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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금융위기,사회운동들도 긴장해야.

미국에서 리먼 파산 신청 이후 불어닥치는 금융위기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파급은 더 엄청난데, 한국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세계화(미국에 대한 금융종속)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이명박 정권과 지배계급의 대응을 보면, 과연 이들이 "국민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 세력인지 조차도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업은행의 민영화(투자은행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리먼 인수를 추진해오고 있었고, 까딱했으면 국가 전체를 말아먹을 뻔 했습니다. (산업은행 총재인 민유성은 리먼 서울지사장이었죠.)

그뿐은 아닙니다.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한은의 400조 투자는 얼마를 회수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고, 한은은 이미 잘못된 환율정책의 설겆이에 200억달러 (22조)를 털어먹은 바 있습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이번에 부실위기로 BoA에 인수된 메릴린치에 20억달러(2조)를 투자했었는데, 그것도 큰 폭의 손실로 이어질 전망.

일부에서는 이런 이명박 정권 경제팀의 행태를 보면서, 이들이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일부러 한국 경제위기를 도발하고 있고, 제2의 IMF같은 사태를 통해서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강만수 같은 자야 이미 98년 IMF 협상팀을 이끌면서 IMF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던 자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기업 매각과 같은 엄청난 국부유출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리베이트가 오갔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IMF는 일관되게 강만수 경제팀을 옹호했는데, 말이 안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쯤되니 사람들 가운데서는 강만수는 사실 IMF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 고위관료들이나 특히 경제관료, 금융계 고위인사들은 자녀들이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등 거의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는 자들이 다수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상식적인'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국민연금을 조기에 폭락 증시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정말 막가자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도 이런 투자는 없습니다. 폭락증시를 무턱대고 몸으로 막겠다는 것인데.. 230조 규모인 연금이 올해 무리한 주식투자로 6조3천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방금 나온 뉴스를 보니 국민연금공단이 파산신청을 한 리먼브라더스와 매각된 메릴린치,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한 AIG에 7000만 달러가 넘는 투자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손실로 이어지겠죠.(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2_200809161801471729)

전체 규모에 비해서도, 단기간 손실로 보면 엄청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적인 손실은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적인 불신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이미 연기금의 금융화를 촉진할 기금운용공사 설립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를 비롯한 사회운동의 대응이 중요합니다.)

이번 위기가 아마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할 것같습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위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환율 폭등으로 이후 물가도 엄청나게 오르고, 경기후퇴도 심각해질 것인데, 자영업자의 대거 몰락을 중심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당장 생계가 문제가 되는  빈곤가구가 크게 늘 텐데, 사회운동의 비상한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요구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특히 이 과정에서 당면한 생계의 어려움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의 불만을 어떤 정치적 지향으로 모아낼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이를 위해서는 긴박한 정세에 맞는 정세토론-분석과 대응, 정치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순발력이 다시, 요구되는 타이밍. (상반기 촛불 정세의 무기력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마 몇년후(5년 정도?)로 예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까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대안사회를 위한 이념과 운동, 조직을 재건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야만일 수밖에 없겠죠.

그런 점에서 이번 금융위기는 사회운동이 이후 미국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그것도 금융위기의 형태를 취할 텐데--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장일 뿐 아니라, 자신을 재구성할 수있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상반기의 촛불행진에 이어서 이런 정세에서, 사회운동의 긴장감, 그리고 순발력과 행동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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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장하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장하준의 발전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가능한가"
 
발전주의 : 진보주의자들의 시대착오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 <사다리 걷어차기>에 이어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발전주의를 옹호한다.
 
최근 국방부의 "불온도서" 선정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장하준 교수는 "진보언론"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인기있는 저자였다. 우석훈 교수는 이번 국방부 "불온도서" 보도 이후 언급에서 장하준 교수에 대해 "중도 우파 학자로 후기 케인스주의자와 제도학파, 그리고 독일 역사학파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경제정책, 이념적 포지션이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비판과 더불어 발전주의 경제정책을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구체적" 경제정책에 따라 다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장하준의 경제정책 매뉴얼"이다. 이 책을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 에세이를 "매뉴얼"이라 주장하다니 위트도 있으시다)
 
책의 핵심 주장은 "개발도상국의 성공담은 잘 설계된 국가 개입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24)라는 것. 이런 주장은 책 전체에 일관되게 반복된다. 내가 경제학도도 아니고 꼼꼼히 분석-비판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러한 핵심주장들과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의 시각에서도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개입주의 옹호
   
이런 논지에서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개입주의를 옹호한다. 이와 함께 성공한 반주변의 사례로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를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상당히 선택적이라는 점은 아래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반주변 국가의 성공담, 혹은 발전주의 시대의 이야기에서 장하준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50~6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호황으로 인해 케인즈주의 정책이 가능했다. 금융억압도 한편으로는 위기 탈출을 위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선택이었지만 비금융-산업부문을 통해 충분히 이윤율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세계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자 바로 케인즈주의 정책과 금융억압도 위기에 빠진다. 케인즈주의가 위기에 빠지고 금융이 자유화되었기 때문에 70년대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찬반을 떠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데, 저자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간다.
 
게다가 세계적 발전주의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50~60년대에는 실제로 주변-반주변-중심부의 경제적 격차가 다소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70년대 이후에는 다시 확산된다. 이는 주변-반주변의 발전이 세계자본주의의 동학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왜냐하면 저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할 대상인 주변-반주변 국가들(저자들은 비록 "개발도상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만)이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의 변동은 따라서 관심밖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라서 이 지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동학을 무시하고 발전주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있다. 19세기초에 영국이, 19세기말에 독일과 미국이, 50~60년대에 동아시아가 할 수 있었다고 해서 무역장벽과 개입주의가 지금도 가능한가 혹은 그것을 통해서 발전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무시는 동아시아의 성공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저자들은 동아시아의 상대적 성공--우리도 인정할 수 있듯히 남한과 대만은 20세기에 서 반주변으로 상승한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다--은 개입주의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냉전으로 인한 요인을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이라고 서술한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지만, 그 성공은 두가지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는 냉전으로 인한 미국의 역개방 정책이다. (마셜플랜의 원조 대신, 미국은 동아시아에 시장을 개방한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러한 전략으로 인한 적은 원조규모를 오히려 동아시아가 특권적이지 않았다는 논거로 사용한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수출지향 공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국제적 하청생산구조이다. 이는 미국처럼 법인자본이 직접 진출하지 못하는 일본 자본주의의 취약성으로 인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동아시아 주변-반주변 국가의 산업기반 형성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각 국의 경제정책은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는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경제발전이 순전히 민족국가의 경제정책-전략의 결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요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들에게는 이런 요인들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와 연괸되어서, 저자들은 개별 국가의 독자적인 금융정책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물론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기는 하지만, 과연 개별 국가의 금융정책을 "발전주의적으로" 수립하는 것으로 실제 정책효과가 가능할까? 오히려 주변-반주변은 상시적인 금융위기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개별국가 정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제금융정책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무역-금융정책을 변화시켜야한다. 말하자면 WTO와 FTA를 막아내고 국제협약으로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이다.
 
