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넘버원은 거칠고 느리며 무뚝뚝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장 단단한 닻의 사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사슬은 지난 몇 년 동안 닳고 닳아 약해졌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배한 이유이다.'
-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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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의 책 소개 문구는 충격적이었다.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슬프고 우울해진다. 이른바 사상투쟁에서 나는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 이유는 입장의 유보가 아니라 자세한 내용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성장한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입장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직관이었다. 제발로 찾아간 조직을 떠나온 것도 한참만에 다른 조직을 선택한 것도 나만의 기준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단지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반목하는 현장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더 견딜수 없는 건 다른 척, 센 척 하지만 조그만 권력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결국 누구나 비슷해지는 활동가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이었다. 혹시 운동조차 수컷들 권력투쟁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 의심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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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메이데이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인가 나는 노동절 집회에 가끔씩 얼굴만 내민다. 개인적인 사정은 둘째치고 메이데이에도 아무날 아닌척 일해야 하는 중소사업장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변함 없지만, 이제 내 가슴은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다.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했던 '동지'라는 말, 그러나 가슴이 울리지 않는다. 사라진 열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