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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0
    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겨울철쭉
  2. 2007/09/01
    [SMF2일차]새로운 활동양식, 무엇이 필요한가(5)
    겨울철쭉
  3. 200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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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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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12/31
    [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겨울철쭉

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노무현 추모 비판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에 대한 답변
>


참세상에 기고한 <사회운동, 노무현의 그림자에 안녕을>이라는 글에 대해서 최원씨가 논쟁을 제기하셨군요. 글들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1) 참세상에 기고한 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id=1629&page=1
 
(2) 최원씨의 비판 (및 댓글에 저의 답변, 이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질의)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ers_news&nid=53282
 
(3) 최원씨의 저의 댓글에 대한 반비판-질의
http://blog.aladdin.co.kr/trackback/droitdecite/2888296

답변을 요청하시지만, 제가 깊이 논쟁할 사정은 되지 못해서 몇가지만 간단히 적겠습니다. (3) 글에 트랙백을 겁니다.

첫째.

최원씨가 저에게 묻기 전에 먼저 답해야할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2)에 대한 댓글 답변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노무현 추모동참이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애도"라고 등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둘을 혼재해서 쓰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김진숙 지도위원은 노무현을 "애도"하고 있지만 "추모"에 동참하는 정치적 실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둘을 어떤 근거로 연결할 수 있는지 오히려 궁금하군요.

둘째,

제가 쓴 글중에 가장 문제제기하시는 부분이 "정세에 대해서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과 정치적 분석은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이지만, 사실상 다른 대상을 다루는 작업일 겁니다"라는 대목입니다.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에서 <혹은>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최원씨의 논평이 양자의 경계에 있거나 혹은 그 경계를 흐리는 방식의 작업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데리다의 "유령론"이 과연 학제상 정치철학에 속하는지 정신분석학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원씨가 사용하는 논거의 하나가 아닌가요?)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처럼 가능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씨는 글에서 "노선 차이이지, 정치철학 대 정치의 대상 차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문제는 노선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최원씨의 논거가 정세분석보다는 주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철학에 근거해있다는 점입니다.

세째,

이에 대해서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 이후 어떻게 변했길래, '하던 거 계속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는지" 물으셨습니다.

제 글 중에 "노무현을 상대화하고 다른 쟁점들을 부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분리되어있다거나 혹은 하던것 계속하자는 식에 불과한 것(따라서 기존의 실천과 다른 효과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던 거 계속하자는 거 맞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가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가시화"되는 이상, 오히려 하던 거 잘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분노를 노무현 사망을 "매개"로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조직하려는 또다른 신자유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경합한다는 것입니다.

네째,

질의하신 "3번"은 말 그대로 노선상의 입장차이이겠죠.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생각이니 간단하게만 언급하자면,

6.10 집회(저는 2부 노무현 추모문화제 시작될 때에는 자리를 떳습니다만)에서 주된 구호는 (오마이뉴스의 헤드라인을 인용하자면)
"민주개혁 세력 하나됐다, 2012년 정권을 바꾸자"
라는 겁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6.10준비위를 상설연대체로 전환하자는 것은 확정되어 있고, 이후 내년 6월 지자체선거, 2012년 총선, 대선을 공동대응하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결국 87년 "국본"처럼 보수야당의 주도아래 전선이 형성되고, 민중운동이 여기에 복무하는 판인 셈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저 헤드라인,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사회자와 연사들의 발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10여년간 사회운동이 제기해온, 보수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과정이, 한순간에 22년 전으로 후퇴하는 것이죠. 이명박이 20년전으로 후퇴했으니 우리 대응도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민주주의 제기를 중심으로 실천하자는 주장의 정세적 의미도 명확합니다.

---
충분한 답변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선 상"의 입장차이에 대해서라면 몇번의 트랙백 토론으로 생산적인 무엇이 있을까도 싶군요. 당장 운동판에서 "실용주의"를 빙자한(이명박 당선후에 운동판에도 "실용주의"가 유행이죠.ㅋ) 기회주의와 싸우기에도 정신없는 상황이기도 하니까요.

최원씨의 주장이 그런 정치적 기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정세에 개입하는 순간 같은 효과를 낳는 것으로, 심지어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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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2일차]새로운 활동양식,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운동포럼 2일차,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워크숍, “미래를 돌아보라”

2일차 프로그램 중 오후에 진행된 열쇠말(공동의제) 워크숍은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을 바꾸자는 논의였다. 이제까지의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이 변화하는 대중의 감성을 따라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대중을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단지 “형식”에 대한 논의라고만은 볼 수 없는 쟁점이다.

