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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인 노조교육 ; 어떤 시도

광주에서 공공노조 지역지부의 간부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기초 교육을 진행하고 나서 쓴 글입니다.

보다 사회운동적이고 연대지향적이고, 지역운동전략에 기반한 노조운동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러한 운동이념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간부, 활동가, 조합원에 대한) 노조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은 간간히 지적된다.

나도 그러한 측면에 동의한다. 여러 실천이 중요한 만큼, 대중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대안적인 이념에 언어를 부여하고 활동가, 조합원들이 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운동이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의 변화는 대중운동의 실천 속에서 어떤 이념을 추출하고 이를 다시 대중의 언어로 돌려주는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가장 일반적인 경로중 하나는 노조 교육이다. 운동의 혁신을 위해서, 운동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한 교육의 변화를 위한 노력과 시도는 간간히 있어왔다. 사회진보연대도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교안 구성 혹은 팜플렛 작성을 위한 워크샵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중지되어 있지만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주관한 “서울지역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단”의 중요 사업 중에 하나도 교안구성 사업이었다.

나도 이러한 교안 작성 사업(이라기보다는 시도들)에 함께 했지만, 일부러 교안을 작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내가 만들었던 몇 개의 교안도 구체적인 교육 요청이 있었을 때 그때 그때 작성할 수는 있었지만, 불연속적.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구체적인 교육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교안작성, 교육 준비가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글은 14일 쓰기 시작해서 블로그에는 지금 올리는 중) 광주지역 동지들의 요청으로 간부활동가교육을 진행했다. 간부활동가의 자세와 역할, 노동권과 임금/단체교섭이라는 다소 일반적인 제목의 교육. 30명 정도의 간부, 활동가, 열성조합원이 함께 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부분, 노조 교육에서부터 노조의 이념을 혁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광주 동지들이 나에게 요청한 이유도, 요청한 것도 바로 그런 측면일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실제 교육은 좀 나았던 것 같지만, 교안은 단어나 표현이 난삽. 옆에 조합원들이 “써논 거는 어렵구만”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읔;;)
여튼, 다른 곳에서도 쓰려면 교안 자체는 표현-구성 등을 더 손볼 필요가 있겠다.

누군가에게 참고가 된다면 ; 교안파일(hwp)

내가 주로 반영하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기존의 노조교육 교안들에 대한 비판의 지점은 이렇다.

<간부활동가의 활동론 관련해서>

* 20년 전에나 지금에나 똑같은 내용으로 교육해서는 안 된다. 간부활동론과 같은 ‘기초적인’ 것이라도 노조운동이 처한 현실, 정세를 반영해야한다.

* 노조는 ‘운동’과 ‘조직’의 복합체, ‘조직’은 (물질적) 기구와 공동의 이데올로기로 구성된다.
문제는 ‘운동’을 통해서 조합원의 공동의 이데올로기, 이념을 형성하는 것.
(노조는 ‘운동’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운동을 소진하는 제도화-기구의 강화는 노조‘운동’의 무덤)

* 기구의 측면 ; 노조와 국가기구의 비교. 국가기구는 지배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어디에 권력이 있는지를 은폐한다. 그러나 노조는 반대로 투명하게 인식되어야 구성원의 자발성을 지속시킬 수 있다.

* 간부활동가는 공동의 이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조합원 상호간의 대화와 소통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 노조에 필수적인 ‘운동’은 ①사업장 안에서 현장 투쟁, ②사업장을 넘어서는 사회적 투쟁이 모두 필요 ; 특히 ②를 위해서는 간부들의 집단적이고 일상적인 공동학습이 필수적이다. 또한 사회운동과의 열린 토론이 필요. (ex. 사회운동포럼)

* 간부활동가들은 노조라는 조직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조직적 제약을 냉정하게 인식해야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용인된’ 조직으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가지는 한계. 노조는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물신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주의’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존의 노조를 조직 하면서도 그것을 지양하는 운동을 내부에서 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 결론적으로, 간부활동가의 역할은 “노조(조합원 대중) 안에서 운동을 실현(조직)하는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잘 알려진 기존의 교안 중에도
○ 노조를 “사람”과 같이 [두뇌=위원장, 심장=집행부, 척추=대의원.. 운운]라는 유기체로 비유하거나,(플라톤식 유기체론?)
○ 대의원은 ‘부서의 소대장’ 식의 군사적인 비유,
○ 조합원의 다양성은 자본이 좋아하는 경쟁/갈등의 요소라는 입장..
==> 그러나 노동자 조직은 단결의 긴급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주체들의 자발적인 연합으로 사고되어야하고, 노조 안에서도 개인의 소거가 아니라 평등-자유로운 연합이 강조되어야한다.

* 보통의 교안들은 간부의 헌신성, 청렴성 등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초등학교 도덕교육에서 배워야할 것들로 사회적 통념을 ‘노조의 용어’로 번안하여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조교육은 사회적 통념의 반복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 마찬가지로, 학습의 중요성, 토론의 중요성,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 등은 그냥 말하면 되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왜 필요한지 이야기해야한다. (‘자명한’ 것으로 그냥 나열하고 말 때, 그것은 정작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공자님말씀이 되고 말 뿐이다.)

<임금, 단체협약과 노동권 관련해서>

* 노동자들의 권리는 노동3권?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법적으로 제도화된 시민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반적인 노조 교육에서 과대평가되고 있다.)

* 노동자의 권리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권리”로서 노동권, 그리고 시민권=인권으로 제시되어야한다. (노동3권은 시민권의 한 항목을 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 그리고 노동권 개념은 “노동할 권리”라든가 “노동에서의 권리”이라는 해석과 쟁점을 형성)

* 노동권, 시민권=인권은 “의무(댓가) 없는 권리”.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는 그것이 어떤 제한없이 정당한 천부적인 권리이다. 노동자들이 이것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한다.

* 노조의 임단협(요구안과 내용)에서도 노동권을 실현하고, 그것에 시민권=인권을 도입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탈리아 CGIL의 150시간 교육시간 확보와 같은 것은 그러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조페미니즘이 가능하게 하고, 노동자가 과학과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 이렇게 노조의 단협, 임협은 단순히 좋은 조항의 나열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임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장시간-초과 노동을 강요하는 현대자동차의 임금체계는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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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정은교 선생이 프레시안에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글을 기고하셨군요.
>> 화려한 휴가' 유감 [독자 기고] 항쟁의 주체와 실상 왜곡

좋은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 붙은 덧글이 하나 있습니다. 광주와 지식인에 대한 어떤 분의 짧지만 무거운 언급입니다.
그냥 기사 하나에 댓글로만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이네요. 퍼왔습니다.



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원문있는 곳(링크)
무념 / 2007-08-15 오후 2:58:40   
추천 17,    반대 1 

광주항쟁은 소위 먹물이라는 자들의 결정적 치부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휴가의 제작자들은 이러한 미세한 흐름을 표현하기가 두려워 소위 지식인이라는 계층의 활동가들을 통채로 삭제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 실 윤상원씨는 운동권을 제외한 일반 학생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야학을 열성적으로 해 간 의식있는 청년 정도로 여겼었던 것 같습니다. 항쟁이 마무리되고 그가 도청에서의 저항을 주도하고 최후를 맞았다는 애기를 듣고 멍치끝이 띵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부끄럽다는 느낌, 내가 배신자라는 오욕감,  자신의 삶이 그다지 가치있을 것 같지는 않겠다는 뭐 그런 감정이었지요. 한마디로 광주항쟁은 젊은 우리들의 인생관을 크게 뒤바꾸어버린 경험을 안겨주었지요.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지도부에 속한 인물들의 대다수가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뒤로 한채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씨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군인들의 체포작전이 시작되자 도피하여 서울의 어느 작은 공장 직공으로 들어가 체포될 때까지 숨어 지냈었지요.

