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한겨레> 논설위원의 글.

김강기명님의 글과 섞어 읽으면 일종의 상승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잖을까 싶다.

 

촛불집회의 역동성을 둘러싸고 보이는 자족적 낭만화를 경계하는 글이랄 수 있겠는데,

역시나 신 위원 스스로 언급했듯이 포인트는

작금의 역동성에는 그 진보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정부'를 욕망하는,

이른바 (엔엘스런 민족주의와는 대별되는) '대한민국주의'로 수렴할 계기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거다.

 

달리 말해, 미친소 유통 문제로 생성된 작금의 흐름이 지닌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난 세기 초중반, 그니까 일본령 조선기 때 형성된 근대국가(!)를 원형으로,

1945년 이후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단속적 변주를 이뤄온

저 대한민국 국가/정부에 대한 "전면 포맷"의 열망이 발현됐다는 한에서만

진보적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런 대한민국의 유구한 연륜과 내력에 기대

참 조야하게 삐대온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에게야,

그 요구만으로도 (특히나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몹시 성가시고 언짢으며, 어떤 본능적 공포를 유발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이런 열망이 그 자체로는 더 나은 상황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데 있다.

전면 포맷에 대한 열망은 공화주의적 요구를 고리로 한다 해도

"제대로된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창출이라는 고루한 전망에 갇힐 수 있다는 얘기다.

포맷의 잠재력이 결국엔 리셋 수준으로 오그라들고 마는 거랄까?

 

따지고 보면 30년 가까이 굴러먹어온 소위 "세계화 체제"의 동요가,

자본운동의 자유방임이 부른 지랄 같은 패악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적 통치술에 대한 신뢰 내지 지구문화적인 합의가

사실상 넝마 수준으로 너덜해졌음을 시사하는 징후라는 데 유념한다면

 

"대한민국주의"로 촛불의 열망이 오그라드는 상황은,

외려 그 열망의 "순수성"으로 인해 자기부정적, 자기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형태의 "역사적 업"을 고려한다면

사실 큰 정도가 아니라, 필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다.

이쯤 되면 순수가 아니라 순진에 가까운 게 되겠지만.

 

이러하니,

현재의 역동적 흐름이 얼마든지 반동적인 방향으로 귀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염두에 두자는 얘기로 읽힌다. 내가 보기에, 신위원의 논지인즉슨.

 

다른 한편으론,

소위 "좌파"를 자처해왔던 이들이 지적, 이론적 무기로 활용해온

"국가/정부론"을 "진정 좌파적인"ㅋ; 시각에서 전면 갱신해야잖겠냔 얘기로도 읽히고..

 

아닌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국가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합의는

사실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늘상 불거져 나오기 마련인

정치적 필요조건이자 세속화된 종교처럼 일상화돼 있는데도,

이런 "생동하는 조건"으로서 근대국가-정부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지 싶다.

 

풀란차스니 그람시, 알튀세르 얘기 좀 나오다,

누다 만 똥처럼 "진전된 논의"가 개운찮게 중단된 느낌이랄까?

 

 

***

 

 

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대중은 진보적인가?

 

신기섭(언론인) / 2008년06월18일 11시17분

 

 

 

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 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 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 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 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 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 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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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23:32 2008/06/21 23:32

사족 달 거 없이, 한마디로 훌륭한 글.

두고두고 곱씹고, 풍부화해야 할 내용들이 그득하다.

 

근데 지금 나한텐, 결정적으로 체력이 부족하다는 거.

 

죈장..ㅠㅠ;

 

 

 

***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김강기명 osr1998@hanmail.net / 2008년06월20일 9시44분

 

 

 

사건

 

5월 2일, 여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우병 쇠고기 반대시위가 시작된 이후로 이전에 지식인들이 쏟아냈던 수많은 미래에 대한 전망(그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전망이 '해석'이 되어버린 이 난감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 할아버지 음성을 꿈결에 들었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빨리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일이다. 전망하고 해석하는 신체에서, 변혁하는 신체로. 그러나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 한 달여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는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주체"론에서부터 네그리의 다중론까지, 혹은 웹 2.0이라는 틀로 분석한 세대론적 고찰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는 전망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언정 변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변혁은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 위에서 다시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 이 사건에 참여하는 너, 나, 우리 모두가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사건이 존재에 우선한다.

 

물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사건이란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쫓아다니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갑자기 모일 때(5/2), 공연이나 보고 자유발언이나 듣는 "촛불문화제"가 몇 주씩 이어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로 쏟아져 나갔을 때(5/24), 시민들을 보호하는(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던) 경찰이 시민들을 공격할 때(5/25), 물대포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 물대포가 쏟아질 때(5/31), 닭장차에 끌려가야 할 시민들이 스스로 닭장차에 오를 때, 며칠 째 시위대를 가로막은 차벽과 컨테이너 앞에서 장시간의 논쟁을 거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 권력을 조롱할 때(6/10)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벌어질 때마다 국면은 전환되었고, 권력자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시위대의 힘은 커져 갔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6월 10일을 전후하여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촛불은 잦아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분출된 힘을 담아낼 정치적/정책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최장집 같은 이는 속히 정당정치를 복원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한홍구의 말을 따라 "국회에 맡기느니 차라리 천일기도를 하겠다." 사건들은 좀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건들을 창조할 상상력과, 그것을 실천할 강철의 체력이다. 이미 대중은 청와대로의 행진이 막힌 곳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고 전선을 넓히고 있다.

