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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 최바울 (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현 시기 남한 농업의 현황에 대하여 사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생각이다. 이것은 주로 윤수종의 〈한국 농업의 미래와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글에 의거할 것이다. 한편 글에는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하반기 농업 개방과 관련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신문 기사를 이용했음을 밝혀 둔다.

  다음으로 글의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남한 농업이 처해져 있는 현실을 맑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내려 한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맑스의 『자본』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가운데 전개될 것이다.


  Ⅰ. 남한 농업의 현황


  최근 농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농촌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상은 여전히 목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렇지 않다면,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수많은 창업 실패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워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이러한 정서는 남한 사회에서 일반적인데, 그 까닭은 남한 사회가 농업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격렬한 역사적 변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시기의 극심한 노동 착취 속에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비록 빈궁할 지라도 ‘인간’일 수 있었던 농촌 사회를 그리워하곤 했다. (실제로도 여전히 대다수의 귀향지는 농촌이다.) 언론 보도를 보라. 민주노총이 화염병을 던지면 잡아먹으려고 난리를 치지만,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에는 언제나 동정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사회적 풍토 아래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남한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적 정서는, 우리가 농업 문제를 과학적 시각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윤수종의 글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지점은, 농민들 간의 계급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1)


   “농촌 사회 관계는 특히 농민들 간의 계층분화를 들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보면, 전형적인 양극 분해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앞선 시기에 주로 중농으로 표준화되던 양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어쨌든 양극으로의 분화는 기계화에 따라 차지형 상층농이 등장하는 등 기계를 통한 대규모화가 가능해지면서 정치규모가 큰 상층이 등장하였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지 규모에 매이지 않는 시설농가, 축산농가 등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지원제도의 강화와 더불어 지원을 받은 농민들이 기계화와 시설화를 통해서 경제력을 집중하여 새로운 상농층으로 도약하고 그 반대쪽에는 다수의 침전층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농업 생산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로 현상하고 있다.


  “농업 생산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농업 생산 주체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농업 생산 조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위탁 영농회사와 영농조합법인, 다양한 생산실험(예를 들어 생명농업) 공동체들이 그것이다. … 일관 기계화가 가능한 기계 체계를 갖추고 회사형태를 갖춘 위탁 영농회사는 벼농사의 수위탁 작업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벼농사의 핵심적 작업집단으로서 부각되었다. … 다수의 영농조합이 소수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수의 구성원을 지닌 영농조합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것은 영농조합 내의 분화 현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출자규모로 볼 때에도 대다수의 영농조합은 소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부 대규모 투자를 하는 영농조합도 나타나고 있다.”


  농민층의 계급 분화, 그리고 그것과 변증법적 원인·결과로 맞물려 있는 생산 방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정부 역시 농정 정책의 초점을 상층농에 대한 지원으로 맞춰 나가고 있다. 1950년,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시행했던 소농 육성 정책은, 오늘날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계급 분화에 직면하면서 ‘농업 자본가’ 지원 정책으로 변모된 것이다. 농민 전체가 아닌 ‘경쟁력 있는 농민’에 대한 중점적 지원, 그로써 ‘경쟁력 없는 농민’에 대한 자연 도태가 정부의 농정 정책인 것이다. 솔직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노무현이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이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농업만 살아남는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가자. 여러 지원정책 중에서 경쟁력 없는 농업에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농촌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YS·DJ 정부가) 지키겠다고 잘못 공약한 것이다. 앞으로 시장기제에 의해 농업인구가 줄어든다는 점, 탈농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신뢰가 따르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하자.”

-  미제의 앞잡이 제프리 존스 회장과의 대담에서


  한 마디로 ‘살 놈은 살리고, 죽을 놈은 죽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이러한 말을 WTO 체제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인용한 통계자료는 85년부터 95년까지의 자료이다. 농민 간의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농촌 사회에서 계급 모순이 증대한 것은, 이른바 ‘세계화’가 매스컴을 온통 떠들썩하게 채웠던 것보다도 이전이다.

