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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12
    [독서]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겨울철쭉
  2. 2007/09/01
    [SMF2일차]새로운 활동양식, 무엇이 필요한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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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MF]노동운동과 사회운동, 1차 워크샵(5)
    겨울철쭉
  4. 2007/06/17
    [SMF]여성노동권 쟁취 투쟁,이라는 쟁점
    겨울철쭉

[독서]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미국의 잘 알려진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성-인종-계급적 차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현실에서 억압은 이런 모순들의 복합체이고, 성과 인종적 차별은 이제 이야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 차별의 문제는 미국의 언론과 학문공간의 담론에서 금기시되어 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간과된다.
 
흑인이자, 노동계급 출신이자, 여성인 벨 훅스는 이러한 모순이 종합적으로 사고되어야하고, 또한 계급적 불평등의 문제 해결이라는 지점에서 이 모순들의 해결책이 만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신지어 베티 프리던의 "이름 없는 문제" 조차도 상류계급의 백인여성들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백인 상류계급-중산층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그러 문제를 겪는 동안 대부분의 엿어들은 장시간 저임금으로 노동시장에 있었다. 그러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말할 때 그  한계 또한 말하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다.
  
"이름없는 문제"의 제기에서 시작된 백인 특권 계급이 주도하는 페미니즘 운동은 개량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벨 훅스는 이 지점에서 차라리 남성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레즈니언 페미니즘-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옹오하는 데, 이러한 입장이 계급적 분석과 융합될 수 있을 것인지는 쟁점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페미니즘은 대학의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유폐되어 가거나 혹은 인종차별문제와 결합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여전히 계급이라는 문제는 배제되고 있다. 이런 동안, 여성의 평등은 특정한 권리--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되고, 특권층 여성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배제된 여성들과 노동계급이 페미니즘을 적대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마치 특권층 여성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이념인 것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 흑인 특권 층도 여기에 가세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문제는 더욱 인종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층계급이 가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에 관해서는, 비난만이 아니라 비판,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여성운동이 누구의 이익을 보장하려고 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리천장' 문제에 집중하는 여성운동은 청소용역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직면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를 사고할 수 있는가? 노동계급은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빈곤은 그나마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던 흑인공동체마저도 파괴해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결합해가기 때문이다. 빈곤한 흑인들은 빵을 위해서는 강도질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마약을 위해서 강도와 살인을 한다. 흑인 공동체는 파괴되어가는데, 이것은 흑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한편, 미국에서 빈곤의 문제를, 따라서 계급의 문제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인종문제와 결합하는 것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흑인들이 빈곤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인구수의 비율로 따지면 빈곤층의 다수는 백인 빈곤층이다. (흑인은 인구비율이 적다)
  
그런데도 빈곤을 흑인들만의 문제로 상징화하는 것은 백인 빈곤층을 보이지않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인종 사이의 계급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빈곤의 문제를 인종과 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계급의 문제로 사고하고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벨 훅스의 이 책은, 이러한 주장은 노동계급이며, 흑인이며, 여성인 자신의 출신배경의 개인적인 경험을 곁들여 말하면서 설득력을 갖는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러한 모순들이 현실에서는 별개의 추상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상호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하나의 개인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한가지를 마지막으로 지적하자.
벨 훅스는 계급적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미국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떻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연대"정도이다. 그러나 누구와 누구가, 무엇을 위해서?
  
벨 훅스의 문제제기에는 "계급"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계급투쟁"은 없다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책개혁으로 충분할까? 오히려 계급문제의 해결은 그/녀들이 자신의 계급적 조건을 인식하고 투쟁할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계급이 가시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특권층의 "나쁜 의도" 때문이기 이전에 계급투쟁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계급을 형성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미국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간과되는 현실은 당연할 수 있다. 도덕적 비판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계급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그녀에게,
보다 체제에 위험해지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흑인 공동체를 파괴하는 마약 밀매보다 계급투쟁이 체제에 더 위험할 수 있어야 그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
 
 
---
벨 훅스는 <행복한 페미니즘>이라는 인상적인 책을 쓴 바 있다.
 