박관현씨는 옥중에서 단식항쟁 끝에 운명하게 됩니다. 그가 그리 치열하게 단식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산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자괴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전남대 학내에서의 항의데모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한달여 동안 매일의 데모 끝에 진압경찰들이나 학생들 모두 지쳐서 그저 도로에 앉아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만 나옵니다. 이렇게 지독하다 할 정도로 데모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학생들 개개인이 느꼈던 그리도 심한 자괴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데모진압의 강도는 훨씬 강해질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데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떼려잡는 그런 것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그저 버스를 타려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아무 경고도 없이 덤벼들어 검은색 박달나무 곤봉으로 머리통을 내려갈겼습니다. 고시학원으로 난입하여 수업중인 수험생들을 두들겨패고 피흘리는 그들을 질질 끌고 나와 도로에 꿇어앉혀 놓거나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로 데려갔습니다. 충장로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점원들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점원과 함께 항의하는 가게 주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일부는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나중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면 덤벼들어 물어뜯는 미친개, 바로 그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상입니다.

집집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폭행한 것은 그야말로 집 또한 안전하지 않겠다는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시외로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교통은 두절되었고 시외로 빠져나가다가 포위중인 군인들에게 걸려 변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자자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상무대에서 교육받는 군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우리 동네까지는 수색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이즈 음해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거의 모두 잠적해버리고 맙니다. 데모는 즤들이 다해놓고 정작 필요할 때는 한놈도 안보인다. 광주 시내에서 흔히 들렸던 투덜거림들이었습니다. 개학해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니 모두들 나와 똑같이 행동했다는 걸 알고 참 기가 막히더군요. 소위 먹물이라는 작자들은 그렇게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습니다.

영화에 윤상원씨를 등장시키려면 이러한 먹물들의 행동양태가 반드시 묘사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랬으면 이 영화는 또다른 저항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 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선은 그 당시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심리상태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가 싫고..... 지금 내 나이 오십하고 하나, 그 영화가 잘됐든 잘못됐든 또 영화감상 시간이 길든 짧든 그 당시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되돌아가기 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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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서를 내고 온 날

병가에 이어서 휴직을 연장하고,

한 동지의 사직 소식을 듣고 술을 같이 진탕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술을 먹는 밤.

집에 오는 버스를 타고 중경삼림 주제가인 夢中人(王菲)를 듣고 나서,

어쩌면 우습게도..

럼블피쉬의 "으라차차'를 듣다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펑 울고 말았다.




 
  

음악과 동영상은 다소 무관하지만 음악 때문에, 암튼.
 


몽중인(夢中人),중경삼림 OST




가사는 원곡인 Cranberries - Dreams 의 것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Never quite as it seems
 
I know I felt like this before
But now I'm feeling it even more
Because it came from you
Then I open up and see
The person fumbling here is me
A different way to be
 
Ah, la da ah... La...

I want more, impossible to ignore
Impossible to ignore
And they'll come true
impossible not to do
Impossible not to do

And now I tell you openly
You have my heart so don't hurt me
For what I couldn't find
Talk to me amazing mind
So understanding and so kind
You're everything to me

Oh my life is changing everyday
In every possible way
And though my dreams
it's never quite as it seems
'cause you're a dream to me
Dream to me   Ah la la la 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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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이기라.양창렬 외 지음 / 그린비


2005년 가을 이후 파리 외곽 지역을 중심으로 폭발한 (주로 "이주자들의 폭력사태"로 알려진) 소요를 분석한 책.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국인 연구자들이 썼다. (책의 에필로그로는 발리바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먼나라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매우 흥미로운 정치적 쟁점들이 담긴 책.

“방리유”는 도시 근교를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도시에서 방리유(근교)는 한편으로는 중산층들의 주택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시테'라고 불리는 이주민, 하층 프롤레타리아의 열악한 주거지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그것도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불린 곳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접근한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 국가의 정책, 노동자운동(주로 CGT)의 입장과 활동, 노동시장의 성격 등은 물론이고, 특히 국가의 대응으로서 범죄-치안담론, 이주자의 "배제적 통합"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등도 다루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긴 만큼, 남한에서 생각하기 힘든 쟁점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조만간" 우리에게도 현실화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벌써 현실이기도 하고.)

극우들이 이주자를 배제하는 인종주의적 의제를 제기하고, 우파들이 그것을 포용하며, 좌파들도 그 의제에 답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주자와 관련된 쟁점들은 점점 더 우경화된다.(이런 걸 정책프레임 전쟁이라고 할텐데, 미국에서도 우파들이 강한 것으로 유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의 문제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로 전가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입장이 확대된다.

우파들은 백인 하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의 불만을 이주자들에게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을 범죄자로 몰아부치게 되는데, 이는 "사회보장"을 후퇴하면서도 대신 "사회적 안전"을 지킨다는 것으로 쟁점을 이동한다. 이를 위해서 방리유 지역에 대한 억압은 증대되고, 오히려 폭력과 저항을 유도한다. (2005년 사태도 사르코지가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강한 혐의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의 국가가 노동자운동에 대해서 하는 짓거리도 이런 측면이 있는 듯)

치안담론 속에서 이슬람국가의 이주자들은 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슬람원리주의 테러리스트와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범죄와의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것으로,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책은 너무나 많은 흥미로운 쟁점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특히 관심있게 본 쟁점 두개만 일단 언급하자.(쟁점들을 요약하는 것도 힘들다; 나머지는 담에 생각나면..)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 착용 문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종교적 상징물인 히잡(이슬람식 여성 스카프)을 착용하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입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법안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법안이 아니라 이 안에 담긴, 드디어 폭발한 쟁점들이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부터, 다문화주의, 이슬람 사회(공동체와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 식민주의 등과 같은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런 쟁점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힘들겠지만, 다만 “정교분리”원칙에 대해서는; 이것은 애초 대혁명 이후 기독교 교회의 지배로부터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현재 언급되는 “정교분리”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언급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논쟁에 대면하는 원칙으로 “그녀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히잡을 쓰는 이슬람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조차,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만 이슬람 여성들을 대상화해왔다는 비판.

이슬람 여성들(이슬람 페미니스트들도)은 오히려 스스로 히잡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남성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을 “무성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사진은 마르세유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시위)

이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엇보다 문제는 히잡을 착용하는 이슬람여성들,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져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문제라는 점,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오히려 그녀들이 학교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입장과 이중노동시장

이주자들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입장은 어땠을까? 저자는 그것이 이중적이라고 말한다.(“연대”와 “통제‘의 모순) 한편으로 이미 합법화된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대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반대하고, 이에 따라 불법 이주자들에 대해서는 눈감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이 전후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 자리하면서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입장에 제약이 가해진 상황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이중적 입장은 프랑스 공산당의 몇몇 쟁점들에 대한 모호한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노동자운동(특히 CGT)가 민족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동유럽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왔고, 이들을 대변해온 역사가 있다.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형성-지원하고 이들을 대변하려한 노력들을 보면 단지 민주노총에 "가입시켜준" 정도의 활동 이외에는 적극적인 조직화 전략도 지원도 없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입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주노동자의 합법화가 그나마 상당히 이루어져있다는 사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장기간의 노동자 이주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사회에 거의 완전히 통합된 2~3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상황이다보니 남한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다. 남한 정부의 극단적인 이주노동자 관리, 불법화가 민주노총에게는 이주노동자의 합법-불법과 무관한 지원이라는 입장을 요구하는 셈이지만, 정부의 입장이 어느 정도 유화적으로 변화할 경우 민주노총의 입장도 모호해질 수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방리유의 소요에 대해서 의미있는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고, 입장도 모호했다. 방리유의 소요 이후 불과 만에 쟁점화된 CPE(최초고용계약법) 투쟁은 전혀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데에는 노동자운동이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 혹은 노조가 조직되어 있는 공공부문, 안정적인 노동시장에 몰두한다는 점도 작동한다고 지적된다.(사회운동적인 성격을 가져온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에서조차 난점이었다는 점) 이들 방리유의 청년들은 실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일자리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주자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으로 갖고, 또 실천할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지점은 "노동운동을 잘하면 사회운동의 과제들은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는 노동운동 좌파들의 입장들에 다시 한번 회의적이게 한다. 사회운동포럼 사전 토론에서도 제기되는 논점인데.. 노동운동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밖의 쟁점들을 간단하게만 메모.