  따라서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농업개방 문제는 결코 새로운 모순이 ‘도입’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기존의 모순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확대·재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네 글자와만 관련이 있다. 물론 WTO 체제는 농촌 사회의 계급 모순을 가속화시킬 것임은 틀림없다. 노무현이 더 이상 YS·DJ와 같이 농촌을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은, 농촌 사회에서도 점차 소자본이 대자본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은 이전 시기에도 있어 왔으며, 다만 오늘날의 전면적인 농업 개방에 의하여 그것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전면적인 쌀 개방은 결코 농촌을 황폐화 시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독점 자본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식량 무기’로 인한 ‘국가 안보의 위협’이 실질적인 것으로 된다면, 남한의 부르주아들 역시 자신의 애국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의 애국심의 본질은 남한 사회에서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국심은 애국심이다). 그들은 ‘식량 주권의 수호’를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와 동떨어진 것으로 사고하고 있지 않다.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를 위해 400만 농민이 200만으로 줄어야 한다고,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발전된 농업 생산력을 200만 명의 목숨과 바꾸겠노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지만 말이다.


  Ⅱ.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을 맑스주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위에서 밝힌 대로, 이에 대하여 맑스의 불후의 명저 『자본』(김수행 역, 비봉출판사)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한 부분은 『1권 : 자본의 생산과정』 중 「7편 : 자본의 축적과정」과 「8편 : 이른바 시초축적」, 그리고 『2권 : 자본의 유통과정』 중 「1편 : 자본의 변태들과 그 순환」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의 부족으로 발제문이 완결되지 못했다. 굵은 글씨를 중심으로 짧게 구두로 발제하겠다.


  [1] 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 법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발전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서만 자본가는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열광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 ― 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 ― 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각 개별 자본가에게 강요한다. 경쟁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 …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대하는 것이다. …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이다!” (1권, 807쪽)


  [2] 자본의 축적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축적을 위해 필요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개별 상품 생산자들로 사회가 분업화 되는 것은 자본 축적의 전제이다. 즉, 남한의 소농 육성책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본축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따라서 또한 일정한 크기의 잉여가치]가 체화되어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한다.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면[또는 떨어지는 경우조차도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는 것보다 완만하게 떨어지는 한], 잉여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1권, 824쪽)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아래서만 노동의 분할 및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수단은 대규모 집적에 의해 절약될 수 있으며, 이미 물질적 성질로 보아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예컨대 기계체계 등]이 나올 수 있고,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되며, 생산과정이 과학의 기술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지배적인 제도가 상품생산이라면, 즉 생산수단이 개인의 소유이어서 수공업자가 고립해서 자립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든가, 또는 그에게 자립적 생산을 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한다고 하면, [위에서 말한 전제인] 대규모의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에 의해서만, 또는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전제가 된다.” (1권, 852쪽)


 [3] 자본의 축적에서 필요로 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의 끊임없는 발전이다. 또한 이것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축적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개별 자본은 크든 작든 생산수단의 집적이며, 그에 대응해 크거나 작은 노동자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으로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그리하여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 집적은 축적으로부터 직접 나오거나 또는 오히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것…. 축적은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에 대한 지휘의 집적의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사회적 총자본의 분열 또는 그 단편들의 상호배척은 그들 사이의 흡수에 의해 상쇄된다.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수단과 노동지휘의 단순한 집적[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된 자본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이며,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이며, 다수의 소자본을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흡수과정이 집적과정과 다른 점은, 흡수과정은 이미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는 자본들의 분배의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작용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 또는 축적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축적 및 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1권, 853쪽)


  [4] 위의 내용과 같이, 집중이란 대자본이 소자본을 격파하고 흡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밝힌 대로 대자본이 노동 생산성을 훨씬 빠르게 증대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농사짓는 캘리포니아 쌀을 기껏해야 경운기로 경작하는 남한의 쌀이 당해낼 수 없듯이 말이다.


  “이 자본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경쟁전은 상품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값이 싸지는 것은, 기타 조건이 같다면, 노동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생산성은 생산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에 따라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자본의 최소금액이 증대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그러한 생산분야로 몰려든다. 여기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는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1권, 854쪽)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되며, 또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광범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즉,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1권, 856쪽. 엥겔스의 주석.)