물론 개별국가의 대응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97~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과정에서 남한과 말레이지아의 대응방식은 크게 달랐고, 이에 따라 경제위기의 강도와 사회적 부의 유출 정도 등이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이를 다른 영역까지 일반화해서, 이러한 개입주의를 통한 발전전략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하다.
 
단적으로, 말레이지아는 금융위기의 충격을 덜 받았지만 남한보다 경제가 더 성장했는가는 물어보아야한다. 말레이지아와 같이 금융통제를 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전과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신흥시장과 금융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지역
   
한편, 저자들은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의 예를 들면서 경제성장이 오히려 민간자본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의 유인정책을 사용하기 전에 생산성을 높여야한다고 지적한다. 크게 틀린 지적은 아닐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 왜 특정한 국가들만 금융투자의 대상이 되는 "신흥시장"이 되는가? 왜 어떤 나라들(아프리카와 같은)은 금융시장에서도 배제되는가?
  
그것은 신흥시장에 대한 민간자본의 투자가 단지 경제성장 정책을 옹호하는 논지로만 언급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신흥시장이란 상대적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한 반주변 국가들에 대한 금융착취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화에서도 배제된 아프리카와 같은 "버려진 지역"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틀에서 접근해야한다.
 
발전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저자들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을 잘 활용했던 일부 민족국가들이 성공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선별적 산업정책, 금융통제, 생산유치 및 일정한 보호무역 등은 그러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시기(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 특수한 지역(동아시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점을 함께 언급해야한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여전히 그러한 정책들이 가능할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런 시간-공간에서조차 주변-반주변-중심부의 위계를 도약하는 민족국가는 20세기 내내 거의 없었다. 주변-반주변의 공업화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반주변의 발전이라기 보다는 공업활동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흔들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의 구조적 종속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발전주의의 환상: 반주변의 재개념화", 아리기 -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과천연구실세미나9> 중) 그렇다면 특정 산업의 확대가 발전주의의 성공으로 언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과 같은 접근은 마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현명한 민족국가의 발전전략이 있다면 그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의 정치적 결론은, 주변-반주변에서 발전주의 국가를 다시 수립하는 것이 된다. 개별 민족국가들은 유능한 전략(이른바 '발전비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데 집중해야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결론을 국제적으로는 물론 남한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는 "미친 경제학자들"의 독특한 발명품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세계자본주의의 금융세계화를 위한 정책, 전략,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신자유주의 교리를 비판하고 대안정책을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을 불러온 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오히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인해) 필연적으로 경제위기와 금융화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변혁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주변, 반주변의 개별국가들이 현명한 경제정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미국발 금융위기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민족국가의 대응은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전체를 변혁하는 것이 난망한 마당에, 각 민족국가별로라도 대안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주장. 그러한 금융위기가 예상될 수록 민족국가별 대안이 필요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대안을 위한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경제정책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미의 ALBA(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와 같은 대안무역구조 구축전략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그러한 민족국가 혹은 지역적 차원의 대안을 발전주의 전략으로 부를 수도 없고, 그러한 발전주의 전략이 성공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필요한 것은 유능한 관료들에게 정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민주화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남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좌파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야 지역적 대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반주변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노동자 인구가 형성되는 과정과 함께, 권위주의 정권의 일방적인 발전전략 추진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폭발해왔다. 따라서 반주변에서 이러한 체제변혁의 확산이 민족국가 차원에서나 지역적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막아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대안세계화와 대안무역
  
이러한 민족국가적이고 지역적인 대안형성과 함께, 국제적 금융자본의 이동을 통제하고 무역자유화를 저지해야한다. 이러한 운동은 개별 민족국가(들)의 정책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제적인 사회운동을 필요로 한다. 민족국가-지역-세계 각각의 차원에서 대안세계화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를 막아내는 다소간 유일한 정치적 경로라고 할 것이다.
  
개별민족국가에서 유능한 관료들이 발전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한 민족국가 간의 경쟁은 결국 세계적 금융위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입정책을 중시하는 발전주의 정책을 운용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독립된 민족국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유기적인 구성단위이자 효과이다.)
 
덧붙이자면, 장하준 교수 등이 주장하는 발전주의 정책으로는 지구적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적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안무역체계의 형성과 대안세계화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생태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개별 민족국가의 발전주의는 생태위기를 더욱 심화할 뿐이다. 저자가 긍정적인 예로 드는 중국은, 산업발전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고 생태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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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발전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아래 두 권의 책을 참고하는 것이 의미있다.
  
조반니 아리기 외 지음, 이미경 외 옮김 / 공감
 
다이앤 엘슨 외 지음, 과천연구실 엮음 /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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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 :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한편, 장하준 교수는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반대하지만 구조조정과 기업화된 운영방식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공부문을 발전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데 활용해야하는 섹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공부문의 사유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노무현 정권 시기에 강화된 시장화된 운영--공기업의 경영혁신지침, 경영평가 등으로 강요된다--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공공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물론,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SOC 산업의 효율화는 필요하겠지만, 여전히 발전주의의 시각에서 공공성은 부차적이며, 국가의 경제정책의 유효성을 높여주는 한에서만 사유화를 반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주장하는 공공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노조운동은 이러한 주장을 섣불리 수용해서는 안된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제로 장하준 교수 식의 주장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수용되는 추세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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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이명박이 당선된 이후에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를 비롯한 "친기업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정책들은 온통 재벌, 대기업에게 유리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이명박의 정책패키지는 이전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급진화시킬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명박의 경제정책들은 "친기업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순은 조만간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경쟁력강화특위장인 사공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발전국가 하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의 재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발전국가를 재도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지,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공일은 5공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인물이고, 3저 호황 시에 재경부 장관이었다. 그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연구소'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씽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와 긴밀하게 연계해왔다.)

