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큐 - 2007/01/16 22:07

* http://blog.daum.net/goodrich/9648658 에서 펌

 

현재 미국, 일본등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들의 대표적 조리기구인 더치오븐은


 간단하게 말하면 뚜껑 부착의 주철제의 냄비. 그러나, 단순한 냄비와는 너무나 다름!

열전도성이 낮은 주철제이므로, 식재를 태우는 일 없이 열을 계속 더할 수 있고

또, 무거운 뚜껑으로 확실히 밀폐하는 것에 의해서, 압력솥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더치 오븐은, 「굽는·볶는·익히는·찌는····」라는 대부분의 조리법이 이것 하나로 가능하게 되며, 게다가 간단합니다. 극히 맛있는 요리의 완성이라고 말할수 있고, 확실히 「마법의 냄비」입니다.

지금, 더치 오븐은 캠프 요리에는 불가결한 것이 되었습니다.
뭐든지 맛있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더치 오븐은 만능의 냄비입니다.
막 구운 빵이나, 지글지글 익는 스튜도 즐길 수 있습니다.

캠프파이어의 불길이나, 혹은 텐트 사이트의 스토브 등
열원으로 숯 만이 아니고, 프로판 가스에서도, 더치 오븐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캠프 더치 오븐은, 뚜껑 위에 숯을 두고, 요리하는 함으로
위로부터도 열을 걸쳐 맛있는 오븐 요리를 즐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뚜껑을 열 때는, 기울이지 않게하여 맛좋은 음식안에 재가 들어가지 않게 해 주세요.
당신도 더치 오븐의 맛있는 세계로!

어려운 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더치 오븐과 맛있는 식재가 있으면
마법의 남비로, 자연의 맛있음을 재발견해 주세요.

더치오븐의 여러가지 유래등을 한 번 알아 볼까요.

 

더치오븐의 역사에 대하여

 

● 더치오븐이라고 불리우는 이유

 

더치오븐(Dutch Oven), 단순히 번역하면 "네덜란드(인)오븐"이라는 의미가 된다.
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일까?

다양한 설이 있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이야기는 "네덜란드인이 팔고 다니던 냄비이기 때문에"라는 설이다.

1492년 콜롬부스에 의해 미 대륙이 처음 발견된 후, 16세기로 들어서면서 남북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사람들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영국)가 미국의 매사츄세스주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되지만,
영국인들이 곧바로 뉴잉글랜드 지역을 손아귀에 넣고 지배한 것은 아니고,
이미 네덜란드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뉴욕
도 처음에는 네덜란드인 식민지였다.

1602년 네덜란드 정부의 명으로 북동대서양 연안을 탐험한 핸리 허드슨경이 중심이 되어,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아주 싸게 사들인 섬 중의 하나가 지금의 맨하튼 섬이다.
그들은 섬의 남단을 고국인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따와 뉴암스텔담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하지만 그 후 네덜란드가 17세기 후반 영란전쟁(英蘭戰爭) 즉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뉴암스텔담은 영국에 의해 다시 뉴욕으로 개명하게 된다.

서서히 국력을 잃기시작하던 네덜란드였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의 사업에 대한 열의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들은 잘 팔릴 것 같은 제품을 찾아내서는 여기저기 팔러 다녔다.

18세기 초반 영국의 식민지가 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그들은 일용잡화를 갖고 다니며 방문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옛날부터 유럽에서 귀중히 여기던 주철제이며 뚜껑달린 냄비였다.
이 무거운 냄비로 그들은 꽤 많은 돈을 번 모양이며 사람들은 그 냄비를 일컬어,
네덜란드인이 열심히 팔러 다니는 주철냄비 즉 "더치오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내가 개발한 것이다"라고 말한 남자

 

한편 더치 오릴리라고 하는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개척자 더치 오릴리는 부인으로부터 2개의 주철제 프라이팬을 전해 받았다.
야영을 하면서 행동하는 개척자들에게 있어서 프라이팬은 없어서는 안돼는 조리기구였다.

어느 날 그 프라이팬을 조개처럼 위아래로 겹쳐서 사용해 보니, 버팔로 고기에서 파이까지 어떠한 음식도 간단하고 맛있게 조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마음에 든 더치는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더치의 오븐(dutch's oven)"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그는 그 덕분에 네덜란드 정부로 부터 훈장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이 이야기 이외에도 더치오븐 탄생의 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당시의 개척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연구를 해왔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더욱 흥미로웠지만,
더치 오릴리의 이야기를 포함 해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 더치오븐의 원형 [빈 폿(Bean Pot)]

 

네덜란드인이 열심히 팔러다니고 있던 더치오븐은 주로 가정의 키친에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키친 스토브 위에 올려놓고 스튜나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거나, 키친의 대형 오븐 속에 냄비째 집어넣고 로스트 비프 등을 조리했다.

