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 닫은) 양승룡 당시 학과장 개인홈피에

학과존치 결정 소식이 올라왔길래, 그에 관해 올렸던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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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통(폐)합 논의가 일단 '농업경제학 전공의 기존 단과대 내 존치'로 일단락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같은 결정을 본 분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일단락됐는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네요. 게다가 적어도 저로선 워낙이 지금 상황에서 학과 존치 자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보는 입장였던 터라, 딱히 좋다 나쁘다 할 상황이 아니라 여겨지거든요?

더구나 양 교수님께서 올린 학과존치 이유인즉, "생과대 내의 학제간 연구와 연계교육 필요성"이란 점도 일단락의 '속내'가 과연 뭔지 더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목이고요.

"서로 간의 관용과 화합을 통해 식자경의 새로운 도약이라는 일치된 목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정진"한다셨지만 누가, 어떻게, 어떤 비전을 갖고, 이런 정진의 여건과 기초를 다질 것인지 역시 모호하기만 합니다. 그간 벌어진 갈등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게 그렇게 녹록치 않을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지금의 학과존치 결정, 향후 비슷한 갈등을 되풀이할 수밖엔 없을 잠정적이고 모호한 봉합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한미fta 정세와 관련해 흥미로웠던 건, 한두봉 교수님 이름이 엡티에이 반대 서명자 명단에 올라있었단 점임다. 학부시절 이 분 강의 때 주제발표 했다가, "이념써클"스런 주장한다며 중도에 발표를 제지당했던 적이 있었는데요.ㅋㅋ

전 그때나 지금이나 기본 시각상 별 달라진 게 없이 엡티에이 반대 입장에 있는 쪽입니다만, 한 교수님 이름도 반대 교수 명단에 올라간 걸 보니 좀 묘하더군요. 이념써클스런 견해에 대한 태도가 그새 바뀌신 건지.. 아님 항간의 비판마냥 지금 한미엡티에이와 관련한 정부의 폭주가 지적으로 좌-우할 거 없이 광범한 불만과 이의를 초래하고 있기는 있는갑다 싶기도 하고 말이죠. 뭐, 걍 갑자기 생각이 나서리..;;)



암튼 각설하고.. 해서, 이번 학과존치 결정과 관련하여, 그것이 고식지계용 봉합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들은 뭔지 얘기해볼까 합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 제출되는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겠죠. 뭐또, 그렇다고 이게 '어디까지나 제 생각' 뿐인 것만도 아닐 테지만요.

먼저, (생과대 내의) 타전공간 연계와 학제연구에 대한 기대가 생과내 '내'에서 유달리 높다고 볼 여지나 근거는 대체 뭐냐는 점입니다. 이건 당장, 농업경제학이 연계하거나 분과간 가로지르기를 시도해야 할 전공은 그럼 뭐냔 물음과도 직결되거니와,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특정 단과대 소속이라야 하는 근거가 명확해야 하는 일이겠지요.

제 생각엔 크게 먹거리와 이의 생산조건을 포괄적으로 다뤄야 할 농업경제학에 있어 연계하지 않아야 할 분야는 사실상 없다고 봐요. 생과대 내의 타전공 분야서들 다룰 '기술/환경 요소'들(주류 경제공학적 시각에 벗어날 경우, 농업이윤 축적의 생태적 지속성 여부도 포함될)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저로선 그런 전공간 연계효과를 기대하기로 치자면, 가령 먹거리-식량-농업관련 담론들이 미디어나 일상에서 어떤 가치를 부여받으며 전공의 위상은 물론 실물 분야의 위기/피폐화를 방조 내지 조장하는지에 대한 학제연구도 그 어떤 학제연구보다 절박하고 중차대한 일이 아니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요즘 경영-경제학 분야 같은 데선 '웹2.0'이라는 소프트웨어의 기술적 획기성에 주목하는 가운데, 그런 측면이 거대기업들의 돈벌이에 얼마나 보탬이 될 거냘 놓고 그야말로 아주 난리들인 모양입니다.

고작 거대기업들의 돈벌이에 터보엔진를 달아줄 수단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이런 기술적 개가가 비영리적 기술체계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 삶의 질 개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를 '사회과학적으로' 탐색하는 작업은 아주 가치있는 일이리라는 데는, 저 역시 전혀 이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때, 경영학과가 이를테면 전자/전기/전파/컴퓨터공학 전공 등이 있는 공대나, 정보통신대에 '물리적으로 가까워야' 후자 분야의 신경향에 대한 지적 접근이 더 잘 될 것인가?