 

 

전위

 

전위란 이런 상상력과 체력의 주체다. 즉 전위는 대중을 결집하여 이끄는 주권적 명령형식이 아니라 대중의 흐름이 몰화되지 않도록 분열을 조장하는 자, 대중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 '여러 방향'을 제시하는 자, 곧 '소수적 흐름'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놀랍게도 이번 시위에서 대중들은 어떤 이들이 전위인지를, 그리고 어떤 이들이 전위가 아닌지를 명확하게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무엇보다 "다함께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24일에 시위대가 청계광장을 벗어나 행진을 벌이기 시작하자 26일, 소위 "운동권"들 중에서 <다함께>가 가장 먼저 개입을 시도했다. <다함께>는 대책위가 사실상 방임하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며 스스로도 행진의 맨 앞에서 구호를 선창하며 진로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의 개입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전체 시위대 일각에선 심지어 이들에 대한 각종 비토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다함께>는 조직된 대오가 앞에서 이끌어야 행진이 질서 있고, 위력이 있을 것이며, 연행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다함께(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된 대오)가 없었던 24일과 25일의 집회 역시 질서 있었으며, 위력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연행'은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다함께>가 행진을 이끌다가 경찰과의 충돌이 우려되는 지점에서 자신들만의 결의로 해산하는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프락치론"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이 지점이 현재 시위대의 연대를 부분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프락치론의 시발점이었다. <다함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이들의 좌파적 성향을 문제 삼고 색깔론 마녀사냥을 벌인 것에 격노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부수적인 일면에 불과하다.(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다함께> 비토 사태의 본질은 이들의 지도에 대한 대중의 거부에 있다. 다만 그 방법이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대중의 <다함께> 경험은 기타의 다른 모든 운동조직의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자유발언대가 열리기만 하면 대책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이들이 운영하는 방송차가 대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이 가장 컸다. 이번 시위에 나타난 대중들의 표현욕구와 그 능력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기존의 조직된 운동권이 가진 조직론과 시위에 관한 관성은 끊임없이 대중과의 불화를 겪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중은 소위 "운동권"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시위가 교착상태에 다다르자 "대학생들은 뭐하는가?", "노동자들은 총파업이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요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지도"를 원한다기보다는 전술한 의미에서의 "전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사건을 만들어줄 전위에 관한 한 대중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에 보내는 "성원"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촛불집회가 이어질수록 운동권과 일반 시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조끼를 벗고 일러스트가 그려진 귀여운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아고라를 중심을 모인 네티즌들이 마치 '운동권'처럼 조직을 구성하고 커다란 깃발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그러면 또 "아고라가 권력화 되었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권위가 사라진 지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운동권과 그 바깥에 있던 시민들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연대는 결코 부드럽고 평화롭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예비군 논쟁이나 비폭력 논쟁 등의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체의 변환을 요구하는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도 변하고, 지식인-운동권도 변한다.

 

즉, 지금의 촛불집회 국면에서는 그 어떤 정치조직도 대중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가 없다. 대책위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몇몇 정치조직들의 헤게모니 싸움은 대책위 바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위'(아방가르드)다. 전선은 더 넓어지고, 이슈는 더 다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중이 요구하는 '전위'는 바로 그 사건의 주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운동조직들의, 혹은 대중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정치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1조"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것처럼 이번 시위가 "공화주의의 회복" 혹은 "발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할 어떤 "정치적인 것"(공화주의적이고 대의적인)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까?

 

대중의 공화주의적 요구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의도하거나 결정한 바 없이 진행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한 공포와 훼손당한 자존심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정부나 축산자본이 반복적으로 "촛불집회는 한국의 국내문제"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지속적으로 쇠퇴해 왔다. 이명박의 당선은 정치가 보수화되고 있는 증거라기보다는 정치의 행정화, 혹은 행정권력이 정치권력에 대해 거둔 최종적 승리의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는 세계 경제체제, 세계 주권체제에 포섭되어 있으며 따라서 밖으로는 한 없이 약하고, 안으로는 한 없이 강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대중의 삶에 부과된다.

 

따라서 대중의 저항은 그것이 일국적 요구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또한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 역시 국가주의라기보다는 대안적인 삶의 조직화에 대한 갈망에 더 가깝다. 내 삶을 내가 직접, 그리고 내 이웃과 더불어 직접 꾸려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위 현장이 이미 수십만 명이 모여도 생수와 김밥이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뮨"이 되어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이 꺼질 것을 염려하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환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의 장소가 정치적인 것 바깥의 삶 그 자체라면,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정치는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며칠 전에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인권침해를 고발하며 전교생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사건이나 시위대가 한강을 넘어 공영방송 수호를 외치며 여의도로 행진한 사건은 촛불이 진화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의 모든 요구가 촛불이 되어야 할 시점이다. 착취가 일어나는 모든 장소에서, 억압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촛불이 켜지는 것이 먼저이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쉽사리 개헌이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변화를 통해 대중의 분출을 봉합/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지속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의 연대를 이뤄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좀 더 우리의 활력을 이어갈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또 운동단위들을 만들고 키워가는 일이다. 제헌의회든, 국민정당의 건설이든, 이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분출한 대중의 에너지의 총체가 아니라 잉여로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항상, "제헌된 권력"보다 "제헌하는 역능"이 우선한다.

 

촛불은 미래였던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특히 지식인들이 할 일은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감히 68년과 87년을 망각하는 것이다. 더 많은 상상력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사실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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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22:25 2008/06/21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