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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떠돈다, 닷코뮤니즘이라는...

유령이 떠돈다, 닷코뮤니즘이라는... [한겨레]2000-08-04 02판 26면 1150자 국제·외신 기획,연재 한 유령이 네트워크를 배회하고 있다. 바로 닷코뮤니즘이다. 최근 미국 네트워크 활동가들 가운데 일부가 공공연히 닷컴기업에 대응해, 새롭게 닷코뮤니즘의 미래를 꿈꾸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150여년 전에 유럽에서 봤던 공산주의(코뮤니즘)라는 유령과 달리, 이 새로운 유령은 외관상 닷컴이란 신무기를 들고 있다.새로운 유령의 힘은 인터넷에서 나온다.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배포하고, 교환하고, 무한히 복제한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음악파일 무료교환 사이트 냅스터를 비롯해 그누텔라, 프리넷, 정글몽키, 핫라인은 바로 이를 돕는 도구들이다. 이 모두는 중앙의 개입 없이, 네티즌들 스스로 디지털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개방형 기술이다. 냅스터의 경우는 사용자가 엠피3 음악을 교환하기 위해 디렉터리를 관리하는 서버를 경유해야 하지만, 나머지 넷은 서버 없이도 자유롭게 어떤 양식의 파일이건 교환할 수 있다. 닷코뮤니즘은 이런 새로운 기술력에 기초해 자율적 공동체(코뮌)를 세우자는 기획이다. 지난주에는 저작권 위반 혐의로 기소된 냅스터에 대한 법원의 서비스 중지 명령과, 뒤이은 명령 유예로 인해 연일 미국 언론이 들끓었다. 이후의 판결과정도 중요하겠지만, 냅스터 저작권 시비는 메이저 음반사들이 닷코뮤니즘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해 생긴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미 냅스터를 통해 전세계 약 2천만명의 네티즌이 음악파일을 교환해 왔다. 게다가 냅스터의 하루 이용자 수는 미국 인터넷 인구 중 적어도 2퍼센트에 이른다. 기존 저작권을 옹호하는 음반사들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을 소모적인 법정싸움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번 냅스터 공방의 핵심에는 네티즌들의 파일 공유에 대한 닷코뮤니즘의 새로운 정서가 놓여 있다. 음반업계를 포함한 모든 기업들은 이 변화된 정서를 감지할 필요가 있다. 신경제의 기업들은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윤모형을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들의 이윤모형은 온라인에 접속하는 네티즌들의 특성을 인정하고, 좀더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상품가격을 산정하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정보의 자유만을 외치는 닷코뮤니즘은 순진하다. 그러나 기업들이 인터넷에 의해 변화된 조건에 구태의연하게만 대응한다면, 그것 또한 심각한 무지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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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발 저작권 시비

디지털 사회]할리우드발 저작권 시비 [한겨레]2000-07-28 02판 26면 1207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정보는 자유롭고 싶다'고 했던가. 이 말은 정보가 지닌 공유적 특성을 가리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논쟁의 불씨도 담고 있다. 저작권 옹호자들에게는 이 말이 도전과 같기 때문이다. 최근 저작권 시비의 바람이 또다시 일고 있다. 발원지는 할리우드다.전세계 영화판을 좌우하는 미국영화협회(MPAA)가 해커 잡지 (2600)의 편집인인 에릭 콜리를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전설적 해커인 케빈 미트닉의 석방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2600)은 첨단의 해킹 기법들을 다뤄, 기업의 시스템 관리자들에게는 항상 요주의 대상이었다. 에릭 콜리의 변호를 마틴 가버스가 주도한다는 점도 재미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수정헌법의 옹호자이며, '악마의 시'로 이슬람 모독 논란을 불렀던 작가 살만 루시디를 변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저작권 시비의 발단은 노르웨이의 16살짜리 학생 요한센이 만든 리눅스용 암호해독용 프로그램 'DeCSS'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선풍적으로 팔리는 디브이디(DVD) 영화디스크의 튼튼한 암호코드를 무력화시켰다. 암호코드가 풀리면, 영화디스크는 끝없이 복제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유포될 수 있다. 할리우드의 디지털 상품 체계가 단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은 저작권 시비로 이어졌다. 콜리는 이미 (2600)의 웹사이트에 이 프로그램를 등록.