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세 부담은 전가될 수 있다

조지스트와의 대화

* 헨리 조지 지대조세제의 한계에 대하여 어느 분들과 대화하면서 쓴 글입니다.

 

어떤 사람은, 땅주인들끼리 경쟁하는 것으로 지대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 같은데,
지대는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지대는 헨리 조지의 분배법칙으로 결정된다.(그의 이론에서 유일하게 계승해야 할 것이 이 법칙이고, 나머지는 사실 허접쓰레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자가 노동생산물을 생산한다
이 가운데 얼마가 노동자 몫으로 떨어지고 얼마가 땅주인 몫으로 떨어지느냐, 이게 어떻게 결정되는지 밝혀놓은 게 분배법칙이다

노동자한테 떨어지는 몫을 임금, 땅주인 몫으로 떨어지는 걸 지대라고 부른다
즉, 분배법칙이란 임금과 지대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생산물=임금+이자+지대 ...노동생산물은 임금,이자,지대로 분배된다.
(임금은 노동자가 먹고, 이자는 자본가가 먹고, 지대는 땅주인이 먹는다)

따라서, 임금=노동생산물-지대-이자 ...인데,
헨리 조지는 이자 역시 분배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걸 간과했다.
그는 화폐제도 문제에 대하여 무지하여, 이자도 노동자들이 얻는 몫으로 취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룰 것임.
지금 다루면 지대 문제가 혼동될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임금+이자=노동생산물-지대 ...가 된다
위 등식에 의하면 지대가 0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은 전부 노동자들 몫이 된다
다시 말하여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이,
지대를 내야 하는 땅에서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가 된다.

땅주인들의 땅은 공짜땅을 넘는 이점이 있고,
(그런 이점이 없다면 지대를 낼 필요가 없다.)
그 이점 때문에 공짜땅보다 더 많은 노동생산물이 나온다.
따라서 땅주인은 그 이점에 대하여 반드시 지불받으려고 한다.
노동자들이 땅을 빌리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부분을, 땅주인은 자기 몫으로 청구한다.
이 경계를 헨리 조지는 '지대선rent line'이라고 불렀다

땅주인들끼리 경쟁하여 지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땅주인의 땅'과 '공짜땅'이 경쟁하여 지대가 결정된다.

먼저 위 법칙을 명확히 새겨야 한다.
이게 "지대조세제는 효과가 없다"라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기본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조지스트가 혼동하는 문제는,
지대를 세금으로 몰수하여 기본소득으로 분배할 때
땅주인이 그 세금 부담을 세입자와 노동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가..다.
지대를 세금으로 몰수하여 얻은 수익을,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한다면 떠넘길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지대선을 경계로 하여 임금 쪽을 증가시키게 되니까. 실비오 게젤에 따르면, 이 경우에 땅주인은 두 가지로 공격받게 된다.
첫째, 토지세 부담 (토지세 부담을 떠넘길 수 없으므로, 이 부담은 땅주인이 지게 된다)
둘째,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이,
노동자들이 지대를 내야 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이므로)

반면에 지대를 세금으로 몰수하여 얻은 수익을, 땅주인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한다면 떠넘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지대선을 경계로 하여 지대 쪽을 증가시키게 된다.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가 늘어난 것이 아니므로 땅주인은 더 남겨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실비오 게젤에 따르면, 이 경우에 노동자는 두 가지로 공격받게 된다.
첫째, 토지세 부담 (토지세 부담을 떠넘길 수 있으므로 이 부담은 노동자가 지게 된다)
둘째,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 (지대가 늘어났으므로 임금은 줄어든다)

토지세 부담이 전가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조지스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토지세가 어떤 면에서 다른 세금과 다른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 다른 세금은 전가되지만 토지세는 전가가 불가능하다. 즉 토지 소유자가 토지세를 부담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세금의 전가는 가격에 따라서 수요량과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는 재화에서나 가능하다. ... 그것은 가격 변화에 민감한 쪽이 덜 부담하게 된다. 만약 연필 소비자들이 연필의 가격 변화에 민감하다면, 즉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연필이 아닌 다른 필기구를 구입한다면 연필 생산업체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토지는 가격에 따라 그 양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토지는 공급이 완전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토지세를 부과하면 토지 소유자가 이를 부담할 수 밖에 없다.
...
현실 시장은 토지 또는 상품의 독과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토지세가 얼마간 전가될 수 있다. 토지 이용자 겸 토지 소유자가 토지 생산물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린다면, 토지세의 일부를 수요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 물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서 이윤도 줄겠지만, 토지세를 모두 떠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하면 토지세를 어느 정도 전가할 것이다." <토지정의, 대한민국을 살린다> 제4장 토지 강화와 조세대체 전략 (109-112쪽)


이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조지스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연필에 세금을 매길 때 연필소비자가 연필 말고 다른 걸로 갈아타면 그 세금을 물지 않고 연필생산자가 물듯이, 땅에 세금을 매길 때 땅주인이 땅 말고 다른 걸로 갈아타면 그 세금을 물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세금을 전가할 수 있다. 하지만 땅을 대신할 대체물은 없기 때문에(그리고 새로운 땅을 공급할 수도 없기 때문에) 땅주인은 다른 걸로 갈아탈 수 없다. 따라서 세금을 남한테 전가할 수 없다.”

조지스트들은 토지세를 직접 전가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위의 비유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조지스트들이 위에 든 비유는 그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즉, 땅주인을 연필소비자에 빗대고 세금이 전가되는 사람을 연필생산자에 빗댄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땅주인은 땅을 소비(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땅을 소유한 상태에서, 땅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땅을 공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세금이 전가되는 사람(임차인과 노동자)이 땅을 생산(공급)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분명하니 그를 연필생산자에 비유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이 비유는 토지세가 직접 전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토지세 부담이 간접적으로 전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기에는 부족하며, 따라서 그 비유는 섬세하지 못하고 매우 부주의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연필소비자는 임차인, 연필생산자는 땅주인에 대응시켜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

정부가 땅주인한테 토지세를 부과하고 땅주인이 그 세금을 임차인한테 떠넘기려고 할 때, 그 임차인이 대체재인 공짜땅(지대가 0인 땅)으로 갈아탈 수 있다면 땅주인은 그 토지세를 전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짜땅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토지세 부담은 전가되며, 지대조세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비오 게젤은, 토지세가 전가되지 않으려면 토지세 수익이 공짜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땅을 공짜땅으로 만들 것을 주문한다. 즉 땅사유권을 폐지하고, 땅을 국유화하며, 땅을 공공임대로 이용하게 하여 모든 지대를 공공이 회수하여 그것을 복지 재정으로 삼자는 것이다. 이것은 땅사유권을 남겨둔 채 진행하는 기존 복지정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복지”라는 이름을 붙여도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기존 복지정책은 땅사유권이 복지정책의 효과를 무력화한다. 복지정책의 혜택은 모두 지대에 반영되어 그 효과가 상쇄된다. 그것은 지대선을 경계로 할 때 지대 쪽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게젤이 제시하는 방법은 땅사유권을 폐지하므로 복지정책의 효과는 모두 온전히 살아남는다.