이 주제는 민주주의, 페미니즘, 운동언어, 집회, 교육이라는 소주제들을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많은 대중운동,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은 고루하고, 창의적이지 못하고, 하던 것을 답습하는 데 급급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화석화되어서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운동언어

특히 제기된 영역 중 운동언어의 측면은 중요한데, 대중과 소통하는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지식을 돌려주거나 토론하거나 공감하고자할 때,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많은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워크샵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마치 운동의 언어들 중 모든 경우에 개념(어)들이 사라져야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운동내의 논의, 혹은 이론에서는 정확한 개념(어)는 필수적이다.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대중집회나 선전물, 대중과의 토론에서 언어와 운동전략과 이론의 토론에서 언어는 다른 문제다.(물리학이 쉬운 언어로 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는 이 쟁점을 반지성주의, 반이론주의의 맥락에서 수용하는데, 애초의 취지와도 다르게 위험하다.

한편, 집회에서 “동지 여러분”이라는 호명도 도마에 올랐다. 이 표현이 집회에 조직된 참가자와 그 근처를 지나는 보통의 시민들을 분리하는 효과를 낳으며, 또한 집회 자체가 “자기들끼리”의 자족적인,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행사로 전락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내부의 결의를 다지기위한 집회도 많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중집회에서는 이럴 수도 있을 것같다. 집회 참가자와 근처를 지나는 청중 모두가 시민이라는 점에서, “시민 여러분”이라고 호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배권력은 집회 참가자들을 시민이 아닌, 어떤 동원된 기괴한 대상, 집회 때만 출몰하는 인간-시민이 아닌 존재로 취급한다.(그래서 전경들은 사람을 “몇 점”이라고 호칭한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시민으로 우리와 거리의 시민들을 함께 호명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불균등한 영역들

토론 중에도 지적된 것이지만 워크샵을 구성한 다섯 개의 영역은 상당히 불균등하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은 운동의 가치, 지향과 관련된 것인 반면, 운동언어와 집회 부분은 상당히 형식-양식에 관련된 부분이다. 교육은 양면적인데, 지적 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전략적 시도로, 또한 대안적 이념을 대중과 공유하고 대중이데올로기로 형성하기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반면, 단지 교육형식-방식의 다양화라는 식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이렇다보니, 워크샵의 진행과정에서도 다소 불균등하게 토론이 진행된 느낌이 있다. (혹은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의 지향과 관련된 부분까지 형식-양식과 무차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편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각각의 영역은 병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운동 내 민주주의의 문제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라는 쟁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플로어발언으로 언급하기도 했던 것이지만, 집회에 대중동원이라는 쟁점도 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치 대중동원이 부정적인 것으로 언급되지만 과연 그런가?

대중조직 안에서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 운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회 참석과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매번 사항에 자발성만으로 참여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회보험지부는 지회, 분회마다 조합원 집회 참석 비율이 할당되면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참석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공동체 내에 민주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집회 참여에 대한 합의, 집회 참석 지침을 내리는 집행부에 대한 신뢰, 집회 순환 참석에 대한 현장분회 내 조합원들의 동의 등등. (그래서 3만명이 파업해도 500명만 집회에 나오는 현대자동차노조보다 사회보험노조의 집회 참석, 연대투쟁이 나을 수 있다.)

문제는 공동체 내의 의사결정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관료적으로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해서는 안 되지만, 어떤 합의된 공동체의 운영원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사회보험지부도 시간을 지나면서 이러한 ‘합의’가 점점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권위와 권위주의

또한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는 ‘권위’라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참석자는 “우리가 왜 대표자에게 꼭 존대를 해야하나? 서로 반말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다소 어이없는 일이다.

대표가 존중받는 것은 그가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의 대표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 교육의 1번 중 하나는 위원장-지부장을 존중해야 사측이 우리를 존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존중할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권위라는 것이 모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대표의 대표성 자체가 민주적 과정이라거나 공동체의 합의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심각할 때 그렇다.