공개했다가, 지난 1월 연방 지방법원으로부터 이를 삭제하도록 강제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 저작권 시비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 있는 400개 이상의 웹사이트를 자신의 웹페이지에 링크시켰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1998년에 제정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을 따르면, 저작물에 대한 기술적 보안장치를 우회해 그것을 일반에 공개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그러나 해커쪽 변호사인 가버스는 이 저작권법이 저작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자유, 즉 `정당한 사용'을 보장한 수정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저작물 이용자들의 권리보다, 디지털 상품에 대한 할리우드의 통제권 쪽의 손을 들어줄 공산이 크다. 피고쪽은 이 사건의 판결을 맡은 루이스 카플란 판사가 원고쪽과 사적인 관련성이 있다면서 재판의 공정성 문제를 제기해 놓고 있다. `자유롭고 싶은 정보'는 어느 쪽으로 향할까? 현재로선 결과가 뻔해 보이지만, 그래도 왠지 실제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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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옥죄는 인터넷 감시

노동자 옥죄는 인터넷 감시 [한겨레]2000-07-21 01판 26면 1164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해리 브레이버만의 (노동과 독점자본)이 출간된 지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그의 저서는 좌파 노동경제학의 손꼽는 고전으로 남아, 꾸준히 인용되고 있다. 브레이버만이 얘기한 작업장내 통제와 감시, 노동자와 기술혁신의 관계 등은 디지털 시대의 변화된 노동환경 속에서도 다시금 고민해야 할 주제들이다.미국경영협회가 최근 기업들을 상대로 작업장 감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이 빛바랜 고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대기업의 75% 이상이 직원들의 전화, 전자우편, 인터넷 접속, 컴퓨터 파일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내용을 열람하고 감시한다. 이런 감시율은 1997년에 비해 두 배로 높아진 것이다. 특히 기업 넷 가운데 하나는 컴퓨터 감시 결과에 따라 직원을 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이 사내 직원들을 통제하는 기법이 새롭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제록스가 포르노 등 금지된 사이트들을 즐겨 찾던 40명의 직원을 무더기 해고했던 것은 인터넷 감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근무 중인 모든 직원의 컴퓨터와 인터넷 접속경로가 감시.파악되는 것은, 고용주가 각 컴퓨터에 인터넷 감시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두기 때문이다. 웹센스(Websense)란 감시용 소프트웨어는 이미 컴팩 등 미국내 5천여 기업들이 애용할 정도로 널리 보급돼 있다. 또 스펙터(Spector)는 몇초 간격으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형체는 무엇이든 찍어 저장하는 위력으로 인해, 매력적인 감시용 프로그램으로 악명이 높아지고 있다. 고용주가 '비즈니스를 위한 정당한 사유'에 의해 직원들의 컴퓨터를 무제한 열람할 수 있다면, 감시 당하는 노동자들은 커다란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새로운 직원감시 시스템이, 사무실과 집의 경계가 흐려진 오늘날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에 둔감하다는 데 있다. 전통적인 사무실 업무 외에 컴퓨터와 인터넷의 사용까지 감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인터넷 뉴스 열람, 병원 진료 예약, 자신이 소속된 정치적 웹사이트나 동호회 접속, 연인과의 전자우편 등 일상적인 인터넷 이용까지 위축될 수 있다. 어차피 근무태만이란 잣대로는 이런 개인적인 인터넷 이용도 금지된 포르노를 훔쳐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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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회] 더 교묘해지는 스파이웨어

