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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에 취한 미 엔지오

애국주의에 취한 미 엔지오 [한겨레]2001-11-17 05판 09면 1272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녹차 포장지에 새겨진 광고 문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기 십상이다. "녹차는 '자유소'라고 알려진 몸의 독소를 해독해 노화를 방지하는 천연 잎이다. 녹차의 주성분은 몸에 해로운 자유소들을 억제해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다."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 이론가로 알려진 슬라보예 지제크가 다른 맥락에서 썼던 녹차의 비유를 요즘 미국 분위기에 맞춰 바꿔보면 아마도 이런 내용쯤 되지 않을까? "애국주의라 불리는 녹차의 효능은 전체에서 벗어나 튀는 것들을 순화시켜, 이것을 전체가 향하는 길로 이끄는 자연스런 대중 최면이다. 애국주의는 사회 단결력을 흐트러트리며 멋대로 튀는 것들을 억눌러 하나된 건강한 정신을 고취한다." 9.11 동시다발 테러는 미국에 '애국주의'의 진한 녹차를 선사했다. 이제 그 녹차의 효능이 자유주의 시민운동 진영에도 서서히 흘러들기 시작한다. 지난달 중순께 (뉴욕타임스)에 꽤 유명한 한 시민운동가가 글을 기고해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전자 신원카드를 왜 두려워하나'란 그의 칼럼은 녹차 덕을 단단히 본 경우다. 그는 잠재적 테러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지문 판독용 칩을 내장한 전자 신원카드의 도입을 난데없이 제안했다. 시민의 프라이버시 권리는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면서, 지금과 같은 위기시에 그 권리를 돌볼 여유는 없다며 전자 신원카드 도입의 당위성을 강변한다. 불과 두어 해 만에 급부상해 인터넷 시민단체로 자리잡은 프라이버시재단도 마찬가지다. 이 단체는 이제까지 디지털 녹화장치 티보에 의한 시청자 감청, 각종 첨단장치에 의한 노동자 감시 등 기업들의 최첨단 정보 수집 능력을 폭로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어왔다. 그런데 이 단체의 영향력을 좌우했던 한 활동가가 얼마전 안면 판독과 전자 신원카드의 개발을 주업종으로 삼는 보안업체를 차려 독립한 일이 생겼다. 어이없는 그의 기회주의적 행보로 이 단체의 장래가 아예 불투명하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몇 가지 사건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미 자유주의 시민단체들은 '애국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애국주의란 녹차의 효능에 더욱 취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애국주의의 고양과 별 구분없이 통용될 수 있는 허약한 이념적 기반을 갖고 있다. 게다가 소비자 중심주의, 대정부 로비 치중, 비대화한 조직 구조, 정치적 입지의 보수성 등 미 시민운동계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이들을 더욱 쉽게 애국주의에 휘둘리게 만들고 있다. 자유소를 순화시키는 녹차의 효능이 기가 막히게도 시민단체들에 먹혀드는 것은 바로 이런 정황에 기인한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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