권위없는 권위주의만 남는 것은, 운동이 정당성을 구성원들에게 확인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만 조직적 권위로 강제할 수밖에 없을 때 나타난다. 민주주의의 문제와 함께 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동의와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권위 일반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혹은 다소 문화주의적인 반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직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내야할 때 오히려 공동체를 원자들로 분할한다. 그것은 소통을 증진하는 방식도 아니며 운동을 파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반성폭력 활동? 라이프스타일?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전체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가치가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이것이 활동양식 상의 하나의 주제일까? 물론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갖추는 것이 모든 운동들에게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활동양식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할까?

오히려 나는 그것이 운동노선의 문제, 이념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노조가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첫걸음은 노조가 스스로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다.(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념을 수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실천 속에서 주체가 혁신되고, 그것은 다시 운동의 제도들, 형식들을 바꾸어낸다.

즉, 운동의 양식과 형식의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그냥 “좋은 이야기”일 수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직, 운동이 실제로 바뀌기위한 경로를 제기해야한다.

또한 발제자가 지적한 것처럼 페미니즘이 반성폭력활동, 이와 연관된 조직내 교육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그 반대 편향에서 정세적으로 대응해야할 운동의 어떤 조직적 과제라기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이해되는 편향도 있다. 둘 다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대중의 해방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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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양식의 변화가 필요한 측면이 많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현존의 활동양식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동양식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활동양식이 형성된 이유를 먼저 묻고 이해해야한다. 그럴 때 변화가 필요한 지점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이한 활동양식이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집회 양식에 있어서도 소규모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이 의미있는 집회가 있는가하면, 대규모의 군중동원이 필요한 집회도 있다. 그것이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서로 이해되어야한다. (기존의 양식이 문제라고 해서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모두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퍼포먼스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대규모 집회가 의미가 있는 만큼, 활동가들의 직접 행동 켐페인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대중운동이 가져온 제약조건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변화시키기위한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워크샵.


===
끝으로, 민중법정

나오는 길에 잠깐 지켜봤던 민중법정.
철거민이 직접 연기에 나서고 대중이 함께 반응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민중이 스스로 만드는 민중극과 같은 양식.

한편으로 “민중법정=인민재판”일 것이다. (워낙 인민재판이라는 용어가 지배계급에게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말이다.) 인민들이 자신을 착취하던 억압자들을 앞에 놓고 직접 심판하면서 자신을 해방하고 그들의 범죄를 묻는 가운데 공동의 이념을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인민재판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피고라고 하더라고 혹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잊는 순간 위험할 수 있지만.

여튼 오늘 잠시 지켜본 민중재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인민재판의 역사적 전통을 다시 불러오는 것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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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한미FTA를 생각해보자 한미FTA를 추진하는 노무현에게 우리는 그 권한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 노무현은 할 수 없는가?  죄송하지만 할 수 있는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왜? 선거를 통한 대의제가 대표의 자율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국민투표는 따라서 선거 대의제와는 다른 민주주의 모델을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거는 민주적일 수도 있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민주주의와는 별로 상관없는 별도의 제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으로서 선거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제도이고,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보하지도 않는다는 것.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오히려 추첨제도가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거는 귀족정의 것으로, 추첨은 민주정의 것으로 사고 되었다. 추첨을 통해서는 누구나 공직에 접근할 수 있고 관직을 평등하게 교체할 수 있다. 추첨이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한 것도 아닌데, 추첨제도와 부분적인 선거, 자격조건을 혼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폴리스의 예를 보면, 직접민주주의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선거로 구성된 대의제도를 절대화하기 위한 신화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전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 엘리트의 배타적 지배를 막는 효과가 기대되었다. 이것은 지적 차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방지하고, 오히려 지식을 권력의 문제와 무관하게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제도는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발전시킨다. 추첨과 자발성의 결합이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 혹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 구분과는 전혀 다른 평등개념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등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발성이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 독점을 배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생계때문에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시민은 정치로부터 '자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초기에도 마찬가지어서, 이탈리아의 공화제 도시국가에서도 추첨이 널리 사용되었다. 루소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하다고 쓴다. 귀족정은 시민들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체제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대의민주정 사회도 귀족정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17~18세기를 지나면서, 선거가 가진 정치체에 대한 정당성 부여라는 효과 속에서 선거제도는 민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간다. 영국(청교도)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이 특히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된다. 새롭게 구성된 정체에서, 정당성의 확보는 필수적이고, 선거는 여기에 유용했다. 또한 미국 헌법 논쟁은 선거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 통치에 우월한 자를 선정하는 데 선거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민주적 귀족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한다.