[디지털 사회] 더 교묘해지는 스파이웨어 [한겨레]2000-07-14 04판 26면 1214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상업적 목적에 의한 소비자 개인정보의 유출과 프라이버시 침해는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그 방식이 교묘해,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네트워크에 상주하는 닷컴 기업의 스파이 프로그램들은 부지불식간에 개인 컴퓨터에서 정보를 빼내간다. 이런 `스파이웨어'를 통해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신상정보는 물론 개인적 성향까지 파악해낸다.지난해 11월 미국의 리얼미디어가 리얼주크박스라는 인터넷 오디오 프로그램을 공급하면서 이 소프트웨어를 통해 소비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크게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부정적 여론에 부닥친 리얼미디어는 이 프로그램을 일부 수정해 정보수집을 중단하는 선에서 일단 불을 껐다. 아메리카온라인(AOL)에 자회사로 합병된 넷스케이프의 소비자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아메리카온라인은 소비자들의 파일 전송을 불법적으로 모니터한 혐의로 집단소송을 당해 뉴욕 연방법원에 피소된 상태다. 웹브라우저 프로그램인 넷스케이프에 내장된'스마트 다운로드'라는 모니터 기능이 프라이버시 관련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기능은 넷스케이프 사용자가 내려받는 파일들의 이름.형태.출처 등의 정보를 자동으로 아메리카온라인에 보내, 이 회사가 소비자들을 개인별로 관리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물론 넷스케이프는 스마트 다운로드 기능이 소비자들의 취향을 파악해 그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이용될 수 있지만, 절대 어떤 정보도 보관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보된 개별 소비자들의 개인정보가 별도로 보관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고, 이럴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저작권에 걸리는 파일을 내려받은 소비자들의 정보가 확보되면, 그들 모두를 관련 기업의 감시와 소송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인터넷 기업들의 상업적 동기에 의한 소비자 정보 오용 또는 남용과, 그에 따른 소송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네트워크에 깊숙이 숨어드는 기업 스파이웨어들의 보이지 않는 전자촉수들을 감지하고, 이를 공론에 붙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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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4. 기술문명의 폭력 학습장 : 생존연구실험실 (SRL)

기술문명의 폭력 학습장 : 생존연구실험실 (SRL) 기 계문명이 인간의 ‘생존’에 가하는 공포심을 철저히 체험하는데 근 25년 이상을 지탱해온 그룹이 있다. 이름도 으시시하게 ‘생존연구 실험실(Survival Research Laboratory, SRL)’이다. 실험실은 1978년 예술 테러주의자, 엔지니어-예술가, 행위 예술가 등으로 불리는 마크 폴린(Mark Paulin)이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실험실의 방장격인 폴린을 뺀 나머지는 실제 실험실에 애정을 갖고 있고 그의 작업을 그때 그때 돕는 수 백여 명의 조력자들이다. 생존연구 실험실의 정식 활동가는 폴린 한 사람인 셈이다. 대부분의 재정은 조력자들이 기부하는 헌금, 실리콘 밸리가 한창 잘 나갈 때는 닷컴 주식으로 횡재한 돈이나 그 곳에서 폐품 처리를 앞두고 나온 고철 기계들의 헌납을 통해 이뤄진다. 한번 인류가 핵폭탄으로 난리를 치르고 난 뒤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그의 종말론적 실험실은 문외한들에게는 고철들의 잡동사니 폐품 수집소를 방불케 한다. 그가 실험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것은 문명의 야만을 보여주는 ‘폭력기계’다. 고철 수집소의 거대한 엔진이 부착된 기계 로봇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기계음과 터보엔진의 힘을 이용해 엄청난 불을 내뿜는 공격성까지 갖춘다. 그의 ‘피칭머신(pitching machine)’은 굉음을 내는 브이(V)1 로켓을 장착하고 시속 3백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거대한 널빤지를 공중으로 날려보낸다. 그밖에도 그가 시연한 대표적인 기계로봇들로는 보잉 엔진과 경찰 사이렌을 장착한 채 불꽃을 방사하는 ‘프레임 휘슬(flame whistle)’, 여섯 개의 다리와 흉칙한 이빨을 휘두르는 괴물 ‘러닝 머신(running machine)’ 등이 있다. 이 폭력기계들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1982년에는 폴린 자신이 만든 로봇의 반란으로 그의 오른 손가락 중 일부가 날아가고 뭉개지는 수모까지 겪는다. 그의 시연과 관련된 흥미있는 일화가 많다. 미 연방정보국(FBI)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꼽았고, 퍼포먼스 이후에는 수 차례 방화 혐의로 감옥에도 들락거렸다.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그의 피칭머신 기계쇼 때문에 그라쯔(Graz)라는 지역에 전쟁 비상령이 내려지는 촌극이 벌어졌고, 1999년 일본 도쿄의 요요기(Yoyogi) 스타디움 공연 이후로 그의 생전에 일본 입국이 어렵게 된 일도 있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찾는 도시들마다 그의 시연 금지령이 내려지기 일쑤였다. 어쨌거나 그가 출현하면 전세계 치안 기구들이 잔뜩 긴장하는 반면, 정반대로 로봇 매니아나 하위문화의 열광자들은 그를 기술 문화의 스타로 숭배하는 진풍경이 목격된다. 