  [5]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임금노동에 의한 생산이 일반적으로 되자마자 상품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상품생산은 사회적 분업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데, 특정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상품은 끊임없이 전문화하고, 보완적인 생산과정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분할된다. … 상품생산의 물적 조건들은 점점 더 큰 범위로 여타의 상품생산자의 생산물로서[상품으로서] 개별 자본가와 직면하고 있다. 거기에 발맞추어 자본가는 점점 더 화폐자본가로 등장하게 되며, 그의 자본이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임금노동자 계급의 존재]을 만들어내는 동일한 사정이 모든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촉진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발달은 모든 이전의 생산형태[주로 생산자의 직접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처음에는 외관상으로는 생산방식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은 채 생산물의 판매를 주관심사로 삼는다. …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정착되자마자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의거하고 있거나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 의거하고 있는 상품생산의 모든 형태를 파괴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상품생산을 일반화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상품생산을 점차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킨다.” (2권, 43쪽)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향은 모든 생산을 가능한 한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는 주된 무기는 모든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유통과정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발달한 상품생산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인 것이다. 산업자본의 침입은 어디에서나 이 전환을 촉진하며 그와 함께 모든 직접적 생산자의 임금 노동자로의 전환도 촉진한다.” (2권, 128쪽)


 [6]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 법칙은, 결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 발생한 특수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생 시기에서부터 관철된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소생산자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은, 공상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동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계급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인류 역사의 ‘부정의 부정’을 완료해야 한다.


   “자본의 시초축적, 즉 자본의 역사적 발생은 결국 무엇으로 귀착되는가? 그것이 노예 및 농노를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것[즉 단순한 형태변화]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오직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즉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사적 소유의 해체]을 의미할 따름이다.

  …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토대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

  이 생산방식은 토지의 분할과 기타 생산수단의 분산을 전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수단의 집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각 생산과정 안의 협업과 분업, 자연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 사회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도 배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 및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운동할 때에만 적합하다. 이 생산방식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페쾨르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만인(萬人)의 범인화(凡人化)를 명령’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방식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가슴속에서는 이 생산방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생산방식은 철폐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철폐된다. 그것의 철폐, 즉 개인적이며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광범한 국민대중으로부터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러한 처참하고 가혹한 국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건과의 융합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타인노동[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 축출된다.

  이 변환이 낡은 사회를 깊이와 넓이에서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또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그리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노동이 더욱더 사회화 되는 것,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즉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더욱더 전환되는 것, 따라서 또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 -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즉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러한 집중[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 병행해 기타의 발전도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예컨대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따라서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등이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빈곤·억압·예속·타락·착취의 정도는 더욱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수가 계속 증가하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속박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1권, 1047쪽)


  첫 번째 발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바이다. 남한의 농업 생산이 점차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자본의 몰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본 발제의 결론이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이, ‘소자본의 몰락’ 과정은 너무나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다음의 발제에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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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앞서 윤수종은, 호당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의 75%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경우 ‘평균소득’이라는 개념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1조 7천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건희와 통장 잔고 0원을 자랑하는 나의 ‘평균 소득’은 8천 5백억원이지 않은가.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농업 인구가 대개 고령화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도시와의 평균 소득 비교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에 비해 문화적·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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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반전운동의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전쟁은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가지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치는 전쟁반대는 단순하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외침과 같지 않다. 반전운동이 전쟁의 원인인 자본주의에 대한 철폐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반전운동과 자본주의 철폐 투쟁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와 힘을 인정하는 세력이 반전운동을 주도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에 이렇다할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현재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시민운동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철폐는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저항을 진행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계속되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힘겨운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들은 노동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더욱 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무조건 반전운동에 결합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몽상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파병철회를 위해 거리로 나서자는 말은 현장에서의 생존권적 요구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반전운동과 현장투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선택은 현장투쟁이다. 아니 현장투쟁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의 선택은 교섭을 통한 실리 획득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파병철회를 주장하자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반전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에게 전쟁과 자본주의가 가지는 연관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녀들이 반전운동에 나서는지를 알리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결합이 없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계급적인 시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에 직접 결합하면서 반전운동을 선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반전운동은 거리에서의 촛불시위로 한정되고 있을 뿐, 현장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의 적극적인 선동을 통해 현장투쟁과 반전운동이 결합될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평화주의와 민족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반전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철폐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파병철회를 외치려는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당면한 임무는 학생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당연하게 대학에서 반전을 외치는 일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자본주의를 끝내는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전쟁은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것,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가 끝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학교 안에서, 그리고 집회 장소에서 꾸준하게 알려나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노동자계급이 어떤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지를 알리고, 이 투쟁들을 반전운동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은 반전운동과 다른 맥락이 아니며,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반전시위에 단순한 시민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을 알리고 이 투쟁들에 관심을 갖고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그러한 연대가 반전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택시, 보건, 궤도연대 등 굵직한 투쟁들이 마무리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산별노조이거나 산별의 형식을 취한 세 사업장 모두 조합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투쟁을 정리하였다. 노동조합이라는 신분마저 보장을 받지 못한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건설노조는 간부들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을 진행 중이다. 작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속 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아직까지도 회사로부터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정부는 고용허가제 실시를 강행하려 하며,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이 투쟁들에 결합하는 속에서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폭로하고, 반전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선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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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혼돈의 그 이름. 파병 반대를 외치다.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있는 파병 반대 집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층위들이 결합하고 있는데, 각종 시민 단체 뿐 아니라,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꾸준히 그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각각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만큼이나, 그 개입방식도 확연히 구분되고, 내밀고 있는 유인물 등에서 그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는 그들이 정치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다음에서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살펴보면서, 각각 어떠한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반대” “미국 반대”