조지스트들이 범한 치명적인 오류는, 직접적으로 세금이 전가되지 않는 것만 보고 그 부담이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 전가될 수 있는 다른 경로가 없을 거라고 단정지은 것에 있다. 직접적인 세금 전가는 없으나 그 부담이 지대라는 부메랑으로 임차인과 노동자를 공격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지대조세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곧바로 땅사유권을 폐지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근거는 바로 헨리 조지의 분배이론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논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으며, 부정하려 한다면
헨리 조지의 분배이론을 날려버려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이 모순이 있을 때는
이론을 날려버리든지 실천을 날려버리든지
둘 중 하나는 날려버려야 한다.
아무것도 날려버리기 싫다면
바로 그 어리석은 사람이 날아가게 될 것이다.



추신: 여러분 가운데 이 분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나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이 토론에 참여할 만한 배경지식이 없는 것이다. 토론에 참여하고 싶다면 먼저 이 이론을 이해해야 한다. 토론은 기본전제를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이 경우에는 헨리 조지의 분배이론이다. 기본전제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 때는 토론이 아니라 강의를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과 다르다며 반론(反論)이 아니라 무론(無論)을 주장하기도 한다. 토론에서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궤변에 무슨 얘기를 더해주랴마는,
그런 사회운동가는 이론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문제상황을 돌파하려 할 것이고
땅사유제 아래에서는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지겨울 정도로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다가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데에도 많은 힘이 든다.
하물며 70억 세계인구가 사회운동에서 잘못된 경로로 가다가 올바른 길로 돌아오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소모되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겠는가.
이런 점을 진지하게 고려해본다면,
고작 며칠간의 토론으로 그 엄청난 삽질을 막은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약한 지성은 비판을 견딜 수 없다
나약한 지성은 비판에 직면하면, 겁을 먹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덮어버리고 쉬쉬하고 토론의 장을 비공개로 처리한다.

하지만 진리는 그런 것들을 다 엎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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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3 18:41 2016/04/2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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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Society and <THE NATURAL ECONOMIC ORDER>

칼럼

According to Soros, "Reflexivity applies to situations that have thinking participants. The participants' thinking serves two functions. One is to understand the world in which we live(cognitive function). The other is to change the situation to our advantage.(participating or manipulative function)."

 

Soros argued that the prosperity of open society needs the condition that cognitive function is predominant over manipulative function; because if the freedom of open society distorts the truth, we cannot say that an open society is better than a totalitarian state(In the totalitarian state the ruling classes can manipulate the truth, whereas in the open society all people can do it)

 

How can a cognitive function be predominant over manipulative function? How can the will to understand the reality to be predominant over the will to manipulate it?; it can be only in the condition that it is more profitable and only Silvio Gesell's "Natural Economic Order" makes it possible.

 

According to reflexivity, participants' thinking can change reality and the reality can change participants' thinking again and again.

 

"Feedback loops can be either negative or positive. Negative feedback brings the participants’ views and the actual situation closer together; positive feedback drives them further apart. In other words, a negative feedback process is self-correcting. It can go on forever and if there are no significant changes in external reality, it may eventually lead to an equilibrium where the participants’ views come to correspond to the actual state of affairs. That is what is supposed to happen in financial markets. So equilibrium, which is the central case in economics, turns out to be an extreme case of negative feedback, a limiting case in my conceptual framework.

By contrast, a positive feedback process is self-reinforcing. It cannot go on forever because eventually the participants’ views would become so far removed from objective reality that the participants would have to recognize them as unrealistic. Nor can the iterative process occur without any change in the actual state of affairs, because it is in the nature of positive feedback that it reinforces whatever tendency prevails in the real world. Instead of equilibrium, we are faced with a dynamic disequilibrium or what may be described as far-from-equilibrium conditions. Usually, in far-from-equilibrium situations the divergence between perceptions and reality leads to a climax which sets in motion a positive feedback process in the opposite direction. Such initially self-reinforcing but eventually self-defeating boom-bust processes or bubbles are characteristic of financial markets, but they can also be found in other spheres. There, I call them fertile fallacies—interpretations of reality that are distorted, yet produce results which reinforce the distortion."-George Soros, Soros Lectures

 

Cognitive function and manipulative function can interfere with each other. Therefore we cannot arrive at the objective truth. The only thing we can do is approaching it. Approaching the objective truth means that we aim at "the fewer fallacies from the long-term viewpoint". If only aiming at the fewer fallacies from the long-term viewpoint is more profitable than telling temptation lies for a moment, people will do it.

If you want to understand the truth, you must watch it as long as possible. The longer the term is, the closer you approach the truth. You will lose the truth if you watch only a phase of the total phenomenon as a blind man touches the elephant. If you focus on the short term, you cannot see the truth. When you date with your girlfriend for just 1 hour, you can be deceived by her, but when you marry her and live together all your life, you cannot be.

In general, manipulating truth is possible only for a short term. it must be unveiled as time goes on. Therefore, the more people are led to maximizing short-term profit, the more they will manipulate the truth.  On the contrary, the more they are led to minimizing long-term depreciation rate, the less they will have the motive to do it and even it could be impossible.


 

두 가지 돈의 그래프 영어.png

explanation: 1 - the basic condition that money creates   2 - the direction of investment

 

Existing money makes economic agents seek to maximize short-term profit. According to Silvio Gesell, existing money's face-value is constant, whereas goods rot or perish, so they are not same as a medium of saving. All people prefer money to goods as a medium of saving. For this reason, the exchange between both of them is not fair, and money asks a tribute called "basic interest" (Its original concept was polluted by the concept of "liquidity premium" of Keynes. I am going to tell you about this topic in the next letter.) Therefore the purpose of economic agents is to get more money than the sum of basic interest in the same time or to get the same amount of money in the shorter term than the term during which money bring about the sum of basic interest. It means all people pursue short-term profit. It needs deceiving. Deceiving is often connected with an economic interest in this economic order. Think about the latest Volkswagen scandal. What's the cause? It is the motive to maximize short-term profit, isn’t it?

 

These circumstances make people deceive each other and it also makes people be deceived easily too. See all the fraud. Why were they deceived? Because they wanted to maximize short-term profit. If they wanted to minimize long-term depreciation rate, they would never be deceived.

 

Hence existing money maximize manipulating function and minimize cognitive function.

 

Silvio Gesell's Free-Money leads economic agents to seek to minimize long-term depreciation rate. Free-Money's face-value is depreciated regularly. (It was accomplished by stamp script in the 1930s. Now, we can also do it by electronic money.) In this circumstance, the economic agents' purpose is to slow down the speed of depreciation of their wealth as possible as they can. In the Natural Economic Order, it means that they invest their money because hoarding money is loss and they want to delay depreciation time and to minimize depreciation rate at the same time.