일반인들과 다를 것 없는 온화하고 친사회적인 외모와 성격의 폴린은 어려서부터 기계 조립과 함께 극장 예술에 대한 관심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중반에는 자본주의 대중 선전의 중요한 수단인 길거리 옥외 광고의 전복적 이용에 관심을 두고 ‘광고판 해방전선(Billboard Liberation Front)’에도 가담한 전력도 있다. 독특하다 말할 수 있을지언정 비정상인의 의혹은 전혀 없었다. 그런 그가 전세계를 다니며 미친 폭력기계의 종말론적 기계쇼를 펼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관객에게 뼛속까지 심어주려 한다. 그의 시연 도중에 날아다니는 쇠붙이나 나무토막의 흉기들에 신체의 위협을 느끼고, 거친 기계 소음과 타는 기름냄새에 멀미를 하고, 무서운 아가리를 벌리고 불을 뿜는 기계들에 오금이 저리는 등 관객들의 정서는 혼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종말론과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흉물스런 거대 기계의 폭력성 앞에서 관객은 공포에 치를 떤다. 폴린이 얻고자하는 목표는 기술, 특히 군사기술의 가공할 위험에 대한 경고다. 기계에 대한 공포는 미래에 다가올 기술 문화에 대한 대비와 단련의 과정이다. 폴린이 폭력기계로 행하는 관객에 대한 정신적 고문은 바로 미래 기술이 인류에게 자행할 수 있는 해악성을 표현한다.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냉혈한 기계의 소름끼치는 미래상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의 공연은 하이테크 쇼의 일반적 가정들, 예컨대 패션쇼나 컴덱스에서 흔히 보이는 화려와 현란의 장치란 없다. 오히려 관객을 폭력 기계들에 반쯤 미친 아수라로 만들고 이에 대한 경악을 최대한 이끈다. 관객 모독과 폭력주의에 기반한 극단적 정서에 반발이 일자 폴린도 최근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관객에게 우호적인 표현 방법으로 인터넷이나 위성을 통해 로봇 기계를 조작하는 장치를 개발하는 등 공연도중 관객의 안전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의 실험이 과연 예술이냐는 조롱 섞인 일부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25년 넘게 꾸준히 그는 미래 기계상의 모습에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비록 그 방식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에도, 그의 퍼포먼스에 반응하는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발하고, 괴음을 내고, 고속의 속도를 유발하고, 무서운 불꽃을 뿜는 기계들의 모습은 인간을 압살할 수 있는 힘의 상징 혹은 위협적 대상이다. 이와 같은 폭력기계들의 스펙터클 속에서 관객들은 공포를 통해 경고와 각성의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계들의 폭력에 대한 단단한 준비,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조건까지 살핀다면, 폴린의 목적하는 바가 이뤄지는 셈이다. 참고 페이지 생존연구 실험실(SRL) http://www.srl.org 광고판 해방전선(BLF) http://www.billboardliberation.com/home.html 20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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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3. 스텔락 : 맥루한의 사이보그적 실현

스텔락 : 맥루한의 사이보그적 실현 스 텔락 : 1946년 생인 그의 예전 이름은 스텔리오스 아르카디우(Stelios Arcadiou)이다. 그는 97년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 예술과 로보틱스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되기도 했으며, 현재 영국의 노팅햄 트렌트 대학 ‘행위예술 디지털연구팀’의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맥 루한은 일찍이 감각의 확장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혁명적으로 뒤바꾼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에게 감각을 확장하는 수단은 미디어다. 예를 들어 바퀴는 발의, 책은 눈의, 옷은 피부의 확장으로 취급된다.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이자 새로운 감각의 연장인 셈이다. 호주 출신의 행위 예술가이자 첨단 기술을 이용해 신체확장 실험을 벌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스텔락(Stelarc)은 맥루한의 이러한 미디어론을 실제 행위 예술을 통해 실현시킨 인물이다. 70년대는 상품으로 완성된 작품보다는 창작 행위와 그 과정에 중심을 둔 이른바 ‘개념 예술(conceptual art)’이 번성했던 시대다. 개념 예술은 자본주의에 자연스레 포섭되어 상품화되고, 정형화된 틀 안에 갇힌 예술의 엄숙주의를 경계했다. 자연히 이 예술 경향은 잡힐 수 없고 항상 변화무쌍한 신체와 그 물리적 행위를 창작의 중심에 놓게 된다. 