한편, 이러한 선거제도와 함께 확립된 대의제에서 여론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대표가 자율적 판단을 허용받았기 때문에 인민에게는 '여론'을 형성할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되어야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 가능해야한다. 이 '의사표현'은 개별적인 것은 물론 집단적인 것을 포함한다.

대의제도는 정당정치 속에서 변형된다.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행위는 소속감을 반영하는 행위가 된다. 특히 서유럽에서 계급정당의 발전은 투표행위는 계급공동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행위로 변형된다. 투표는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정당정치 속에서 '대표의 자율성' 혹은 '의회 내 토론' 과정도 제한된다.

저자는 최근의 경향으로 '청중민주주의'라는 것을 제시한다. 정당보다는 신뢰받는 개인, 미디어 선거, 여론조사의 영향력확대 등등이 요소이다. 저자는 이것이 인민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다. 이 과정은 최근 각국에서 (특히 계급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약화, 인민주의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청중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한 경향인 인민주의 정치로 노무현 정권은 탄생했다. 그 정권은 대의제의 맹점인 권력의 위임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의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통치에 대한 정보의 공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고(한미FTA 협정문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론의 형성과 정치적 의사의 표현도 봉쇄하고 있다.(집회/시위의 원청봉쇄, 방송광고 봉쇄 등등까지) 이를 통해서 노무현 정권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선거제도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데 '민주주의'가 '선거'는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선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함으로서 그것이 민주주의와 갖는 제한적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선거를 절대화하고 맹목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한편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에서 선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와 똑 같은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대중적 권위를 부여하고, 대중이 신뢰하고 이들을 따르도록하는 헤게모니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따라서 다른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들이 도입되어야한다. (일부 공직에는 추첨이 이용될 수도 있다. 자발성과 결합하여, 평등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합원 발의, 대표소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조합원 투표가 보장되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에서 모든 노사합의사항은 '잠정합의'로서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야하는 것과 같은 관행은 직접민주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발명'되었던 87년 민주주의 투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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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가 뭐 이래?

공공노조 출범 이후, 지난 2월 말 선거와 과도기 집행부 이후 제도를 정비하는 3차 중앙위원회가 지난 주 끝난 이후 나에게 특징적인 정서는 (많은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환멸"이다. 이런 낱말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나 자신에게도 분노스러운 일이라도 그렇다.

 

앞서 썼던 글들에도 말했던 것처럼, 공공노조의 출범과정은 대단히 문제가 많이 있었고 많은 쟁점이 '봉합'된 채로 '일단 출범'한 상태였다. 결국 선거와, 그 이후의 제도 정비과정에서 묻혀있던 여러 쟁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들은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위한 고민에 입각해서 발전적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기존 조직들, 특히 대공장 사업장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가운데 (또한 감히 말하건데) 폭력적으로 정리되었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글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선거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공공노조 선거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월말에 진행된 선거는 아래와 같았다.

(1) 공공노조 위원장-사무처장 (2) 업종본부 본부장-사무처장 (3) 지역본부 본부장-사무처장 (4) 업종선출 노조 대의원 일반 (5) 업종선출 중앙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6)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7)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조합원들은 총 7장의 투표용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의원 투표의 경우 많은 경우 16명에 이르는 후보에 대해서 투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선거구의 조합원은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3월말에도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앞서의 선거에서 (1)을 제외하고 선출되지 않은 기구에 대한 보궐선거(많은 경우 6개)에다가 지역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업종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등 총 10장의 투표용지를 받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평조합원의 입장에서 불과 한달만에 이런 선거를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질까?

 

쟁점은, 이러한 과중한 선거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3월말 선거에서 지역본부, 업종본부에 당연직 대의원제도를 임시로 운영하는 등의 방안을 도입하자는 서울본부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제안은, 조합원들이 표찍는 기계도 아니거니와, 지난 선거 경험을 통해 볼 때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진행할 경우 한달간 모든 활동이 마비된다는 점에도 있었다. 학교 비정규직 등 투쟁사안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고 산별적인 사업을 위해서 현장 순회 등으로 조직력을 정비해야할 시기에 모든 일정이 연기된다면 단위 지부의 임단협마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일부의 주장은, 완고하게 "제도에 정한 대로"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약과 규정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지난 선거 이후 모든 제도가 얼마나 탁상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실제로 확인한 이상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대의원 선거는 이번에는 각 단위 자율로(결국 대부분의 단위가 선거를 진행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다)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볼 때 선거는 각 집행기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노조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토론이 가능하게 되어야하는데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결국 과도하게(지역-업종으로 2중으로 불어난) 노조의 기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합원을 동원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노조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조합원이 노조와 노동자 운동의 쟁점에 대해서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조의 활동,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교육이든 토론이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공유하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노조의 방침에 따르는 수동적인 조합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동적 조합원으로 조직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로 선거가 이용되고 있다.