 

Minimizing long-term depreciation rate requires the less fallacy from the long-term viewpoint. You can get the money in Gesell's economic order, only if you are not far from the truth from the long-term viewpoint. If the demand for investment on the principal of minimizing long-term depreciation rate increases, such investments will be supplied.

 

In existing economic order, the feedback of reflexivity can broaden the gap between cognition and reality because money circulation depends on personal will. In the "Natural Economic Order" proposed by Silvio Gesell, on the contrary, money is circulated by compulsion, so the feedback of reflexivity narrows the gap continuously. If you hoard money in the Natural Economic Order, you will lose it because it will be depreciated regularly as your old bread rot. Therefore, nobody hoard money; they spend or invest it. As a result, money circulates very well, and you do not need to hoard it more and more. Cognition ("hoarding money is a loss, and money circulation is enough and will be enough") is superior to the will to manipulate money circulation ("we must hoard it") in this economic order. Personal will can manipulate money circulation no more, the market is not far from equilibrium, and will always go back to it.

 

As discussed above, we can suppress the will to manipulate the truth if we will choose Free-Money of Gesell. The dark side of open society could be excluded only by Silvio Gesell's "Natural Economic Order."

 

***

Dear Soros, your conceptional framework is indeed right. The reflexivity works between economic phenomenon and economic agents, but please imagine that we replace the existing money with the Free-Money of Silvio Gesell in your framework. If we reform money as Gesell proposed, we can stop self-reinforcing of positive feedback, because the fundamental cause of self-reinforcing is the condition that money circulation depends on the personal will, and we can change it forever with Gesell’s way.

 

Silvio Gesell's idea is very strange to us because we are familiar with existing money and the crude concept of monetary system, but I am sure that you can get "the cognition" from his idea, I mean the answer you will find. I really hope you will save the world with the time given to you. You can do it if you follow Gesell. I hope you will be remembered as a successful philosopher.

 

P.S:  Silvio Gesell's proposal is NOT negative interest. In the Gesell's Free-Money reform, the face-value of money is depreciated regularly. It gives economic agents a message "hoarding money is a loss; you would better spend or invest your money," but in the negative interest the face-value of money is constant. It gives economic agents a message, "you can hoard your money." Therefore, it is evident that both of them have different effects on money circulation. Unfortunately, most columnists are misunderstanding Gesell's idea. Please read <THE NATURAL ECONOMIC ORDER> written by Silvio Gesell, not the columns by the ignorants. I am sure this is the book for INET(Institute for New Economic Thinking.) I am not a native speaker of English and this text may include some grammatical errors, but just focus on what I mean.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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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타 야스유키에 대한 반론

칼럼

***이 글은 히로타 야스유키가 저술한  실비오 게젤 입문서 < 돈은 왜 굴러다지지 않는가?> 6장 실비오 게젤의 문제점에 대하여 에 대한 반론입니다. 이 글은 게젤에 대한 오해로 가득합니다.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엉터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지요. 일본에서 왜 게젤의 운동이 실패하였는지, 아니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지 이 글만 봐도 감이 옵니다. 게젤에 대한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간단히 반론하겠습니다.
 


히로타 야스유키는 공짜땅 개혁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쓸만한 땅이 모두 개척된 지금, 100년 전과 같이 신세계를 바라 보고 농민이 이주하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 입니다."

공짜땅 개혁이 불가능한 이유를 모두 개척되어 남은 땅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짜땅 개혁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개혁의 대상에는 기존의 땅도 포함됩니다. 이것만으로도 히로타 야스유키는 게젤을 엉터리로 이해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또, 히로타 야스유키는 게젤이 우생학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생학은 자연선택이 아니라 사람의 개입으로 종을 개량하는 것이므로, 실비오 게젤이 지지하는 자연선택과 모순됩니다. 게젤은 자연선택을 지지한다고 공언하였고, 게젤이 제시한 공짜땅 공짜돈 개혁은 토지제도와 화폐제도가 만들어내는 특권을 제거하여 자연선택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게젤이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 언급한 "우생학"이라는 표현은 말그대로 우생학이 아니라 우생학이 추구하였던 목표인 “진화”를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히로타 야스유키는 게젤의 방법으로 통화당국이 돈의 발행량과 유통량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실비오 게젤은 통화 관리 당국이 돈의 발행량과 유통량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돈이 어떻게 발행 되는지 알게 되면,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 임을 곧 알게 될 것 입니다."
"실비오 게젤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막대한 금액의 돈이 외환 시장에서 거래 되고 있습니다. BIS (국제 결제 은행)에 의하면 2007년 4월 현재 하루 평균 3조2,100억 달러의 돈이 거래 되고 있으며, 이는 1992년의 8,800억 달러의 4배 가까이 늘어 난 것 입니다. 일본이 년간 국내 총 생산이 4조3,816억 달러, 전 세계의 년간 총 생산이 54조5,849억 달러에 이릅니다. 경제 규모가 적은 나라에서 자국 통화가 일제히 매물로 나올 경우, 가치가 폭락하는 통화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 입니다. 금융 시장이 너무 팽창해 있어, 정부에 의한 물가와 돈의 유통량의 통제가 점점 어려워 지고 있습니다."

히로타 야스유키에 따르면 신용창조로 막대한 금액이 풀려있기 때문에 컨트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물경제를 넘는 막대한 금액이 발행된 것 자체가 돈순환장애 때문입니다. 게젤의 해법을 적용하면 돈이 순환할 수 밖에 없으므로 그 막대한 금액의 1/100로도 필요한 수요를 구현하는데 충분합니다. 따라서 개혁과정에서 정부부채와 지자체부채를 모두 청산할 수 있습니다.


히로타 야스유키는 지역통화에서 대해서도 안일한 전망을 내놓습니다

"지역 통화를 추진하는 분들이 종종 실비오 게젤을 인용 하므로, 실비오 게젤 이 마치 지역 통화를 주장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3장에서 언급한 대로, 실제로 실비오 게젤 자신은 지역 통화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발행하고 유통 시키는 통화 이외에 일반 시민이나 기업이 자유롭게 자기 상황에 맞추어 돈을 발행 한다면 경제가 혼란스러워 진다고 생각 하였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지금의 우리들은 지역 통화라 부르지는 않지만, 상품권, 포인트 카드, 비행기 탈 때에 쌓이는 마일리지 등이 여기에 해당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돈을 현금과 함께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불편을 느낀 적은 없을 것 입니다. 지역 통화도 이와 같을 것 입니다."