한편 틀에 갇힌 엄숙주의를 향한 개념 예술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적 요인을 과장하는 쪽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바로 스텔락은 70년대를 거치면서 이 두 경향을 함께 지녔던 대중적인 행위 예술가다. 그에게 스펙타클의 요소는 뭔가 첨단을 상상하게끔 하는 신체 확장의 기계 이미지를 통해 구성되었다. 스텔락은 ‘몸의 확장’, ‘레이저 눈’, ‘제 3의 손’, ‘자동 팔’, ‘비디오 섀도우’ 등 인간-기계간의 잡종 기획을 통해 신체 확장을 부단히 실험해 왔다. 관객은 SF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보그 인간의 모습을 스텔락의 예술에서 관찰할 수 있다. 스텔락의 구상은 이처럼 인간과 기계의 형식적 결합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가 보는 궁극의 비전은 ‘신체의 소멸’이다. 기계를 통한 신체 확장을 넘어서, 기계와 신체 중 어느 중심된 조정자 없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동작하는 인간-기계의 진정한 잡종을 염두에 둔다. 이것이 스텔락이 보는 ‘포스트휴먼’의 구상이다. 맥루한의 미디어론을 극대화한 신체-기계관이다. 그에게 현대 인간의 신체란 진화하는 존재다. 신체 감각의 진화는 새로운 시대의 신체 모델을 필요로 한다. 그가 기술과 함께 소멸하는 신체를 선언한 것은 변화된 인간의 감각과 신체적 조건을 미리 감지했기 때문이다. 피부 깊숙이 뚫은 낚시 바늘에 연결된 줄의 평형성을 유지하기 위해, 연결된 돌들의 중력에 기대어 허공에 들어올려진 그의 초기 행위예술에서 관객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극한을 체험한다. 최근에는 피부에 칩을 이식하여 자신의 근육을 외부 자극에 의해 조정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무선 인터넷을 통해 원격 조정되는 이식된 칩이 자율 신경을 자극함으로써 팔의 근육을 저절로 움직이는 실험이다. 그가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신체 확장의, 신체-기계-네트의 합일 과정을 보여주는 행위다. 스텔락은 근본적으로 기행(奇行)으로 사기치는 예술가들과 결별한다. 그가 지닌 예술적 의의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구상이다. 스텔락은 궁극적으로 네트 속에서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는 새로운 신체 소멸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권력의 중심점인 신체의 소멸을 꿈꾼다. 그는 기술과 결합한 몸을 통해 초월과 권능의 이미지를 실험하면서 그 새로운 가능성을 점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이 제시하는 기술의 모습에서 관객은 절대 후기자본주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 관객은 오로지 신체를 가로지르는 기술의 가공할 이용과 능력만 느낄 뿐이다. 기술로 포장된 신체에 대한 관심의 몰입은 기술 생성의 사회적 맥락을 거세한다. 그에게는 신체를 구성하는 테크노 권력의 실상이 불투명하다. 예컨대, 신체에 작동하는 현대 권력의 모습은 개별화된 바코드 삽입, 신체 내부에 자리잡은 감시용 칩, 인간 눈동자를 흐르는 개별 인식의 데이터베이스, 위성을 통한 신체 관리 등에서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신체에 가해오는 디지털 권력의 ‘신체정치’ 구상이 스텔락의 ‘몸’에 생략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관객은 그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봄직한 신체와 기계간의 성교를 관음적으로 지켜볼 뿐이다. 이것이 30년 이상 굳건히 지속된 그의 사이버네틱 행위예술에서 관찰되는 가장 큰 한계다. 스텔락의 홈페이지 http://www.stelarc.va.com.au/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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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2. 올랑의 사이보그 성형수술 극장

올랑의 사이보그 성형수술 극장 자신의 외모가 내면적 본질에 비해 턱없이 소외되었다는 강박에 이르면 정신의학적으로 일부는 ‘신체기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에 걸린 것으로 의심해야 한다. 성형이 하고 싶어 얼굴이 근질거리거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잘난 여성의 얼굴 거죽을 벗겨내어 자신의 얼굴에 이불 깁듯이 기워 넣고 싶다거나, 진공 청소기로 몸의 과장된 일부를 쭈욱 흡입시켜버리고 싶은 지경에 이르면 장애가 중증으로 돌변한다. 유명 여성들의 가장 잘난 부분을 자신의 얼굴에 꼴라쥬로 이어 성형한다면, 이건 완전 ‘울트라 엽기짱’ 수준일까? 실제로 올랑(Orlan)이란 프랑스의 한 멀티미디어 행위예술가는 ‘최고의 걸작: 성녀 올랑의 환생’이란 기획으로 8번 이상의 성형수술 극장을 선보였다. 모나리자의 이마, 프시케의 눈, 유로파의 입, 다이애나의 코, 비너스의 뺨 등 유명 그림들에 나오는 여성들의 이목구비를 디지털 이미지로 조합한 ‘얼굴본’을 가지고 그녀는 실제 성형 작업에 임했다. 올랑은 80년대부터 성형수술 과정을 통해 소위 ‘카날 아트(carnal art)’를 꾸준히 소개한 국제적 인물이다. 