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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4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3)
    겨울철쭉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18년만에, 두 번째 공연

지난 3월13일, 조계사 안에 있는 한국불교문화역사문화회관에서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공연이 열렸다. 몇몇 동지들과 공연장을 찾았다.

윤선애는 말한다. 18년 전, 1992년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공연 이후, 다음 공연을 언제 할 수 있을지, 혹은 할 수 있을련지도 알 수 없었다고. <소녀의 꿈>으로 시작한 윤선애의 목소리는 맑았다. 천상의 목소리, 역시 윤선애다.

윤선애의 이름을 최근에 다시 듣게 된 것은, 2005년에 나온 앨범 <하산>부터였다. 그리고 재작년에는, 언제였나, 미국산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절정이던 습한 그해 여름, 서울시청광장에서 무대에 섰다. 그녀의 등장에 나는 무척 놀랐지만,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 대부분이 그녀를 잘 알지(혹은 기억하지) 못했다.


*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서 화질은 영 좋지 못하다.


성장에서 현재까지


노래공연은 1부, 2부로 나뉘었다. 1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곡을 배치했다. 2부에서는 현재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 중간에 나온 <윤선애 팬 까페> 중창단 공연까지 감안하자면 그녀의 표현대로 ‘가족’들의 모임같은 분위기도 있다. ‘새벽’ 멤버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 중창단은 ‘중년시대’라는 이름이다.

대학 1학년 때, 아크로폴리스,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불렀다는 <민주>부터(그녀는 84학번이다), <낭만 아줌마>까지, 그게 26년이다. 벌써.

<저 평등의 땅에>,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이 구절에서는 눈시울이 불거졌다. 세상을 변혁할 자신감은커녕, 갈갈이 찢겨지고 뭉개지고 비난받고, 노동자의 이름마저 다시 빼앗기고 잊혀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 노동자. 하지만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그것이 우리 노동자 계급.

나이들어 간다는 것

공연을 함께 추진하고 준비한 이들이나, 윤선애나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이들이다. 공연을 보면서 그/녀들이 나이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녹여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낭만 아줌마>같은 곡까지는 아니라도, 시간의 흐름과 그 변화를 삶의 일부로 소화해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간에 너무 조바심내지 않게 되는 여유랄까, 아직 철이 덜든 30대 후반의 나로서는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나이먹어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니까.
 


PD들의 20년 후

같이 간 동지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공연(3시)에 유일한 “현직 운동권” 집단이었던 것 같은 우리는 인사동에서 간단히 뒤풀이를 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기대했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사회운동과는 너무 멀어졌다는 이유로 실망스럽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냥 윤선애의 노래가 훌륭했다는 이야기만 했다. 사실, <저 평등의 땅에>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한명이 나에게 물었다. “선배는 왜 윤선애 공연에 왔는”지.
PD들의 20년 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땠을까?
나는 조금 슬퍼졌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운동에 가까이 있지 않다거나, 혹은 함께 공연한 <윤선애 팬 까페>의 중창단 멤버들이 현직 대기업 회사원, 자영업자, 학원강사, 컨설턴트, 교수..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NL들은 그랬다. 마음놓고 김대중을 지지할 수 있었고, 노빠가 될 수도 있었고, 청춘의 야망을 어쩌면 막 실현하는 듯도 했고, 또 결국은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오히려 자신을 애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PD들은, 적어도 한 때 진실했다면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적응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했다. 노동자의 이데올로기로 전화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진보신당의 좌충우돌, NL을 비판하고 탈당했으면서도 다른 정치를 시도하지 못하는 현실도 그 일부일지 모르겠다. 혹은 18년을 그저 시계침을 멈추어버린 (더 이상은 PD가 아닌) '좌파' 정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윤선애의 공연은, 1992년과 2010년, 긴 시간이 비어있다. 소련이 망하고, 새벽의 마지막 공연 93년, <러시아에 관한 명상>으로부터 지금 그/녀들이 만난 것은 무엇일까. NL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20년을 기억하고 살아온 PD들에게도 이제 애도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 뒤에 남은 PD였거나 PD의 후배들인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 2006년 <새벽> 공연에 대해서 <월간 사회운동>에 실린 박준도의 글을 함께 소개한다.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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