지역통화는 국가통화가 순환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며, 국가통화가 게젤이 제안한 방법으로 순환해야 하는 강제에 종속되면 필요없어집니다. 국가통화가 "공짜돈"으로 개혁된 다음에 지역화폐를 놔두면 오히려 수요를 교란하게 됩니다. 따라서 게젤의 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금지해야 합니다. (공짜땅 개혁까지 완료하고 공짜돈 개혁을 하기 전에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다음 블로그에 위의 글을 댓글로 달려고 하였으나, 블로그 개설자가 장기간 활동이 없어 댓글을 달 수 없고 방명록도 비공개이기 때문에 글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http://blog.daum.net/taesu50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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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5 21:51 2015/11/25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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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2015/11/26 17:32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ow | 2015/11/26 22:46 URL EDIT
전체적으로 맞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이자를 바로 0으로 만들어버리면 원금만 갚아도 되죠.
공짜돈 개혁에서 이자를 바로 0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천히 내릴 수도 있는데,
지금처럼 금리가 낮으면 갚아야 할 원금이 커져 버리니까
바로 이자를 0으로 만들어야 정부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땅을 임대하고 받는 임대료는 재산세와 다르고
BB님의 계산에서 7억의 2%면 연 임대료만 1400만원입니다.
이렇게 해도 7억/1400만=50년 걸리겠군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빨리 갚게 됩니다.
공짜돈 개혁을 하면 돈순환속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훨씬 적은 돈으로 경제를 꾸려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 부풀려있는 막대한 자금을 상당부분 흡수해서 국가부채를 해소할 수 있지요

그리고 공짜돈 개혁으로 나타나는 경제현상 중 하나가 선불입니다.
돈이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니 사람들은 돈을 쌓아두려고 하지 않고
대금 지불할 때도 결제시점을 늦추지 않고 바로 지불할 뿐 아니라 미리 지불하게 됩니다.
그게 경제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불은 세금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부자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하죠. 뉴스 보니까 돈을 아궁이에도 숨겨둔다고 하던데
공짜돈 개혁을 하면 세금을 더 빨리 내지 못해 안달하게 될 겁니다.
쌓아두면 손해니까 아예 미리 내버리는 것이죠
이것은 실제로 뵈르글 케이스에서 관찰되었던 일입니다.

공짜돈 개혁은 사회적 부를 엄청나게 늘려줍니다. 그래서 국민들의 납세능력을 극대화합니다.
지금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력이 풀가동되고 그 사람들이 생산하여 교환할 막대한 부를 생각한다면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실 것으로 봅니다.

요약하면, 경제를 운용하는 비용이 줄어들고, 납세할 동기도 강화되고, 납세능력도 커집니다
그래서 공짜땅 공짜돈 개혁을 하면,
정부 부채가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으로 추정되는 기간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해소될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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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칼럼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가운데 묵자墨子만큼 대중의 본성을 정확하게 꿰뚫은 사람은 없다. 묵자는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다른 사상가들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니 악하니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묵자 홀로 가장 현실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렸던 것. 그건 아마도 묵자 본인이 대중을 구하려고 여기 저기 고생스럽게 다녔지만 바로 자신이 구하려는 그 대중의 몰이해로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백성들이 자신의 숭고한 이념에 동조하기 보다는 제 이익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분명히 발견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일화가 남아있다. 춘추 말기 초나라의 왕은 공수반이 만든 운제라는 무기로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묵자는 전쟁을 막으려고 초나라로 가서 공수반과 왕을 설득했다고 한다. 둘은 모두 묵자에게 설득당했고 결국 송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묵자가 전쟁을 막고 돌아오는 길에 송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 송의 병사들은 묵자를 초나라 첩자로 오해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했다. 묵자가 송나라를 구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묵자는 성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고생을 하였고 돌아와서 큰 병치레를 했다고 전해진다. 묵자는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이런 경험을 숱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그저 제 이익만 알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탄식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정확한 인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주된 사상이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묵자에 따르면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며, 이익을 추구하려면 공격과 편애가 당연한데, 비공과 겸애는 거기에 맞서기 때문이다. 묵자의 가르침을 따르던 집단을 "묵가墨家"라고 불렀는데 유가와 함께 당시 백성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양대축이었다고 한다. 그런 묵가가 역사 속에서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 정치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살을 당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묵가는 자멸했을 것이다. 묵가의 멸망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과 맞서 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묵가는 사라지기 전에 이미 3개의 파로 분열되었다. 이미 멸망의 전조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점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준다. 묵가처럼 어떤 종류의 사회운동이 사람의 본성과 맞서게 된다면 그 운동은 결국 좌초될 것이다. 사회유기체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운동이 튀어나올 수는 있지만 오래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묵자가 "백성은 그저 이익을 알 뿐이다"라는 그의 올바른 인식을 기초로 사회운동을 재구성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비공과 겸애를 말하기 전에 비공과 겸애가 어떤 조건에서 싹틀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면, 서로 공격하고 편애하도록(인간의 모든 에너지가 제 가족의 이익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지 못하게) 유도하는 경제질서를 바꾸었다면, 즉 화폐제도와 토지제도를 개혁했다면 묵가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유가를 압도했을 것이다. 춘추전국의 역사가 제국으로 귀결되지 않고 권력이 분산되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현대의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도 묵가와 마찬가지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타주의를 자기들 운동의 바탕으로 삼고, 모두가 이타적일 수도 있다는 전제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중산층은 당연히 그런 운동에 관심이 없고 때로는 그런 운동이 자기들 이익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그리고 그런 염려는 결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사회운동가들, 정치가들은 잠에서 깨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린 다만 "사람들이 이익을 쫓는 행위"가 서로 유익을 주도록 화폐제도, 토지제도를 재설계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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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14:59 2015/11/2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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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칼럼

실비오 게젤이 주장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를 이루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익에 호소하여야 한다. 이기주의를 사회운동의 동력으로 삼는 것. 이런 형태의 운동은 이미 기존 경제질서에서도 볼 수 있다. 대기업의 불법적인 경제행위에 소비자들이 대규모로 집단고소나 불매운동을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자발적인 운동이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대가 전체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려면, 지대와 이자로 평균적인 중산층 노동자가 얼마나 털리고 있는지 계산해서 보여주면 된다. 그들은 예금과 부동산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지불하는 지대와 이자는 그것을 충분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움직일 동기를 가질 수 있다. 거둬들이는 지대·이자가 빼앗기는 지대·이자보다 많은 사람은 극소수의 자본가와 대지주 뿐이다. 이 운동은 충분히 국제적인 스케일로 키울 수 있다. 게다가 더이상 자원봉사자들과 방관자들 사이에 틈을 벌리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이와 매우 대조적인 형태의 사회운동이고, 한마디로 말해 사기다. 노동자들한테 노동대가 전체에 대한 권리도 보장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구소련의 운동이 국가자본주의의 형태로 귀결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러 명의 자본가 대신 하나의 정부가 백성을 착취한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이런 사기에 걸려들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파시즘으로 내모는 심리적인 동기는 기존 경제질서에 의해 주조된다. 사람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면, 그것은 기존 경제질서에서 소위 "자유"가 고립이나 분리, 소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자유"를 반기겠나? 그런 불쾌감이 어떤 원인으로 극에 달하면 사람들은 그런 텅빈 자유보다는 노예가 되더라도 전체와 연결되기를 희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역사가 보여준 교훈이다. 이런 경향은 정치에서만 관찰되는 게 아니라 종교집단에서도 관찰된다. 광신자들은 좌절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고립되었고 전체와 분리되어 소외감을 느낀다. 거기서 도피하려고 종교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 종교가 이성적인 사람이 볼 때 말도 안되는 교리를 읊어대도 그건 그 사람들한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 종교에 기대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소속감, 더 이상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전체와의 합일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안도감을 준다. 따라서 그 연결을 끊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극도로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연결이 끊어진다면 그 사람은 다시 외로워진다. 혼자 남겨진다. 불안해진다. 그래서 그 분리에 대하여 발작을 일으킨다. 대중이 맑스주의의 기만에 낚였던 까닭도 이와 같다. 그들은 좌절하였기에, 이미 망가진 인생이기에 거짓말에도 낚일 수 있었다. 그들이 느끼는 비참한 외로움과 고립감이 썩어빠진 동아줄도 기꺼이 잡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는 땅과 돈으로 모두가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연결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사회연결망social network이다. 대중들이 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야만 다른 삿된 연결에 기대지 않는다. 가장 보편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만족하므로 다른 네트워크에 기대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릴 까닭이 없다. 또, 공짜땅과 공짜돈이라는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자유"가 비로소 빛을 발한다. 자유가 더이상 고립·분리·소외가 아니라 연결·합일·연대가 되기 때문이다.

