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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종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버릴 물건들을 한참이나 쥐고 앉아

이사 준비를 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

반 병 남은 와인을 아빠랑 둘이서 비우고 나니

얼굴이 달아 오른다.

 

대학을 졸업한 해 이 집에 왔는데,

마석에서 3년, 명동에서 1년, 길에서 1년

그렇게 빼고 나니

정작 이 집에서 산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뒤도 안보고 달려갔던 마석, 내 첫사랑

그 깊은 상처를 바닥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긴긴 잠을 잤던 곳

한여름의 장거리 달리기처럼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였던 기나긴 농성

그 안에서 인간의 밑바닥을 마주해야 했던 피폐함이 치유되었던 곳 

민주노총 창가에 앉아 뛰어내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백수가 되어 들어앉아 처박혀 있던 곳

이 집에서 였구나.

휠체어에 앉은 엄마의 한없이 쓸쓸한 뒷모습을 보았던 곳도

119를 불러 무기력하게 실려갔던 마지막 날도

이 집에서 였다.

 

아빠는 이 집을 떠나자고 했다.

그건 마치 엄마를 버리는 것 같아 싫다고했던 나도

두팔로 부둥켜 안고 있던 엄마의 물건들을 커다란 쓰레기 봉투에 버렸고

내일이면 떠날 것이다.

 

마석가는 46번 국도만 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었는데

지난주에는 무덤덤하게 마석에 가서 가구를 샀고

오늘은 이사갈 집에서 새 가구를 닦았다.

새로 도배된 하얀 벽지와

월넛마루의 매끈함을 보며

마치 내 삶이 새로워질 것 같은 열기를 잠시 느끼기도 했다.

집을 옮기듯 그렇게 내 맘도 움직이고 있겠지.

꾸역꾸역 살아가야될텐데.

 

이사가야 하는데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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