 

조합비, 0.65%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조합비와 관련된 부분이다. 많은 노조에서 보통의 조합비는 1%로 생각되어 왔다. 0.65%라는 조합비 기준은 기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임금규모가 일정하게 되고 조합원수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노조들에서 총임금의 1%가 아니라 기본급의 1% 등의 방식으로 조합비를 낮게 책정해온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이 금액의 10%는 희생자구제-투쟁기금으로, 나머지의 60%는 다시 지부에 교부된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조합비 결정과정에서 많은 "유예"조항이 신설되었다. 기존 조합비가 인상되는 지부에 대해서는 1년간 이를 유보하고 이후 3년동안 점진적으로 인상한다든가, 해고자가 많은 사업장 지부에 대해서는 조합비를 감면한다든가 하는 조항이 그것이다.

 

유예조항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에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고 조합비를 많이 걷었던 지부들은 기존의 규모만큼 부담해야하고, 그렇지 않았던 곳은 오히려 계속 혜택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열심히 하는 데만 부담이 가중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해고자 부담 등을 이유로 사회보험 지부에는 산별중앙에 할당된 금액의 50%를 감면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조합비를 감면하는 대신 해고자들이 산별노조의 각급기구에서 활동한다든가하는 조치가 함께 통과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에서 일하는 해고자에 대해서는 상근자 임금수준의 급여를 지부 대신 노조 중앙이 부담하기로 하면서 '이중혜택'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결정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공동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지부가 어렵다"는 것만이 모든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사회보험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클 수록, 임금이 높은 사업장일수록 그런 모습이 강했다.

 

이는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 어떻게 각종 사업을 산별차원에서 함께 진행하면서 통합력을 증진할 것인가를 각 단위가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사업을 보전하고 산별노조(중앙과 지역, 업종본부까지 포함하여)에 납부되는 기금은 마치 어딘가 빼앗기는 것처럼 사고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출범한 산별노조에 대한 신뢰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산별노조를 출범하는 과정에서부터 원칙으로 천명되던 '단결의 증진과 힘의 결집'이라는 것과는 다른 사고가 팽배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것은 역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보전해야할 사업장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최대한 많은 사업을 산별노조 차원에서 함께 하기를 바라는 곳들이다. 결국, 조합비를 낮게 책정하고 산별노조의 기구들, 특히 지역본부를 약화시키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 사업장과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의 관심이 충돌하는 쟁점이 되었다.

 

결국 결정된 예산안을 볼 때, 가장 예산축소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은 지역본부들이다. 원래 예산의 규모가 작은 상태에서 심지어 가장 작은 강원, 대전충남, 충북, 전북, 울산 등의 지역본부들은 월 130만원 대의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대부분의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 과정에서 기본에 연맹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에서는 가용한 예산이 줄어들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에는 연맹 때와는 '현상유지'를 한 정도지만 전북, 대전충남 등에서는 연맹 지역본부 시절보다 예산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지역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도 발생했던 것이다. 노조 중앙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어서, 현재 작성중인 예산에 따르면 중앙의 각 부서의 사업비가 총 20여만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5개 정도 실이 만들어질 경우 4만 몇천원으로 사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전국단위의 비정규직노조들의 상태는 심각하다. 학교비정규직, 보육, 자활, 사회복지 등 지부들은 이미 지역별로 조직을 편제하기로 하고 중앙조직을 해산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들 사업장은 어차피 임금총액이 적기 때문에 조합비 교부금을 받아도 독자적인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지역별로 편제할 경우에도 지역별 주체형성도 문제이거니와 노조의 지역본부가 매우 취약하게 되면서 공세적인 조직화 사업은 커녕 조직유지도 힘들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조직의 상근자들은 공공노조에 고용이 승계되면서 최소한 지역-업종본부, 중앙단위 이상으로만 인사배치가 이루어지게될 것인데, 이 경우 상근활동가가 조직을 담보하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회의 장소에서 조합비에 따른 각단위 사업비의 시물레이션이 즉각 공개되었다)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산별노조에 대한 각 단위 간부들의 솔직한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히려 저임금 사업장, 중소영세비정규직 동지들이 조합비 인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의 한 간부는 이런 논란이 '우습다'는 말도 했는데, 0.65%로 책정될 경우 산별중앙이 가져가는 조합비 수준은 연맹-민주노총의무금에도 미달하기 때문이다.(최저임금 조합원이 늘어날 수록 산별중앙 사업비는 줄어든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조건에서 지역,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오히려 "연맹 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과정은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운동적 의의를 공유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일단 결의하고 보자'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후에도 최소한의 원칙을 확인하지 못하고 "제도 정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후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산별노조,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된 이유를 사업장 현장 간담회라든가 이런 저런 과정에서 본 것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산별노조는 여전히 명분뿐이거나 개별 기업별 사업장의 이해를 지키기위한 방편정도로 인식되는 것같다. 기업별을 넘어서 적어도 유사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 당장 자신의 일은 아니라도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으면 연대한다는 연대의식이라든가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겠다는 목표들은 공문구가 된다.