글쎄요, 이렇게 하지들도 않겠지만 경영대학과 공과/정보통신대학 간의 지리적 거리가 멀다 해서 두 분야간 학제연구와 전공연계 효과가 딱히 신통찮을 이윤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건 분야간 연계의 핵심고리란 것이, 전공소속이나 학제의 지리적 근접성과는 상관도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그걸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는 겁니다. 지금 같은 논리로는 아주 딱이라고 봐요, 이런 소리 듣기에.


때문에 결국 짚어보고 싶은 건 이런 겁니다. 생과내 내 존치를 통해서 기대할 수 있는 전공연계, 혹은 학제연구 효과란 어떤 것이냐는 거죠.

나아가 그렇게 해서 이뤄지는 전공연계/학제연구 효과라는 게, 이를테면 언론(사회)학 분야서 그나마 이뤄지는 걸로 아는 (농업-식량) 담론분석 연구라든가, 1세계 지역 국가들의 농업(보호)정책 하고 한국 등 제3세계 지역 국가들의 농업(안락사)정책이 구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정책결정 매커니즘에 대한 연구 등등과 결합하는 것만큼 그렇게 절박하고 중요한지도 저로선 쉬이 납득이 되질 않는군요.

물론 양 교수님께서 윌슨이 개념화한 '통섭' 얘기하시믄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거짓 경계가 허물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데 대해선 저 역시 아무런 이의가 없어요. 외려, 자연현상과 연계된 사회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허구적 대립은 시급히 끝장이 나야한다 보죠.

다만 제가 궁금한 건 이겁니다. 그런 통섭이 자연과학 분야와의 학제적 소통을 통해 극복돼야 하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일이 사회과학 분야 간의 통섭 아니냔 거죠. 그리고 이게 생과대 내 타전공간 가로지르기보단 현실적으로 훨씬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는 거고요.

요컨대 인문-자연 분야할 것 없이 지적 깊이의 고양을 위한 전방위적 가로지르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거야 지당하지만, 중요한 건 그 가로지르가 실질적으로 효과를 볼 만한 지점이 어디냔 점일 겁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정복조 교수님 같은 분들, 농대 내 타전공과의 연계강화 필요하고도 중요하단 얘기하시는 거 곧잘 들었지만, 아시다시피 그 후 10여 년이 넘도록 그와 관련해 실질적으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죠. 앞으론 그리 될 거다? 글쎄요, 이게 다짐의 강도로만 풀릴 일이면야 그런갑다 할텐데, 앞서 말씀드린 전차로 실로 난망한 일이란 생각밖엔 들질 않는군요.

그럴 바엔 차라리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타 전공과의 연계와 가로지르기를 시도하는 게 가시적 성과로나, 그 성과가 갖는 사회적 파급력으로나 훨 높은 영양가가 있잖겠나 싶은데요.(더구나 윌슨의 통섭 개념이란 말이 좋아 통합학문 지향이지, 당사자는 아니라 해도 결국엔 생물하적 결정론을 사회현실에 대한 방법론으로 확대적용하려는 것에 불과하단 만만찮은 반론도 있고요. 윈델 베리가 쓴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가 그런 책입니다.)

뭐, 여러가지로 상황이 급박해 이런 모호한 진술로 일단락음을 알렸다고 볼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학과존치는 결코 문제의 해결은커녕 사태의 봉합 내지 갈등의 잠재화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단 생각이 든지라 이렇게 결정된 상황에 대해 얘길 봤습니다. 정리하면, 대충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네요.

_생과대 내 존치의 근거로 거론한 학제연구/타전공간연계 필요성이라는 건, 외려 타 단과대 내의 특정 전공들(이를테면 정경대 내의 정치-언론-행정학 내지 문과대 내 사회학)을 대상으로 할 때 실질적 성과 면에서나 사회적 파급력 면에서나 현실성이 더 높아보인다는 점.

