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3/12 10:04

 

 


엄청나게 큰 건물이 보인다.

앞쪽 벽에는 활짝 열어젖힌 좁은 문이 있다. 문 안에는-음산한 안개. 높다란 문지방 앞에 한 처녀가 서 있다......러시아 처녀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는 싸늘한 냉기를 내뿜고 있다. 얼어붙는 듯한 냉기의 흐름과 함께 건물 내부로부터 궁근 목소리가 느릿느릿 울려퍼진다.

"오오, 너는 그 문지방을 넘고 싶은가 본데 무엇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처녀가 대답한다.

"추위,굶주림,증오,조소,멸시,모욕,감옥,질환,그리고 나중에는 죽음이라는 것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몸서리치는 고독, 그래도 좋으냐?"

"알고 있습니다......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고통, 어떠한 채찍질도 참아내겠습니다"

"그것도 원수들만이 아니라 육친과 친구들까지 그렇다면?"

"네......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좋다. 너는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지?"

"네"

"무명의 희생이라도 좋으냐? 네가 파멸한다 해도-누구 하나, 누구 하나 어떤 자의 명복을 빌어주어야 할지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저한테는 감사도 동정도 필요없습니다. 이름 같은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죄를 지을 각오도 되어 있느냐?"

처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죄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다음 질문까지 잠시 사이를 두었다.

"너는 알고 있느냐" 이윽고 목소리는 다시 계속되었다. "지금 네가 믿고 있는 신념에 환멸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은 기만이었다, 공연히 젊은 생명을 파멸시켰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저는 들어가고 싶습니다"

"들어가라!"

처녀가 문지방을 넘어서자-무거운 막이 그녀의 등 뒤로 내려졌다.

"바보 같은 년!" 누군가가 뒤에서 이를 갈았다.

"성녀다!" 어디선가 거기에 답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


<꿈>이라는 부재가 붙은, 뚜르게네프의 <문지방> 혹은 <문어구>라는 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3/12 10:04 2007/03/12 10:04
TAG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soist/trackback/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