당시의 더치오븐은 바닥의 다리도 없었을 뿐더러 뚜껑 둘레에 플렌지도 없었고 둥그런 콩 모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경의와 함께 친근감으로 "bean pot"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러한 바닥에 다리 없고 플렌지도 없는 더치오븐=빈 폿은 만들어 지고 있으며 "키친 더치오븐"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네덜란드인으로 부터 그것을 사들인 것은 주부뿐 만이 아니었다.
전인미답의 오지에 들어가서 인디안들과 교섭하고 곧 교역의 길을 만든 "마운틴 맨"들에게 있어서도 빼놓을 수없는 도구였다.
그들은 그것 하나만으로 여러 다양한 요리를 간단하고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미식가였기 때문은 아니다.
육체와 정신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 많은 식사를 맛있게 먹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식사를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있는 여유도 없었고 많은 조리기구를 갖고 운반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엄격한 선택 기준을 만족시키는 소수의 도구 중의 하나가 빈 폿이었다.

18세기 후반, 독립전쟁을 마치면서 영국의 속박에서 부터 해방된 미국인은 신천지를 찾아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대륙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서부 개척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마운틴 맨들이 입증한 더치오븐의 훌륭함을 들어서 알게 된 개척자. 입식자. 양치기, 금광 채굴자, 그리고 카우보이들이 더치오븐을 갖고 갔다.

 

● 이것은 3개의 다리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일상 생활은 야영생활 그 자체였고 설령 집을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비나 안개를 피하고,
외적으로 부터 자기를 지키기 쉽게 하는 레벨의 것일 뿐이었다.
당연히 요리의 열원으로서는 장작을 때는 모닥불이었고 주철제로 된 대형 키친 스토브 등은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별이 보이는 하늘 아래에서, 캠퍼스 천으로 만든 타프 아래에서, 통나무 캐빈속에서, 등등 어디가 됐건 식사를 위해 모닥불을 피우지않으면 안되었다.
모닥불 위에 올려놓기에 빈 폿은 너무나 불안정 했다.
장작이 타면서 숯불이 되고 모닥불이 무너지면 휘청하면서 기울거나 속에 있는 스튜가 엎어지면서
모닥불에서 수증기와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들은 모닥불에서도 안정되게 올려놓을 수 있게 바닥에 세개의 다리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다리를 만들면서 안정감이 좋아진 것 만이 아니라 바닥과 열원이 되는 모닥불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충분한 산소가 훌러 들어가게 되면서 안정된 연소도 가능하게 되었다.
동시에 숯불이 바닥에 직접 닿는 일이 없어지면서 바닥 전체가 공평하게 가열되면서 그 열이 전체로 천천히 전해진다.
그들은 키친에서 빈 폿을 사용하며 조리하는 요리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키친 스토브에 내장된 오븐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닥불과 빈 폿만으로 그 맛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상부에서도 가열해야 하는 "상방가열"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뚜껑에 원주형 플렌지를 달고 숯불을 안정되게 올릴 수 있도록 개량했다.
이로써 빈 폿은 하부에서 뿐만이 아니라 상부에서도 동시에 가열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그 자체로 오븐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세개의 다리를 갖게 되고 뚜껑에 플렌지가 달리면서 미국에서 진화한 더치오븐은 "캠프 더치오븐"이라 불리우며, 현재 일반적으로 더치오븐이라고 하면 이것을 지칭한다.

 

● 그리고 더치오븐은 완성되었다

 

이 처럼 유럽태생의 빈 폿, 키친 더치오븐은 미국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야영생활에서 쓰기 쉬운 아메리칸 오리지날의 캠프 더치오븐으로 개량되었다.
현대 더치오븐의 형태를 완성 시킨 것은 폴 레벨(Paul Revell 1735~1818)이라고 하는 보스톤 출신의 인물이라고 한다.
저명한 은 세공사의 아들인 그는 독립전쟁 전에 다수 발생한 혼란에서 영웅적 활약을 한 히어로였다.
당시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의 전사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서재에서 나와 말을 타고 많은 날들을 야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건국의 의사로서 알려진 남자가 더치오븐이라고 하는 조리 기구의 발명자로써도 알려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인의 더치오븐에 대한 마음가짐을 비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더치오븐의 성지 "사우스 피츠버그"

 

에피소드를 하나 더 소개한다.