 

당장 사업비가 월130여만에 불과한(추가 할당된다고 해도 170만원을 넘기는 힘들 것이다.) 지역본부에서는 운영비도 빠듯할 뿐더러 투쟁사업장이 발생할 경우 제대로 지원도 할 수 없는 조건에 이른다. 이런 조건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거나 지역 차원의 산별교섭이나 사회공공성투쟁과 같은 것은 "좋은 사업계획"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산별노조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산별노조는 이런 것'이라는 관성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내부투쟁은 물론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면서 최대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수밖에. 그것은 당장은 조직적으로는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조직하는 노력과 사업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조직 내에 조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노조운동의 주체를 이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기존의 노동조합들을 바꾸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훌륭한 관점을 갖고 있더라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는, 자신들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그런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막막함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실천이 기존의 운동을 압도해가도록 할 수밖에. 그것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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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영국 인민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무한히 복잡한 공공노조 선거제도

 

공공노조 선거 기간이다.(투표는 21~23일 동안 진행된다.) 금속노조는 1차 선거가 끝나고 결선이 예정되어 있다. 금속노조보다는 작지만 유례없는 규모와 복잡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이 선거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 이것은 선거제도의 지나친 복잡성과 관련있다. 아래 공공노조에 대한 글에서, 공공노조가 지역본부-업종본부의 이중골간 체계를 인정하면서 관료조직이 두배로 확대되고 말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 선거는 두배로 진행되고 있다.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투표용지는, [중앙 위원장/처장], [지역본부 본부장/처장], [업종본부 본부장/처장], [지역선출 중앙대의원], [업종선출 중앙대의원]다섯개 선거에 여성할당 별도 투표용지까지 모두 7장이다. 후보는 특히 대의원의 경우 큰 선거구는 12~16명에 이르는데, 이 결과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후보자수는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이번 선거와 지부-지회 선거를 겸하는 경우에는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게다가 현재 규약규정상 3월 중에 지역본부, 업종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한번 더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이쯤되면 "조합원을 표찍는 기계로 전락.."운운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은 아닌만큼 나는 3월 선거는 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 직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투표용지에는 얼굴도, 소속사업장도 없이 오직 성명 세 글자 뿐이다. 게다가 투표방식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나 엄격하다. 각 종이박스로된 투표함은 모두 20곳을 봉인해야하며, 각 투표용지에 지부 선관위원의 날인이 필요하고, 각 비표는 따로 봉인해서 23일 저녁까지 개표소에 인편인든 퀵이든 박스채로 모두 보내야한다. 볼펜기표는 금지되며 반드시 인주를 사용해야하고... 나는 내가 조직하고 주로 대해왔던 환경미화, 청소, 경비 고령의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장, 투표용지가 빠졌다는 전화를 받으면 어떤 경우에는 (선거구가 다르기 때문에) 단지 옆 지부와 투표용지 크기가 다를 뿐인 경우들도 있다..