그녀를 첫 대면하는 사람은 ‘카날’과 ‘카니발’의 경계를 구분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필자 스스로도 93년 뉴욕에서 행해진 그녀의 수술극장 퍼포먼스 비디오를 보면서 구토를 일으켰고, 한 등발 좋은 여성이 기절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올랑은 그저 포스트모던한 ‘엽기녀’ 혹은 중증의 성형 수술에 시달리는 여자에 불과할까? 우리에게 정체를 구성하는 외모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는 의도한대로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외모의 시간적 변화 또한 자신에게서 ‘타자’의 영역에 속해 있다. 자신으로부터 외모가 소외되는 현상은 ‘바깥’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더욱 더 강화된다. 여성성, 물신성 등의 가치는 바로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이며, 신체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것’ 혹은 ‘의복’의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올랑에게 신체는 오직 사회적으로만 구성된다. 그녀의 수술극장은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규정된 여성 외모의 미적 규준을 깨기 위해 그녀 스스로 극장의 감독이 되어 벌이는 예술적 퍼포먼스다. 환자, 시술자, 참관인들은 파코 라반에서 디자인된 오트 쿠튀르 수술복을 입는다. 수술실은 소품용으로 준비된 십자가상, 모조 과일, 수술극장의 큼지막한 크레딧 벽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녀는 시술 동안 정신분석과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위성을 통해 자신의 관객들과 전화를 나눈다. 그녀의 이러한 엽기적이고 키치적인 시술에는 다중(multiple) 정체성에 대한 예술적 실험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외모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현대 여성들이 지닌 욕망의 광기를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다. 90년대말 이후 그녀의 시술은 멀티미디어 작업으로 확대된다. 포토샵 등의 작업을 통해 그녀의 얼굴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위성이나 이메일 팩스 등으로 작업 내용을 전송하는 전시 기획도 갖고 있다. 애초 그녀의 얼굴이 수정, 제거, 덧붙이기가 가능한 ‘소프트웨어’와 같다고 언급했을 때, 이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특히 멕시코 여행을 통해 얻은 1999년 디지털 작업 ‘자아-잡종들(self-hybridations)’은 얼굴 이미지의 사이보그적 변형성을 극대화시킨 퍼포먼스로 기록된다. 올랑은 고정화되고 닫혀있는 전체로서의 신체 개념을 수정과 변형의 대상으로 역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신체 재구성은 궁극적으로 사이보그 정체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일찍이 ‘사이보그 선언문’을 썼던 도너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를 일종의 ‘해체되고 재구성된 후기모던의 자아’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권력에 의해 타자화 된 신체의 해체와 재구성을 올랑은 수술극장을 통해 현실화하고 있다. 물론 그녀에게 새로운 디지털 기술은 신체를 재가공·재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수술에 의한 변형과 디지털에 의한 신체의 재디자인은 최종적으로 신체 소멸을 위한 기획이다. 서구의 기술 수단을 가지고 서구의 미적 기준을 깨려 한다. 하지만, 매일 밤마다 그녀를 괴롭히는 수술 후유증은 여전히 큰 고통으로 남는다. 포스트모던한 다중의 정체성에도, 그녀에게 끈질기게 달려드는 그 아픔은 절대 지우지 못할 ‘단 하나’ 남는 ‘모던’한 실체인 셈이다. 올랑의 홈페이지 http://www.orl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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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디지털 저항의 집단 창작 모임,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고 인간 감성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는 시도는 먼 과거부터 존재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으로 실험 정신을 추구하는 이들을 우리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불렀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이 182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관찰하면서 붙인 이 말은, 줄곧 사회에 복무하는 예술의 해방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였다. 생시몽의 개념에 부합하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이제부터 ‘사이방가르드(Cyvantgarde)’라는 개념을 꿔다 쓰겠다. 