_더구나 생과대 내의 이학분야와의 가로지르기를 이유로 드는 건 (많은 인식론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회계열-이학계열간 '현실적 거리'를 감안할 때 그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대목. 결국 어느 쪽과의 연계/가로지르기가 더 손쉽고 효과적일 것인지, 그리고 이 점을 향후 커리큘럼 개정 및 전공교원 임용시(나아가 학과 틀의 근본적 혁신을 위한 비전에) 어떻게 감안-반영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

_무엇보다 학제연구/전공간연계의 실효성을 오직 '지리적 근접성' 여부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 또한 현 학과존치 결정이 안고 있는 최대 맹점. 예컨대 정경대 내 경제학부의 농업경제학 전공으로 소속이 바뀐다 해서, 생과대 내의 타전공의 성과와 도모할 시너지효과가 더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음. 중요한 건, 분과허물기가 적절한 문제의식의 깊이를 통해 얼마나 짜임새 있게 성과를 이룰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

_정경대로의 전속으로 전공 자체의 붕괴를 우려하지만, 이는 단과대 소속 여하보다는 앞서 예로 든 바, 향후 농업경제학(궁극적으론 먹거리 문제) 연구의 방법과 형식을 이끌 혁신적 비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취약한 데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봄.

_예컨대, 생산(경제학) 분야를 연구할 경우 '고작해야' 생산함수를 방법적 툴로 하여 작물생산효율의 최적조건 따위에만 초점을 맞추던 기존 접근에서 벗어날 필요. 즉, 이같은 생산이 이뤄지는 공간 내지 지역의 '삶과 문화'(나아가 이들을 규정짓는 사회적 조건과 그 변동의 요인들)에 대한 포괄적 접근으로 연구의 매력을 높이고, 수강자들이 관심을 가질 접촉면을 넓힐 필요.



시간도 늦고, 얘기도 넘 길어지는 듯하야,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전공의 형식과 내용을 어케 바꿀 것이냐는 점 못지 않게, 아니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이 전공에 지적/실무적 관심을 갖고 발을 들일 친구들을 어케 뽑느냔 점이란 봅니다만.. 이에 대해선 조만간 다시 얘기해보도록 하죠.

그리고 얘기 난 김에 덧붙이고 싶은 게, 예전에 박미희란 친군가요? 농업경제학과 존치근거를 나름 얘기하면서, 미국 쪽선 지금 농업경제학이 일종의 '학문적 우량주'로 평가받고 있단 얘길 했었죠 왜?

음.. 제가 보기에 이런 식의 진술은 지금 미국 쪽과 한국 쪽의 농업 및 식량을 둘러싼 현실이 소위 '지식생산'의 거점이라는 대학에서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는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거라 보는지라서요. 미국의 (주류)농업경제학계가 지금 유달리 탄력을 받고 있는 이윤, 사실 간단하거든요. 초국적 농업자본법인들의 빵빵한 후원 아래, 제3세계 및 한국 같은 곳의 농업기반을 파탄낼 이들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줄 지식의 주요 생산거점이 바로 그 곳이니까요.

이런 (지정학적, 문화적) 맥락의 차이를 놓치고서, 미국 농업경제학계는 저리 잘 나가는데 우리 쪽이 이래서야 되냔 식의 얘기는 자칫 그 선의와는 별개로 아주 위험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단 생각입니다. 암튼 뭐, 학생선발방식과 관련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따로 얘길 했으면 좋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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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20:59 2008/03/22 20:59

 

 

2005년 벽두,

식품자원경제학과(군대 간 사이, "농업경제학과"란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학생들한테 따로 묻지도 않고 교수(들) 멋대로 고쳐논 이름이 고작 이거였다ㅋ;)가

경제학과로 통폐합될 거란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졸속성과 '철학의 빈곤'을 문제 삼고자 작성했던 성명서 초안.

 

합치는 것 자체야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다 쳐도,

문제는 "왜, 어떻게"라는 게 결국 "쪽수",

그니까 학진 등 연구지원금을 '수주'하기에 수월하다는 덩치 불리기였어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 논리가 주요동력원이었던 셈이다.

 

그럼 "존치"가 해결책이었느냐? 당근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용적으로 도대체 존치의의가 있느냔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던 상황였으니까.

 

이른바 "식민지적 무의식"이 교수를 위시하야 학생들의 신체,

그러니까 농업경제학과란 제도화된 공간의 일상을 잠식한 진 이미 오래였던 거다.

그것도 아주 흥건하게.

 

농업-농촌-먹거리를 둘러싼 문제들은 갈수록 꼬이고 절박해진 지 오래건만,

이런 상황을 지적으로 다룬다는 "농업경제학과"라는 데는

그런 현실과 계속 헛돌며 외려 '문제의 일부'가 돼 있었달까.

 

 

암튼 연서명을 받던 중,

'급조된' 학과 교우회라는 데서 어찌 대응할지를 놓고 나서면서

그냥 초안으로 남게 됐지만 ;;

 

여기서 다룬 내용은 확실히,

농업경제학뿐만이 아니라 대학 내의 "주변부" 학문 일반이 처한 현실을

관류하는 내용이지 싶다.