* 시빌리테(시민윤리)의 문제. 그것은 발리바르에 의해서 운동에 필요한 이념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게 이주자와 관련해서 프랑스에서 기만적인 성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무례한” 이주자 청년들.. 이런 식의 비방과 이를 범죄와 연결시키는 시도. 정작 문제는 이주자들에게 먼저 “무례한” 국가권력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개념이 이런 현실에 봉착할 때 어떤 이론적 전략이 필요할까?

* 공동체주의 문제. 이주자들의 (민족에 기반한) 공동체는 긍정적인가? 그것은 공동체주의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발리바르는 공동체주의를 강화하는 배제와 추방을 먼저 사고해야하고, 이주자들의 공동체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도 매우 현실적인 문제.

* 정치의 부재 혹은 소멸의 상이한 양상.. 이주자들, 하층 프롤레타이아는 “대표되지 않음”으로서 정치에서 배제된다. 극단에서 초민족 부르조아지는 굳이 국내정치에서 대표될 필요가 없다. 방리유의 반란은 정치적 생성, 봉기적 생성의 계기일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슬로건도 정치적 목표도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 생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까..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7가지 논점 중에 하나)

* 이중노동시장. 프랑스에서도 이중노동시장이 고착되고, 2차 부문 노동시장(중소영세비정규직 일자리라고 보면 될텐데)에서 특히 이주자들과 백인노동자들이 경쟁한다. 이에 따라 주로 노조로 조직화된 1차 부문(공공부문, 대기업, 전문직)은 오히려 무관심. 일단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제시된다.(옳다고 본다) 문제는 제한된 일자리에서 경쟁하는 2차 부문 노동시장에서 인종주의적인 대결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남한에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처럼)

=====
한편, 극단적인 모습의 방리유를 무대로한 프랑스 영화도 있다.

“13구역”은 도시에서 방리유를 배제하는 방식의 극단을 상상한 영화다. 그곳에서 장관(아마도 내무부겠지)은 이미 콘크리트 장벽으로 고립된 방리유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온다.

(마침 오늘 케이블 TV에서 하더군. 실제로 빠리 외곽의 방리유는 도시외각순환고속도로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니, 사르코지가 비슷한 짓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징적 배제를 물리적 배제로 만드는 것은, 몇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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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영구없다~&quot;진중권의 유머?심형래의 유머?

'디워'에 대한 포스팅을 한 번 더하게 되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한 비유 중에 "영구 없다~"가 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말인데, 언론이 이상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괜한 욕설로 알려지는 중이다. 여튼, 심형래 개그의 본질을 진중권이 패러디한 셈.

대부분의 언론이 "스토리가 없는 것이 ‘영구 없다’와 다를 바가 없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다. 엥? 황당한 얘기다. 신문마다 100이면 100 기사들이 다 이런데, 기자들이 멀쩡한 말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안되거나 멍청하게 처음 쓴 남의 기사를 배껴쓴다고 밖에 볼 수없게 만드는 대목. 물론 이 말이 '디워' 영화 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핏대올리는 '디워'광팬들도 마찬가지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한 말은 이렇다.(오마이뉴스의 토론 지상중계만 정확하더만.)

(관객들이) '아리랑' 나와서 눈물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 올라갈 때 '인생극장'이라 찡하다. CG 볼만하다. 이것 빼곤 없다"며, "문제는 그러면서도 애국 코드가 아니다, 민족 코드가 아니라고 하니 황당하다. 영구가 '영구 없다' 하는 것과 똑같다"

'디워' 광팬들이 민족주의, 애국주의 논리로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게 아니라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에 대한 언급이다.

심형래의 "영구 없다~"개그가 재밌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영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구는 단지 "말"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모순을 우리 모두 알지만 영구만 모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말의 불일치가 일어나고 그것을 모르는 영구를 우습게 만든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디워'광팬들이 "영구 없다~"로 집단 개그를 해주고 있는 시추에이션.
그러니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심형래의 위트있는 개그를 그의 광팬들이 (충실한 팬들답게?) 따라하는 셈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심형래가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들을 광팬들은 정말로 모른다는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그냥 코메디가 아니라 블랙코메디가 될 수밖에. (여기선 역사가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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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MBC100분 토론이 진미군.

영화 '디워 ' 광풍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길게 덧붙일 것은 없지만,
다시 논란이 되는 MBC 100분 토론, " '디-워'(D-WAR)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 "을 봤다. (MBC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이번 100분 토론은 지대로 재밋더만. 강추! (사실 하도 광들이라 호기심에 영화도 볼까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지만, 지금 더 흥미로운 건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니 보지 않기로.) 진중권은 역시 예의 그 날카로운 입담을 발휘한다. 순발력도 죽이고 논쟁 중에 상대의 약점을 잡는 방법도--다소 비열할 정도로--잘 알고 있다.(언론에 다소 엉뚱하게 소개된 "영구 없다" 발언은, 맥락을 보면 통괘할 정도로 예리하다.) 진중권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디워' 광풍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 영화 자체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비판한 셈이다.

정말로 재밋다. 자, 여기.
100분 토론 홈페이지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toron/index.html


진중권의 이야기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대중들이 애국주의, 민족주의 논리로 말하고 있으면서 곧바로 자신들은 그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여,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비밀. 자신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예 인식하지 않을 때/거부할 때 그것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바로 앞에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한다. 논리와 이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비판은 불필요해진다.

'디워'를 광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스크린쿼터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겠다고한다. 결국, 이번 소동을 겪으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컴플렉스는 헐리우드와 같은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셈이다. 자기 파괴적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한 대안이 아닌데, SF는 아메리카에 고유한 (문학)양식일 뿐 아니라, 그것을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즉 SF를 영화로 제작할 수있는) 자본과 기술은 미국이 아닌 곳에서도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문화적 양식이라는 점, 헐리웃 영화산업이 아메리카 헤게모니의--아마도 매우 불충분할-- 새로운 이윤의 원천 중 하나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러한 요구는 결국, 한국영화가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장점들마저 모조리 파괴하고 말 것이다. 헐리웃 영화의 문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헐리웃 영화일 뿐이다. 그것은 심지어 심형래도 아니고 말이다.(따라서 100분 토론에 나와서 "한국영화를 위해서" '디워'를 옹호하는 하재근 씨는 오히려 자신이 그 "한국영화"가 불가능한 어떤 곳으로 가는 대중들을 정당화한다.) 젠장, 영화관에 헐리웃 영화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지만, 헐리웃 영화 + 헐리웃 영화와 구분이 안되는 한국영화들(그것도 수명이 얼마 안 남을 테지만)로만 깔리는 것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토론에서 '디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던 하재근 씨마저, 진중권의 주장이 옳고, 존중해야한다고 말하자 마자 여기에 대해서조차 디워 광펜들은 광분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포지션도 용납이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같은 편"이라도 "비둘기파'는 테러의 대상이 된다. 아주 웃기고들 계시다.