기존 경제질서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백성이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버리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수단이 아니라 결과이며, 오로지 자연스러운 경제질서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상태다. 만일 민주주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민주주의를 빚어내는 조건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기존 경제질서를 고집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중우정치"를 낳을 뿐이다. 왜 아니겠는가? 모두가 단기적 이윤을 쫓도록 유도된다. 그 결과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끊임없이 부딪힌다. 그러므로 기존 경제질서에서 민주주의(요식행위로서의 민주주의조차)는 주기적으로 경멸당하게 될 운명이니, 보라. 백성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먹고 자기 권리를 독재자에게 기꺼이 양도하리라. 그들이 기만당하는 것은 그들의 죄요, 그들의 눈이 진리에 어두운 탓이라. 스스로 팔아먹은 자유를 되찾으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하니, 그들은 어느날 문득 왜 그런 삽질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리라. 그 때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대로 토지제도와 화폐제도를 개혁하고, 비로소 진짜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이다.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는 개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개인을 모두와 연결할 수 있다. 따라서 파시즘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강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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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칼럼

케인즈주의나 사민주의 등 현대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질서에 결함이 있으니 그것을 정치제도로 견제하자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으니 민주주의로 견제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훈련된 귀는 불협화음을 감지한다.

위의 명제는 경제질서와 정치제도를 별개로 본다. 한쪽에는 경제질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치제도가 있어서 정치제도로 경제질서를 견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치제도는 경제질서에 종속된다. 인위적으로 어떤 정치제도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어도 경제질서는 그 초기의 형태를 자기에 맞게 점점 빚어간다. 그래서 기존 경제질서를 고집한다면, 민주주의를 채택하여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실제 모습은 제국을 닮아간다. 경제질서에 따라 정치제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우린 지금 민주주의를 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이다. (필자는 국민國民보다 백성百姓이라는 말이 좋다. '국민'은 국가라는 틀에 백성을 밀어넣으니 파시즘적이고, '백성'은 백가지 성씨라는 뜻이니 다양성을 드러내고 아나키즘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백성이 주인인가? 특권계급이 이 땅의 주인이며 대다수는 노예다. 좀 더 살만한 노예와 먹고 살기 팍팍한 노예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자본가 계급도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그 사람들 역시 삶을 지배하는 동기가 돈에 붙들려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들 삶에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자기가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모으다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그들이 남긴 재산은 가족들의 유산다툼 문제를 유발하면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린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는 합법적으로 백성의 뜻을 묵살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기존 경제질서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분열되므로 그 안에서 어떤 정책을 제시하고 찬반투표를 하더라도 그것은 찝찝한 결과만 남긴다. 모두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므로 그건 아무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타협안이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누구도 자기 뜻대로 세상을 빚어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대다수는 무기력에 빠져 있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이나 별볼일없는 취미생활, 미디어가 보여주는 조그만 즐거움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정말이지 대다수 백성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액면가가 불변하는 돈"과 "땅사유권"은 이자와 지대를 통하여 부와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킨다. 그리고 집중은 더 많은 집중을 낳는다. 에너지와 산업과 인구와 재산 등 많은 것들이 집중되면 리스크가 커진다. 사고·자연재해·전쟁·환경파괴·공황·혁명 등으로 한꺼번에 모두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통제가 요구된다. 따라서 집중은 더 많은 집중을 낳고, 통제는 더 많은 통제를 낳는다. 당연히 정치는 민주주의에서 멀어진다. 민주주의는 요식행위가 되고 실제로는 소수가 권력을 움켜쥐고 모두를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 견제하자는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한데 자본주의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겠나? 경제활동으로 드러나는 실제 삶의 모습이 노예와 마찬가지인데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를 낳을 수 있는 경제질서"로 교체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제질서가 바로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다.

실비오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는 돈 액면가가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므로 돈이 꾸준히 순환하여 돈의 불균형적인 분포가 끝없이 완화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낙수효과가 가능해진다. 돈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땅 국유화하공공임대하여 그 지대를 공공복지에 사용하면 노동분화로 생기는 유익이 모두에게 분산된다. 이렇게 땅의 유익과 돈이 분산되면 사람도 산업도 에너지도 그리고 부와 권력도 분산되고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로 갈아타려면 기존 사회운동과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 기존 사회운동, 특히 맑스주의는 경쟁을 부정하고 재산공유를 주장한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취약계층이라면 모를까 중산층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방법에 기대를 거는 건 시간낭비다. 또, 이타주의를 강조하면서 대중을 낚으려고 하거나 묶으려는 것도 결국 실패한다. 그것은 인위이고 사람의 본성에 맞서기 때문이다. (필자는 훌륭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타주의가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평생을 남의 이익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몇몇 사례들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사회운동의 바탕을 환상에 두는 것과 현실에 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이기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심리적 에너지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결합하는 방법을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이 나쁜 것이다. 게젤이 제안하는 해법은 바로 그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를 운동의 바탕으로 삼지 않았다고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할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이익에 호소해야 한다. 특히 중산층 개개인의 이익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중산층이 자기 노동대가에서 지대와 이자로 얼마만큼 도둑질 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통계자료를 근거로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원래 당신 것이지만 시스템이 털어갔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한국인 전부가 지대와 이자로 털린 노동대가를 총 인구수로 나누면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실제로 빼앗긴 것은 그 이상일 것이다. 지대와 이자라는 장애물이 없다면 더 많은 부를 생산할 수 있었을 테니까. 따라서 그런 기회비용까지 계산한다면 중산층이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다. (최소 1/3, 많게는 1/2 이상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다. 평생동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정치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예주의다.)