 

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백년글사랑,시와시학사)
 
 
이 책에 대한 리뷰는 아래 참고 (예전 홈페이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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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2일차]새로운 활동양식,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운동포럼 2일차,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워크숍, “미래를 돌아보라”

2일차 프로그램 중 오후에 진행된 열쇠말(공동의제) 워크숍은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을 바꾸자는 논의였다. 이제까지의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이 변화하는 대중의 감성을 따라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대중을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단지 “형식”에 대한 논의라고만은 볼 수 없는 쟁점이다.

이 주제는 민주주의, 페미니즘, 운동언어, 집회, 교육이라는 소주제들을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많은 대중운동,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은 고루하고, 창의적이지 못하고, 하던 것을 답습하는 데 급급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화석화되어서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운동언어

특히 제기된 영역 중 운동언어의 측면은 중요한데, 대중과 소통하는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지식을 돌려주거나 토론하거나 공감하고자할 때,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많은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워크샵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마치 운동의 언어들 중 모든 경우에 개념(어)들이 사라져야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운동내의 논의, 혹은 이론에서는 정확한 개념(어)는 필수적이다.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대중집회나 선전물, 대중과의 토론에서 언어와 운동전략과 이론의 토론에서 언어는 다른 문제다.(물리학이 쉬운 언어로 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는 이 쟁점을 반지성주의, 반이론주의의 맥락에서 수용하는데, 애초의 취지와도 다르게 위험하다.

한편, 집회에서 “동지 여러분”이라는 호명도 도마에 올랐다. 이 표현이 집회에 조직된 참가자와 그 근처를 지나는 보통의 시민들을 분리하는 효과를 낳으며, 또한 집회 자체가 “자기들끼리”의 자족적인,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행사로 전락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내부의 결의를 다지기위한 집회도 많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중집회에서는 이럴 수도 있을 것같다. 집회 참가자와 근처를 지나는 청중 모두가 시민이라는 점에서, “시민 여러분”이라고 호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배권력은 집회 참가자들을 시민이 아닌, 어떤 동원된 기괴한 대상, 집회 때만 출몰하는 인간-시민이 아닌 존재로 취급한다.(그래서 전경들은 사람을 “몇 점”이라고 호칭한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시민으로 우리와 거리의 시민들을 함께 호명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불균등한 영역들

토론 중에도 지적된 것이지만 워크샵을 구성한 다섯 개의 영역은 상당히 불균등하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은 운동의 가치, 지향과 관련된 것인 반면, 운동언어와 집회 부분은 상당히 형식-양식에 관련된 부분이다. 교육은 양면적인데, 지적 차이를 감축하기 위한 전략적 시도로, 또한 대안적 이념을 대중과 공유하고 대중이데올로기로 형성하기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반면, 단지 교육형식-방식의 다양화라는 식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이렇다보니, 워크샵의 진행과정에서도 다소 불균등하게 토론이 진행된 느낌이 있다. (혹은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의 지향과 관련된 부분까지 형식-양식과 무차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편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각각의 영역은 병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운동 내 민주주의의 문제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라는 쟁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플로어발언으로 언급하기도 했던 것이지만, 집회에 대중동원이라는 쟁점도 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치 대중동원이 부정적인 것으로 언급되지만 과연 그런가?

대중조직 안에서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 운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회 참석과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매번 사항에 자발성만으로 참여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회보험지부는 지회, 분회마다 조합원 집회 참석 비율이 할당되면 평등하게 돌아가면서 참석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공동체 내에 민주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집회 참여에 대한 합의, 집회 참석 지침을 내리는 집행부에 대한 신뢰, 집회 순환 참석에 대한 현장분회 내 조합원들의 동의 등등. (그래서 3만명이 파업해도 500명만 집회에 나오는 현대자동차노조보다 사회보험노조의 집회 참석, 연대투쟁이 나을 수 있다.)

문제는 공동체 내의 의사결정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관료적으로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해서는 안 되지만, 어떤 합의된 공동체의 운영원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사회보험지부도 시간을 지나면서 이러한 ‘합의’가 점점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권위와 권위주의

또한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는 ‘권위’라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참석자는 “우리가 왜 대표자에게 꼭 존대를 해야하나? 서로 반말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다소 어이없는 일이다.

