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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 예술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디지털 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예술 활동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장르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예술은 한 시대를 특징짓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에 규정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수단들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동하기도 한다. 특히
그 후자적 입장에서 디지털의 예술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샌디에고 소재 캘리포니
아 대학의 영상 아트 교수,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같은 이는 디지털 '미학 선언'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 맞는 미학적 관점의 출현을 역설하기도 했다. 즉 산업 시대의 미디어를
가지고 디지털 시대를 구성하려 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질 수 있는 오감의 발전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고 본다. 인간의 변화된 정서에 맞는 새로운 미학과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미디어 수단의 개발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미학이 정확히 어떻게 현
실적으로 구성될지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선언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예컨대, 인
터페이스의 구성에 있어서 이제까지 우리가 전혀 고려하지 못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적절
히 반영할 수 있고,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다양한 뉴미디어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에 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인간의 감성과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
해 충분한 고려가 없으면, 이런 선언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디지털 아방가르드의 전사(前史)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고 인간 감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시도는 과거에
도 존재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이같은 실험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을 우리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칭한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이 182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일컬으면서 생긴 이 용어
는, 줄곧 사회에 복무하는 예술의 해방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통용되어왔
다.
아방가르드는 중립적 용어가 아니다. 가치 함축적이다. '전위'라는 의미에서도 드러나지만, 앞서 나가는 것, 보수적 장벽을 깨는 것,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것이 그 긍정적 쓰임새이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는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시대적 정서와 맞지않는 것, 거부감이 드는 것,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자기만족적인 것 등의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체계의 변방에서 실험적인 예술 기법을 통해 서구 문화의 모순들을 지적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즉 현대 사회의 키치화된 예술과 상품화에 반발하여 그들만의 자율적인 문화 영역을 꾀하면서, 사회·정치 해방의 보다 광범위한 프로그램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역할도 동시에 가졌다.
아방가르드의 제대로 된 전범은 단연 1915년 쮜리히에서 등장했던 다다(Dada)다. 사전에
서 무작위로 뽑아서 만들었건, 아이의 울음소리를 따서 만들었건, 말의 따그닥거리는 소리를
흉내내어 지었건, 다다란 용어의 정확한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다다의 상식을 끊
는 비상식적 명명을 주시해야 한다. 다다의 예술 작품은 예술의 우위성에 대한 거부로 출발
한다. 이전까지 예술 자체의 공력에 집중했던 개인화되고 주관주의적인 예술의 가치를 가차
없이 부정한다. 베를린의 다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또한 자본주의의 문화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비판을 결합하려 애썼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으로 그 당시 성장했던 볼세비
즘의 비전에도 크게 갇혀있지 않았다.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권력에 대한 비판, 그
것이 중심 목적이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있어서도 이전의 전통적인 예술가들이 시각 매
체에 치중했다면 이들은 다양한 매체 수단을 활용하여 미디어 기법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
었다. 쮜리히에서 결성되었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는 전통적인 시각 자료들의
전시뿐만 아니라 음악, 퍼포먼스, 낭송 등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했다. 또한 1920년에
처음 시도되었던 베를린의 국제 다다 전시회에서도 다양한 미디어들이 동원되었다. 한편 베
를린 다다의 핵심이었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가 시도한 '포토몽따쥬'(photomontage)와 같은 기법은 파시즘의 잔인성을 널리 알리는 기제로 사용되면서, 20세기의 시각문화의 가장 특징적 장르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다다의 이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이 현대에 와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함의는 무얼까? 우선
은 지속되어야할 실험정신이다. 다차원적인 미디어 활용은 디지털 예술에 오면 더욱 빛이
날 수 있다. 둘째로 예술의 자기함몰적이고 주관적인 자세에 대한 극복이다. 방법에 있어선
집단적 창작이 수시로 모색될 수 있겠고, 관점에 있어선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는
예술가가 나와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정신이다. 눈에 보
이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숨어든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 저항 정신이 에술가라면
필히 가져야 할 덕목이다. 필자는 이런 다다이즘의 덕목을 현대에 와 새롭게 출현하는 한
예술 실험 집단을 통해 관찰하고 싶다.
다다의 후예,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
술 창작집단이다. 지금은 한 명이 빠져나가 다섯 명의 전문적 미디어 아티스트들로 구성되
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예술적 재능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 CAE는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맥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유용할 뿐이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이 펼친 중요한 퍼포먼스로는 우선 에이즈 위기에 대한 미국 정책을 비판하면서 플로
리다에서 이루어졌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뉴욕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 영
국 쉐필드에서 벌어진 '실업자들을 위한 국제 끽연 캠페인'에서의 거리 시위, 유전공학의 위
험성을 알리는 유럽 순회 퍼포먼스 등이 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같은 국제적 디지털 예술가들의 각종 모임에서도 시연, 강연 등을 해오고 있다. 94년 '무용성의 기술'(Useless technology) 기획을 시작으로 앙상블은 온라인(critical-art.net)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적극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이들은 94년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저술을 벌이고 있는데, 뉴욕의 아우토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이제까지 발간된 네 권의 게릴라북들은 '전자적 시민 불복종'이란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저항 전략과 전술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의 책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온라인상에 전문을 공개한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CAE
는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 또한 이들에게 '예술가'란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오히려 '문화 노동자'의 지위에 처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적극적 의미를 살려 예술가를 '미디어 전술가'(tactical media Practitioner)라 칭하고자 한다. 이들의 운동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살린 '미디어 전술운동'이 된다.
이러한 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
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아방가르드의 저항 정신을 고무한다.
그들의 창작과 실험은 모두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
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거
대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
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영구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가는 길밖엔 없다. 차츰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디지털 아방가르드 정신
CAE의 예술적 실천은 아방가르드, 특히 다다이즘의 특성과 유사하다. 예술적 시연에 있
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과 학제간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 이들을 다다의 실험
정신과 가깝게 맺어주고 있다. 매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창작의 각종 장소들 또한 앙상블
이 최대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고려되는 선택 범주다. 그리고 예술의 범위를 좀 더 포
괄적인 지위 속에서 고려하려는 시각 또한 비슷하게 닮아있다. 더욱이 이들은 정치적 저항
을 고민하는 예술 집단이라는 것이 다다와의 근친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저
항 전술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요약된 앙상블의 저술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들은 권
력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새롭게 변화된 저항의 다양한 실천 방식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
다.
물론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다다이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앙상블이 새로운 시대의 디지털 예술이 나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을 중심에서가 아니라 변방
에서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앙상블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으며 예술적
실천의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미학을 세워나가고 있다. 단지 우리가 경계해
야 할 경향은 예술적 실험성 자체에만 의존하는 부류다. 순종 엘리트주의에 기대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예술에 써먹는 고급 예술가 혹은 그 극단의 데카당도 존재할 수 있다. 이들에
게 부족한 것은 비판과 저항 정신이다. 오직 실험으로 관객을 우롱하는 엘리트 예술가들의
생명줄은 그만큼 짧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앙상블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이 디지털 시
대의 예술 흐름에 중요한 한 축으로 자라나길 고대한다.
(웹디자인, 20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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