우리는 그저 팩트를 제시해야 한다. 경제질서의 모순을 드러내고 해법을 제시하며, 해법이 아닌 것들이 왜 해법이 아닌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실제로 이 해법을 채택할지 말지는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다. 그건 영원히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겠다고 하면 스스로 게젤의 방법을 채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스스로 제거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사회운동은 많은 에너지를 절약해준다. 사회운동 자체가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므로 사회운동도 저항이 아니라 가속을 낳게 된다. 그런 운동은 스스로 점점 빠르고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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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14:36 2015/11/2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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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케네디의 <화폐를 점령하라> 비판

칼럼

1. 마르그리트 케네디가 쓴 <화폐를 점령하라>를 읽었다. 케네디는 크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데 한 가지는 JAK은행처럼 기존의 돈을 무이자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게젤처럼 새로운 돈을 만드는 것(돈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하는 것)이다.

케네디는 이 두 가지 방법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자라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찰스 아이젠스타인도 말했다시피, JAK은행은 거대한 조수를 거스르는 작은 역류에 불과하다. 이자를 낳을 수 있는 돈으로 이자를 낳지 않는데 쓰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은 길게 볼 때 한계가 있다. 폭발적으로 확산될 수가 없다. 시스템 전체의 문제를 커버할 수도 없다. 자기 이익을 쫓는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고, 이자가 생겨난 근본원인인 "돈 액면가의 불변함"을 방치하기 때문에 그 운동은 중간에 좌초될 수 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장발장은행, 주빌리은행도 한계를 지닌다. 다시 말하지만 이자를 낳을 수 있는 돈으로 이자를 낳을 수 없는 사업에 투자하라는 것은 이익을 쫓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스른다. 사람의 본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돈이 잘못된 것이다. 그 본성에 맞지 않는 돈을 만들어 쓰고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화폐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돈 자체를 개혁해야 하며 그것은 돈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하는 것 뿐이다.

현대의 화폐개혁 운동가들은 호기심이 많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이것저것이 다 방법이 될 수 있다며 대중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내밀고 그 뒷감당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로 행한다고 모두 좋은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법, 오로지 문제의 핵심을 붙잡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왜 이자가 생겼는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이자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미지근한 해법을 내놓고 그 해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덧붙이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런 논리로는 이 거대한 문제의 심부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2. 마르그리트 케네디는 디머리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화폐를 점령하라>를 기술할 당시는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시장 가격 기준이 되는 이자가 디머리지 시스템 등의 사용으로 폐지되면 화폐 투기자들은 투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의 눈을 토지와 부동산으로 돌려 또 다른 투기 양상을 낳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해결책도 있는데 부동산 투기에 높은 과세를 부과하여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땅은 그 땅을 밟는 우리 모두에게 속하므로 땅을 임대하는 것이 사적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여 투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전체적으로는 더 큰 이익을 만들 수 있다. " -마르그리트 케네디, <화폐를 점령하라>
 

이 대목만으로도 "케네디는 디머리지를 모른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게젤이 말한 디머리지의 개념, 즉 돈 액면가가 정기적으로 감가상각되는 것은 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투기의 전제는 돈을 쌓아둘 수 있어야 한다. 잉여금이 시장 주위를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대박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 그런데 게젤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는 그 잉여금이 존재할 수 없다. 돈이 모두 순환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기는 불가능하다. 게젤의 이론을 연구할 때는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해봐야 한다. 공짜돈을 쓸 때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게젤이 토지개혁을 주장한 것은 디머리지로 투기가 생기기 때문이 아니라 불로소득의 한 축인 지대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토지세가 아니라 공짜땅 개혁이 와야 한다. 즉 땅사유권을 폐지하고 토지공공임대제를 해야 한다.

케네디의 책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로 가는 여정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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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09:19 2015/11/1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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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방문자 2015/11/16 15:01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ow | 2015/11/16 22:34 URL EDIT
반갑습니다. bb님, 책 제목은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입니다. 달아주신 댓글 두 개에 모두 잘못 적혀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정해드리니 노여워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실비오 게젤의 경제이론을 실행하려면 분명히 정치조직이 필요합니다. 정당이 게젤의 해법을 채택해야겠지요. 정당이 채택하려면 먼저 국민들이 이 해법을 원해야 합니다. 정치가는 기본적으로 장사꾼입니다. 이건 그 분들을 얕잡아보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가들이,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정책을 팔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국민들이 이걸 원하려면 먼저 이런 해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게 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이 이론을 연구하고 언론이나 기타 매체를 통하여 "이런 좋은 게 있다"고 알려줘야 합니다.

정말 다행한 일이지만 얼마 전부터 실비오 게젤을 연구하기 시작한 모임이 있습니다.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면 기다려야겠지만,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는 얘기지요.

국민들이 게젤을 선택하려면, 무엇보다 이 해법이 중산층에게 이롭다는 것을 정확히 알려야 합니다. 지금 진보정당들이 제시하는 정책은 계층간 이해관계를 분열시키기 때문에 중산층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글을 링크하겠습니다.
http://blog.jinbo.net/silviogesell/144
http://blog.jinbo.net/silviogesell/132
http://blog.jinbo.net/silviogesell/129

국민들이 게젤을 선택하면, 정치가들이 게젤의 개혁안을 공약으로 내세울 겁니다. 그렇게 정권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많은 국민들이 큰 착각을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정치가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엉망이다." 아니죠. 국민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엉망인 겁니다. 정치가들은 "국민들한테 어떤 얘기가 먹힐까?"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바라는대로 해줍니다. 물론 기존 경제질서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분열되기 때문에 적당한 타협안이 도출되고, 그것은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모두 실망하고 정치가를 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잘 살펴보면, 정치가는 그저 분열된 국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지요. 국회의 난장판은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이 잘못 하고 있는 겁니다.

게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모두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연결합니다. "공짜땅"과 "공짜돈"이라는 새로운 토지제도와 화폐제도로 모두를 연결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나가면 그게 나한테 이익으로 돌아오는 구조이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질서 안에서 하나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중산층이 "자기들이 가진 예금과 부동산으로 얻는 이자와 지대"보다 "자본가한테 빼앗기는 이자와 지대"가 훨씬 많습니다. 평생 그렇게 착취당하는 걸 계산하면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래서 중산층에게 그 현실을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하면 게젤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이익을 쫓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자료를 나라별로 국제적으로 조사해서 공개하면 전세계 사람들이 움직일 겁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미션은,

1. 게젤의 이론을 연구할 것
2. 게젤의 이론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그러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
3.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중산층이 지대와 이자로 빼앗기는 금액과 얻는 금액의 차액을 계산하여 공개할 것.

이것입니다.