 

 

***

 

 

이른바 ‘식품자원경제학과 통폐합(안)’을 둘러싼 현 상황에 부쳐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 전공 졸업생 및 재학생들의 입장

 

 

 

 

 

I

 

세계적인 명문대 인프라 구축이라는 기치 아래 줄기차게 진행돼온 고려대학교의 ‘글로벌 프라이드 프로젝트’(이하 프로젝트)가 모교 안팎으로 크고 작은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화라 불리는 전지구적 추세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워낙이 달라진 시대와 현실상황에 걸맞은 ‘거듭남’의 중요성이야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명문사학’이라는 타성에 안주, 물적 기반은 물론 지적 면모마저 침체에 빠진 듯 보였던 지난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현재 모교서 추진중인 거듭남의 시도 자체는 일단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거교적 차원서 이뤄지는 거듭남의 ‘내실’을 곧바로 보장하진 않는다. 프로젝트의 매혹적 광휘(光輝)는 외려, 학내외 성원들로 하여금 정작 그 거듭남의 심각한 부실에 눈 멀게 하는 퇴행의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II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현 프로젝트를 주목할 만한 지적 퇴행의 징후로 읽을 수밖에 없는 정황 앞에 서 있다. 이른바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 전공 통폐합’(이하 통폐합)(안)을 놓고 전공교수들과 학교당국 간에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진 줄다리기가 바로 그것. 그 복판엔 생환대 존속(안)을 지지하는 전공교수들과, 정경대 통합(안)을 종용하는 학교당국 간의 대치선이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전공교수진 간, 전공교수진과 학생들 간, 그리고 학생들 간의 대치선들이 중첩되면서, 통폐합(안)의 향배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한층 복잡한 양상마저 띠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물론, 대치선이 형성됐다는 사실 자체일 수 없다. 달라진 현실상황에 조응하는 학과/전공의 적절한 운용형식에 대한 학내외 구성원간 이견차는 불가피하고, 또 자연스런 것이다. 통폐합을 놓고 발생하는 성원간의 입장차를 생산적으로 조율해 낼 ‘문제설정’ 및 민주적 소통의 역량이 정작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세계화 시대, 학과/전공의 적절한 운용형식과 방법에 관한 깊이 있는 지적 성찰 및 소통합리성의 흔적을 현 통폐합(안) 담론에서 찾아내기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보다도 더 생뚱맞아 보인다. 우리가 보기에, 이같은 생뚱맞음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차원이 뒤얽혀 있다.

 

첫째, 프로젝트의 대의 아래 특정 전공/학과의 존폐 여부를 고작 모교의 ‘브랜드 밸류’ 제고 차원에서 다뤄질 사안으로 환원할 뿐인 학교당국의 행정편의주의.

 

둘째, 학교당국의 압박에 대해 당위적 원론의 재확인 및 수세적인 지키기만이 능사인 줄 아는 전공교수들의 분과적 타성 및 지적 매너리즘/귀챠니즘.

 

셋째, 주류/비주류를 가르는 위계서열적 전공체제의 폐해에 대한 성찰은커녕, 이같은 구도를 외려 부추길 뿐인 관련전공 학부생들의 몰지성적 이전투구 경향.

 

 

III

 

프로젝트의 취지, 구미중심적 주류질서를 내면화할 ‘유창한 앵무새’의 양성이 고작은 아닐 것이다. 이 곳의 현실을 전지구적 추세와 접맥시켜 담론화하는 지적 풍토와 제도적 기반조성이야말로, 모교를 세계적인 ‘비판지성’의 메카로 거듭나게 하는 충분조건임은 자명하다. 이는, 비판이 우리가 살고, 또 알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얼개와 지속조건을 오롯이 드러내는 일이란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통폐합(안)이 이같은 충분조건의 구현을 염두에 둔 것인지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다.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거라곤, 학교당국에게 농업/식량문제 따위 이제, 고려대학교란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낫 ‘촌스러운’ 애물단지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당국의 역량은 그저 새끈한 브랜드이미지 구축을 위한 행정적 효율합리성으로 충만할 뿐, 통폐합의 지성적 근거는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다. 이런 판에, 모교가 ‘비판지성’의 전당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지. 당국은 이런 의문을 터무니없는 침소봉대라 일축할 수 있는가?