 

금융세계화에 대한 실증적 분석으로 채워진 이 책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금융세계화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미국-독일-북유럽 모델을 검토한다.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와 진로가 이 책의 또 한 축인데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책을 소개하는 것이 여기서 목적은 아니니 몇가지 눈에 띄는 시사점을 언급해보자.

 

우선, 금융구조, 기업지배구조, 노사관계 제도/관행을 포함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이 결합되어 있어서 각각 분리해서 몇몇 개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적용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혹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독일에서 산별노조-중앙교섭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복지제도뿐 아니라 기업이 자금을 주식시장이 아니라 주거래은행을 통해서 확보한다는 사정까지 연관되어 있다. 주주자본주의의 취약성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갖는 은행자본과 종업원(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차원에서의 타협도 가능하다.)

 

작년부터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정책"과 같은 경우는 북유럽모델 경제정책 패키지의 일부인 "연대임금정책"의 한국판 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스웨덴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가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연대임금정책을 "노동자양보론"이라고 비판한 입장들도 정당하긴 하지만 더 나가서 말할 필요가 있다. 요컨데 그렇게 제기되어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할만한 정책대안을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운동전략 수준으로 비약시켰다는 점에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주체들의 입장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의도적'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남한이 미국과 같은 조건이 아닌 이상, 미국식 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면적인 것이어야 그나마 '사소한' 개량주의 정책, 사민주의적인 정책이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나의 입장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생산적 팽창이 일어나던 시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경제모델이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반주변에서는 실현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동반되지 않은 채 제기되는 "사회연대전략"과 같은 것은 허망할 수밖에.

 

둘째로,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라는 방식의 금융화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에 조차도 "역사의 필연적인 완성"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심지어는 영미에서도) 주주자본주의가 전면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에도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는 상당히 독자적인 모델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물론 이들이 영미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금융세계화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로 이해하고, 따라서 (쌍둥이 적자로 유지되는) 미국경제의 유지불가능성을 곧 금융세계화된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불가능성으로 등치시키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미국경제의 붕괴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앞으로 발생할 위기의 원인이 모든 국가의 경제모델이 미국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금융세계화가 심각하게 진전되고 있으나 미국과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한국의 조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제체제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껏해야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대안사회 모델로 제기하는 것과 같은) "정책대안"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남한"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체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변혁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대안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요컨데 일국적 모델이 문제가 아니다.

 

세째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정세를 진단하고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국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모순된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으로는 금융허브 구축,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금산분리완화, 출총제완화, 공정위 폐지(축소)와 같은 친재벌적인 금융정책, 그리고 대운하건설과 같이 경기부양을 위한 (아마도 결국은 재정정책이 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몇몇 전략적인 업종에 대해서는 산업정책도 시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는 재벌의 왜곡된 지배구조 보장과 충돌하고 과도한 재정정책은 거시경제 측면에서 금융자본의 이해를 침해한다.

 

아마도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과거에 찬란한 영광을 안겨준 발전주의 전략(산업정책과 금융정책, 재정정책)과 현재 국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모두 결합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동그란 네모"와 같이 불가능한 전략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것은 "친기업정책"이라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지만 조만간 정책적 실패 앞에서는 그런 수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한 쪽의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지점에서 동요하다가 임기응변을 '실용주의'로 포장할 가능성이 많다.(이명박도 노무현만큼 럭비공처럼 튀어다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오히려 정책적으로 일관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예정된) 실패가 가지는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예상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우리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폭로하고 어떤 대안을 낼 것인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재벌옹호 정책을 신자유주의 논리로 비판하는 (참여연대 식의) 비판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위에서 "어떤 다른 대안"과 함께 제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의 주장이 내가 이제까지 언급한 이런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정책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일단 통합신당은 불가능해 보이니, 결국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것인가?) 미국경제의 위기를 예상하는 가운데 내포적 성장전략을 채택하고 조정시장경제와 (숙련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고진로 전략으로 정책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저자가 제기하는 수준의 구체성을 가진 논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대안에 대한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한편, 이런 입장과 지난 대선에서 가장 가까웠던 것은 창조한국당 문국현과 한국사회당 금민이었다.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새흐름"의 일부 분파는 이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에 노동/사회운동 안에서  고전적인 좌-우 구분이 흐트러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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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슬럼,지구를 뒤덮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슬럼이 도시의 미래라고 말하는 이 책은, 단지 도시가 아니라 세계인구의 생존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 책은 어쩌면 슬럼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민중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도시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계최대의 슬럼철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88올림픽을 위한 72만명 철거가 있었던 나라, 그리고 슬럼철거-재개발이 도시 내부의 극단적 분리와 함께 진행되는 나라인 남한에서도 매우 시사적인 책이다.

한편 이 책은 사센의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의 진정한, 그리고 발전된 후속편이라 할만하다. 사센의 책은 금융세계화가 어떻게 초민족적 금융도시를 형성하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 지를 말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걸맞는 금융화된 세계도시가 발전하고, 그 이면에는 세계 전역에서 슬럼이 ‘폭발’한다.(확장 혹은 팽창이라는 낱말의 어감으로는 부적합할 정도로)

도시의 기괴한 팽창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세계인구의 절반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25년까지 세계인구가 100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때 새로 증가하는 인구의 95%는 도시에 거주할 것이다. 이미 세계에는 2000만명 이상의 도시(지대)가 도쿄, 멕시코시티, 뉴욕, 서울(수도권 포함)에 형성되어 있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만 10여개 이상이 될 것이다. 아마도 도쿄-(서울)-상하이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해안의 세계도시가 회랑형태로 연결될 것이다. 도시화는 기존 도시 자체의 확장만이 아니라 시골의 도시화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게 도시는 역사상 최대로 기괴하게 팽창하고 있다. 왜 그런가, 특히 주변과 반주변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팽창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가 이 책이 묻고 답하고 있는 것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도시의 문제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문제라고 말하는 중이다.