필자가 보는 사이방가르드의 덕목은 우선, 자유로운 실험 정신이다. 다차원적인 미디어 실험은 디지털 예술에 오면 더욱 빛이 난다. 둘째로 예술의 자기 함몰적이고 주관적인 자세에 대한 극복이다. 방법에 있어선 집단적 창작이 수시로 모색될 수 있겠고, 관점에 있어선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는 예술이 발굴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정신이다.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숨어든 자본주의 권력에 대한 지속적 저항이 예술가의 당연한 덕목이 돼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이러한 전제 조건을 갖춘 아방가르드로 단연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앙상블이 다년간에 실험하고 정리한 디지털 네트워크 공간에서의 저항 이론은 새로운 디지털 실천 방식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들이 지닌 기술 현실 비판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아방가르드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 예술적 재능들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 맥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유용할 뿐이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이 펼친 중요한 퍼포먼스로는 우선 에이즈 위기에 대한 미국 정책을 비판하면서 플로리다에서 이루어졌던 멀티미디어 이벤트, 뉴욕 사창가의 매춘부들과 함께 벌인 퍼포먼스, 영국 쉐필드에서 벌어진 ‘실업자들을 위한 국제 끽연 캠페인’에서의 거리 시위, 유전공학의 위험성을 알리는 ‘신(新)이브의 컬트’라는 제목의 유럽 순회 공연 등이 있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와 같은 국제적 디지털 예술가들의 각종 모임에서도 시연, 강연 등을 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94년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저술을 벌이고 있는데, 뉴욕 아우토노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이제까지 발간된 다섯 권의 게릴라 포켓북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저항 전략과 전술을 모색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교란(The Electronic Disturbance)>(1994)에 이은 <전자적 시민 불복종(Electronic Civil Disobedience)>(1995), <디지털 저항(Digital Resistance)>(2001), 이 세 권 모두는 움직이는(nomadic) 권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유목적 저항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두 권의 책, <신체 기계(Flesh Machine)>(1998)와 <분자 습격(Molecular Invasion)>(2002)은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시도되는 신체 관리의 유전학적 미래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앙상블의 책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온라인상에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앙상블은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 또한 이들에게 ‘예술가’란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오히려 ‘문화 노동자’의 지위에 처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먹는 예술가 아닌 예술가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라는 적극적 의미를 살려 예술가를 ‘미디어 전술운동가(tactical media practitioner)’라 칭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의 운동이 바로 ‘미디어 전술운동’이다. 미디어 전술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아방가르드의 저항 정신을 고무한다. 그들의 창작과 실험은 모두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질기고 영구적이다. 일상에 미치는 미·거시 권력들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가는 길밖엔 없다. 서서히 끈질기게,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확장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 : http://www.critical-art.net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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