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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되는 각국 자본의 이익추구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1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고, 미국 또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남한의 경우에는,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여론이 급격히 파병찬성여론으로 돌아선 가운데 무수한 논쟁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국익은 없다. 파병을 반대해야한다’라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김선일씨 사건이 발발했기에 우리는 공수부대라도 보내서 이라크놈들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아니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파병을 강행한 정부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다.1)


 우선,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자. 국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부터 필자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에 있다. 이라크 파병을 해서 생기는 국익. 그것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인가? 아니면 남한자본가들의 이익인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복구사업 몇 개 더 따내어서 사업을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자본가들의 이익인가? 노동자들의 이익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주체가 된 것은 분명 노동자계급이다.2) 하지만 그에 대한 떡고물은 모두 자본가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매파의 호전적 정책때문, 그리고 석유패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은 이 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현 정권에만 전가시키고 있다. 과연 미국의 매파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이윤율의 저하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단지 미쳐 날뛰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패권의 논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 필자는 이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석유패권의 논리는 어디서부터 도출되는가를 생각해보자. 단지 석유를 얻으려고 석유 하나만을 노리고 벌이는 전쟁인가? 중동지역 석유의 독점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증대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출신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이라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국가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국은 찬성한 가운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등은 반대를 하였다. 이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블레어가 전쟁광이고, 시라크․푸틴등이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하였는가? 그러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들 국가들 간의 이라크 유전에 관한 세력분포를 알아야 한다. 우선 북부 루마이라 유전 개발권은 중국 러시아에 있었고, 러시아 루크오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토털피나앨프등은 이라크와 석유 탐사 및 개발계약을 한 바 있는데,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배제되었다. 이들 반전진영 자본가들은 UN에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그 이면으로 후세인과 석유지분권을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중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었고, 반전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자국 자본의 이해가 우선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윤 동기라는 ‘황금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다. 계속되는 자본의 이윤증대에 대한 욕구는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파괴적 행위를 원한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는 불황과 전쟁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서 새로운 투자지역을 찾아내고, 생산의 요소와 소비의 요소를 찾아낸다. 자본의 파괴적 본능은 오직 이윤을 바랄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공격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전쟁과 현 시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중심의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을 위한 설정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을 외치려 한다. 이 글에서 왜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심성이 나오는지 의문이 갈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집중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이 받는 착취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녀들의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근본 체제가 바로 노동자계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그들의 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의 이윤증대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해 가면서 노동자계급을 착취/억압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계층들과 다른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탄생할 때부터 자본주의를 철폐할 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하였을 때, 다른 여성, 장애인, 농민 등의 여러 소외 계층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함께 나가야 한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사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철폐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지점인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승인하고 그것에 복무할 때, 자본주의 철폐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우선적이다. 이라크에도 노동자가 있고, 미국에도 노동자가 있으며, 한국에도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는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으며,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계급이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있지만, 자본가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본가의 분할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버려서 이라크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따로 보고 있다. 그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에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한국 노동자에게 자신은 이라크 노동자와 다르고, 자신은 억압/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의 광폭은 노동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구조조정의 형태이든, 비정규직의 형태이든, 전쟁의 수행을 위한 파병의 형태이든- 노동자 계급을 끊임없이 연계시키며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노동자가 민족주의를 넘어 연대할 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모든 착취의 쇠사슬을 끊고 나설 때 자본에 의한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1) 여기서 논한 주장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지만, 사실은 이들 주장보다 훨씬 다양한 주장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2) 참전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며 대개 대학이나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하였다. 더구나 위험한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희생된 미군 병사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참전한 라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는 911이후 부시행정부가 외국인 비시민권자가 군대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즉시 발급하는 절차를 도입한 것에 기인한다. 남한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전 베트남전 때의 파병지원 심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로 가면 조금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로 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본가계급 출신의 젊은이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파병 뿐 만이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무고한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어 김선일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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