도시의 미래는 슬럼

도시화는 산업화 때문일까?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반주변에서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중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뭄바이, 요하네스버그,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파울루 등은 산업화와 완전히 무관하게(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산업은 오히려 축소되는 중이다), 심지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우 농업생산이 후퇴하는 데도 도시는 급격하게 팽창을 거듭한다. (사진은 뭄바이의 슬럼)

도시의 기괴한 팽창은 70년대 이후 외채위기와 80년대 이후 IMF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주변-반주변의 농업을 몰락시켰고 농촌은 공공서비스의 축소(의료지원과 같은)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더 이상 살수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이들이 도시에서 살수 있는 곳은 다양한 형태의, 그러나 한결같이 끔찍한 조건의 슬럼지대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주변-반주변 국가에서 도시의 팽창은 곧 슬럼의 팽창과 정확히 동일한 말이 된다. 슬럼거주자는 선진국에서는 6%, 저개발국가에서는 78.2%에 달한다. 에티오피아와 차드에서는 99.4%의 도시인구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98.5%가 슬럼에 살고 있다. 슬럼이 바로 도시 자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듯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한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쌓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설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 생활의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이 책,33쪽)

슬럼 착취하기

시애틀과 아바나 시민의 1인당 소득격차는 739:1이다. 콜카타에서는 방 하나에 평균 13.4명이 살고 있다. 주거환경의 열악함은 물론이지만 나이로비의 경우 도시 외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월 수입의 반 이상을 출근을 위한 교통비에 사용해야한다. 인구 1000만의 킨샤사는 하수(그리고 분뇨)처리 시설이 “전혀”없다. 베이징에 주로 농민공(비정규직노동자)이 거주하는 슬럼에서는 6000명의 주민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한편, 케냐의 나이로비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슬럼주민들의 목소리는 상업화되기까지한 세계사회포럼에도 충격을 주었다. 아래 사진은 나이로비의 슬럼. 출처:프레시안/엄기호/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인용)


이렇게 빈곤한 슬럼에 대해서도 착취할 무엇이 있을까? 물론.

빈민들이 스쿼팅(squatting, 무허가 토지개척)한 토지는 주기적으로 재개발되면서 개발업자가 이윤을 취한다. 슬럼이 유지되더라도 경찰이나 관료들에게 돈을 상납해야한다.(비싼 유료화장실을 개설하기도 한다.) 세계은행WB의 기만적인 '빈민자조주택‘ 프로그램은 어떨까?

마닐라, 뭄바이 같은 곳에서 이 사업은 “오직” 빈민을 축출하고 개발업자를 배불렸을 뿐이다. 심지어 ’변기설치사업‘같은 경우에도 관리가 되지 않아 오히려 오수가 역류하고 전염병을 불렀을 정도다. 빈민을 위한다는 재개발 사업은, (남한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이지만) 중산층에서 주택을 공급할 뿐, 빈민들에게는 철거와 추방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필수서비스의 사유화는 슬럼의 문제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사유화와 슬럼문제는 직접 연결된다. 특히 치열한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물-상수도 사유화는 의료서비스의 사유화와 함께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의 압력에 따라 상수도를 바이워커에 넘긴 다르에스살람에서는 수도 가격의 폭등으로 주민들은 위험한 수원을 이용해야한다. 그 결과 콜레라, 티푸스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직접 노출된다. 열악한 위생환경은 기생충,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발생시키지만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에게 가족의 생존을 위한 모든 부담을 전가한다. IMF SAPs는 “가족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여성의 노동력을 거의 무한대로 잡아늘일 수 있다는 믿음을 냉혹하게 활용하는 체제이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장시간 노동은 물론 구걸, 매춘에 내몰린다. (이것은 “AIDS 대학살”의 원인이기도 하다.) IMF SAPs가 끝난 남한에서조차 여성일자리 정책과 같은 것들을 보면 이런 기대가 경제관료들의 상식인 것같다.

세계은행의 정책이 또 혜택을 준 집단이 있으니 개발업자들과 이들과 결탁한 관료, 독재자 외에 국제NGO들이다. 이들은 “지역사회 리더쉽을 전용하고 이제까지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공간을 패권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세계은행은 자신들의 사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NGO들을 활용한다.

심지어 이들은 “자활”, “자조”라는 명분하에 슬럼에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도입하고자한다. 슬럼주민들에게 주택증서(등기)를 주자, 그렇다면 그들은 재산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공식경제를 기업형태로 조직하자, 그러면 곧 사업가가 출현하고 재산가와 만나서 일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런 식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대 인상으로 빈민들을 ‘새로운’ 슬럼으로 밀어낼 뿐이다.

국가의 해결책 : 철거

국가의 전형적인 해결책은 철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국제행사가 있을 때에는 더 심해지는 데 88 올림픽 당시 서울수도권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철거는 지금 베이징에서 잔인하게 반복되는 중이다.

특히 도시가 팽창하면서 새롭게 중산층을 위한 교외주택을 건설하기에 입지가 좋은 곳이나, 퇴락한 도심지역은 재개발의 대상이다. (서울에서도 뉴타운 건설을 위한 강북지역의 철거, 청계천 재개발과 도심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극심하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불도저와 경찰, 군인을 동원해서 “밀어버리는 것”이 끝이다. (역시 남한에서도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한번에 수십만명의 주거지를 철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공식부문 ;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도시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잉여인간의 처리장으로 만들었다. 농토없는 농민들의 半프롤레타리아화와 유사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 법적으로 권리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등장.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극단적이어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90%는 이러한 비공식부문이다. 불완전고용과 실업, 식료품노점, 식당, 이발소, 소규모 물물교환.. 같은 것들이다. 국제금융기구와 신자유주의NGO들은 이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자활”을 요구한다. (어디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 같은 곳에서 왔나부지?)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리는 없으며, 다만 정치적 수사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대중들을 보자면, 전통적으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노동자운동의 절대적인 모델로 사고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남한의 좌파들(현장파들)이 사업장(현장)의 노사관계로 제한되는 (전투적) 경제투쟁을 물신화하고 그것이 노동자 운동의 순수한 형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은 사회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 구성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안정적인 임단협이 가능한 사업장 노사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구성되어야한다.(그런 점에서 남한 운동에서 '비공식노동자'란 아예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하긴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것이 인식된 것조차 몇년 안되니.)  

가진 자들의 요새 도시와 새로운 중세

이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 부유층의 요새화된 교외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식 생활양식을 모방하고자한다. 카이로 외곽에도 “비버리힐즈”가 있고 베이징 외곽에는 “롱비치”가 있으며 홍콩에는 “팜스프링스”가 있다.(남한에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이들 지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24시간 사설경비가 이루어지고 개인 수영장과 폐쇄된 지역주민을 위한 헬스클럽, 쇼핑몰, 병원, 고급식당 등이 위치한다. (강남의 주상복합 건물들과 이렇게 같을 수가!) 이들은 경비를 갖추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요새’를 만드는데, 강박증 증세를 보인다. 가난한자들에 대한 공포라고나 할까.