대표가 존중받는 것은 그가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의 대표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조 교육의 1번 중 하나는 위원장-지부장을 존중해야 사측이 우리를 존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존중할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권위라는 것이 모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대표의 대표성 자체가 민주적 과정이라거나 공동체의 합의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심각할 때 그렇다.

권위없는 권위주의만 남는 것은, 운동이 정당성을 구성원들에게 확인하지 못하게 되면서 다만 조직적 권위로 강제할 수밖에 없을 때 나타난다. 민주주의의 문제와 함께 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동의와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권위 일반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혹은 다소 문화주의적인 반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직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내야할 때 오히려 공동체를 원자들로 분할한다. 그것은 소통을 증진하는 방식도 아니며 운동을 파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반성폭력 활동? 라이프스타일?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전체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가치가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이것이 활동양식 상의 하나의 주제일까? 물론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갖추는 것이 모든 운동들에게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활동양식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할까?

오히려 나는 그것이 운동노선의 문제, 이념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노조가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첫걸음은 노조가 스스로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다.(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념을 수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실천 속에서 주체가 혁신되고, 그것은 다시 운동의 제도들, 형식들을 바꾸어낸다.

즉, 운동의 양식과 형식의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그냥 “좋은 이야기”일 수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직, 운동이 실제로 바뀌기위한 경로를 제기해야한다.

또한 발제자가 지적한 것처럼 페미니즘이 반성폭력활동, 이와 연관된 조직내 교육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그 반대 편향에서 정세적으로 대응해야할 운동의 어떤 조직적 과제라기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이해되는 편향도 있다. 둘 다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대중의 해방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
활동양식의 변화가 필요한 측면이 많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현존의 활동양식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동양식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활동양식이 형성된 이유를 먼저 묻고 이해해야한다. 그럴 때 변화가 필요한 지점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이한 활동양식이 공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집회 양식에 있어서도 소규모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이 의미있는 집회가 있는가하면, 대규모의 군중동원이 필요한 집회도 있다. 그것이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서로 이해되어야한다. (기존의 양식이 문제라고 해서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모두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퍼포먼스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대규모 집회가 의미가 있는 만큼, 활동가들의 직접 행동 켐페인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대중운동이 가져온 제약조건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변화시키기위한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워크샵.


===
끝으로, 민중법정

나오는 길에 잠깐 지켜봤던 민중법정.
철거민이 직접 연기에 나서고 대중이 함께 반응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민중이 스스로 만드는 민중극과 같은 양식.

한편으로 “민중법정=인민재판”일 것이다. (워낙 인민재판이라는 용어가 지배계급에게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말이다.) 인민들이 자신을 착취하던 억압자들을 앞에 놓고 직접 심판하면서 자신을 해방하고 그들의 범죄를 묻는 가운데 공동의 이념을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인민재판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피고라고 하더라고 혹은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잊는 순간 위험할 수 있지만.

여튼 오늘 잠시 지켜본 민중재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인민재판의 역사적 전통을 다시 불러오는 것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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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노동운동과 사회운동, 1차 워크샵

지난 6월 19일에는 사회운동포럼의 '열쇠말keyword" 주제의 하나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1차 사전워크샵으로 '노동운동 진단과 평가' 라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관련된 자료와 토론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23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적인 시각에서 평가해보자는 것이 1차 토론의 목표이기는 했는데, 썩 잘 된 것같지는 않습니다. 주발제는 노동자운동 좌파-현장파의 입장에서 평가(노동전선)이었고, 토론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는데, 쟁점을 뚜렷히 부각하는 논쟁이 되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다만, 몇가지 앞으로도 쟁점이 될 수 있는 몇가지 문제는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노동자운동과 어떤 관계로 볼 것인가 문제.