 얼핏 신자유주의와 반미라는 것은 별로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둘은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 초국적 자본으로 인한 금융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의 침탈이 자유로워지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은 파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그것을 주도 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금융 세계화와 맞물려, 군사 세계화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시 대표세력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구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기 전에 계속 있어왔던 국내 자본의 착취에 대해서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세에 발 맞춰 나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금융세계화로는 현재의 상황을 오히려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작은 중소 기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은 왜 계속 초과 근무를 하며 수탈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소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온갖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지, 왜 자본가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고용하려고 하는지 등등 신자유주의로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좀 더 명확히 말해야 한다. 자본의 노동 탄압과 착취는 오로지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 뿐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등. 그 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온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해 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노동자다. 하지만 그들이 산출한 잉여 가치는 자본가들이 가진다. 자본가는 그것을 더욱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하고 탄압한다. 결국,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분쇄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분쇄할 수 있고, 따라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둘째,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다”


 흔히, 민족 운동 진영에서 말하는 파병 반대의 논리는 얕게는 민족주의적 감상을 토대로, 깊게는 첫 번째에서 논했던, ‘미국’ 자본이 주도로 한 전쟁에 반대하자는 것인데, 후자는 앞에서 논의했으므로, 전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다음은 한반도다”나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라는 구호는 우선 대중에게 우리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게 하면서 즉각적인 분노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거쳤다고 보기 힘들고, 미국에 질질 끌려가는 한국 정부의 종속적 태도에 대한 비판에 머물게 된다. 이는 전쟁이 왜 일어났고, 파병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 한국은 왜 자주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 한미 동맹 파기 주장으로 나아간다. 당장 한미 동맹 파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차치해 두더라도, 미국이 아닌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을 벌였을 때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궁금해진다. 



 셋째, 반전! 반 세계화!


 앞서의 발제에서 논의되었듯이 파병반대에 대해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미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 좌파 단위에서 행하고 있는 꾸준한 신문 발행을 통해 대중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평가 지점이 다양하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앞 발제에서도 충분히 얘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 단위에서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연적이라는 것.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지,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상류에서 쓰레기와 함께 물이 내려오는데, 그 쓰레기를 하류에서 치우면서, 이렇게만 하면 물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류로 흘러가는 물 속에서 쓰레기를 완벽히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히 물을 정화할 수 없다. 즉, 상류에서 물을 더럽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거꾸로 된 논리로 대중들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를 외치는 것은 자칫하면 단순히 선전주의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강경 대응해야 한다며, 파병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반대 논리를 펴나가고 대중들에게 그것을 알려나가는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을 대시민 피케팅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노동 계급 중심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전쟁과 파병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토대로, 실제로 이러한 자본주의 전쟁에 막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 하다.



