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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31
    아프칸, 남한정부의 무능과 기만(1)
    겨울철쭉
  2. 2007/07/27
    정교분리와 보편주의(인용)(6)
    겨울철쭉
  3. 2007/07/22
    [독서]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2)
    겨울철쭉

아프칸, 남한정부의 무능과 기만

세 토막의 글
1
. 아프칸 납치 사태에서 남한 정부의 무능과 기만

2. 아프칸에서의 무능과 비교되는 뉴코아-이랜드에서의 신속한 대응
3. 피해자들은 뒤에 숨는 보수-근본주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
 
1.
오늘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청와대, 외통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정부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오늘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 마다 '확인 중'(즉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하는 데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오늘은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물어? 지나가는 미국 개가 웃을 노릇이다. 아프칸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시작이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

아프칸 '정부'는 물론이지만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판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번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없는데 그것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갈등, 탈레반의 잔인성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역시, 자신들의 건재를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생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서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기만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가장 무능하다는  점. 지금의 무능은 아프칸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청와대가 말한 정치적 수단의 한계).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자기 나라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진단,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는 미국의 무책임한 반응들 목록/한겨레신문)


2. 
두번째 인질이 살해되면서 곧장 정부가 한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뚜렷하다.

남한 정부는 아프칸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칸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나는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을 명확히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지금 시점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사태해결을 위해 압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아프칸에 간 것이 책임이라는 식(여러가지 버전의 피해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다소 논쟁적으로 말해보자.
피해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 나는 피해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야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칸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부당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인권으로서 정당화되어야한다.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은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고 이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리고 이들이 아프칸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계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길 수 없을 정도인데,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또 이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를 겨냥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 그 순진함?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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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와 보편주의(인용)

정교분리와 보편주의간의 충돌의 문제에 대한 인용. 이슬람 혹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보편주의라는 의미는 아니고 오히려 그 종교들이 가지는 성격의 일부로서 보편성을 제거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 쟁점을 상기하는 데는 아프카니스탄 인질납치와 관련된 상황 뿐 아니라 주빌리사우스 물-전력 사유화 노동자 회의에서의 논의도 영향을 주었다. 물 사유화 반대 투쟁 등에 종교적 윤리를 반대 논리로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쟁점. (<무례한자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포스트) 다만, 다시 생각해보면 종교직 윤리와 논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 사람이 염두에 둔 것은 일종의 "영성 페미니즘"이었던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편적인 것일 수 있지만, 종교들간의 충돌이 일상적인 곳에서라면, 역시 항상 기존 종교들의 논리에 흡수되거나 동화될 위험에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다.

▒ 원문 :
대안 세계화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사회운동의 새로운 프로세스로서 시민교육운동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700 (장진범)
* 강조와 문단나눔은 나

대안세계화 운동을 위해서는 대중운동들 간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매개할 수 있는 보편주의적 이념들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중 하나일 테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또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조류가 민족형태에 포섭되면서 여러 사회운동들을 매개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해 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보편주의적 이념으로서의 역량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이나 평화주의, 생태주의, 다문화주의 등 다른 보편주의적 이념들과의 대화와 상호개조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보편주의 간의 갈등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특수주의 간의 갈등이라면 특수주의의 상위에 있는 보편주의가 갈등을 매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가문과 가문의 갈등을 상위에서 매개하는 민족처럼. 그러나 쟁점이 되는 것이 보편주의 간의 갈등이고, 따라서 그 상위에 보편주의를 설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그 상징적 사례 중 하나로 프랑스에서 벌어진 히잡(hijab) 논쟁을 들 수 있다. 당시 쟁점은 ‘정교분리’라는 관점에서 종교적 표식이 금지된 프랑스의 학교 안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계 프랑스 여성들이 히잡이라는 이슬람 전통 스카프를 쓰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종족적 차별, 문화적 인종주의 등을 문제삼는 문화주의자들은 이를 허용할 것을 주장했고, 여성의 종속과 불평등, 그리고 그녀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두 가지 보편주의적 이념 간의 갈등은 전면적이며, 아마도 이것이 실천적으로 해결되는 데는 매우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같은 모순을 부정하는 가운데 양자가 (사실상 어느 하나의 절대적 우위 하에) 자연스럽게 수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든지 자신의 이념의 정당성을 근거로 다른 이념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하는 이념은 신뢰하기 어렵다. 우리는 각각의 이념의 정당성을 낳는 복합적이고 불균등한 물질적 조건이 존재하는 한 이 모순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따라서 이 갈등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기예를 익혀야 한다.