한편, 대표적인 친노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는 '디워'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글들이 "컬럼"이라는 이름으로 게시되고, 전화 인터뷰이 중에서 '디워'옹호자는 오마이뉴스 기자. 그리고 토론 중에 진중권이 인용한 "디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무로를 타격하라."라는 정신나간 컬럼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렸고 하재근 씨도 여기 컬럼을 쓴다. 모두 노사모 계열의 사이트들인데,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이 이런 점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그들은 의사-비주류, 반지성주의 전략으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을 읽어야한다. '디워'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한, 희망이 갈 곳없는 대중들이 열망하는, 그러나 "텅빈 자리"다. 대중의 민족주의적인 열등감의 다른 면, 잘나가는 '전문가'들에 반대하는 다른 면, 충무로로 상징된 주류에 소외된 다른 면,  헐리우드 영화자본의 화려한 영상에 대한 열등감의 다른면..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고, 욕망의 이면.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텅빈 욕망의 장소이자, 그것에 걸맞게 영화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것'들--무엇에 반대하는--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디워' 광풍에서도 그에 어울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터넷의 '디워' 광팬들은 처음에는 평론가들에 대한 반대, 그 다음에는 이송희일 감독에 대한 반대, 이제는 진중권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디워'에 열광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들이면서, 또한 계속 미끄러져간다. 그래서 토론에서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비판을 할 수록 역설적으로 '디워'마케팅에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출연하기가 꺼려졌다는 발언은 매우 정확한 지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치 한 때는 그것이 노무현이었고, 한때는 황우석이었을 때처럼) 다음번에는 또 무엇인가,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또 위치할 것이다.(어떤 노련한 인민주의자 정치인? 그게 수준미달이라고들 하는 이 괴수 영화와 관련된 현상을 "정치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디워' 현상에 비판적인 전화인터뷰이였던 서대원 무비스트편집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반복되고, 계속될 것이다. (진중권이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텅빈 자리'에 어떤 다른 상징, 대안적인 세계상이 자리할 때에야 대중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밖에도 평론과 대중, 미학 등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쟁점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 MBC 100분 토론은 한번들 보시길.


* 논란이 되었던 이송희일 감독의 '디워 현상'에 대한 비판 글을 우연히 찾았다. 아래 펼침. 이 양반 글도 정말 맛깔나게 잘 쓰는구만.
 


 1.
막 개봉한 <디 워>를 둘러싼 요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느낀 것은 막가파식으로 심형래를 옹호하는 분들에게 <디 워>는 영화가 아니라 70년대 청계천에서 마침내 조립에 성공한 미국 토스터기 모방품에 가깝다는 점이다. '헐리우드적 CG의 발전', '미국 대규모 개봉' 등 영화 개봉 전부터 <디 워>를 옹호하는 근거의 핵심축으로 등장한 이런 담론들과 박정희 시대에 수출 역군에 관한 자화자찬식 뉴스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는 여전히 70년대식 막가파 산업화 시대이고, 우리의 일부 착한 시민들은 종종 미국이란 나라를 발전 모델로 삼은 신민식지 반쪽 나라의 훌륭한 경제적 동물처럼 보일 뿐이다. 이야기는 엉망인데 현란한 CG면 족하다고 우리의 게임 시대 아이들은 영화와 게임을 혼동하며 애국심을 불태운다. 더 이상 '영화'는 없다. 이 영화가 참 거시기하다는 평론가들 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한 여름의 공포다.

2.
그 놈의 열정 좀 그만 이야기 해라. <디 워>의 제작비 700억이면 맘만 먹으면, 난 적어도 350개, 혹은 컬리티를 높여 100개의 영화로 매번 그 열정을 말할 수 있겠다. 제발, 셧업 플리스. 밥도 못 먹으면서 열정 하나만으로 영화 찍는 사람들 수두룩하다. 700억은 커녕 돈 한 푼 없이 열정의 쓰나미로다 찍는 허다한 독립영화들도 참 많다는 소리다. 신용불량자로 추적 명단에 오르면서 카드빚 내고 집 팔아서 영화 찍는, 아주 미친 열쩡의 본보기에 관한 예를 늘어놓을 것 같으면 천일야화를 만들겠다. 언제부터 당신들이 그런 열정들을 챙겼다고... 참나.

심형래씨는 700억 영화짜리 말미에 감동의 다큐와 감동의 아리랑을 삽입하고, TV 프로그램마다 나와서 자신의 열정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고지깔 안 보태고 영화판에 몇 만 명은 족히 존재할 게다.

지구가 존재한 이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아서 영화를 찍어놓고, 누가 누구를 천대했다는 건지, 참나.

3.
충 무로가 심형래를 무시한다고? 정작 심형래를 '바보'로 영구화하고 있는 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충무로라는 영화판은 대중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에게 애증의 욕망 대상이다. 스타들을 좋아하지만, 반면 끊임없이 스타들을 증오하는 두 가지 배반된 욕망의 투영물인 셈. 이는 스펙타클화되어 있는 정당 정치에 대해 시민들이 갖는 이중의 배리되는 시선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정당 정치에서 배제된 듯 보이는 '바보' 노무현은 잘 살고 거짓말을 일삼는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항점으로 시민들에게 비춰지면서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심형래는 이와 다르지 않다. 충무로에서 지속해서 배척된다고 가정된 바보 심형래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심형래의 아우라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저 기존 충무로에 대한 환멸이 투영되어 있으며, 바보는 여전히 바보로서 시민들에게 충무로에 대한 환멸의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바보 전략'은 바보 아닌 것들을 비난하며, 서로를 바보, 바보 애정스럽게 부르다가 끝내는 정말 바보가 되어 선거함에 투표 용지를 몰아 넣거나 친절하게 호주머니를 털어 영화 티켓값으로 교환해주는 바보 놀이, 즉 아주 수완 좋은 훌륭한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4.
심형래와 기타노 다케시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코메디언 출신이면서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낸 두 사람의 차이 말이다. 열정의 차이? CG의 기술력의 차이? 애국심의 차이? 헐리우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차이? 딱 하나 있다. 영화를 영화적 시간과 공간 내에서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차이다.

CG 가 중요한 것도, 와이어 액션이 중요한 것도, 단검술과 권격술의 합의 내공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스스로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다면, 그 아무리 입술에 때깔 좋고 비싼 300억짜리 루즈를 발랐다고 해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5.
좀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영화는 영화이지 애국심의 프로파겐다가 아니다. 하긴 도처에 난립하고 있는 온갖 징후들로 추측해 보면, 이 하수상한 민족주의 프로파겐다의 계절은 꽤나 유의미한 악몽의 한 철로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될 게 분명하다. 아, 덥다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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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노동자운동의 어떤 가능성들

필리핀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회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살인이 끔찍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노동, 사회단체들이 진행한 기자회견(필리핀의 정치살인 및 노동탄압을 규탄한다! )이 진행되었다. 필리핀 정부(그리고 군부와 지방 우익조직들)는 최근 몇 년 동안 무려 1,000여명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암살했다. 최근에는 총선을 거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1,000명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동료가 살해당할 수 있으며, 내일 내가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필리핀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를 비롯해서 서너 번밖에, 그것도 단절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난 적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을 생각할 때 숙연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러워진다.
(아래는 정치살인에 항의하는 필리핀의 집회 사진, 프레시안기사 지은/'경계를 넘어' 활동가로부터 인용)


최근 태국에서의 회의에 참석한 한국 활동가 중에도, 남한의 운동이 잘나간다는 식의 거만함같은 것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 경우에도 필리핀의 노동, 사회운동의 지형 정도가 관심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가 있어야했던 그 자리에서 말이다.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Lidy Nacpil(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 코디네이터), 빛나는 활동가인 그녀도 몇 년전 이러한 살인에 남편을 잃어야했던 사람인데도.

