를 선택”하라고 요청한 바, 오바마는 다른 구절에서 이런 가능성을 명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건”은 매우 다른 종류의 미국을 창출해낼, 이제껏 세계에 알려진 것보다 더 근본적인 그런 변화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모호함의 복판에는, 미국과 현존 세계체제를 떠받쳐온 구조와 여러 제도들에 대해 오바마가 고작해야 어설픈 땜빵질만 하고 말 것이냐, 아니면 근본적인 변환에 나설 것이냐 하는 물음이 놓여 있다.

 

누가 봐도 분명한 건, 완고한 공화계 우파들이 드러낸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 미국 대통령으로 뽑힌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서 상당수 오마바 지지자들의 기대와 그에 대해 타협의 여지가 없기로 치자면 공화계 우파를 능가하는 좌파 비평가들의 우려처럼, 제2의 로널드 레이건이 뽑힌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그럼 누가 뽑힌 걸까? 그 답은 아직 명확치 않은데, 오마바가 정치인으로서 지닌 스타일 때문이다.

 

따져봐야 할 질문은 두 가지다. 먼저, 오바마가 대통령으로서 실제로 이루고 싶은 게 뭐냐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조변동중인) 지정학적 현실에다 세계 공황까지 겹친 조건에서 그가 이룰 수 있을 만한 건 무엇이겠냐는 질문이 있다. 지난 1월 25일 바이든 부통령은 세계 공황에 대해 “아주 솔직히 말하면, 모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쁜 상황이며, 날이 갈수록 더 나빠지는 중”이라고 했다.

 

이 시점에서 오바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 비상하리만치 영리하고 출중한 학력에다 균형감과 사려깊음까지 갖춘, 아주 성공적인 정치인이다. 그렇더라도 그저 땜빵질만 하고 싶을 뿐인 쪽과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는 쪽 사이에서, 실제 그가 선 자리는 어디일까? 분명 이 양쪽 사이 그 어딘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무엇을 하고 또 이루게 될 것이냐 하는 건, 그 스스로 취할 여러 선택들이 설사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필시 그같은 선택들보다는 현존 세계체제가 부과하는 여러 제약들의 함수에 더 가까운 모양새를 띨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어느 쪽을 향하려는 참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영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포용에 바탕한 참여 기조, 지정학적 여건, 환경 관련 의제, 국내적으로 불거지는 사회 현안들, 세계 공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총평부터 내리자면 아주 혼란스럽다.

 

그가 가장 돋보이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포용에 바탕한 참여 영역에서다. 그의 당선은 그 자체 이를 구현하는 수단이다. 확실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통령으로 뽑힌 건 1945년 이후 (트루먼 대통령 재임기의 병력통합 조치를 시작으로, 대법원의 학교내 인종차별 금지 판결, 써굿 마셜의 대법원장 취임, 콜린 파월의 합참의장 취임,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의 연이은 국무부 장관 취임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꾸준히 보였던 어떤 추세가 가히 정점을 찍은 것이라 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2년 전까지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을 만큼 획기적 사건이다. 그의 당선이 의미심장한 건 그래서다.

 

오바마는 이처럼 시민권의 포괄 범위가 커지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주(노동자) 문제로 중요한 정치적 시험대에 올라야 할 상황에 있다. 그가 이 현안에 얼마나 공력을 들일지에 대해선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게 전혀 없다. 이 현안을 놓고서 그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지지한 이들 대부분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만만치 않지만 앞으로 더 나빠질 국내 실업 정도에 비추어, 그와 관련한 모든 조치를 일단 미룰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며, 갈수록 해법은 찾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더욱이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는 현존 세계가 공황 국면을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데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오바마가 맞이해야 할 지정학적 여건은 이보다 더 좋지 않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당장 해법을 찾긴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하다. 반드시 취해야 할 최소한의 조치로선 하마스를 협상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미첼이 중동담당 특사로 임명되면서, 실제 그리 될 여지는 아주 크긴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실효성 있는 정치적 해결을 이끌어내기엔 크게 부족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참호로 단단히 벽을 둘러친 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이 수용 가능한 건 무엇일지에 대한 생각마저 할 준비가 안 돼 있다.