이러한 분리는 초민족적인 금융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주변-반주변의 엘리트들이 ‘안전하게’ 도시의 주민들과 분리되도록 한다. 이들이 생존하는 공간은 슬럼이 넘치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는 뉴욕-런던과 연결된 금융네트워크이다. 이들이 투자하는 곳은 같은 도시 주민들의 일자리가 아니라 미국의 헤지펀드다. 그러니 더러운 도시빈민들과 분리되더라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러한 분리는 도시의 장벽을 건설하고, “새로운 중세”를 불러온다.

콩고의 칸샤사. 이곳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의 중세가 도래했다. 국가의 유일한 자금원인 광산산업은 세계은행이 부추긴 외채(이 돈은 독재자가 스위스은행에 빼돌린지 오래다)를 이유로 외국에 넘어갔다. IMF는 SAPs를 통해서 공기업매각, 공무원해고 등으로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이자까지 악날하게 모두 가져갔다. 공식경제는 물론 국가제도 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붕괴한 이 곳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화폐는 전혀 무용하다. 연평균소득 100달러 이하(1년간 버는 돈이 우리 돈으로 10만원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구의 2/3가 영양실조. 이곳에서는 중세적인 미신이 창궐한다.

절망에 빠진 도시 주민들은 90년대 초 다단계 열풍에 휩싸였고 이것은 91년, 93년 붕괴한다. 이제 IMF와 세계은행도 콩고에서 철수한다. 이제 그들조차 더 이상 착취할 것이 남이있지 않게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세계가 붕괴하고 도박이라는 환상마저 붕괴하자 남은 것은 주술과 예언종교. 오순절파 교회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주술 서비스를 제공한다. 절대빈곤 속에서 선물경제, 호혜교환도 모두 붕괴하고 미신만 남았다. 이들은 추천명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녀사냥을 하는데, 아이가 마녀로 지목될 경우 부모는 아이를 유기해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된다.

새로운 전쟁

슬럼으로 가득한 제3세계 도시의 청년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전의 병사, 범죄조직, 국제테러조직까지 갖가지 형태를 취한다.(그래서 저자는 네그리의 ‘리좀’과 ‘다중’이 이것이냐고 묻는다. 다소 조롱기로.)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은 미국의 펜타곤이다. 공군아카데미, 랜드연구소 등등. 이들은 미래 전쟁을 예상하면서  "도시화지형에서의 군사작전"MOUT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전술을 혁신한다. 21세기의 전쟁은 바로 이러한 슬럼에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미국이 마주칠 것은 반란자들의 도시 해방구이자 범죄의 소굴, 이들은 모두 ‘테러와 범죄집단’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주변-반주변만이 아니라 중심부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 배제에 대해서는 최근 읽고 있는 <공존의 기술-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같다. 이 책은 다 읽으면 리뷰.)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만드는 미래의 지구를 예상하고자한다면,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다소 장황한 인용과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슬럼은 도시의 미래일 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모든 정치적 쟁점들은 이 문제들을 우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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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2)-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지난 번에는 주로 중국에 대한 쟁점, 이번에는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대응전략에 대해서 논의된 것들과 시사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이와 관련해서 심상정, 권영길 등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변화하는 금융세계화

 

금융세계화의 정세는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10년전 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고, IMF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집행기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자본주의도 변할뿐더러 신자유주의도 변화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만드는 위기의 양상도 말이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기의 심화 속에서 무엇이 위기인지, 그것에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를 사고하는 데 중요하겠죠. 10년전 남한의 사회운동이 IMF에 대한 의미있는 반대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노총은 “민족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합의를 통해서 정리해고, 파견제와 같은 IMF의 요구조건을 자기 손으로 합의해주었고 그 후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IMF 협약이 강제된 다른 반주변 국가들의 사회운동과도 크게 다른 모습이었죠)

 

우선 IMF의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있고 “금융세계화”와 그것이 강제하는 구조조정의 주도적인 행위자도 교체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들이 지적되었습니다. (물론 IMF는 애초에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융자본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이후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융시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국가들이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요구의 제안자로 역할을 전환했죠. 지금은 사실상 정책지원기관으로 변신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카리브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남아있지만) IMF의 악명높은 구조조정 때문에 많은 주변, 반주변 국가들이 서둘러 구제금융을 상환하고 정책적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대중적인 저항으로 인해 신뢰성이 약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주도적인 행위자는 오히려 금융시장의 법칙, 사적 금융자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 국가들은 금융시장의 등락에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알아서’ 조정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투쟁으로서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은 다른 것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자간 무역협상--WTO, GATS 등--이 양자간 무역협상--FTA--로 전환되면서 무역자유화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또 한편, 위기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통화위기의 형태로 발발한 이후에 지역적인 수준에서 최소한 통화위기는 막기 위한 장치들이 개발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 같은 경우에도 아세안+3(중,한,일) 틀을 통해서 양자간 외환지원 장치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가 구성되고, 최근에는 IMF의 지역판이라고 할 만한 아시아통화기금(AMF)를 구성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합니다.(98년 직후에는 AMF가 IMF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구성되지 못했는데, 2007년 현재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달러화가 각국의 외환보유고로 쌓여있는 만큼(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죠) 다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의 형태가 아닌 것으로 닥칠 수도 있다는 점. 그렇다면 그에 대응도 다른 방식일 겁니다.(다음 위기의 형태가 무엇일지는 공부를 더 해봐야할 것같네요;;) 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같고, 그러한 위기가 운동을 수세에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정세는 머지 않아서 다시 귀환할테니까.

 

금융세계화에 대한 지역적 대안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CMI, AMF의 창설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의 대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금융세계화의 파괴적인 불안정으로부터 각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죠. 예를 들어 98년 직후에는 운동진영의 어느 분파에서도 AMF창설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을 정도로(물론 당시에 김종필도 언급했던 적이 있죠;) 지역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안전한” 금융세계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IMF가 했던 것처럼 주로 일본자본의 이해에 따라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행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내더라도 그것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요구할 것인지가 쟁점일 텐데,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흥미로운 쟁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권영길 캠프의 정책

 

권영길 후보의 정책 중에 유사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고, 심상정 의원의 정책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아예 부재한 대목입니다.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노회찬 후보 정책에는 언급이 없군요.)