***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을 활동가들과의 간혈적인 대화나 팜플렛을 통해서 접하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미약하다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자본주의의 극심한 모순에 불균등하게 노출되어 있고, 사회운동이 치열하게 발전하는 곳이 필리핀이다. (사회운동의 발전은, 심지어 노동자운동의 발전조차도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노자관계의 전면화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의 불균등한 발전과 “계급투쟁”이, 그 함수라는 것을 필리핀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필리핀의 노동자운동은 정치적 입장과 노선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분할되어 있다.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은 모두 공산당(CPP)계열의 KMU(노동절운동)에서 분리되어 좌파들이기는 하지만, 입장들은 상이하다. 최근 태국회의에 참가한 것은 필리핀 노동자운동조직 내에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BMP(필리핀노동자연대)APL(Alliance of Progressive Labor)이다.(둘다 전국적인 수준의 노동조합 연합단체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KMU에 비해서는 작다.)
(필리핀 노동자운동의 지형에 대해서는 불충분하고 어떤 점에서는 왜곡도 있지만 한노사연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아시아 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2. 필리핀 )

APL은 독특한 조직형태를 갖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운동의 연합단체이지만 같은 조직 안에 노조의 연맹, 산업노조, 지역노조 뿐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공동체/협회, 노동자 자조조직, 직업조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조직형태를 포괄한다. 이것은 노동자운동의 조직형태는 노동조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그에 비해서 민주노총에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직업조직이 가입할 수 있을까?) 노동자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형태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정세에서는 노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제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APL은 정치조직 중에는 AKBAYAN(시민행동당)과 경향적으로 함께하는데, 최근 총선에서는 월든 벨로가 정치살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APL은 자신들의 지향으로 직접 사회운동노조주의를 표방한다. 위의 한노사연 글에서 APL을 사민주의 좌파라고 소개하는 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한노사연 식의--우익적-- 해석이 반영된 것같다.)

이것은 마치 전노협 시기에 지노협의 조직과도 유사하다. 지노협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지역의 노동단체, 노동자 교육단체 등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92년 전노대의 구성부터,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운동은 노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 과정에서 노조 외의 조직형태는 모두 배제된다. 그 원인이자 결과는 무엇인가? 노조는 사업장 내의 경제투쟁, 사회-정치적인 투쟁은 사회운동-정치단체들이 하는 것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에 “어울리게” 노조는 사업장내의 (때로는 전투적으로) 경제투쟁에 몰두했다.(이점에 있어서는 좌우파가 다를 바가 없었다.) 전국적 총연합단체(민주노총)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층 노조의 경제주의를 보완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사업장 단위의 경제주의가 어떻게 그 노조 외부에 있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여성노동자를 배제해왔는지 알고 있고,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최근 비정규직운동의 고민 중 하나는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이 이 운동에 절대적인 조직형태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적인 조직형태가 무엇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사업장단위의 노조결성--사업장단위의 임단협교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들은 이러한 형태와 어긋나는 조직과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지어 지역차원에서 자주 일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사업장 단위의 활동도 한계가 많다. 따라서 다른 방식의 조직화, 활동이 있을지가 고려된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과 같은 수준에서라면 그것을 포괄하거나 연대할 수 있을까? (다만 노조조직이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 적어도 지역노조와 산별노조는 가능성이 있다. 산별노조들은 매일 실망을 주는 중이지만 말이다.)

한편, BMP는 총연합단체가 아니다. 오히려 지역적인 투쟁연대체에 가깝다. 다른 총연합 단체에 속해있더라도 BMP와 함께 할 수 있다. (전노협도 한국노총에 가입해있거나 독립적이거나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BMP 활동가는 총연합단체를 일부러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며, 역량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조건에서도 조직들을 관통하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적어도 그게 가능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야하기 때문인데, 민주노총은 연맹만 달라도 연대의 수준이 뚝 떨어진다.)

최근 BMP는 지역단위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전략을 채택하고 3개년 계획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치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와 유사한 것일 수 있겠지만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충분히 다른 방식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같다.

한편, BMP는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BMP 활동가는 대화 속에서 APL의 조직화 방식, 즉 노조를 넘어선 조직화에 대해서 “나는 실용주의자다. 그들(APL)은 자신의 노선을 현실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나는 실용주의자”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말도 아마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세 속에서, 노선과 실천은 검증되어야한다. 그것은 단지, 또한 전혀 실증주의가 아니라 정세에 개입하는 것의 본질이다. 정세 속에서 활동가들은 정세를 사고하고, 자신의 대응-노선을 창안하며, 그것을 정세에 기입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가 정세와 그 우연성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의 성공은 보증이 없지만, 정세 속에서 살아남을 경우 새로운 정세를 형성하고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상상력도 필요할 것이다.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BMP 활동가는 조직형태들 속에서도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우리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세 속에서, 당신들이 실현하라.”

그리고 발리바르가 말한 대로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11. 공산주의는 복수의 의미들로, 즉 잉여노동의 제한,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의 종언, 시민성과 국민성[민족성]의 구별의 종언으로 이해된다(그 외에도 다른 것들이 더 있을 것이다). 맑스가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운동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야한다. [미래에 대한] 보증없는 [현재의] 운동이라고.


===
* 정세와 “우연성” 그리고 활동가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사회운동(사회진보연대) 2007년 7-8월 합본호 “정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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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슬럼,지구를 뒤덮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슬럼이 도시의 미래라고 말하는 이 책은, 단지 도시가 아니라 세계인구의 생존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 책은 어쩌면 슬럼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민중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도시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계최대의 슬럼철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88올림픽을 위한 72만명 철거가 있었던 나라, 그리고 슬럼철거-재개발이 도시 내부의 극단적 분리와 함께 진행되는 나라인 남한에서도 매우 시사적인 책이다.

한편 이 책은 사센의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의 진정한, 그리고 발전된 후속편이라 할만하다. 사센의 책은 금융세계화가 어떻게 초민족적 금융도시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 지를 말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걸맞는 금융화된 세계도시가 발전하고, 그 이면에는 세계 전역에서 슬럼이 ‘폭발’한다.(확장 혹은 팽창이라는 낱말의 어감으로는 부적합할 정도로)

도시의 기괴한 팽창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세계인구의 절반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25년까지 세계인구가 100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때 새로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도시에 거주할 것이다. 이미 세계에는 2000만명 이상의 도시(지대)가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서울(수도권 포함)에 형성되어 있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만 10여개 이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도쿄-(서울)-상하이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해안의 세계도시가 회랑형태로 연결될 것이다. 도시화는 기존 도시 자체의 확장만이 아니라 시골의 도시화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게 도시는 역사상 최대로 기괴하게 팽창하고 있다. 왜 그런가, 특히 주변과 반주변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팽창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가 이 책이 묻고 답하고 있는 것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도시의 문제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말하는 중이다.