 

이라크 사람들/정치세력들이 16개월 이내에 주이라크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오바마 스스로 한 약속을 이행케 만들 것이라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보기에, 이란(내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도 말로만 치고받는 것 말고 오바마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그는 취임 후 일주일만에, 통치 기반이 심각하게 허물어진 파키스탄에 대해 재앙으로 귀결될 행보를 내딛었다. 파키스탄 행정부는 허약하고 곧 붕괴할지도 모를 상황에 있다. 실제로 붕괴할 경우, 오바마에겐 이를 돌려막을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문제는 오바마가 미국이 현존 세계의 헤게몬이었던 시절에나 통할, 허세 만땅인 어법과 결별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세계를 향해 “미국이… 다시 한 번 리더십을 발휘할 참이라는 걸 알아두라”고 했다. 세계가 원하는 건 미국의 참여다. 정확히 말해, 세계는 미국의 리더십을 원치 않는다. 내 생각에, 오바마는 아직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경우를 보면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첫발을 잘못 내디뎠다. 차베스에 대해선 (차베스를 악마화하고 말 뿐인 세간의 인식에 편승하는) 대중추수적인 모습을 보였고 설상가상으로, 대쿠바 금수조치를 조건 없이 풀지 않는 한 라틴 아메리카는 오바마가 변화의 대변자라는 걸 믿지 않는다는 (브라질 대통령) 룰라의 도전어린 발언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

 

환경 문제와 관련해 오바마가 처음 내디딘 발걸음은, 그가 임명한 이들과 통수권자로서 내린 결정들, 여타 국가들을 상대로 미국도 과학자들이 불가결하다고 하는 여러 공동조치에 참여할 거라 스스로 천명한 점을 놓고 보건대, 긍정적이다. 하지만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신속하게 행동에 나설 것이냐다.

 

국내 현안들에 대해 보이는 정책적 행보는 이주노동자와 지정학적 대응 방향에서 그랬듯, 불확실한 채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는 클린턴 집권기에 이미 선보인 낙태 관련 정책 기조를 되살렸고, 이는 레이건과 부시부자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 노선과 확연히 다르다. 관타나모 형무소와 CIA에서 비밀리에 운영중인 감옥들에 대해선 폐쇄 결정을 내렸지만, 현재 수감돼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가장 길게는 1년 간 결정을 유보한 상태다. 미국 성원들을 상대로 정부 차원에서 광범하게 이뤄져온 사생활 침해 네트워크를 얼마 만큼이나 걷어낼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더구나 노동조합의 조직화 역량을 위축시키려 전임 행정부에서 노조에 부과했던 심각한 제약 조치들을 무효화겠노라고 조합원들과 한 약속을 어느 정도로 실행에 옮길지도 아직 분명치 않다.

 

마지막으로 세계 공황이 남았는데, 그로서는 행동 반경이 가장 협소한 영역이다. 확실히 그는 정부의 경제 개입 폭을 크게 넓힐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의 정치 지도자 치고 사실상 그렇게 하지 않을 이는 없다. 확실히, 노동자 계층이 겪을 경제적 고통을 덜고자 사민주의적인 해법이라고들 부를 법한 여러 조치를 취할 준비도 돼 있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의 정치 지도자 치고 사실상 그렇게 하지 않을 이는 없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같은 조치들이 얼마나 과감하게 이뤄지느냐는 것이다. 오바마는 자신이 이끌 행정부 요직에다 신중해 빠진 한꾸러미의 케인지안들을 앉혔다. 케인지안 중에서도 더 왼쪽에 포진한 인물들, 예컨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앨런 블라인더, 제임스 갈브레이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기용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중한 정책 수단은 안 먹힐 것이며, 그럴수록 소중한 시간만 날리는 셈일 거라 말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한 1년쯤 지나, 오바마는 좀더 과감한 조치에 나서기를 요구하는 이들을 기용코자 경제팀을 물갈이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본들 다소 늦은 셈이지 않을까 싶다.

 

오바마는 자신이 내놓은 경제 관련 입안들에 대해 의회 내 공화계 의원들도 발맞춰 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여기엔 일정 부분, 취임연설에서 밝혔던 바 “갈등과 반목을 넘어 하나의 목표 아래 통합”을 택하려 하는 그 자신의 열정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더더욱 나락으로 치닫는 데 따른 고역을 피하고 싶은 그로선, 일정 부분 현명한 정치적 선택이다. 하지만 이 점을 모를 리 없을 만큼 수가 빠른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오바마가 추진하려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에서 알맹이를 파내지 않고선 그에게 결코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는 매우 혼란스런 출발 탓에 표류 중인 상황이다. 오바마가 미국을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데 나설 각오가 돼 있다는 믿음은, 그가 똑똑하고 지적으로 개방적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좋게 봐준대도 근거가 취약하다. 미 합중국은 자국 처지에 적합한 문법을 찾아갈 것이다. 이러자면 재건은 과감해야 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원문보기 http://fbc.binghamton.edu/250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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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03:53 2009/03/22 03:53

 

<킬빌>과 <말죽거리 잔혹사>.

이 둘의 공통점, 뭘까요?

 

웬 쌩뚱맞은 질문이냐실 분은, 아마도 없으리라 믿습니다만.

(굳이 답해야 하냐고 할 경우도 있을라나요?^^ 어쨌거나..)

 

 

 <킬빌>에서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보인 점프슈트를 입은 우마 서먼. 길다~.(왼쪽) <말죽

거리 잔혹사>에와신상담 끝에 '이소룡'의 쌍절곤으로 학교끄나풀인 선도부장(이종혁)을 묵

사발로 들었던 현수(권상우). 지금봐도 그렇지만, 그의 몸은 정말이지 착실했더랬다.