사실 '사회운동'의 사전적 의미는 명확합니다.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존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하여 대중이 자발적으로 하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행위. 노동 운동, 농촌 운동, 학생 운동, 혁명 운동 따위가 있다."(네이버 국어사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분리가 장기화되면서, 노동자운동이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경제주의 투쟁에만 몰두하면서, 마치 노동자운동은 사회운동이 아닌 것처럼, 사회운동은 "사회운동단체"라는 것들이 하는 특수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정당운동의 입장에서는 노조-당-사회운동을 삼분하는 사고(전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인식에는 다른 판본도 존재하는데, 노동자운동의 현장파들의 생각입니다. 이날 발제에서 노동전선(활동가조직) 김태연 집행위원장은, 노동운동이 잘 하면 사회운동의 의제라고 이야기되는 교육, 의료, 반전 운동 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변혁운동에서 노동운동 중심성이라는 것을 (부당)전제하기 때문에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노동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발전하면서 그런 사회운동 과제들을 자신의 운동과제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할 수는 있겠죠.(그렇게 같은 취지로 이해하자는 제안이 정영섭 동지의 발언이었던 것같은데 맞나?;;)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운동, 그것이 좌파라하더라도 해온 투쟁의 역사를 볼 때, 좀 심하게 말하면 "듣기좋은 말"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주장은 노동자운동"만" 있어도 된다는 사고를 전제합니다. 운동들간의 교통을 위해서도 별로 좋지않은 다소 '무례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토론과정에서 느낀 것은 노동자운동이 자신을 사회운동의 "하나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회운동포럼을 거치면서, 다른 운동들과의 대화과 교통의 과정에서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 필요도 있을 것같습니다. 물론 이 말이 노동자운동이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수행해야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이 부문운동의 의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러나 유일하지 않은─ 운동주체로서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자신을 위치지워야한다는 말이겠죠.

그렇게 보면,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의 베르티노티가 쓴 <공산주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건설>이라는 글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운동>, 윤소영 엮음/공감 2003에 실림) 몇 부분만 인용하면,

사회운동들의 다원적 성격은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그 자신이 새로이 구성된 정치적 주체를 요구한다. 정치의 위기는 좌파정치, 사회갈등,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재정립함으로써 위기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공산주의 재건은 이런 재정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
우선적으로 대안좌파는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들과 교류한다. 대안좌파의 존재이유는 집단적 행동을 또 다시 유효하게 만듦으로서 정치 자체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개혁에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당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들이 당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70쪽)
 
여기서는 정치운동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운동들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들과 갖는 관계를 돌아보는 데도 좋은 글이죠. 특히 사회운동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정치자체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조건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혹은 노동자의힘과 같은 당-정치조직들이 사회운동에 어떻게 접근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줄 겁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도 이와 유사한 운동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박래군(사회운동포럼 집행위원장, 인권운동사랑방)님이 쓴 제안서에도 나와있으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제안서 "새로운 사회운동, 가능합니다" 읽기

그리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의 재정립의 필요조건으로 공산주의 재건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가 만능이 아니고, 대안세계를 위한 이념적 사상적 지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공산주의 재건으로 지칭합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도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도 중요하겠지만, "공산주의 재건이 필요조건"이라는 점이 공유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대안세계의 상이 무엇인지, 대안세계화'운동'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방식일 수도 있겠죠.

물론 "공산주의 재건"이 스탈린주의나 김일성주의처럼 구 사회주의국가들을 정당화했던 국가이데올로기의 부활은 전혀 아닐 것이고, 오히려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이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포스트마르크스적, 혹은 네번째 공산주의의 형태와 가능성에 관련해서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 이후에는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를 참고해야할 것입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윤소영지음, 공감 2002에 실림. 인터넷에서는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04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더 이어가자면, 발리바르가 지적하는 네번째 공산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페미니즘과 국제주의입니다. 민족형태 비판이 전제되어야하는 국제주의에 대해서는 그래도 좌파들에게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좌파들의 인식도 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김태연 노동전선 집행위원장의 글에서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로 페미니즘 혹은 여성문제와 관련된 부분은 (그것도 관료화에 대한 문제제기 부분에서) 단 한문단이 이렇게 나옵니다.