 

심상정 후보의 경우 “동아시아 호혜경제- ‘Social Asia’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정책이 제시됩니다. “글로벌 경쟁 심화에 따른 국가양극화, 패권국가의 일방적 지배를 방지하고, 호혜적 분업체계에 기초한 지역공동체(regional community) 건설”을 중심으로 “역내평화와 호혜적 경제발전을 꾀하려면 처음부터 차이를 해소해야 하고, 이를 위해 ‘Social Asia’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 시민사회 교류프로그램과 아시아 사회헌장(Asia Social Chapter) 채택 △ 개발과 인프라구축, 기술발전에서 국가간 공조와 지원을 강화 △ 동아시아 지역발전기금(ODA)을 조성하고, 달러 통화체제를 대신하는 아시아통화체제(AMF) 등 역내 금융체제 구축.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이제까지 단지 국내 혹은 대북관계 정도의 사고에 머물고 무역과 금융에 대해서 사고하지 못했던 운동진영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단지 지역차원의 통화안정 프로그램 혹은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동북아시대”프로젝트와 달리 민족국가 사이의 호혜평등한 관계, 사회적 교류를 강조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운동적 요구라기 보다는 국가의 전략적 정책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은 대선이라는 공간의 고유한 효과일텐데, 어떤 후보도 (이미 국가의 정부를 수권하기 위한 후보로 표상된 이상) 국가전략 수준의 정책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 예를 들어 AMF 구상과 같은 것인 현재 구성이 합의된 AMF와 사실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시대 전략이라는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심상정 후보 쪽에 정태인씨가 관계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런 맥락일 겁니다.)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 아시아 지역의 “정세”가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남미가 아니고 따라서 ALBA와 같은 대안이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쿠바가 있지만, 아시아에는 그렇지 않을뿐더러 중국은 그러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죠. 게다가 아시아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민족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 일본을 정점으로 해서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폴과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수직적으로 결합된 하청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안이 가능하기 위한 운동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심상정 후보 정책의 문제는 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정책대안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오히려 운동들이 문제겠죠)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국가전략을 제시하고자할 때 처하는 위험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체제, 대안적 국가 간 관계의 형성의 난점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부분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번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월든 벨로는 이 회의에서 CMI, AMF 같은 것들이 지역차원의 ‘정치의 공간’을 연다는 측면에서, 그것에 개입할 수 있고/해야하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달리 생각해볼 지점도 있지요.)

 

이에 비해서 권영길 후보 쪽의 정책은 더 심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부르조아 국가전략과 사실상 아무런 구분도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북방대륙 경제권 개척으로 제4의 세계경제권 주도”라든가, 이를 위한 역내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공동사용과 같은 정책이 있습니다. 주변, 반주변의 발전을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자는 제안이 위기에 처한 금융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스티글리츠(리버럴들)의 것이라는 점은 지난 글에도 언급한 점이 있지만, “북방경제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미 일본 자본에 선점된 동남아가 아니라 다른 경제공간을 찾아가자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민족국가간 호혜평등한 발전 지원이나 사회적 교류를 전제한 심상정 후보 쪽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의 금융, 무역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아제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발전전략인데, 노무현의 동북아시대 전략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습니다.

 

“노동중심경제체제”라는 것을 제안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식기반경제”를 들고 있는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것은 생산으로부터 이탈한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투기운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팽창한 IT 산업의 이데올로기이고 따라서 남한에서 98년 이후 짧은 금융적 팽창(~2002년 경까지) 시기에 “빅뱅”을 경험한 IT 벤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석훈 박사는 권영길 후보의 비전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라고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그 벤처사장들은 짜증나는 '디 워'의 심형래처럼 이른바 반지성주의 "신지식인"들이죠.)
* 레디앙 기사 참고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148

 
지역마다 다를 분기점, 신자유주의 이후

 

그렇다면 이렇게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 제시되는 대안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하면 “대안이 뭐냐”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대안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말인데, 다만 대안들이 “가능한 조건”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가능한 최대한이라고 할 수밖에요.

 

앞서 말한 대로 남미의 알바(ALBA 미주대륙 볼리바르대안)와 민중무역협정(trade treaty of people; Tratado de Commercio entre los Pueblo: TCP) 같은 대안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말하기 힘들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AMF 같은 것을 이야기해서는 지역적 수준에서도 진행되는 금융화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현재 정세에서 가능한 것은, 각 민족국가의 사회운동들이 지역차원의 대안을 “합의”할 수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 이를 통해서 어떤 전략들이 어떤 민족국가(들)의 발전전략이 아니라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취약한 (특히 남한의 사회운동에는 더욱 취약한) 아시아 지역의 사회운동의 강화된 사회운동 네트워크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 지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취약한 것은 사실인데, 지역별로 진행되는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도 아시아가 가장 취약하죠.)

 

그리고 각 민족국가 내에서 대안적인 지역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운동의 문제제기, 그리고 국가를 강제하는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남미에서 ALBA나 TCP가 가능한 것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그 비슷한 뭐라도 있어야겠죠.

 

그러나 사실, 그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는데, 따라서 다소 비관적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지역차원의 대안세계화를 위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의 조건과 상황이 각 지역마다 모두 다 다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이미 이루어졌고 유럽연합도 신자유주의적인 헌법조약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인 지역통합”을 완성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공동지배” 체제를 이루고 있죠. 아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직적 분업체계가 구축되어 있고 민족국가 간의 역사적 구원으로 인해서 지역적인 통합이 쉽지 않습니다.(일각에서는 지역통합을 위해서 민족주의도 개조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반도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해서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그 징후일 수 있다는 것.)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합중국과 같은 식의 지역적 통합도 논의되고는 있지만 만성적인 내전과 민족국가의 취약성, 민주화의 지체 등으로 인해서 지역통합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자본이 그것을 촉진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쉽게 예상할 수는 없는 문제. 대안세계화운동에서는 남미의 경우가 가장 희망적일 텐데,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화할 수 있는 정세는 아니죠.

 

그렇다면 이후에 만약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붕괴하더라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대안체제는 같은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미가 모두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 (다음 세계체계가 있다면 그 때까지) 상당 기간 경합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역사의 상이한 분기, 어떤 지역적 모델도 절대화할 수 없는 혼란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정세에 맞는 대안들, 운동의 전략들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변혁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그것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들이죠. 그리고 (10년전에 IMF 구제금융과 구조조정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미처 사고하기도 전에 불현듯 사활이 걸린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고 사고와 실천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라도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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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노동자운동(1)-중국과 아시아사회운동

태국에서 열렸던 아래 회의에 대한 이야기.(7월15~17)
Understanding Global Finance, Bulilding International Resistance
국제금융의 이해, 국제적 저항 건설

아래 태국에서 진행되었던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대한 아시아 노동자대회'에 연결된 일정. 주빌리사우스는 이 행사들을 연계해서 참가를 조직하기 위해 앞의 일정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방콕 출라롱콘 대학에서 진행.