스틸죠 뉴하우스라고 불리우는 개척자가, 19세기 후반 테네시 주의 어느 시골 구석에 도착해서,
제네랄 스토어(잡화점)의 주인에게 "여기는 피츠버그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주철의 도시로써 알려진 펜실베니아 주의 피츠버그를 향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나침판이 고장났는 지 남과 북을 착각하면서 남부 테네시 주에 와 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그 남자에게 여행 목적을 물어보았더니 그는 빈 폿에 다리를 달고 뚜껑에 플렌지가 달린 더치오븐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주인은 그 얘기에 반하게 되면서 그를 위해 진지하게 결의하게 된다.

"양키는 싫어하지만(그 당시 대부분의 남부 미국인은 그랬었다) 너의 아이디어와 피츠버그라는 이름이 멋있어서 오늘부터 여기를 사우스 피츠버그라고 부르기로 하자"

산타 모니카 공립도서관의 자료로 알게 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의 아웃도어 잡지 "필드&스트림" 1971년 4월호에 게재되어 있다.
하지만 캠프 더치오븐은 그 때쯤 이미 보스톤의 폴 레벨에 의해 완성되었을 때이며 시대 고증적으로도 이상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잡화점 주인이 롯지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데 뭔가 단서가 있을 것 같다.
현재 미국 넘버 1, 즉 세계 제일의 더치오븐 메이커는 롯지(LODGE)사이며, 테네시 주의 사우스 피츠버그라고 하는 마을에 있다.
현 롯지사 사장인 밥 켈러맨(Bob Kellerman)에게 산타 모니카 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료의 이야기를 하자 놀라워 했다.
밥은 롯지 패밀리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더치오븐에 대해 조사해 보면 이러한 조금 묘하기는 하지만 재미난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1813년 11월의 아주 맑은 날, 미주리 주의 이주지에서 어느 남자가 황달로 사망하고 매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존 콜타. 인디안 등의 선주민 속에 들어가서 그 후의 교역의 길을 만든 마운틴 맨이자 파이오니어였다.
그는 1803년 루이스 & 클락 탐험대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탐험대의 주력 멤버로서,
또는 때로는 단독으로 북미 대륙의 아주 깊숙한 곳에 몇 번이나 들어갔다.
지금은 국립공원이 된 옐로우 스톤을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본 남자로서도 유명하다.
부인인 샐리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참배하며 1775년생인 그의 너무나도 빠른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그 때, 유언집행인이 그의 유품을 처리했다.
그 때의 리스트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 줄이 적혀 있다고 한다.
To John Simpson... One Dutch Oven... $ 4.00

 

 

카우보이가 사랑한 더치오븐

 

● 카우보이의 생활 필수품

 

더치오븐은 서부 개척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북미 대륙에서 퍼져 나갔다.
특히 미국인에게 있어서 카우보이와 더치오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실제로 야외에서 사용하고 있는 더치오븐을 처음 본 것은 카우보이로서 네바다 에서 일하던 때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카우보이들의 일은 영화 등에서 보는 것 처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라운드 업이라고 불리우는 소의 이동, 그것은 소를 상대로 하는 단순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한편 소의 등에 불에 달군 낙인을 찍는 브랜딩은 항상 위험과 대치하고 있는 작업이라,
한 순간이라도 주의히지 않으면 안된다.
피곤에 지친 카우보이의 배를 채우고 육체와 정신을 다시 회생시켜주는 것이 바로 더치오븐이다.
모두 식사를 마치면 각각의 침상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매일 밤, 꽉찬 별 하늘을 바라보며 바닥에 누워, 그 날 있었던 일,
그리고 더치오븐이 스스로 만들고 또 기다려주는 식사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나중에 더치오븐과의 만남과, 더치오븐 덕분에 카우보이의 일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미국인에게 말했더니 "역시 그러냐!"라고 하는 얼굴을 하며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미국인에게 있어서도 더치오븐과 카우보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인 동시에 도구로써의 더치오븐과,
생존 방법으로서 카우보이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개척의 최전선에 있던 더치오븐