 

또한 보편주의에 고유한 위험으로서 자신의 이념에 내재하는 공백과 모순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제어하면서, 이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개방함으로써 보편주의 간의 (갈등적) 교통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민교육은 ‘보편주의 간의 갈등’을 다루는 ‘갈등적 다원주의’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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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먼저 이들의 무사기환을 기원하면서 말하자면]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 인질로 잡힌 후, 이 사건과 관련해서 기독교의 ‘해외선교’활동을 돌아봐야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겨레 신문 기사 등 ; ‘한국=기독교 선교’ 인식 탓 피해 가능성) 이번에 납치된 한국인들의 경우에 직접적인 '해외선교‘ 활동은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건 전 교회의 입장등을 통해서 볼 때) 애초의 취지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뉴라이트 계열의 기독교 우익 NGO인 '기독교사회책임'의 공동대표이기도 한데 그 연관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한 교회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에 함께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은 확인하고 가자. 이 글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고와 비판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그러나 이 전쟁의 한 측면이 근본주의 간의 충돌이라는 점, 그것들이 정치가 불가능지는 정세를 폭력을 통해서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을 모방하는 남한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공격적인 '해외선교' 역시도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정세적 고려 속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입장은 다소 위험하게도 두 가지 모두와 쟁점을 형성할 수 있다. 기독교가 전적으로 문제라는 입장--포탈사이트 덧글에 만연한, 역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입장이며 종교적 비관용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도, 그것은 전혀 다루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예를 들어 "리장"님의 이 포스트--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공격적인 ‘해외선교’ 활동에 나서는 이유는 국내 교회 성장세의 둔화 등에서 가지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종교기관이 (마치 자본과 같이) 무한이 증식하기 위해서 투자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남한 기독교 교회가 성장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남한 교회가 내재화한 이데올로기, 반공발전주의와 관계되어 있다. 기독교 교회는 반공발전주의 국가에 적합하게 조직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였던 셈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면서 진단한다. 그것은 대한제국 말기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상징적 사건으로 하는 초기 조선 기독교 전통의 형성에서 일제에 순응하고 타협한 20세기 초반기,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과 반공발전주의를 내재화한 해방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노골적인 우파 정치세력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이에 비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노동자를 조직했던 진보적인 교회들은 비주류에다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랜드노조가 투쟁하고 있는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7월8일 열렸던 기독교의 대부흥 행사가 바로 "Again 1907"이었는데, 그것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부활하자는 취지였다. 영적 각성, 교회의 통합 증진과 변화와 갱신을 1907년의 정신을 계승을 통해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기업이라는 이랜드의 비정규직 탄압과 이랜드 투쟁에 대한 외면에서 보이듯 그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와 내면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무례’한 것을 넘어서 폭력적인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세 명의 공저자 중 김진호 목사의 글이 가장 주목된다. 그는 1907년의 사건들을 정세적으로 분석한다. 러일전쟁 시기였고, 평안도 지역이 이 전쟁에서 일본군의 배후지였다는 점,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민중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민중들은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독교 교회로 모였지만, 전도사들은 이들 민중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진정한 신앙’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평양대부흥 운동이었던 셈이다.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전도사들은 대중의 상처를 교회제도에서 전도사의 헤게모니 확립, 비정치적인 종교활동으로 이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욕망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한 통합을 선호하는 정서를 형성한다.

 

김진호의 이런 분석은 종교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며, 그 내부에서 상이한 이데올로기가 경합하거나 결합한다는 점, 그것들은 물질적 정세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김진호는 이러한 분석에다가 집단적 정신분석도 결합한다. 일제시기 신사참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공산주의라는 더 큰 적을 발명함으로써 해결하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의 주류 교회들은 미국과 반공발전주의 국가의 지원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는 점, 산업화 과정에서 대중의 동요와 불안을 성장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도 중요한 분석이다.