 넷째,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눈에는 눈’ 이라며, 강력 대응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입어, 파병을 강행하려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가 집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실천적으로, 노무현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파병을 함으로써, 역시 이윤 증대를 꾀하는 국내 자본과 정권에 대해 전선을 확실히 긋는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호가 다음과 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 구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병 강행을 어떤 면에서, 노무현과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열우당 등 부르주아 정치인의 변덕의 소산으로 판단하고,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가 노무현을 이렇게 변신시켰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것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민노당이 집권하더라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 가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나서, 누구를 대통령 자리에 세우고,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개혁을 해 나가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현재 사민주의 국가들이 복지 정책 등을 축소하고 있으며, 다시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다섯째, world peace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명분없는 전쟁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이라크 민중과 전장으로 나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말하고, 무고한 희생을 감행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물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의 파병 반대 운동은 여기서 그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파병이기에 반대해야 하고, 누구를 위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은 파병하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호소하고, 부탁하는 시민운동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매일 매일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는 노동자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 속에서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학생 운동 단위에서 외치는 정치적 구호에 드러나 있는 각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의 한계는 드러났다. 계급적 학생 운동을 고민하는 자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실천적으로 개입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외쳐야할 구호는 “ 노동자 계급 중심에서 파병을 반대한다” 이며, 평화주의, 민족주의, 반미 투쟁으로서는 절대 파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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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어느덧 수능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일반사회 교과서를 보니 그 당시 공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한...................콜록콜록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윤리와 일반사회 시험을 볼 때 객관식에서 답이 되는 것은, “제일 그럴싸한 보기”와 “제일 긴 보기” 였다는 것 뿐이다. 여기서 교과서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집어 볼 수 있다. 바로 굉장히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음...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럴싸한 맥락들을 집어보자~!(나는 물론 되살릴 기억이 없다..)

  우선 일반사회 대단원 중 두 번째 민주 시민의 역할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보자..


“현대 민주 시민 사회는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의해 운영된다”(p.20)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p.21)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국민의 천부 인권과 행복을 존중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고, 국가가 앞서서 지켜 나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질서이다.“(p.190)


  위에서 언급한 말만 보면 우리는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우리의 자유 의사가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하고, 법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니 이 어찌 완벽한 사회인가?

  그러나 당신의 실제 삶은 그러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부분이 있다. 하나는 “우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할 수 없다면 왜 그런가? 그리고 국가는 중립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유명한 선언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가 한 말이 그냥 멋져서 아직까지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멋있기도 하다.) 잉여생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과 소유를 둘러싼 투쟁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사회의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 가면서 각기 다른 모습의 계급들이 투쟁해 온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두가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부르주아는 유산계급으로서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매우 유복하게- 존재이다.

  위에서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한 것은 다름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급간의 대립이 반영되는 공간이다. 물론 계급간에 대립하는 모습의 투영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즉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 주도권이란 소유라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유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잡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이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을 대변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부르주아와 중세 영주와의 투쟁은 혁명으로 봉건제 사회는 종식됐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의 승리 즉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불행히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외쳐졌던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가? “자연에 근거한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이러한 권리, 부르주아 혁명 이후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 평등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즉 현대국가에서 이야기 하는 자유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자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평등 역시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부르주아만이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세하고 파고들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모르거나 귀찮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ㅡㅡ;;.) 발제할 부분은 일반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그 중에서도 계급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교과서에는 어떻게 감추려하는지(민주주의의 이름을 이용해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써 놓은 걸 보니 이미 충분히 길게 써놓았군...;;;)

  일반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시민의 생활 원칙으로 ‘대화와 토론’, ‘양보와 타협’,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을 이야기 한다.(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시민”이라는 개념도 참 재미있다. 대학 와서 알게 된 민주 시민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지나가다 분노한’ 시민‘인양’ 싸우는 사람들 이었다..;)

  ‘대화와 토론’과 ‘양보와 타협’은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논리이다. 사회의 갈등을 서로 대화를 통해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을 보자는 것인데, 갈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공허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또 이는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대화와 타협으로 은폐시키려는 -요즘들어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사회적 합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즉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이며, 그것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관계를 보지 않고, 단지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밑에 포섭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등록금투쟁을 생각해 보자. 학교와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섭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비상학생총회 당일 교양관으로 기습 항의 방문을 들어가서 부총장을 압박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교섭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전부터 요구해 왔던 교섭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하다가 학우들이 학교를 실제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교섭을 시작해 왔다. 그러면서 본관점거에 대해서 학교가 폈던 말은 “학우들이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보고 어쩌라구~! 압박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은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다수결이 ‘전원 일치에 가깝기 때문에’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물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기만적으로)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이 과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하고,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지만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되고 이기주의에서 나온 행위들로 보도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인식한다.(이는 가장 진보적인 담론이 많이 오가는 대학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파병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현재 계급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통제 한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힘으로 의식 역시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 KBS등의 모든 매스컴 역시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은 접하는 매체는 부르주아들의 그 것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인증한 교과서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중립적인 존재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보고 듣는 것, 심지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역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투쟁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병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수결이라는 것은 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학습 정리(시험에 꼭 나온다고 해서 외웠었던 기억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는다.


