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야."
- 제롬 대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누구나 위태위태한 시절이 있다. 누가 나 좀 붙잡아 줬으면, 속으로 목메이게 외쳐댈 때가 있다. 이젠 아예 대놓고 공식적인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아이들뿐 아니라 겉으론 멀쩡해뵈는 어른들조차도 말이다. 누가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주변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가족과 친구들, 선생님 기타 주변환경 등등.. 아이들은 혼자 자라나지 않는다. 뿌린만큼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슷하게 거둘 수 있는 분야가 교육이다. 진심으로 사랑받고 나눌 줄 알며 믿음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거센 바람에도 많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도 그런 바램을 가져본다. 시련은 틀림없이 온다. 그것도 자주. 자신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물질적 세계로부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견뎌내고 극복하느냐이다. 부딪히고 깨지고 일어서는 과정의 반복속에서 더욱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울음이 앞서는 우리 아이도 눈물을 멈추고 당당하게 말하는 법 또한 알게 되리라.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내 손을 내줘야겠지. 절벽에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던,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벼랑끝에 내몰려 있던 홀든이 간절히 바랐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말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였다. 공장에 들어간 여자후배가 오랜 투쟁끝에 요구사항을 외치며 옥상에서 몸을 날린후 머리가 깨진 시신과 핏자국이 회사에 의해 긴급하게 치워지는 장면에 경악했다. 20대초반쯤에 나도 현장에 있었고, 기본적인 요구사항에도 해고와 구사대로 응징하는 자본측과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분열되어 가는 동료들속에서 장난처럼 또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 있었다. 단지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지만, 한 인간의 죽음이 너무나 가치없고 허무하게 느껴져 영화의 진행과는 관계없이 정말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었다. 그러나 그때 생명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가치들의 의미는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소심해져서, 열정이 식어서, 투쟁으로부터 멀어져서, 나이들어서 또는 기타 여러 이유로 이제 나는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서 싸우기를 바란다. 죽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투쟁의 대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걸. 내 속과 우리, 그리고 세계 속 전 방면에 다양하게 존재해 있다. 적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싸움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떠나려는 홀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건 진정으로 아꼈던 동생 피비이다. 결국 가출을 포기하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는 홀든, 그도 이제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후 겉돌고 헤매이던 속물들의 세계로 편입하게 될 것이다. 그가 희망을 갖고 꿋꿋하게 살게 되길 바란다. 얌전하게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가길, 여자들에게 집적대지 말기를, 그리고 정말 자신이 꿈꿨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아이들을 지켜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