 

투표에서 ; 민주주의 조건

 

이쯤되면 직선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조직구성,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조합원을 고문하는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30여명을 모두 투표해야하는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은 근무 중 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한 고민해야할 것들이 (그야말로) 대규모로 누락되고 있다. 아무리 선거가 복잡하더라도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이 있는 법일텐데, 실무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다른 말로 하면 관료기구의 편의를 위해서─면밀하게 보지 않는 것들. 누구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는 가장 쉽게 구성되어야한다. 가장 지적으로 부족한 조합원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제도 전반은 사무전문직 조합원들의 수준, 가장 높은 수준에 맞추어져있다. 이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주류-교육수준이 낮고, 고령이며, 행정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바쁘더라도 더 신경써야하는 부분도 있다. 10여명의 이름이 있는 투표용지에 최소한 사진이나 사업장같은 기초 인적 사항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다. 조합원 선거 공보물에는 대의원의 경우 '엑셀'로 만든 표가 그대로 건조하게 들어간 정도여서 내 선거구 후보를 찾는데 나조차 곤란을 겪을 정도다.(그나마 서울본부의 경우 사진-경력-출마의 변이 담긴 포스터를 겨우 제작했다.)

 

물론, 선거구의 크기, 후보의 크기와 같은 면에서 지역 선거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에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초기업 선거구를 만드는 것을 관건으로 보다보니 일부 선거구는 너무 비대해졌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선거구도 더 분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거가 복잡해지는 것은 지역-업종 이중골간체계에다가 과도한 선거제도, 불친절한 선거행정.. 등의 복합물이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역-현장에 밀착한 운동구조, 그리고 가장 낮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춘 제도의 구성을 지킨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을 텐데.

 

노조에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노조에서의 선거는 또한 지속적으로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조직을 실현해나가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마자 관료조직이 (제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정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들이 우리들이 위임한 사업의 단순한 집행자, 즉 책임을 지며 소환 가능하고 근소한 보수를 받는 "감독과 부기 계원"(물론 여기에는 모든 종류와 모든 등급의 기술자들이 포함된다)의 역할로 끌어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롤레타리트적 임무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먼저 시작할 수 있고 또 먼저 시작해야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같은 시작은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하여 저절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사멸"로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식은 더욱더 단순화되는 감독과 계산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순번대로 수행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특수한 인간계층의 특별한 기능은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질서─괄호없는, 즉 임금노예제와 같은 유보조건이 없는 질서─가 점차 조성되게 할 것이다. (돌베게 판, 71쪽)

 

그러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직무의 기능들이 주민 대다수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 모두에 의해 이해되고 수행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통제와 회계사무로 전화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5쪽)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관리하게 되며 독립적으로 계산을 하게될 그 때에는.. (137쪽)

 

노조기구를 전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전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조직에서 노동자의 자기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착목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사회에 미리 훈련될 것이다.

 

여기서 두개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이 더욱 단순해져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적 차이가 감축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다. 이는 노조에서도 (선거제도까지 포함하여) 노조행정의 단순화, 그리고 단순히 선거를 조합원 머리위로 위해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은 하나의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경우 억압적인 자본주의국가의 '국가관리'가 아니며 '감독과 부기계원'도 아니라는 점. 유기적 지식인이자 활동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행자'로 끌어내려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적 차이를 감축하면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순번대로"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중에 주목할 만한 한 단어가 있다. "순번대로".

레닌은 베른슈타인이 이러한 자신의 주장(마르크스의 주장)을 "원시적" 민주주의라고 비웃었다고 말하면서 반박한다.(62쪽) 따라서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에서 참고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선출되는 것도 있었으나) 추첨에서 의해서 선발되었다. 오늘날, 대의제가 지배적인 "민주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배자이자 피지배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한 제도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것은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운영에 적합하도록 교육되고 훈련될 것을 요구한다.(정체의 필수적인 유지조건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감축) 그리고 그것은 평의회, 법정, 입법 위원회, 민회 등 다양한 기구를 구성하고 필요한 자리에는 선출제를 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인민 그자체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인민의 규모의 문제, 기술적 문제는 전혀 아닌데, 충분히 대규모 조직에서도 추첨은 가능하다.(법정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에는 추첨이 더 적절해보인다. 추첨이 무정부적으로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시 상기해야한다.

 

(이번 공공노조 선거에서 자신이 좌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후보는 자신이 "지도자형"이며 "실무자형"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원장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노조가 지향해야할 '민주정'에 대한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합원-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동체에서 지도자이자 피지도자이다. 그것을 고양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출될 후보가 특권적인 "지도자형"이 될 것을 요구하는 모델은 전혀 아니다.)