“사회적 집단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립되는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사회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p.103)


  교과서 스스로가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본질도 변하지 않는 무산계급을 자본의 ‘세련된’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는 위에서도 강조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왜 없는가? 생산력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이제 지역간의 갈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통해 없어질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 있어서도, 사적인 소유관계를 철폐하면 차별적인 분업이 아닌 자연적인 분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적소유와 계급을 철폐하면 자연히 계급간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뭐 했다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계급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 하다. 결국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던 대화와 타협 등의 이야기,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경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교과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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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선집 1권,박종철 출판사)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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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모두에게 좋은 거다’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터인데 당장에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으로 막연해진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참고하여 우선 이렇게 이해해두자.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국가 의사의 결정을 국민의 합의에 두는 특정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와,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 이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시킨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자세, 생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정치 교과서)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시민 사회’를 떠올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신분 사회와 절대주의적 전제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7, 18세기에 이르러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대 민주 정치의 이상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대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내걸고, 국민 주권의 기치 아래 공동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원동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치 교과서)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글에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7,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생산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그들에게 당시 국가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라고 불려오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고유한 생산 방식은 봉건 질서의 지방적이고 신분적인 특권들 및 인신적 상호 속박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당시 국가 체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경쟁하고 무역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프랑스 혁명을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혁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들 역시 혁명을 위해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이 두 신분 모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대립 또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의 갈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마치 보편적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탈바꿈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이념을 내세운다. 이러한 평등의 이념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규정에 잘 명시되어 있다.” (정치 교과서)


 혁명의 성과를 만인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주장한 ‘(경제적) 자유’와 ‘(신분적) 평등’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였다. 단, ‘경제적 평등’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법적으로 국민의 참정권은 주어져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민주주의의 형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이상은 모든 국민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지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윤리 교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자유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의 개념을 “국민 각자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평등을 “기회 균등의 의미”로서 “법적, 정치적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계급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현대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명시한다면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계급사회에서 부의 집중과 집적은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가 계급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삶의 조건들이나 선택의 기회는 우리가 지배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보장되는 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태어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비교할 때,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머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되며, 그러한 이념들은 현실의 철저한 반영물에 불과하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또한 인용문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이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교과서가 교묘하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5



** 왜 그런지는 굳이 쓰지 않겠음.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3



**** 맑스에 의한 유물론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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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되는 각국 자본의 이익추구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1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고, 미국 또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남한의 경우에는,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여론이 급격히 파병찬성여론으로 돌아선 가운데 무수한 논쟁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국익은 없다. 파병을 반대해야한다’라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김선일씨 사건이 발발했기에 우리는 공수부대라도 보내서 이라크놈들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아니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파병을 강행한 정부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다.1)