카우보이라는 직업이 미국에 생겨나게 된 것은 역사상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원래 북미 대륙에 말, 소는 없었다.
전력으로서 말을, 그리고 식료, 유지의 공급원으로서 소를 중미 지역에 들여온 것은 스페인 사람들로,
멕시코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목축이 당시 멕시코령이었던 텍사스 등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북상한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방목한 소를 말에 타고 컨트롤하는 기술은 당시 바켈로 라고 불리우는 멕시코인 카우보이에 의해 북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왔고 그 후,
멕시코인으로 부터 흑인에게, 흑인에서 백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고 부터라고 한다.
카우보이라고 하면 몇 천마리나 되는 소를 이동시키는 긴 여정, 즉 롱 드라이브를 연상한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된 것은 주욱 거슬러 올라가서 1840년대에 들어서 부터다.
그 때까지는 소를 방목하고 키우는 것이 카우보이의 일이었으며 이동하는 여정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동부지역이 번성하면서 사람들은 식료로써 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쪽으로 이동했고,
또 1849년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처럼 서해안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라도 사람들은 소고기를 필요로 했다.
대부분의 소는 텍사스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그곳의 소는 비싸게 팔기 위하여 처음에는 동부로, 그 다음엔 서부로 긴 여행을 하게 된다.
이것이 롱 드라이브이다.
가혹한 롱 드라이브가 성공할 지 실패할 지의 여부는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카우보이들에게 제공하는 가에 달려 있었다.
왜냐하면 카우보이들에게 있어 여정의 가장 큰 즐거움은 먹는 즐거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목장 주인은 가능한 한 실력 좋은 요리사를 고용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런 요리사의 이동 기지가 서부의 비속어로 "먹을것"을 의미하는 "챡(chuck)" ,
그 챡과 조리기구를 가득 실은 포장마차가 chuck wagon이었다.
커피, 밀가루, 콩, 염장육, 건조야채 등 며칠간 저장이 가능한 식료품, 물 그리고 그것들을 조리하는 도구, 식기, 약, 간단한 의료기구, 목공 도구 등등 chuck wagon으로 운반 해야만 하는 물건은 굉장히 많았다.
요리사는 마차에 실고 다니는 물건의 선택에는 아주 엄격했다.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기술 좋은 요리사가 반드시 고르고 갖고 다니던 것이, 그 것 하나만으로 찌고 굽고 볶고 삶고 튀기는 등 어떤 조리든 가능한 더치오븐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예전 TV영화 로우하이드(Rawhide)에서 활약하는 요리사 Wishbone아저씨와
그의 chuck wagon의 씬을 필두로 많은 서부극, 사진집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포장마차를 배경으로 모닥불로 데운 식사를 더치오븐에서 떠서 한 입 가득 넣는 먼지투성이 카우보이들이 있고, 네바다에서 일하는 현대의 카우보이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더치오븐을 앞에 두고 잠깐 동안의 행복을 맛보던 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현대에 다시 살아난 더치오븐

 

미국 대륙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란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던 것과 같은,
주철제 뚜껑 달린 냄비를 갖고 싶어하면서 부터 미국에서의 더치오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모닥불 위에 직접 올려놓고 쓸 수 있도록 고안된 더치오븐은 캠프 더치오븐이라고 불리우며 나중에 태어났다.
18세기 후반, 독립전쟁이 끝나면서 이주지에서 나와 대륙을 이동하는 것이 자유롭게 되었다.
사람들은 개척자, 양치기, 금광 채굴자, 사냥꾼, 나무꾼이 되면서 다양한 동기를 갖고 신천지를 찾아서 서쪽으로 서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짐에서는 더치오븐을 빼놓을 수 없었다.
야영 중심의 이동 생활에서는 캠프 더치오븐을, 정착할 곳을 찾아서 정착하게 되면은 키친 더치오븐을 그들은 사용했다.
그러한 활약상은 영화나 사진집을 통해 볼 수가 있다.
이처럼 미국인의 합리성이 키워온 더치오븐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정리정돈 된 키친에서, 기름때나 마늘냄새와 함께 더치오븐은 모습을 감추었고, 사람들은 "TV 디너"라고 불리우는 미국판 "전자렌지로 띵"요리를 칭송하며, 그러한 식생활에 도태돼어 버리고 말았다.
더치오븐은 레져로서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상당히 매니아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남았다.
예를들면 리버 드리프팅, 승마, 낚시를 하면서 텐트 아래에서 밤을 보내는 향수를 자극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투어 가이드들,

이제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옛날과 마찬가지로 소를 상대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워킹 카우보이들 처럼 일과 야영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
보이 스카웃에서 야영술의 하나로 배운 소년들.
가족의 끈끈한 정을 소중히 여기는 셰이커 교도(shaker), 몰몬 교도들,
이러한 제한 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이한 요리기구로 쇠퇴하고 있었다.
그런 더치오븐이 미국에서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10년 정도 전 부터이다.
진정한 풍부함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건강지향이 높아지게 되면서 미국인은 다시 한번 더치오븐에 주목하며,
재평가 하게 되고 자신들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사용하고 있던 더치오븐을 헛간에서 꺼내오거나,
지방의 제네랄 스토어에 가서 신품 더치오븐을 입수하거나 하면서 어설픈 흉내를 내면서 사용해 봤다.
그리고 더치오븐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면서 친구에게 권유하고 더치오븐의 애호가 층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더치오븐은 현대에 와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출처: 키쿠치 히로시 저. 더치오븐 일요일에 노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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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22:07 2007/01/1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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