이 행사는 주빌리사우스 노동자대회에 결합했던 각국의 노조들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의 노조, 농민조직 등 대중조직,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온 사회운동 활동가, 연구자들이 함께했습니다.(공동주최 :Bretton Woods Project, Eurodad, Fifty Years is Enough, Focus on the Global South, Gender Action, IDEAS, Jubilee South APMDD, Solidarity Africa)
* 관련된 프로그램 소개와 일정은 이곳 링크  참조

이 회의는 Conference on A Decade After : Recovery and Adjustment since the East Asian Crisis(아시아 금융위기 10주년 토론회)라는 (주로 학술) 행사 뒤에 이어졌습니다. 회의 제목 그대로, 여러나라의 사회운동들이 금융위기 10년을 맞아서 그 동안의 금융세계화의 양상을 평가-이해하고 운동적인 대응전략을 논의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가지 발제와 토론이 있었는데, 주로 생각해볼만 한 것들을 정리해봅시다.

전체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운동단체들이 모여서 진행하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깊다는 것.(당연한가;;;) 국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운동이나 금융기구의 움직임, 그리고 국가간 체제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심화된 토론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국내에서라면 이런 것들은 몇몇 저자의 책에나 언급되거나, 좌파-현장파들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혹은 개량주의네 하면서 비난을 일삼을 만한 내용들이죠.(금융세계화의 양상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강조하는 것을 왜 개량주의라고 비난하는지 그 머리 속을 이해하기가 더 힘든 노릇입니다만.)

몇가지 쟁점들과 생각해야할 지점들.

중국이라는 문제 - 거대한 팽창

먼저, 전체적으로 프로그램 내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국이라는 쟁점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참가한 대중운동 단위 중에서 중국의 부재가 가시적이라는 것 등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금융세계화, 따라서 미국 헤게모니 하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운명에 중국이 큰 쟁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외환(달러)보유고는 이미 1조3천억 달러가 넘어서 일본을 넘어 세계최대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달러는 외국자본들의 상당 부분이 FDI에 기반하는 데, 이 자본은 주로 미국의 재무성 채권과 미국의 해지펀드 등에 투자됩니다. 이렇게 미국으로 순환된 자본은 다시 중국에 투자되는 방식으로 순환합니다. 알려진대로, 이 순환에 있어서 미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에 비해서 외국에 투자된 미국자본은 두배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가지 입장과 해석이 있더군요. 일단 중국의 거대한 생산과 미국의 거대한 소비가 불안정한 균형에 있다는 건 대부분 동의하는 데 그 함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등등.

일부에서는 중국이 미국이 아니라 주변-반주변 국가들에 대해서 대안적인 투자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래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국이 최근 투자를 전략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스티글리츠의 주장과도 공명할 뿐 아니라 중국 체제의 성격을 볼 때 실현가능성도 의문입니다.

포스트-워싱턴컨센서스를 제안하는 스티글리츠는 (중국만이 아니라) 각국이 외환보유고를 개도국에 투자해서 국제적인 유효수요를 확대하자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진보주의자들.. 리버럴들의 대안이라고 보면 될텐데요,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현재의 금융체계가 붕괴하지 않을 것이고 글로벌한 통치성도 유지될 것이라는 거죠. 이는 현재의 금융세계화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노선일 뿐 아니라, 중국 자체가 이미 대안세계를 위한 어떤 전망을 갖거나 제시할 수 없는 조건에서 그냥 "좋은 희망"일 뿐인 것같습니다.

한편, 예측에 있어서는, 중국이 "때를 기다린다"는 해석도 있습니다.(중국은 미국 시장 외에 대안적인 투자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안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죠.)

어차피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일정한 시기에는 중국이 미국의 쌍둥이 적자를 지랫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중국은 시간을 벌면서 (물론 때로는 심각한 신경전을 펼치─는 척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재무성의 요구나 월스트리트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중국이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고, 중국의 지배엘리트들도 그런 지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전망은 아리기나 백승욱 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국헤게모니의 위기 이후에 미국-중국의 공동지배(스페인-제노바 공동지배와 같이)로 갈 수도 있다는 예상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군사력과 경제적 지배력이 상이한 지역에서 우세하게 되고, 세계체제는 이러한 국가들의 공동지배에 의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쟁점은 아시아의 운명과 관련해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의 내내 여러 섹션에서 쟁점이 되었을 텐데요, 그것이 사회운동, 대안세계화 운동-전망과 어떤 관련을 맺을 지는 이어지는 글에서 더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하죠. 특히 중국의 외환보유고와 관련해서는 아시아 지역 차원의 대안으로 제시기되는 아세안+3(한.중.일) 차원의 양자간-다자간 통화 스왑 장치로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아시아 통화기금’(AMF) 구상과도 관련됩니다. 그것의 의미와 전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튼, 이 쟁점은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 해보죠.

(아시아 지역의 대안적 금융체계에 대한 것은 최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인 심상정 후보캠프에서 관련된 공약을 내면서 쟁점으로 부각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심상정 캠프의 관련된 공약에 동의하지도 않고, 반대에 가까운 입장이지만 그것을 사고하는 것 자체는 매우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경우, 국내적인 변혁과 동시에 남미에서 ALBA와 같은 대안적인 지역경제-금융협력체계를 제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안적인 무역을 시작하는데, 몇개 나라가 석유-의료서비스-콩을 교환하는 망을 만들거나 공동의 지역은행을 창설하거나 하는 것이죠. 변혁의 문제가 국내정치적인 것만 아니라 이미 최소한 지역적 수준의 대안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도 자기 입장이 필요하겠죠. 물론 심상정 후보캠프의 것은 운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전략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여튼 자세한 내용은 담글에서.)

중국의 노동력

이런저런 발제 중에서 강조되는 것은 또한 중국이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 특히 중국의 거대한 노동시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인구로만 보아도 중국의 거대한 인구는 세계 노동력의 1/5 정도에 이릅니다. 이 노동력의 편입이 가지는 의미는, 중국 국내의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죠.