 

이런 분석은 기독교 교회의 구체적인 인맥을 통해서 연결된다. 주로 백찬홍의 글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이들 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 목사들의 의식, 이들의 인맥이 기독교 교회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은 이런 방식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한 기독교 교회의 현재와 그 역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진호의 글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종교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물질적-정세적인 요인, 이데올로기적인 요인, 무의식적인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김진호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례한 자들의 기독교”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례”는 다른 입장, 견해와 대화를 거부하고, 타자의 비판에 닫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례(禮)”는 발리바르의 시빌리떼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종교가 자신을 하나의 보편성이라고 주장한다면(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자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영적인 것’과 관계되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종교가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례(禮)”를 갖지 못할 때, 즉 무례할 때 그것은 상징적 폭력이 된다.(그리고 곧 쉽게 물질적 폭력으로 전화한다.)

 

김진호는 현재 주류 기독교 교회가 타인에 대한 무례함에서 기인한 위기를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하려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것은 최근에는 시청앞 극우 단체와의 집회(70~80년대 성장한 선발대형교회들), 혹은 보다 세련된 형태로 뉴라이트 운동이나 '기독교사회책임‘과 같은 우익 NGO에 결합(80~90년대 성장한 후발대형교회)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교회들이 성장한 역사와 기반하는 교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반영한다. 주로 강남이나 신도시 중산층에 기반한 후발대형교회들은 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정치적 화법을 구사한다. 이들은 공화당 우파들, 네오콘과 연합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정치개입을 모방하려한다. 이는 향후 남한 정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반독재 투쟁에 결합했던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 80년대 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로 결집한 진보적인 교회들. 이들은 기독교 내에서는 비주류였으나, 70~80년대에 그들의 역할로 인해서 과잉대표되었다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위기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 명망가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정권에 지배엘리트로 합류했다. 그러나 저자들과는 달리 서경석 목사와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가 우파(뉴라이트)로 전향하는 것과 이는 분리해서 볼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어떤 정치분파가 더 효과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가에 판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인 기독교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비록 인맥으로는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신자유주의 정권에 함께 한 인사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 비판과도 결합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러한 운동이 부활할 수 있어야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 내부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

 

1.
저자들은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민중신학이 생소한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이론과 교통하는 것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http://www.minjungtheology.net/

 

2.
내용은 흥미롭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망스러운 점이 많다. 편집 상의 문제와 목사님들 특유의 만연체까지 겹쳐서 상당히 방만한 느낌이다. 저자들 간의 토론을 통해서 내용을 추리고 표현을 손봤다면 발간된 책 분량의 반 이하로도 충분히 내용을 소화할 수 있었을 것같다.(심하게 말하면 1/4;;) 오타와 비문도 많아서 읽는 중간 중간에 걸린다. 내용 구성에 있어서도 내가 주로 언급한 남한 주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에서부터 신학적인 비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상당히 불균등한 느낌이다. 책 말미에 있는 대담도 본문의 내용, 심지어는 표현과 문장까지 반복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했거나 지면 낭비였거나.

 

3.
종교와 정치의 문제. 최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노조들의 필수서비스 사유화 반대를 위한 토론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항이 있다. 어떤 노조활동가가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정치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 종교적인 논리를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인도에서 온 활동가가 강력히 반발한 것. 종교적 논리를 사회운동에 활용하게 되면 곧 종교 근본주의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인도와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정교분리가 확고하지 않을뿐더러 종교 근본주의 간 충돌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의 관계는 다른 조건에 처하게 된다. 이런 사회들에서는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예의 바르게” 개조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종교들과 연합하기 보다는 정치(그리고 사회운동)를 세속화하는 것, 운동에서도 정교분리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종교들이 자신들이 서로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예의, 혹은 시민윤리(시빌리떼)를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정세, 종교들이 처한 조건이라면 종교와의 결합은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서 좌익들이 몰살당한 이란에서의 경험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샤라프의 붉은 사원 공격 이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공세가 확대되고 있는 파키스탄과 같은 지역의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에는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이다.
 

(이슬람이든 기독교이든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오히려 좌파가 투쟁해야하는 이유 등에 대해는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과 같은 책이 도움이 된다. 타리크 알리는 시오니즘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슬람도 개혁되어야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럴 때에만 일상화된 극단적 폭력들을 제어하고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남한에서 사회운동이 진보적인 기독교 교회와 결합했던 경험이나, 남미에서의 가톨릭 해방신학과 민중운동의 결합은 이와 다른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일반화될 수 없다. 그것들 역시 정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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