- 노동운동 내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차별․가부장적 조직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조직문화는 노동운동 내에서 동지적 관계를 파탄내기까지 한다. 동지들의 성차별적․가부장적 행태를 농담으로 용인하는 분위기는 이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자본주의 상품문화의 찌꺼기이며, 전근대성의 잔재를 노동운동 내부에서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안타깝죠. 여기에 대해선 구구절절 더 할 말도 없습니다.;;

여튼, 이 날 토론을 하면서 느낀 것은, △ 사회운동포럼이 보다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이념적 대안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되거나 혹은 최소한 그것을 사회운동진영들이 공동으로 논의해야한다는 점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점 △ 노동자운동이 경제주의에 경도되면서 사회운동과 분리된 역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 △ 특히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과의 결합에 관련해서는 전체 사회운동포럼에서 중요한 결의로 취급되어야할 것이라는 점 등입니다. (쓰고 나니 모두 '과제들'이군요. 내가 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ㅎㅎ)

앞으로 논의가 더 진행되는 만큼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열쇠말 토론에서도 더 많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겠죠. 어차피 사전토론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한 의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의의에 맞게 활동가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군요 : http://sm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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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여성노동권 쟁취 투쟁,이라는 쟁점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사회운동포럼의 사전 워크샵이 진행되고 있다.
전체 프로그램과 취지는 아래 링크 참고.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issue&id=449&page=1
1차> 6월 14일(목):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2차> 6월 28일(목):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3차> 7월 12일(목):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
 
1차 워크샵의 주제는 위에 있는 것처럼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라는 제목. 나도 토론자로 참석했는데, 제목은 마치 나에게 따지는 듯한 느낌. 내가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취조당하는 듯한 입장에서 토론에 임할 수밖에.
토론문은 밑에 있으니 미리 준비한 내용은 보시면 되겠고, 토론과정에서 생각난 몇가지를 언급해보자. (사실 토론문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생각하기에 나름 중요한─문제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은 많이 토론되지는 못했지만,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1차 토론자료 전체는 아래 링크 참고.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21

우선, '여성노동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노동자운동 진영 안에서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게 뭔지 모른다는 얘기다. 심지어, 토론에 참석한 나 같은 경우에도 이게 과연 어떤 개념의 하위 범주인지, 여성권과 관게는, 노동권과 관계는 무엇인지, 어떤 구체적인 실제 사례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 대단히 모호하게 인식할 뿐이다. 이건 노동자운동 안에는 부재한 개념이다.

그러니, 개념에 대한 참가자들 공동의 인식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론이 어느 정도 겉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유의미한 토론들은 진행되었는데, (발언하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발언자를 일일히 언급하지 않고 내 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그럼 왜 (특히 비정규직투쟁 과정에서) 여성노동권 개념이, 혹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노동자운동-노조운동 내에 없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여성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점, 따라서 대증요법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투쟁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같다. 노조운동이 성-맹목적인 상황에서 그것은 노조운동 안에서는 불가능한다. 불행히도 외부에서도, 노동권-여성권을 상호 배제적인 권리로 제기하는 주류 여성운동을 통해서는 노조운동 안에서 문제는 더 퇴행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심지어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조차 여성노동권,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등에 대해서 제기되지 못한다. 남성활동가들은 물론, 투쟁하는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 스스로도 문제를 인식하고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의 실무자로서 내가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프로그램 정도다.
여성노동권이라는 쟁점이 심지어 여성노동자 자신에게서도 제기되지 않는다면(그것은 그녀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당사자들도 그것을 인식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잠재된 그녀들의 목소리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그녀들과 대화하면서, 요구안을 정리하면서, 그녀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조건이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또한 다소 실용적인 접근, 구체적인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조직활동가들이 우선 '여성노동권'을 개념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게 조직해야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그녀들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도록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하고, 활동가들이 훈련되어야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에 구체적인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공간에서 여성노동권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문제도 더 구체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지금 쉬는 입장에서는 다소 '오버'한 발언이었던 셈인데,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 내가 시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제기하고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이런 것들이 실제의 '프로그램'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론회에서 제기된 것처럼 노조가 여성 노동권을 제약하는 모순, 한계를 인식하고 투쟁하려는 관점이 필요하다. (의지와 능력, 용기가 모두 요구된다.) 그것(한계와 모순)은 심지어 노조운동 안에도 존재한다.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노동권쟁취를 고유한 대상으로 하는 노조운동 자체로만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여성노동권의 침해 혹은 부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의 비밀이 작업장 밖, 다른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족형태"가 아닐까.
여성의 특수한 권리로서 '여성권'을 인식하지 않으면 여성의 노동권 쟁취도 가능하지 않을 텐데,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가족형태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더구나 여성이 작업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가족 내에서 마주치는 억업형태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자리는 돌봄노동과 같이 '여성적인 것'이거나, 가족 내 노동과 같이 '부차적인', 따라서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이 당연한' 일자리로 여겨진다. (이것은 두번째 워크샵의 주제이기도 하다. 6월 28일(목):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운동구조에 있어서 노조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비판과 개입이 필요해지는 지점이다. 여성권-노동권을 상호 배제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주류화의 입장에서 노동권에 침묵하는 주류여성운동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페미니즘 운동말이다. (그것이 가능해지다면 이탈리아에서처럼 '노조 페미니즘'이라 불릴만한 것이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이번 워크샵과 같은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포럼과 이번 사전워크샵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다른 일정들 때문에 남은 두번의 워크샵, 토론에 참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의미있는 시도.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첫번째 워크샵에서 참석이 저조했던 노조활동가들의 참가가 중요하다. 세번째, 노조운동 안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이라는 것이 결론에 가까운 토론이 된다면, 두번째 일-가정 양립정책 비판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여성노동권의 침해-부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래는 당일 제출한 토론문