 

  

 

 

나ㅓ힝로허;ㅣ와ㅓ

니ㅏ허ㅣ오ㅓㅣ;ㅇㄹ허;ㅣㄴㄹ

그렇죠. 저 둘을 잇는 고리는 바로, 이소룡입니다.

ㅇ라ㅓㅎ

 

둘 중에선 <말죽거리>를 훨씬 더 재밌어했더랬죠. 못 해도 세 번은 넘게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킬빌>은 뭐랄까, (구미권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신기하면서도 강렬했던,

요절한 아시아 배우의 이미지를 그저 차용하고 만 느낌이랄까요.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벌이는 고투의 과정을,

<킬빌>도 <말죽거리>와 마찬가지로 보여주긴 하죠.

다만 적어도 저는 그 과정이 어떤 절박함으로 다가오기보단,

예컨대 이명세의 영화 마냥 ‘스타일’에 크게 기운 느낌이더라구요.

 

 

기본플롯이 어떻네 저떻네 해도, <킬빌>은 결국 탐미주의 계열의 영화라는 생각.

 

 

이ㅏㅓ힝ㄹ렇

나ㅣ어ㅣㄴ러히

사실 주변에서 <말죽거리>에 대해서는 폭력적이라느니,

마초스럽다느니 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곧잘 봤어요.

아닌 게 아니라 폭력이 선연한 영화인 건 맞는데,

그렇게 '평가'하는 게 과연 맞는지에 대해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더라구요.


전 외려 <말죽거리>가 구조적·조직적인 일체의 폭력에 대항하는 반反폭력의 기술,

즉 ‘무(예)’에 대한 갈증이 누구한테나 있기 마련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싶었거든요.

폭력을 숭배하긴커녕 그런 숭배가 우리를 어떻게 피폐하게 하는지,

그리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를 물었던 게 아녔냐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그 영화의 주인공인 현수(권상우)가

이소룡을 본보기로 착한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이런저런 핑계로 방치했고 그래서 왜소해진 ‘이 나’와 정직하게 대면하련 과정이었잖나 해요.

어느 평론가의 재미난 우회적 표현마따나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라고 한 현수의

일갈은, 그 과정이 학교라는 폭력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였음을 보여주고요.

제가 몇 번이나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비록 간접적인 것일지언정

이런 과정이 안겨주는 짜릿함이랄까, 후련함 때문이었잖나 싶슴다.

 

 

현수(권상우)가 정작 욕망했던 건, 선도부장(이종혁)이 누렸던, 제도화된 폭력이나 마찬가

지였던 학권력아니라 그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 아니었을까? 이 영

화의 명백한 '폭력성'을 이 영화가 던지려던 메시지와 혼동해선 곤란한 이유다.

 

 

헌데, 이번에 나온 책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를 보면

권상우가 이소룡을 본보기로 삼은 건 무척이나 잘한 일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실제로 이소룡이 추구했던 무예(절권도)란,

저런 반폭력의 기예를 얼마만큼 체화하느냐를 중시했다고 하거든요.

싸움의 기술로서 절권도라는 건, 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데 필요한 기술였다는 거죠.


하지만 이소룡에게 ‘반폭력’이라는 건 싸움을 넘어서라는 뜻이지,

피해가라는 뜻이 아녔다고도 해요.

그에게 투혼이란 자신의 존엄함을 지켜줄 강한 열망, 혹은 그 열망이 만드는 ‘힘’인  셈입니다.

“도로써 길을 찾고 조화에 이르는 일”이 “투혼을 체화하는 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건 그 힘이 결국 ‘이 나’를 (되)찾는 관건이라 그런 걸 테구요.


그래설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에게는 지금 이런 힘이 있는지, 이런 힘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그럼 혼자선 가능한 건지, 지금 우리는 어쩌면 ‘적응했다’느니 ‘철들었다’느니 하면서

정작 이런 힘을 발휘하는 덴 완전 젬병이 돼버린 건 아닌지 하고요. ^^;


물론 그렇다고 이소룡이 이 투혼을 체화하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건 아닙니다.

그 또한 한 사람으로서그 과정에서 좌절하고 번민하고, 외로워했더라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럼에도 스스로 깨어 있고자 애썼던 걸 보고 있노라면 지금 내가 그 힘을 못 쓰는 게,

못 써서 안 쓰게 된 건지 아니면 안 써서 못 쓰게 된 건지만큼은

스스로 곰곰히 곱씹어보게 되지 싶더라구요.

그렇게 애쓰는 시늉이라도 언제 함 해 봤나, 하구요.ㅋ;

 

정말로 그리 곱씹어보게 될는지 아닐는지야,

제가 미주알고주알 할것없이 실제로 읽어보심 되겠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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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3:17 2008/11/11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