 

전공교수들의 분과적 타성 및 지적 귀챠니즘을 거론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농업/식량문제를 어떻게 현대세계의 이해에 유용한 인문-사회과학적 텍스트로 담론화할지에 대한 성찰은, 일차적으로 전공교수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농업/식량문제는 이른바 ‘시장경쟁력 강화’ 담론 따위로 환원불가능한, 발상의 전환 및 지적 혁신 없인 제대로 풀리기 힘든 조건에 있다. 농업-농촌-식량문제 해결에 전통적 경제학 담론이 복음일지 재앙일지, 그도 아니면 불가피한 이론적 우회로일지, 나아가 ‘탈농화(deruralization)’가 전지구적 추세가 된 지금, 식량/농업문제를 우리 ‘삶의 문제’로 전환할 분석적 논리와 방법은 무엇일지 등은, 우리가 보기에 이른바 ‘전공’교수라면 결코 에둘러가선 안될 절박한 지적 요청이다.

 

무엇보다, 이 요청은 분과 및 세부전공이라는 격자 안에 머물러선 결코 풀리지 않는 물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를 포괄적으로 다룰 전공 커리큘럼의 혁신은 물론, 전공교수들 스스로의 ‘내적 쇄신’은 그동안 얼마나 이뤄져왔던가? 이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당국에서 종용중인 것으로 알려진 통폐합(안)의 ‘생산적 극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보기에, 현재 전공교수들이 내세우는 존치(안), 그저 분과적 타성에 의존해 이뤄지는 당위적인 동어반복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학부생들의 몰지성적 이전투구 경향은 사실, 앞서 지적한 차원들에 종속된 문제다. 더욱이 그것은 식민지-제국 관계에 빗대도 무방할, 오랜 위계적 분과체제하에서 배태된 ‘문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그같은 경향 자체를 오롯이 학생들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씁쓸한 건, 경제학/농업경제학 전공 여하를 떠나 농업/식량문제라는 토픽이 고려대학교 담론장에서 ‘구조조정’ 내지 ‘아웃소싱’될 참이라는 상황 자체가 광범한 지적․사회과학적 쟁점으로 다뤄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려대학교가 한국 사회과학의 동량(棟樑)이 되는 데 정작 중요한 건 해외의 저명권위지에서 승인받았다고 하는, ‘사회과학 분야 세계 66위’ 같은 정량적 수치보다도, 이같은 의제로 날선 통찰의 열매를 일궈낼 내부성원들의 집합적 지성 아닐까?

 

 

IV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농업경제학(또는 식품자원경제학) 전공/학과 통폐합(안)이 이상의 퇴행적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데 대해 깊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요청하는 바이다.

 

하나. 학교당국은 이번 통폐합(안)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단순한 행정편제 조정/통합 차원의 사안이 아니라 고려대학교의 지적 정향을 중장기적으로 가름할 사안임을 유념, 농업/식량문제를 새로이 담론화할 제반 연구여건의 조성․지원에 주의를 기울일 것.

 

하나. 전공/학과 교수들의 경우, 이같은 여건조성 및 지원의 충분조건이라 할 전공 커리큘럼의 총체적 혁신(안) 및 관련연구 프로젝트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농업/식량담론의 지적 쇄신에 필요한 내-외적 역량 결집과 성원간 소통에 주력함으로써 학과/전공 존치라는 수세적(negative) 대응에서 탈피, 좀더 공세적인(positive) 협상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

 

하나. 학부생들의 경우 이번 통폐합(안)이 특정 학과/전공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식량-농업-농촌 등 문화적-정치적 소수자관련 토픽들이 고려대학교와 같은 지적 담론장에서 배제, 또는 폐기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웅변하는 사태라는 데 주목, ‘지성 없는 교양’의 창궐을 제어-상쇄할 포괄적인 수강권 구성 프로그램을 거교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의제화할 것.

 

 

우리는 이상의 내용이 현 프로젝트가 ‘세계화(Globalization)’란 이름의 전지구적 신기루를 좆는 데 급급한, 알맹이 없는 세계주의적 슬로건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고려돼야 할 최소한의 요구라 믿는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 통폐합(안)이 프로젝트의 명실상부함을 가늠할 지성적 준거라 보고, 향후 이 상황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예의주시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모교는 추억의 언저리 어딘가, 빛바랜 흔적으로나 남을 ‘마음의 고향’일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시대, 모교가 굽힌 것은 피게 하고 억눌린 자는 일어서게 했던 ‘비판지성’의 전통을 올곧게 법고창신(法古創新)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5년 1월 1일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과 졸업생 및 재학생(총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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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3:55 2008/03/22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