판단은 중산층이 알아서 할 겁니다. 움직일 것인지 말 것인지도 중산층이 알아서 결정할 겁니다. 중산층을 설득할 필요가 없고 그냥 팩트만 제시하면 됩니다. 중산층이 지대와 이자로 빼앗는 것보다 빼앗기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사실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자본가들은 게젤을 막기 위해서 중산층에게 여러 가지 달콤한 제안을 하게 될 겁니다. 경기부양책과 개발공약들이 난무할 것이고 중산층은 다시 미혹될 겁니다. 하지만 중산층은 결국 깨닫게 될 겁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게젤의 제안이 더 이익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자본가들의 회유책이 아무리 근사하여도 지대와 이자를 모두 폐지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들이 회유책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그 지대와 이자를 지키기 위함인데 당연히 그렇겠지요.
비밀방문자 2015/11/16 16:17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ow | 2015/11/16 22:35 URL EDIT
저희 동네도서관은 신청을 받아주던데, 도서관마다 다른가 보군요.
출판제안은 고맙습니다. 구체적으로 제안해주시면 가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비밀방문자 2015/11/22 18:03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비밀방문자 2015/11/25 10:42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ow | 2015/11/25 22:01 URL EDIT
히로타 야스유키의 생각에 대한 반론을 올렸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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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의 두 가지 흐름

칼럼

필자는 사회운동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사회유기체의 염증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운동, 다른 한 가지는 사회유기체의 치유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운동.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봐서는 언뜻 잘 구분이 안될 수도 있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두 가지 모두 활력이 넘치고 새로운 비전에 도취될 테니까.

하지만 그 운동이 제시하는 해법을 차분하게 분석해본다면 차이를 알게 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치유반응이다. 해결할 수 없다면 염증반응이다. (전자는 그 속성상 작용action, 후자는 반작용reaction이다.)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 역시 그것을 판가름하는 지표가 된다. 만일 그 운동방향에 대한 엄밀한 비판에 겁먹고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거나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염증반응이다. 만일 그런 비판에 귀를 열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치유반응이다.

운동의 구성원이 그 운동을 자기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염증반응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그 운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운동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운동의 과정에서 창조적이거나 비판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없고 그저 운동의 톱니바퀴 정도로 전락하게 된다. 그 때 그 구성원은 좀비와 같다. 그저 옆에 있는 동료와 유대감을 나누고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빼앗기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운동의 구성원이 구체적인 해법보다는 선전구호에 집착하는 것도 염증반응이라는 증거다. 실제로 이들을 낚는 도구도 선전구호다. 물론 이 선전구호들은 감성적인 호소에 많이 치우친다. 지성은 그 해법을 차분히 살펴볼 수 있지만 감성은 그 운동을 거리를 두고 볼 수가 없다.

우리 시대 사회운동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염증반응이다. 사회유기체가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노출되고, 그로 인한 대중의 좌절이 그 운동의 재료가 되고, 기계적인 반작용이 그 운동의 방향이 된다.

그런 운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저 그 운동을 상징하는 리더에게 권력을 쥐어줄 뿐...

그래서 우리는 대중운동의 한가운데에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개인의 각성이 여기서 필요하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라. 당신은 맑스주의자나 케인지언 또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냥 사람이고 순수한 존재다. 당신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되면 안된다. 완전히 스스로를 비워야 한다.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틀지워버린다면 그 틀을 벗어나는 해법이 보이지 않을 것 아닌가? 과거와 결별할 것. 익숙한 운동의 방향이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망가진 인생을 채워주웠던 달콤한 위로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동료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이 다시 유혹할 것이다. 그 유혹은 어리석은 믿음을 고집하라고 당신을 간지럽힐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이제 과거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도 이제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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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21:16 2015/09/1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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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자본을 모른다

칼럼

맑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맑스주의를 하지 않아도 불로소득을 차단하고 노동자들이 노동대가 전체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맑스주의가 틀린 이유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빼앗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항생제로 염증을 억제하려하다가 건강한 세포의 활력마저 빼앗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물을 깨끗이 한답시고 소독약을 치다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서 둥둥 뜨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아이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두손 두발을 모두 묶어버려서 장애자를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바로잡으려고 하기에 틀린 접근방법이다.

맑스는 원인을 모른다. 맑스가 원인을 모른다 함은, 맑스가 자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뜻이다. 맑스는 자본을 물질적 재화라고 보았다. 따라서 생산수단 국유화를 그의 요법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결과였다.

하지만 자본은 물질적 재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조건에서 나온다. 그 시장의 조건은 생산수단의 공급이 수요보다 늘 부족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은 자본이 되어 이자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돈이 낳는 기본이자에서 비롯하며, 그 기본이자는 돈과 재화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교환관계에서 비롯한다. 재화는 썩고 녹슬고 소멸하지만 돈은 그 액면가가 불변하여 이 둘의 교환이 불평등하다는 것. 따라서 돈이 기본이자라는 조공을 재화로부터 뽑을 수 있어야만 둘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너무나 명료한 해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돈의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하여 재화가 겪는 소멸성을 돈에 부여할 것.

이것이 게젤의 우아한 해법이다.
이 해법을 통하여 돈이자는 사라지고, 돈을 매개로 만드는 모든 생산수단도 이자를 낳지 않는다. 불로소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땅 역시 국유화하고 지대를 공공이 회수하여 복지에 사용함으로써 토지불로소득도 사라진다)

맑스가 소모적이고 러프한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게젤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룬다.

맑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다.
그들은 요즘 기업유보금을 몰수하자며 달려들지만, 그 전에 기업유보금이 왜 생겼는지, 왜 돈이 순환하지 않고 쌓여있을 수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차분하게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찾는 답은 게젤이 쥐고 있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거지와 도둑과 노예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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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14:30 2015/09/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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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ou_topia | 2015/09/15 03:57 | DEL
$low님의 [맑스는 자본을 모른다] 에 관련된 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없었더라면 유럽의 과학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아마 &ldquo;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rdquo;(플라톤, 정치가/폴리티코스, 266e)이 난무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털을 다 뽑은 닭 한마리를 갔다 놓고 &ldquo;ecce homo!&rdquo;했을 때 플라톤의 낯은 뜨거웠을 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거다. 디오게네스의 해학으로 유럽의 사유는 다행히도...
비밀방문자 2015/09/14 16:50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ow | 2015/09/14 19:16 URL EDIT
위 글에서 틀린 게 있으면 공개적으로 반론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민들레홀씨 2015/09/14 21:11 URL EDIT REPLY
실비오게젤은 세상을 모른다. 그의 눈에는 돈만 있고 사람이 없다. 그는 경제주의자이다. 경제학을 사람중심이 아니라 돈을 중심으로 썼다. 실비오게젤은 사람보다 돈을 더 중심으로 여긴다. 그의 머리속에는 자본주의에 억눌린 사람을 구해내기보다 자본주의를 수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수명을 연장하려 한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대변인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혁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에게 돈을 잡으라고 충고한다. 이 거만한 경제주의자의 손에 경제학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로서 수치이고 굴욕이다. 실비오게젤이 고안해 낸 것은 자본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아무리 선의를 인정하다손 치더라도) 자본가에게 이윤을 바치는 대신 수수료를 갖다 바치라는 ( 없는 사람들은 알아서 기라는) 수정자본주의로서 노동자들에게는 극복가능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실비오게젤과 경제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과 더 이상 화해할 수 없기에 논지가 다르고, 논쟁이 불가능한 황금만능주의를 앞세워 자유로와야 할 세상을 독점자본가에게 갖다 바치지 말라!! 실비오게젤은 사람을 모른다!!
$low | 2015/09/14 22:26 URL EDIT
님의 글에는 위 글에 대한 논리적인 반론이 없습니다. 위 글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는 불로소득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빼앗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본이자가 돈이자에서 비롯하므로 돈을 개혁해야 노동자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겁니다. 이게 자본가들 편드는 건가요?