o ‘여성의 일자리’를 규정하는 맥락에 대한 비판 필요

- 60~80년대 섬유산업, 80~90년대 전자산업 등 수출산업 중심의 경공업에 ‘여공’, 90년대 이후 사무보조, 유통, 돌봄 노동의 여성노동자 등, 여성노동자가 집중된 노동영역에 대한 분석필요
-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가치절하된’ 노동에 여성이 집중되고(여성이 집중된 업종이 가치절하되고) 이에 따라 저임금과 고용불안이 일상적. 현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 하에 있다고 할 때, 여성저임금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비판 필요
- 현재 여성들의 일자리라고 이해되는 직종, 직무들은 비정규직, 무기계약제, 외주화 등을 통한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로 새롭게 규정되고 있음.
-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일자리’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사업의 의도가 출산률 저하에 따라 여성노동력을 노동시장에 진입시키는 방안이었다는 점에서 ‘여성 일자리’로 규정된 것으로 볼 수 있음. 정부는 이를 거의 대부분 민간에 맡기는 방식으로 불안정 일자리로 창출할 뿐 아니라, 비정규법안 시행령에서도 ‘정부의 복지대책으로 만들어진 일자리’로 규정하여 기간 제한 없이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함.
- 여성들의 일자리는 항상 가장 불안정한 일자리였을 뿐 아니라, 노동의 불안정화에 가장 취약하기도 함. 따라서 불안정노동철폐투쟁에서 여성의 불안정노동에서는 집중적인 문제제기가 필요
- 그러나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와 같은 문제는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심지어는 여성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에서조차)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결합시키지 못하는 등 제대로 제기되어오지 못했음.
- 다만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문제를 “특권화”할 경우에, 모든 방면에 밀려오는 노동의 불안정화 문제를 노동자 전체의 ‘일반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 현재의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핵심은 노동의 불안정화가 비정규직, 정규직. 업무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에게 밀어닥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여성노동권 문제를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과제로 함께 제기한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임.

o 무기계약제라는 ‘대안’

