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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데이즈 / 구스 반 산트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앵글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의 삶에서 사라진,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그러므로 실상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마지막 며칠을 담기로 결심했다. 시적인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펀트>의 누이 같은 영화. 사실 나는 그닥 좋지 않았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을 어떻게 상상했을지, 그것이 궁금해서 찾아간 극장. 당연히 <도어스>를 바랬던 것은 아니다.

 

오프닝은 아주, 아주,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선택적으로 농도를 달리하는 앰비언트 사운드와 낮은 웅얼거림, 보일 듯 말 듯 나뭇가지 사이로 흔들거리는 걸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단 말이다. 컷이 바뀌고 나서 반대편 기슭에 있던 그가 이편으로 건너와 뒷태를 보이는 움직임까지도.

 

그런데 확실히 나는 낯선 것에 호의를 베풀지 않는 사람. 생경함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나의 몰입은 끝이 나 버렸고, 오프닝에 이어 두 장면 정도 - 창가에서 원경으로 빠지는 장면이랑 it's the long lonely journey from death to birth 부르던 장면 - 를 제외하곤 떨떠름해 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커트 코베인 같던 블레이크가 마이클 피트로 보이기 시작한 것도 문제. 난 마이클 피트가 싫다. 어른이 되다 만 애 같은 얼굴이 정말 꼴사납다. 유난히 싫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가리워진 마지막 순간을 이토록 표현해 낸다는 것, 그것은 인정이다. 예를 들어 기형도의 죽음 같은 것, 개인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시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오롯이 빚어낸 영화는 어떤 느낌일 수 있을까. 고정희의 죽음. 예민한 이들의 죽음들. 최승자가 죽고 나면 뭐라도 하고 싶어질 것 같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권력을 창의적인 발상의 실현으로 연결 지으며 변방의 아웃사이더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예술가로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그의 모습과 주변 현실이 상업주의의 최전방인 미국에서 목격되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며 실험이란 젊은이의 특권이란 것이 허상임을 깨닫는다. 삶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실험은 성숙의 결과물로 제시될 때 더 감동적이다." - 김영진, 필름 2.0


 

후후... 두 갈래의 길이 있었고,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고, 훗날 한숨을 쉬며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그 앞에는 모호한 길이 놓여 있었구나. 이제서야 보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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