 

한편, 여기서 시민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은 "일차적으로 민주정에서 존재한다." 시민은 "판결권과 집행권에 참여하는 자이다." 시민은 민주정에서만 가능할 뿐 아니라, 민주정은 판결권과 집행권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그것이 민주정.

 

레닌이 말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그러한 순번, 혹은 추첨이 사회의 운영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묘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대의원 제도와 같은 경우에는 추첨을 통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아테네에서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출마하고, 추첨하며, 다만 선출될 경우에는 회의 참가에 따르는 일급을 지급할 수 있다.(무한히 복잡한 선거제도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절한 '민주주의 비용'일 것이다.) 지금의 선거에서 20~30명이 출마한 선거구에서 기계적으로 투표하는 것보다는 민주적이다.

 

(대부분의 선거구가 미달이거나 후보자와 선출자수와 같기 때문에 선거제도가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경선이 된다 치더라도 대사업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불리하다. 게다가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노조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모두 투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과제들

 

지금 진행되는 선거의 이례성─그 규모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 만든 조직의 첫선거이며 따라서 아직 '관례'가 아니고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 은 노조에서 선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민주노총 직선제 주장에서도 직선제가 만능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문제는 관료제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 사이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의지와 고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장 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의 복잡성 속에서 끈기있게 작업할 수 있어야 겨우 가능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첫 시도에서 우리에게는 끈기보다는 감각과 속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었고, 당장은 이번 주의 선거, 투표-개표까지 실제로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선거 이후 다시 평가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평가가 선거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관료제의 편의성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증진할 수 있도록 논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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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 한길사


비극과 혁명, 그리고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입각해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비극적tragique이라는 점을 인정하자...(중략).. 그것은 '대중들'(피지배 계급들, 인민계급들에 속하는 개인들의 잠재적 통일성)이 돌이킬수 없도록 분할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대중들이 두개의심금들, 그들 자신의 가상의두 개의 실존및 조직양식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또그 힘이 단순한 '관념들'의 힘과는 비교될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이 전자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혁명적 정치가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왜 비극이며, 또 그것은 비관주의 혹은 종말목적론과는 왜 구별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현재의 운동이다.(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위한 11개의 테제/발리바르)  따라서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정세의 변화, 대중의 움직임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실패해왔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투쟁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쓴 포스트 <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운명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서, 1944년의 스페인 반군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죽음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도 진실을 대면하려는 것,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예언된 전투에 스스로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의미는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주체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저자는  예술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 폴리스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사시는 세계(존재)의 총체성을 반영하고 정신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서사시가 보여주었던 질서있고 조화로운- 완전한 삶의 모형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을 자각하는 서정시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이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반성할 때, 자신은 자립적인 정신으로 나타난다.

서사시의 비극성은 죽음과 삶의 비극성도 완전한 삶의 일부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으로 긍정된다. 이에 비해서 서정시의 비극성은 주체의 갈등과 분열에 뿌리를 둔다.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조건과 정념)의 변화에 따라 주체가 타자가 되는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을 보여준다.(아마도 그것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순간 안에도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과 갈등을 생각해보자.)

(한편, 저자는 비극은 자기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극은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지만, 특히 서정시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런 예로 김수영의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든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른 글(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김수영의 이 시를 비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비극의 시대. 비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 사람들이 함께 비극 공연을 감상하고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코러스와 대화로 구성된 공연방식은 시민들의 교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코러스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코러스가 나타내는) 공동체로의 고양 이전에 시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러한 교통이 비극을 통해 느끼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슬픔이 내 속에서 쉴 때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모두 고통받았고, 슬픔 속에서 평등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인 그리스 비극이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적 정치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혁명적 정세를 이유로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최원씨의 <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이라는 글 참고) 책의 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정치적 예술이란 단순한 저항예술도 아니고 반대로 관변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적으로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것에 대한 가장 심오한 증거이다. 그것은 정치적 예술로서 만남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직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비극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 25쪽

물론, 경험 속에서는 유사한 슬픔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다. 만남의 그런 불가능성은 슬픔을 주체 안에 가두어 둘 것이지만, '자기연민'이 아닌 '교통'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용했던 발리바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비극적 관점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과잉결정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사고.  혁명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비극"인 이유.(『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e 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fataliste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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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한 권. 슬픔을 정념으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책. 따라서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나의 슬픔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그/녀들과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책. 따라서 마침내 '나'라는 자명하지 않은 주체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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