도시의 미래는 슬럼

도시화는 산업화 때문일까?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반주변에서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뭄바이, 요하네스버그,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 등은 산업화와 완전히 무관하게(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산업은 오히려 축소되는 중이다), 심지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우 농업생산이 후퇴하는 데도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을 거듭한다. (사진은 뭄바이의 슬럼)

도시의 기괴한 팽창은 70년대 이후 외채위기와 80년대 이후 IMF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주변-반주변의 농업을 몰락시켰고 농촌은 공공서비스의 축소(의료지원과 같은)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더 이상 살수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이들이 도시에서 살수 있는 곳은 다양한 형태의, 그러나 한결같이 끔찍한 조건의 슬럼지대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주변-반주변 국가에서 도시의 팽창은 곧 슬럼의 팽창과 정확히 동일한 말이 된다. 슬럼거주자는 선진국에서는 6%, 저개발국가에서는 78.2%에 달한다. 에티오피아와 차드에서는 99.4%의 도시인구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98.5%가 슬럼에 살고 있다. 슬럼이 바로 도시 자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듯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한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쌓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설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 생활의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이 책,33쪽)

슬럼 착취하기

시애틀과 아바나 시민의 1인당 소득격차는 739:1이다. 콜카타에서는 방 하나에 평균 13.4명이 살고 있다. 주거환경의 열악함은 물론이지만 나이로비의 경우 도시 외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월 수입의 반 이상을 출근을 위한 교통비에 사용해야한다. 인구 1000만의 킨샤사는 하수(그리고 분뇨)처리 시설이 “전혀”없다. 베이징에 주로 농민공(비정규직노동자)이 거주하는 슬럼에서는 6000명의 주민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한편, 케냐의 나이로비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슬럼주민들의 목소리는 상업화되기까지한 세계사회포럼에도 충격을 주었다. 아래 사진은 나이로비의 슬럼. 출처:프레시안/엄기호/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인용)


이렇게 빈곤한 슬럼에 대해서도 착취할 무엇이 있을까? 물론.

빈민들이 스쿼팅(squatting, 무허가 토지개척)한 토지는 주기적으로 재개발되면서 개발업자가 이윤을 취한다. 슬럼이 유지되더라도 경찰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상납해야한다.(비싼 유료화장실을 개설하기도 한다.) 세계은행WB의 기만적인 '빈민자조주택‘ 프로그램은 어떨까?

마닐라, 뭄바이 같은 곳에서 이 사업은 “오직” 빈민을 축출하고 개발업자를 배불렸을 뿐이다. 심지어 ’변기설치사업‘같은 경우에도 관리가 되지 않아 오히려 오수가 역류하고 전염병을 불렀을 정도다. 빈민을 위한다는 재개발 사업은, (남한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이지만) 중산층에서 주택을 공급할 뿐, 빈민들에게는 철거와 추방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필수서비스의 사유화는 슬럼의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사유화와 슬럼문제는 직접 연결된다. 특히 치열한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물-상수도 사유화는 의료서비스의 사유화와 함께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의 압력에 따라 상수도를 바이워커에 넘긴 다르에스살람에서는 수도 가격의 폭등으로 주민들은 위험한 수원을 이용해야한다. 그 결과 콜레라, 티푸스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직접 노출된다. 열악한 위생환경은 기생충,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발생시키지만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에게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모든 부담을 전가한다. IMF SAPs는 “가족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여성의 노동력을 거의 무한대로 잡아늘일 수 있다는 믿음을 냉혹하게 활용하는 체제이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장시간 노동은 물론 구걸, 매춘에 내몰린다. (이것은 “AIDS 대학살”의 원인이기도 하다.) IMF SAPs가 끝난 남한에서조차 여성일자리 정책과 같은 것들을 보면 이런 기대가 경제관료들의 상식인 것같다.

세계은행의 정책이 또 혜택을 준 집단이 있으니 개발업자들과 이들과 결탁한 관료, 독재자 외에 국제NGO들이다. 이들은 “지역사회 리더쉽을 전용하고 이제까지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공간을 패권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세계은행은 자신들의 사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NGO들을 활용한다.

심지어 이들은 “자활”, “자조”라는 명분하에 슬럼에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도입하고자한다. 슬럼주민들에게 주택증서(등기)를 주자, 그렇다면 그들은 재산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공식경제를 기업형태로 조직하자, 그러면 곧 사업가가 출현하고 재산가와 만나서 일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런 식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대 인상으로 빈민들을 ‘새로운’ 슬럼으로 밀어낼 뿐이다.

국가의 해결책 : 철거

국가의 전형적인 해결책은 철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국제행사가 있을 때에는 더 심해지는 데 88 올림픽 당시 서울수도권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철거는 지금 베이징에서 잔인하게 반복되는 중이다.

특히 도시가 팽창하면서 새롭게 중산층을 위한 교외주택을 건설하기에 입지가 좋은 곳이나, 퇴락한 도심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다. (서울에서도 뉴타운 건설을 위한 강북지역의 철거, 청계천 재개발과 도심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극심하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불도저와 경찰, 군인을 동원해서 “밀어버리는 것”이 끝이다. (역시 남한에서도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한번에 수십만명의 주거지를 철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공식부문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도시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잉여인간의 처리장으로 만들었다. 농토없는 농민들의 半프롤레타리아화와 유사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 법적으로 권리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등장.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극단적이어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90%는 이러한 비공식부문이다. 불완전고용과 실업, 식료품노점, 식당, 이발소, 소규모 물물교환.. 같은 것들이다. 국제금융기구와 신자유주의NGO들은 이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자활”을 요구한다. (어디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 같은 곳에서 왔나부지?)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리는 없으며, 다만 정치적 수사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대중들을 보자면, 전통적으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노동자운동의 절대적인 모델로 사고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남한의 좌파들(현장파들)이 사업장(현장)의 노사관계로 제한되는 (전투적) 경제투쟁을 물신화하고 그것이 노동자 운동의 순수한 형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은 사회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 구성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안정적인 임단협이 가능한 사업장 노사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성되어야한다.(그런 점에서 남한 운동에서 '비공식노동자'란 아예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하긴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것이 인식된 것조차 몇년 안되니.)  

가진 자들의 요새 도시와 새로운 중세

이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 부유층의 요새화된 교외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식 생활양식을 모방하고자한다. 카이로 외곽에도 “비버리힐즈”가 있고 베이징 외곽에는 “롱비치”가 있으며 홍콩에는 “팜스프링스”가 있다.(남한에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이들 지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24시간 사설경비가 이루어지고 개인 수영장과 폐쇄된 지역주민을 위한 헬스클럽, 쇼핑몰, 병원, 고급식당 등이 위치한다. (강남의 주상복합 건물들과 이렇게 같을 수가!) 이들은 경비를 갖추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요새’를 만드는데, 강박증 증세를 보인다. 가난한자들에 대한 공포라고나 할까.

이러한 분리는 초민족적인 금융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주변-반주변의 엘리트들이 ‘안전하게’ 도시의 주민들과 분리되도록 한다. 이들이 생존하는 공간은 슬럼이 넘치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는 뉴욕-런던과 연결된 금융네트워크이다. 이들이 투자하는 곳은 같은 도시 주민들의 일자리가 아니라 미국의 헤지펀드다. 그러니 더러운 도시빈민들과 분리되더라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러한 분리는 도시의 장벽을 건설하고, “새로운 중세”를 불러온다.