 우선,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자. 국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부터 필자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에 있다. 이라크 파병을 해서 생기는 국익. 그것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인가? 아니면 남한자본가들의 이익인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복구사업 몇 개 더 따내어서 사업을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자본가들의 이익인가? 노동자들의 이익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주체가 된 것은 분명 노동자계급이다.2) 하지만 그에 대한 떡고물은 모두 자본가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매파의 호전적 정책때문, 그리고 석유패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은 이 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현 정권에만 전가시키고 있다. 과연 미국의 매파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이윤율의 저하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단지 미쳐 날뛰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패권의 논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 필자는 이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석유패권의 논리는 어디서부터 도출되는가를 생각해보자. 단지 석유를 얻으려고 석유 하나만을 노리고 벌이는 전쟁인가? 중동지역 석유의 독점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증대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출신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이라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국가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국은 찬성한 가운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등은 반대를 하였다. 이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블레어가 전쟁광이고, 시라크․푸틴등이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하였는가? 그러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들 국가들 간의 이라크 유전에 관한 세력분포를 알아야 한다. 우선 북부 루마이라 유전 개발권은 중국 러시아에 있었고, 러시아 루크오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토털피나앨프등은 이라크와 석유 탐사 및 개발계약을 한 바 있는데,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배제되었다. 이들 반전진영 자본가들은 UN에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그 이면으로 후세인과 석유지분권을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중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었고, 반전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자국 자본의 이해가 우선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윤 동기라는 ‘황금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다. 계속되는 자본의 이윤증대에 대한 욕구는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파괴적 행위를 원한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는 불황과 전쟁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서 새로운 투자지역을 찾아내고, 생산의 요소와 소비의 요소를 찾아낸다. 자본의 파괴적 본능은 오직 이윤을 바랄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공격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전쟁과 현 시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중심의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을 위한 설정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을 외치려 한다. 이 글에서 왜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심성이 나오는지 의문이 갈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집중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이 받는 착취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녀들의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근본 체제가 바로 노동자계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그들의 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의 이윤증대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해 가면서 노동자계급을 착취/억압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계층들과 다른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탄생할 때부터 자본주의를 철폐할 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하였을 때, 다른 여성, 장애인, 농민 등의 여러 소외 계층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함께 나가야 한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사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철폐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지점인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승인하고 그것에 복무할 때, 자본주의 철폐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우선적이다. 이라크에도 노동자가 있고, 미국에도 노동자가 있으며, 한국에도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는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으며,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계급이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있지만, 자본가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본가의 분할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버려서 이라크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따로 보고 있다. 그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에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한국 노동자에게 자신은 이라크 노동자와 다르고, 자신은 억압/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의 광폭은 노동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구조조정의 형태이든, 비정규직의 형태이든, 전쟁의 수행을 위한 파병의 형태이든- 노동자 계급을 끊임없이 연계시키며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노동자가 민족주의를 넘어 연대할 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모든 착취의 쇠사슬을 끊고 나설 때 자본에 의한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1) 여기서 논한 주장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지만, 사실은 이들 주장보다 훨씬 다양한 주장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2) 참전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며 대개 대학이나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하였다. 더구나 위험한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희생된 미군 병사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참전한 라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는 911이후 부시행정부가 외국인 비시민권자가 군대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즉시 발급하는 절차를 도입한 것에 기인한다. 남한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전 베트남전 때의 파병지원 심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로 가면 조금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로 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본가계급 출신의 젊은이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파병 뿐 만이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무고한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어 김선일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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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7월 15일)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발제문 2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어느덧 수능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일반사회 교과서를 보니 그 당시 공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한...................콜록콜록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윤리와 일반사회 시험을 볼 때 객관식에서 답이 되는 것은, “제일 그럴싸한 보기”와 “제일 긴 보기” 였다는 것 뿐이다. 여기서 교과서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집어 볼 수 있다. 바로 굉장히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음...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럴싸한 맥락들을 집어보자~!(나는 물론 되살릴 기억이 없다..)

  우선 일반사회 대단원 중 두 번째 민주 시민의 역할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보자..


“현대 민주 시민 사회는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의해 운영된다”(p.20)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p.21)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국민의 천부 인권과 행복을 존중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고, 국가가 앞서서 지켜 나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질서이다.“(p.190)


  위에서 언급한 말만 보면 우리는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우리의 자유 의사가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하고, 법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니 이 어찌 완벽한 사회인가?

  그러나 당신의 실제 삶은 그러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부분이 있다. 하나는 “우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할 수 없다면 왜 그런가? 그리고 국가는 중립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유명한 선언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가 한 말이 그냥 멋져서 아직까지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멋있기도 하다.) 잉여생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과 소유를 둘러싼 투쟁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사회의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 가면서 각기 다른 모습의 계급들이 투쟁해 온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두가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부르주아는 유산계급으로서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매우 유복하게- 존재이다.