- 우리은행 사례 이후에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도 무기계약방식으로 비정규법안의 기간 제한을 피해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음
- 정부-자본의 무기계약제의 도입 이유 : △ 계속 교체하는 계약직으로 사용할 경우 비용부담이 더 되기 때문이며, △ 비정규직법안에서 ‘보호’의 방법으로 정부가 ‘사용기간제한’이라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계약기간 문제가 결정적 △ 또한 그 동안 한국식의 연공급 임금체계에서 (노조 등의 반대로) 도입이 어려움을 겪던 직무급 체계를 도입하려는 시도 (일부에서 직무급 체계 도입을 긍정하는 것은 오히려 생계비 임금모델로의 발전이라는 과제에 역행하는 것으로 위험할 수 있음)
- 이러한 대안은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적용 가능한 것 ; 기간제 사용 기간 제한으로 인하여 교체할 경우에 더 많은 인사관리, 교육 비용부담이 발생할 수 있는 직접고용 비정규직, 일부직종(사무보조, 은행창구업무 등)만 적용
- 이러한 일부 직종에 여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성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안인 것은 아님 : 우리은행 300여명(무기계약 배제 인원) 해고사태, 무기계약 시행 이전 학교비정규직 해고사태 등
- 간접고용 노동자(특히 청소용역이나 보육, 간병 등 돌봄 노동), 일용직 노동자(1년 미만 단기간 계약) 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음.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기계약제와 같은 모델은 실효성이 없음.
- 무기계약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는 ‘무기계약으로 전환할 만한’ 일자리/‘외주용역이 어쩔 수 없는 일자리’에 대한  암묵적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음(자본의 입장에서도 정기적인 ‘교체’가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전문성’을 가진 일자리가 무기계약 전환의 대상이 되는데, 무기계약 방식을 요구하는 직종도 이러한 성격의 업무에 집중되어 있음).
- 또한 무기계약제는 직군의 분리를 통해(주로 여성 직군의 분리를 통해) 구조적으로 차별을 온전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고착화할 것임. 또한 성별화된 업무구분을 만연하게 할 우려가 있음.

o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비정규법안 등 비정규직 관련제도의) 성별화된 영향평가의 필요성

- 여연, 여성노조 등은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에 대해서 ‘성별화된 영향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하여 왔음. 여성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많고, 특히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대책이 수립될 수 있기 때문에 제기된 것
- 정부의 대책수립과정에서 실제로는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대책 내용 중 일부에 여성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해서 언급되었음, 공공부분비정규직대책이나 비정규법안(시행령 포함) 등과 같이 비정규직관련 제도에 대한 투쟁에서 그것의 성별화된 효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책을 요구하는 투쟁 필요.

o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는 대안인가

- 비정규직이 이미 주류적 고용형태인 상황에서, 기존의 정규직 모델을 요구하는 것이 대안일 수 있는가 문제는 검토가 필요 (불안정노동철폐,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존의 ‘정규직’ 직제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임)
- 기존 ‘정규직’은 90년대 초중반까지의 경제성장의 상황의 지대를 옹호하면서 기업 내(기업별) 복지와 고용안정에 몰두하여 왔음. 이 결과, 자본은 정규직(노조)을 우회하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기업 내 비정규직은 물론 아웃소싱을 통한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외부화)
- 그런데 비정규직이 이러한 정규직 모델에 편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고, 올바른가 하는 문제
- 현재의 정규직이 확보한 수준의 임금, 고용조건은 특정한 정세의 산물일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비정규직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개별 기업 내에 제한된 노동자에 대한 고용안정을 확보하는 구조라는 점(따라서 운동과제도 기업 내에 집중되고 연대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불안정노동철폐는 곧바로 ‘정규직화’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정규직노조 운동 모델을 모방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음. 이를 초과하는 운동모델-연대 지향적이고 사회운동적인-을 만드는 문제가 될 수 있음.
- 현재 일부 비정규직 운동이 기업 내 경제투쟁에 몰두하고 연대투쟁에 소홀한 방식으로 정규직 기업별 노조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음.
- 오히려 비정규직 운동은 지속적으로 단위 사업장에서는 고용과 관련한 문제를 갖고 싸우지만, 전체 비정규직(에 적용되는) 문제에 대해 싸우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
- 기존의 정규직 노조의 운동 모델을 모방하는 방식으로는 여성노동권 쟁취라는 요구도 도구적이거나 부차적인 문제가 수밖에 없음(특히 기업별 문제 해결 방식에 집중할 경우 여성문제는 도구적으로 활용됨). 따라서 여성노동권 쟁취 투쟁도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다른 과제들처럼, 개별 기업별 요구를 넘어서는 것으로 조직하고 투쟁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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