콩고의 칸샤사. 이곳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의 중세가 도래했다. 국가의 유일한 자금원인 광산산업은 세계은행이 부추긴 외채(이 돈은 독재자가 스위스은행에 빼돌린지 오래다)를 이유로 외국에 넘어갔다. IMF는 SAPs를 통해서 공기업매각, 공무원해고 등으로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이자까지 악날하게 모두 가져갔다. 공식경제는 물론 국가제도 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붕괴한 이 곳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화폐는 전혀 무용하다. 연평균소득 100달러 이하(1년간 버는 돈이 우리 돈으로 10만원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구의 2/3가 영양실조. 이곳에서는 중세적인 미신이 창궐한다.

절망에 빠진 도시 주민들은 90년대 초 다단계 열풍에 휩싸였고 이것은 91년, 93년 붕괴한다. 이제 IMF와 세계은행도 콩고에서 철수한다. 이제 그들조차 더 이상 착취할 것이 남이있지 않게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세계가 붕괴하고 도박이라는 환상마저 붕괴하자 남은 것은 주술과 예언종교. 오순절파 교회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주술 서비스를 제공한다. 절대빈곤 속에서 선물경제, 호혜교환도 모두 붕괴하고 미신만 남았다. 이들은 추천명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하는데, 아이가 마녀로 지목될 경우 부모는 아이를 유기해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된다.

새로운 전쟁

슬럼으로 가득한 제3세계 도시의 청년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전의 병사, 범죄조직, 국제테러조직까지 갖가지 형태를 취한다.(그래서 저자는 네그리의 ‘리좀’과 ‘다중’이 이것이냐고 묻는다. 다소 조롱기로.)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은 미국의 펜타곤이다. 공군아카데미, 랜드연구소 등등. 이들은 미래 전쟁을 예상하면서  "도시화지형에서의 군사작전"MOUT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전술을 혁신한다. 21세기의 전쟁은 바로 이러한 슬럼에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미국이 마주칠 것은 반란자들의 도시 해방구이자 범죄의 소굴, 이들은 모두 ‘테러와 범죄집단’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주변-반주변만이 아니라 중심부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 배제에 대해서는 최근 읽고 있는 <공존의 기술-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은 다 읽으면 리뷰.)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만드는 미래의 지구를 예상하고자한다면,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다소 장황한 인용과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슬럼은 도시의 미래일 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모든 정치적 쟁점들은 이 문제들을 우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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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2)-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지난 번에는 주로 중국에 대한 쟁점, 이번에는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에 대해서 논의된 것들과 시사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이와 관련해서 심상정, 권영길 등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변화하는 금융세계화

 

금융세계화의 정세는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10년전 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고, IMF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집행기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자본주의도 변할뿐더러 신자유주의도 변화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만드는 위기의 양상도 말이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기의 심화 속에서 무엇이 위기인지, 그것에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를 사고하는 데 중요하겠죠. 10년전 남한의 사회운동이 IMF에 대한 의미있는 반대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노총은 “민족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합의를 통해서 정리해고, 파견제와 같은 IMF의 요구조건을 자기 손으로 합의해주었고 그 후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IMF 협약이 강제된 다른 반주변 국가들의 사회운동과도 크게 다른 모습이었죠)

 

우선 IMF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있고 “금융세계화”와 그것이 강제하는 구조조정의 주도적인 행위자도 교체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들이 지적되었습니다. (물론 IMF는 애초에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이후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융시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국가들이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요구의 제안자로 역할을 전환했죠. 지금은 사실상 정책지원기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카리브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남아있지만) IMF의 악명높은 구조조정 때문에 많은 주변, 반주변 국가들이 서둘러 구제금융을 상환하고 정책적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대중적인 저항으로 인해 신뢰성이 약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주도적인 행위자는 오히려 금융시장의 법칙, 사적 금융자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 국가들은 금융시장의 등락에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알아서’ 조정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투쟁으로서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은 다른 것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자간 무역협상--WTO, GATS 등--이 양자간 무역협상--FTA--로 전환되면서 무역자유화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또 한편, 위기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통화위기의 형태로 발발한 이후에 지역적인 수준에서 최소한 통화위기는 막기 위한 장치들이 개발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 같은 경우에도 아세안+3(중,한,일) 틀을 통해서 양자간 외환지원 장치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가 구성되고, 최근에는 IMF의 지역판이라고 할 만한 아시아통화기금(AMF)를 구성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합니다.(98년 직후에는 AMF가 IMF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구성되지 못했는데, 2007년 현재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화가 각국의 외환보유고로 쌓여있는 만큼(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죠) 다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의 형태가 아닌 것으로 닥칠 수도 있다는 점. 그렇다면 그에 대응도 다른 방식일 겁니다.(다음 위기의 형태가 무엇일지는 공부를 더 해봐야할 것같네요;;) 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같고, 그러한 위기가 운동을 수세에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정세는 머지 않아서 다시 귀환할테니까.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대안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CMI, AMF의 창설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의 대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금융세계화의 파괴적인 불안정으로부터 각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죠. 예를 들어 98년 직후에는 운동진영의 어느 분파에서도 AMF창설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을 정도로(물론 당시에 김종필도 언급했던 적이 있죠;) 지역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안전한” 금융세계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IMF가 했던 것처럼 주로 일본자본의 이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행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내더라도 그것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인지가 쟁점일 텐데,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흥미로운 쟁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권영길 캠프의 정책

 

권영길 후보의 정책 중에 유사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고, 심상정 의원의 정책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아예 부재한 대목입니다.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언급이 없군요.)

 

심상정 후보의 경우 “동아시아 호혜경제- ‘Social Asia’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정책이 제시됩니다. “글로벌 경쟁 심화에 따른 국가양극화, 패권국가의 일방적 지배를 방지하고, 호혜적 분업체계에 기초한 지역공동체(regional community) 건설”을 중심으로 “역내평화와 호혜적 경제발전을 꾀하려면 처음부터 차이를 해소해야 하고, 이를 위해 ‘Social Asia’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 시민사회 교류프로그램과 아시아 사회헌장(Asia Social Chapter) 채택 △ 개발과 인프라구축, 기술발전에서 국가간 공조와 지원을 강화 △ 동아시아 지역발전기금(ODA)을 조성하고, 달러 통화체제를 대신하는 아시아통화체제(AMF) 등 역내 금융체제 구축.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이제까지 단지 국내 혹은 대북관계 정도의 사고에 머물고 무역과 금융에 대해서 사고하지 못했던 운동진영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단지 지역차원의 통화안정 프로그램 혹은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동북아시대”프로젝트와 달리 민족국가 사이의 호혜평등한 관계, 사회적 교류를 강조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운동적 요구라기 보다는 국가의 전략적 정책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대선이라는 공간의 고유한 효과일텐데, 어떤 후보도 (이미 국가의 정부를 수권하기 위한 후보로 표상된 이상) 국가전략 수준의 정책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 예를 들어 AMF 구상과 같은 것인 현재 구성이 합의된 AMF와 사실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시대 전략이라는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심상정 후보 쪽에 정태인씨가 관계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런 맥락일 겁니다.)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 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남미가 아니고 따라서 ALBA와 같은 대안이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쿠바가 있지만, 아시아에는 그렇지 않을뿐더러 중국은 그러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죠. 게다가 아시아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민족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 일본을 정점으로 해서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폴과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수직적으로 결합된 하청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안이 가능하기 위한 운동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심상정 후보 정책의 문제는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정책대안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오히려 운동들이 문제겠죠)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국가전략을 제시하고자할 때 처하는 위험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체제, 대안적 국가 간 관계의 형성의 난점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부분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번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월든 벨로는 이 회의에서 CMI, AMF 같은 것들이 지역차원의 ‘정치의 공간’을 연다는 측면에서, 그것에 개입할 수 있고/해야하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달리 생각해볼 지점도 있지요.)