  위에서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한 것은 다름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급간의 대립이 반영되는 공간이다. 물론 계급간에 대립하는 모습의 투영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즉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 주도권이란 소유라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유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잡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이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을 대변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부르주아와 중세 영주와의 투쟁은 혁명으로 봉건제 사회는 종식됐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의 승리 즉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불행히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외쳐졌던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가? “자연에 근거한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이러한 권리, 부르주아 혁명 이후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 평등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즉 현대국가에서 이야기 하는 자유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자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평등 역시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부르주아만이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세하고 파고들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모르거나 귀찮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ㅡㅡ;;.) 발제할 부분은 일반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그 중에서도 계급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교과서에는 어떻게 감추려하는지(민주주의의 이름을 이용해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써 놓은 걸 보니 이미 충분히 길게 써놓았군...;;;)

  일반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시민의 생활 원칙으로 ‘대화와 토론’, ‘양보와 타협’,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을 이야기 한다.(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시민”이라는 개념도 참 재미있다. 대학 와서 알게 된 민주 시민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지나가다 분노한’ 시민‘인양’ 싸우는 사람들 이었다..;)

  ‘대화와 토론’과 ‘양보와 타협’은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논리이다. 사회의 갈등을 서로 대화를 통해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을 보자는 것인데, 갈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공허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또 이는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대화와 타협으로 은폐시키려는 -요즘들어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사회적 합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즉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이며, 그것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관계를 보지 않고, 단지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밑에 포섭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등록금투쟁을 생각해 보자. 학교와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섭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비상학생총회 당일 교양관으로 기습 항의 방문을 들어가서 부총장을 압박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교섭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전부터 요구해 왔던 교섭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하다가 학우들이 학교를 실제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교섭을 시작해 왔다. 그러면서 본관점거에 대해서 학교가 폈던 말은 “학우들이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보고 어쩌라구~! 압박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은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다수결이 ‘전원 일치에 가깝기 때문에’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물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기만적으로)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이 과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하고,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지만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되고 이기주의에서 나온 행위들로 보도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인식한다.(이는 가장 진보적인 담론이 많이 오가는 대학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파병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현재 계급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통제 한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힘으로 의식 역시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 KBS등의 모든 매스컴 역시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은 접하는 매체는 부르주아들의 그 것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인증한 교과서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중립적인 존재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보고 듣는 것, 심지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역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투쟁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병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수결이라는 것은 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학습 정리(시험에 꼭 나온다고 해서 외웠었던 기억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는다.


“사회적 집단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립되는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사회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p.103)


  교과서 스스로가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본질도 변하지 않는 무산계급을 자본의 ‘세련된’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는 위에서도 강조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왜 없는가? 생산력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이제 지역간의 갈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통해 없어질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 있어서도, 사적인 소유관계를 철폐하면 차별적인 분업이 아닌 자연적인 분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적소유와 계급을 철폐하면 자연히 계급간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뭐 했다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계급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 하다. 결국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던 대화와 타협 등의 이야기,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경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교과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민주주의’이다.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5


** 왜 그런지는 굳이 쓰지 않겠음.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3


**** 맑스에 의한 유물론적 관점.


***** 공산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선집 1권,박종철 출판사)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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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7월 15일)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발제문 1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모두에게 좋은 거다’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터인데 당장에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으로 막연해진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참고하여 우선 이렇게 이해해두자.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국가 의사의 결정을 국민의 합의에 두는 특정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와,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 이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시킨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자세, 생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정치 교과서)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시민 사회’를 떠올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신분 사회와 절대주의적 전제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7, 18세기에 이르러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대 민주 정치의 이상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대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내걸고, 국민 주권의 기치 아래 공동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원동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치 교과서)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글에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7,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생산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그들에게 당시 국가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라고 불려오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고유한 생산 방식은 봉건 질서의 지방적이고 신분적인 특권들 및 인신적 상호 속박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당시 국가 체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경쟁하고 무역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프랑스 혁명을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혁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들 역시 혁명을 위해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이 두 신분 모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대립 또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의 갈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마치 보편적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탈바꿈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이념을 내세운다. 이러한 평등의 이념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규정에 잘 명시되어 있다.” (정치 교과서)


 혁명의 성과를 만인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주장한 ‘(경제적) 자유’와 ‘(신분적) 평등’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였다. 단, ‘경제적 평등’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법적으로 국민의 참정권은 주어져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민주주의의 형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이상은 모든 국민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지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윤리 교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자유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의 개념을 “국민 각자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평등을 “기회 균등의 의미”로서 “법적, 정치적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계급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현대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명시한다면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계급사회에서 부의 집중과 집적은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가 계급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삶의 조건들이나 선택의 기회는 우리가 지배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보장되는 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태어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비교할 때,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머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되며, 그러한 이념들은 현실의 철저한 반영물에 불과하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또한 인용문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이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교과서가 교묘하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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