중국에서 온 학자들도 발제를 했었는데, 주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중 한명은 중국의 후진타오 체제가 제시하는 전략으로서 '조화사회'를 언급하면서 노조(공회)설립의 의무화 등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친화적인 체제를 통해서 사회적 불안, 계급투쟁의 촉발을 제어하겠다는 전략인데, 어느 정도로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중국의 이러한 전략이 성공한다면 중국 체제의 안정은 물론, 새로운 노동타협체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겠죠.(그러나 그 반대의 가능성이 더 커보이고 따라서 그것은 반대의 방향에서 국제적인 계급투쟁에 엄청난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국의 지금과 같은 방식의 거대한 팽창은 에너지 수요에 있어서나 환경적인 측면(특히 co2 배출, 지구온난화와 관련해서)에서 재앙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팽창이 어떤 지점까지 가능할지는 알수는 없지만, 어느 시점에 긴급한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적인" 측면은 물론이려니와생산과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기술과 이것의 사회적 조직화와 같은 것들이 정치적 문제로 제기될 것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아프리카

21세기 들어서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를 크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진타오가 아프리카를 순방하면서 외채탕감, ODA 확대, (주로 에너지 관련 국영기업들의) 직접투자 등을 약속했죠. 이러한 중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지원 확대는 이제 미국에 비슷한 규모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이 장기적으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로 나이지리아나 앙골라 등 산유국에 대한 지원이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아프리카는 미국 헤게모니가 배제한 지역이기 때문이죠. 아프리카는 주로 금융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들에게는 변변한 주식시장, 채권시장도 없는 버려진 곳입니다. 전쟁이 나든 인종청소에 학살이 벌어지든 버려두는 것이죠. 그런데 중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입장도 애매한 것같습니다. 여전히 금융적인 투자가치는 없지만 석유자원이 문제인 것이죠.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이 지역의 사회운동도 (서로 다른 이유로) 중국에 더 친화적이고 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일단,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처럼 IMF 협약,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미국, 유럽과 국제금융자본들은 IMF 협약을 통해서 이들 나라의 물, 전기 등의 필수서비스와 에너지, 광물자원을 체계적으로 약탈해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러한 조건을 달고 있지 않죠. (이 점은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나 초국적 금융자본과 관련된 비판이 집중되어 왔던 지점이라는 점에서, 중국에 대해서 일단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프리카의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진보적인 입장에서 인권, 정치 민주화와 같은 쟁점에서 조건을 달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는 것같습니다. 최악의 독재국가들에 대해서도 중국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지역 차원의 대안적인 지역적 협력체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우회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중국이 서구의 이러한 명분의 개입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별로 가능할 것같지는 않지만 말이죠.

또 하나는 중국이 이렇게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외채 등의 방식으로) 자국 자본의 우회적인 침투를 위해 활용했던 서구와는 달리 (기술 이전 등을 통해서) 아프리카 각국의 내재적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역시 중국 정부의 입장이 문제일 텐데요, 여기에 중국은 국내 정치에 있어서 '조화사회'와 마찬가지로 외교에 있어서 '조화세계'라는 전망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역시 같은 만큼의 한계를 가질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국내적으로 발전주의 정책이 중시되고 아프리카 관계에서도 에너지자원이 중시될 것이라는 점.

최근 미국은 이제까지 유럽사령부가 관장하던 아프리카의 군사작전을 총괄하기 위해한 별도 기구로 아프리카사령부(아프리콤)를 신설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각국들이 미군의 주둔에 부담을 느끼면서 군사기지 설치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자, 일단은 군사기지 없는 사령부 형태로 추진하는 것도 검토되는 것같습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비교하게 하는데, 앞으로도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 성공적인 발전국가?

 

발제 중에는, 외환위기 이후의 '쇼크요법'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주로 IMF가 "금융위기를 불러온 경제의 구조조정을 촉진해야한다"는 명분으로 강요하는 협약에 의해서 이루어지죠. 대표적이고 극적인 케이스는 오히려 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 적용된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급격한 사유화와 공공부문의 붕괴.. 이어지는 자신시장의 창출과 급격한 빈곤화, 성장동력의 소실 등이 결과였죠. 물론 IMF는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고, 중국이 이에 비해서 일종의 '연착륙' 모델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더라는 겁니다.(물론 동의하지 않는 토론자들도 많죠.) 베트남 역시 비슷한 케이스로 언급되는데, 발제 중에 언급되는 지표만 봐도 이들의 성장속도는 엄청나더군요. '전성기'의 남한, 대만 등도 앞지르는 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경제성장은 '질서있는 개방' 혹은 '연착륙'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이들 국가가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한 80년대말-90년대초 이전에도 민족주의적 발전국가였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종료 이후 덩샤오핑 시기부터 그랬고, 베트남도 꾸준히 정책을 전환해왔죠. 그 이전의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제3세계 개도국과 발전주의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세계시장에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직업적으로 잘 훈련/교육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당의 지시에 순응적이고 규율있는 노동자들은 국제적인 생산 재배치에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던 것이죠.

 

결국 혁명 몇십년 만에 세계시장에 복귀하면서 애초에 혁명가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공을 만들어낸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북한에 있어서도 북한 엘리트들이나 미국-남한의 리버럴들은 이런 방향의 구상을 가질 텐데요.) 그런 점에서는 쿠바가 이례적인데, 지역적인 정세의 차이(아시아와 남미)와 결합해서 정말로 다른 효과들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망도 아마 다를 수 있겠죠.(이 대목은 좀 우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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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주로 중국 이야기까지만 해야할 것같군요. 국제금융체계 등과 관련된 여러 흥미로운 쟁점에도 중국이 연관되기는 하는데, 그건 그 쟁점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중국이 쟁점이 되는 분위기가, 묘한 점이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주로 서구 쪽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중국은 뭔가 공포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같고, 아프리카에는 어떤 희망, 아시아 참가자들에게는 우려와 기대의 양가감정 같은 것.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민족국가의 지정학적 운명이 미묘하게 인식에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냥 느낌일 뿐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한가지 에피소드. 태국의 비디오샵 같은 곳에는 한국의 드라마가 많이 깔려 있습니다. 인기가 있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는데요, 공중파에서도 주몽과 같은 드라마를 해주고 있는 걸 봤습니다. 필리핀 사람과도 이야기를 하다보니 주몽이 인기리에 방송 중이라고 합니다. 너무 민족적인 판타지라 해외 판매는 글렀겠구나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동남아 TV시장에서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도 느끼게 됐죠.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주몽과 같이 중국과 대립하는 드라마가 수용되는 맥락은 뭘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국과는 어떤 식으로든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시아 각 민족들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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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중국에 대해서는 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아래 연재가 도움이 됩니다.(백승욱, 사회진보연대 기관지 연재)

[{사회진보연대}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 (2002년)

[연재순서]
1. 흔들리는 중국 (1·2월 합본호)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3월호)
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4월호)
4. 黑猫白猫: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6월호)
5. 마오쩌뚱의 유령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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