 

이에 비해서 권영길 후보 쪽의 정책은 더 심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부르조아 국가전략과 사실상 아무런 구분도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북방대륙 경제권 개척으로 제4의 세계경제권 주도”라든가, 이를 위한 역내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공동사용과 같은 정책이 있습니다. 주변, 반주변의 발전을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자는 제안이 위기에 처한 금융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스티글리츠(리버럴들)의 것이라는 점은 지난 글에도 언급한 점이 있지만, “북방경제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미 일본 자본에 선점된 동남아가 아니라 다른 경제공간을 찾아가자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민족국가간 호혜평등한 발전 지원이나 사회적 교류를 전제한 심상정 후보 쪽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의 금융, 무역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아제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인데, 노무현의 동북아시대 전략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습니다.

 

“노동중심경제체제”라는 것을 제안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식기반경제”를 들고 있는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것은 생산으로부터 이탈한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투기운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팽창한 IT 산업의 이데올로기이고 따라서 남한에서 98년 이후 짧은 금융적 팽창(~2002년 경까지) 시기에 “빅뱅”을 경험한 IT 벤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석훈 박사는 권영길 후보의 비전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라고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그 벤처사장들은 짜증나는 '디 워'의 심형래처럼 이른바 반지성주의 "신지식인"들이죠.)
* 레디앙 기사 참고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148

 
지역마다 다를 분기점, 신자유주의 이후

 

그렇다면 이렇게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 제시되는 대안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하면 “대안이 뭐냐”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대안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말인데, 다만 대안들이 “가능한 조건”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가능한 최대한이라고 할 수밖에요.

 

앞서 말한 대로 남미의 알바(ALBA 미주대륙 볼리바르대안)와 민중무역협정(trade treaty of people; Tratado de Commercio entre los Pueblo: TCP) 같은 대안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말하기 힘들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AMF 같은 것을 이야기해서는 지역적 수준에서도 진행되는 금융화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현재 정세에서 가능한 것은, 각 민족국가의 사회운동들이 지역차원의 대안을 “합의”할 수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 이를 통해서 어떤 전략들이 어떤 민족국가(들)의 발전전략이 아니라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취약한 (특히 남한의 사회운동에는 더욱 취약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운동의 강화된 사회운동 네트워크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 지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취약한 것은 사실인데, 지역별로 진행되는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도 아시아가 가장 취약하죠.)

 

그리고 각 민족국가 내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운동의 문제제기, 그리고 국가를 강제하는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남미에서 ALBA나 TCP가 가능한 것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그 비슷한 뭐라도 있어야겠죠.

 

그러나 사실, 그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는데, 따라서 다소 비관적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지역차원의 대안세계화를 위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의 조건과 상황이 각 지역마다 모두 다 다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이미 이루어졌고 유럽연합도 신자유주의적인 헌법조약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인 지역통합”을 완성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공동지배” 체제를 이루고 있죠. 아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직적 분업체계가 구축되어 있고 민족국가 간의 역사적 구원으로 인해서 지역적인 통합이 쉽지 않습니다.(일각에서는 지역통합을 위해서 민족주의도 개조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반도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해서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그 징후일 수 있다는 것.)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합중국과 같은 식의 지역적 통합도 논의되고는 있지만 만성적인 내전과 민족국가의 취약성, 민주화의 지체 등으로 인해서 지역통합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자본이 그것을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쉽게 예상할 수는 없는 문제. 대안세계화운동에서는 남미의 경우가 가장 희망적일 텐데,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화할 수 있는 정세는 아니죠.

 

그렇다면 이후에 만약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붕괴하더라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대안체제는 같은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가 모두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 (다음 세계체계가 있다면 그 때까지) 상당 기간 경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역사의 상이한 분기, 어떤 지역적 모델도 절대화할 수 없는 혼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정세에 맞는 대안들, 운동의 전략들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변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그것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들이죠. 그리고 (10년전에 IMF 구제금융과 구조조정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미처 사고하기도 전에 불현듯 사활이 걸린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고 사고와 실천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라도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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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담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봤다, 기담.
(스포일러 조금 있음)
이런저런 평처럼 "잘 만든" 공포영화다.
서로 연결되는 세개의 에피소드가 액자구조 속에 있다. 액자의 밖은 1979년 유신 말기, 액자의 안은 1942년 일제 말기 경성. 억압적인 시대--따라서 그 자체가 공포들인--들이 절정에 있고 끝나가는 시기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싶었나보다.

영상도 좋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식 건물과 복식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남한 사람들에게는 일본전통양식은 뭔가 알수 없지만 존재했던 공간,아직 봉건적--따라서 前-이성적--이고도 근대적--따라서 이성적--인 것들의 불안정한 공존을 상징하는 것같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이자 부재, 과학의 부재이자 존재를 드러낸다.(이 영화는 병원이라는 근대적인 '과학'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괴담.) 역시 잘만든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장화홍련'의 배경도 일본식 건물이었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공포효과'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플롯 자체는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세개의 에피소드들에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역설적이게도 논리적--따라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과학적'인 것이라면 정신분석이거나, 심리학적인. 다만 심리학을 과학이라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무의식의 어떤 불안을 건드리면서도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에 비하면 너무 친절하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잘 아는 누가 꼼꼼하게 분석을 해주면 재미있을 것같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여러가지 정신적인 현상들을 소재로 가져온다. 시체성애 necrophilia, 엘렉트라 컴플렉스, 다중인격장애 같은 것들. 이것들은 모두 죽은자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다른 포스터에는 "사랑에 홀린자, 여기 모이다"라는 카피를 쓰는데, 내용들은 모두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응시한다. 사랑하는 대상들은(그것이 이미 죽어있든 사랑하다가 죽었든) 살아있는 주체에게는 여전히 죽지않고 살아서 함께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타자에 대한 사랑은 타자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의 욕망)이라고 상상되는 내 안의 가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다. 사랑하는 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유령이다. 뭐, 사실 모든 사랑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망각하고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해야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것들에 실패하고 죽은 자들은 따라서 죽지 않는다. 특히 이런 점에서 세번째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애도작업이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 된다. 따라서 주체 안에서 죽지않고 공존하게 된다. (영화의 무대는 안생(安生)병원이라는 가상의 병원이다. 이름이 흥미롭다. 내가 보기엔 안(安)은 오히려 '아니-'라는 의미의 부정어로 보인다. 따라서 un-live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un-dead.. 따라서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좀비같은 존재다.) 이 영화의 공포효과는 이 부분, 죽었지만 죽지않은, 그리고 그 죽지않은 부분은(사실은 살아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당신들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했지만, 잘 만든 영화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공포스럽지는 않다.(이것은 욕이 아니다.) 모두 설명가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 또한 모두 상징들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섭다기 보다는 지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흠.. 깜짝 놀라고 무섭기도 장면들도 많다. 감독이 만든 영상-음향 효과는 뛰어나다.)

공포영화들이 최근에는 가족(장화홍련, 4인용식탁)이나 학교(여고괴담)를 다루어온 것은 그것이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주체들을 무의식에서 억압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제도적인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이라... 사랑도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과잉되어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주이상스로 나타날 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인영'(이자 동시에 그녀의 남편인 '동원'이기도 한)이 마지막으로 남성 인턴을 살해하려는 장면은 마치 여성상위체위에서 성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에서 인영은 사실은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동원'이 부재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나비(퓌지스psyche-영혼)모양의 비녀로 가슴을 찌르고 자살한다.

그리고 인영의 마지막 대사, "쓸쓸하구나.."
실재계에 갑자기 마주할 때, 그런 느낌이다.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쓸쓸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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