그리고 서로 존대말을 쓰기로 하죠.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못하면 소통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은 다를 수 있어도 사람으로서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2015/09/15 02:18 URL EDIT REPLY
경제학을 잘 모르지만, '돈의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하여 재화가 겪는 소멸성을 돈에 부여한다'는 아이디어는 일리가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하며 다른 방법은 폭력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자연스런 경제질서'에 우아하게 순응할거면 뭐하러 돈들여 경찰과 군대를 유지하고, 언론과 정치.사법엘리트들한테 장학금 주나요. 자기들 좋을대로 정치 경제 제도 주물러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거 안보이시는지요. 수틀리면 국민연금 동원해서 이재용 개인의 삼성 지배권 방어도 하고 말이죠.

어디 한 번 그 '개인'들에게 지금 있는 자본주의 경제법률과 원칙부터 지키게 만들어보시면 될 듯. 그 어떤 질서든, 그 질서보다 더 위에서 자기들만의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자들에게.
$low | 2015/09/15 21:25 URL EDIT
님의 글에는 위 글에 대한 논리적인 반론이 없습니다. 위 글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는 불로소득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빼앗게 된다. 그리고 자본이자가 돈이자에서 비롯하므로 돈을 개혁해야 노동자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겁니다. 반론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즉, 맑스주의를 해도 개인의 자유를 뺏지 않는다는 것과 자본이자가 돈이자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바랍니다. 다른 이야기는 논지를 흐리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민들레홀씨 2015/09/17 19:21 URL EDIT REPLY
간단한 돈의 논리를 위해 사람을 모읍니까? 아니면, 사람을 위해 논리를 만들어야 합니까? 돈보다 먼저인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low | 2015/09/18 09:12 URL EDIT
님의 글에는 위 글에 대한 논리적인 반론이 없습니다. 위 글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맑스주의는 불로소득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빼앗게 된다. 그리고 자본이자가 돈이자에서 비롯하므로 돈을 개혁해야 노동자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겁니다. 반론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즉, 맑스주의를 해도 개인의 자유를 뺏지 않는다는 것과 자본이자가 돈이자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바랍니다. 다른 이야기는 논지를 흐리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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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의 <한국 자본주의>비판

칼럼

장하성 교수의 생각은 이렇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한 가지는 자본주의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 다른 한 가지는 자본주의를 우리가 잘못 운용하고 있다는 것."

장하성 교수는 후자를 따르고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고 한다. 그래서 사내유보금 과세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몇 가지 정책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는 그대로 두고 정치로 그것을 견제하자는 얘기다.

이것은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건 대증요법이다. 대증요법은 현재 증상을 더 복잡하게 꼬아갈 뿐이다.

실업, 경제위기, 부의 불평등의 원인은 자본주의 그 자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장하성 교수는,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는 대안이 아니라고 한다. 동의한다.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이 실비오 게젤이 제시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다.

부의 불평등은 왜 생기는가? 토지제도와 화폐제도의 결함 때문이다. 땅사유권이 낳는 지대와 돈이 낳는 이자가 노동자의 노동대가를 털어가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도둑질이다.

올바른 분배란 지대와 이자를 제거해야 하며 그 방법은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이다. 게젤은 이 두 가지 개혁에 '공짜땅', '공짜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두가 지대와 이자라는 요금을 물지 않고 땅과 돈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장하성 교수의 방법에서는 지대와 이자를 제거할 어떤 수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사내유보금에 과세를 하면 기업들이 가진 돈이 노동자들한테 흘러나올 거라고 하는데, 분명히 쌓여있는 돈은 흘러나오겠으나 기업은 그런 과세를 하지 않는 국가로 갈아탈 수도 있다. 이 경우 상당한 부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기업이 해외로 옮기면 그 기업이 만들어내던 일자리가 무너진다. 하지만 게젤의 방법에서는 이런 염려가 없다. 그의 방법에서는 모든 돈이, 쌓여있으면 벌금을 물기 때문에 전부 순환한다. 그러한 벌금을 피해서 기업이 자기가 가진 원화(공짜돈)를 외화로 바꿔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그 원화를 받는 외국인은 그 돈을 쌓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국제품을 사려고 자기 돈을 그 돈과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경제에는 타격이 없다. 그리고 그 돈은 원래대로 순환하면서 일자리를 만들기 때문에 고용에도 문제가 없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소수가 쥔 경제권력을 분산시키므로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돈을 쌓아둘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쌓아둘까 흐르게 할까 1명에게 결정하도록 하는 것보다 수백만 명에게 결정하도록 하면 그 돈은 흐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수백만 명도 교환과정에서 기본이자를 얻지 않는 한 돈을 쌓아둘 것이다. 기본이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경제위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변한 것은 없다.

 

게젤이 다루는 것은 토지제도와 화폐제도다. 장하성 교수가 다루는 것은 그 제도에 종속되어 있는 하위요소다. 조세제도, 입법... 이런 것들로 토지제도와 화폐제도의 결함을 보상할 수는 없다. 장하성 교수의 방법으로 주기적인 경제위기와 실업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게 진실이다.


경제위기는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변기 물이 점점 차오르듯이 사회가 생산한 부가 점점 차오른다. 하지만 어느 수위에 이르면 더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변기 안에 있는 부력장치가 함께 떠올라서 어느 지점에서 물이 들어오는 통로를 잠가버리듯이 돈이 낳는 기본이자basic interest가 부의 생산을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기본이자는 돈이, 그 액면가가 불변하여 저축매개물로서 다른 재화보다 선호되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는 조공이다. 재화를 가진 쪽이 이 조공을 내지 못하면 돈은 재화와 교환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산이 실물자본을 늘릴수록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서 그것이 낳는 이윤은 줄어들고 그러다보면 그 조공을 충당할 수 없으며 재화는 돈과 교환되지 않고 경제는 멈춘다. 분업이 마비되고 더이상의 부를 생산할 수 없다. 그 상태에서는 물을 한 번 내려줘야 다시 물이 차오른다. 경제위기가 한 번 터져줘야 다시 시스템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경제위기는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부의 공급을 수요 이하로 유지한다. 그래서 돈 그리고 돈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실물자본이 계속 이자를 낳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빈곤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돈 자체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해결방법이 없다.

우리가 경제문제를 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토지제도 화폐제도를 개혁하는 것 뿐이다. 나머지는 다 헛짓이다. 진부한 방법이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도하기 전에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문제를 풀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장하성 교수가 선의를 갖고 그의 책을 썼음을 믿는다. 다만 그의 제안은 해법이 될 수 없다. 난 그가 기존 경제학의 진부한 틀을 벗어나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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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07 2015/09/1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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