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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베트남 땅을 밟다. (2006. 1. 10)

호텔 아침 부페의 로망

호텔 아침 부페. 개인적으로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지만, 배낭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별로 실현해 본 적이 없는) 여행의 로망.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대충 짐을 챙겨 놓고 부페가 제공된다는 레스토랑으로... 아, 이 얼마나 깔끔하고 알찬 음식들인가! 정말이지 무료로 제공되는 숙소와 아침 치고 너무 놓은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JAL의 정책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더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신이 나서 일본인, 서양인, 제복을 입은 승무원 들이 섞여 있는 식당 안을 혼자 돌아다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출혈성 위염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나의 위장을 생각하니 폭식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밥을 먹고 나면 할 일이라고는 코앞에 있는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넘게 앉아있는 것 뿐이니... 나로서는 꽤 많이 참아 주었다.
아, 먹는 것에 관한 한 조금은 철이 든 것인가.

안락한 비행의 로망

칸사이 국제공항에서 호치민 국제 공항으로 가는 베트남 에어라인 비행기 (JAL과의 조인트로 이 구간은 JAL의 표를 샀어도 실제로는 베트남 에어라인을 이용하는 것)는, 너무나 안락해서 마치 비지니스 클래스에 탄 느낌이었다. 워낙 승객이 없었던 덕에, 뒷쪽 창가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객이 거의 없는 비행기는 고요하고 아늑하다. 구름 위를 날며 태양으로 가까이 가는 길. 비행기 날개에 반사된 태양광이 작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비교적 새 비행기, 짙은 자주색 아오자이를 입고 영어, 베트남어, 일본어를 구사하는 승무원들의 친절한 서비스. 기내식 메뉴와 안대 (물론, 왕복 두 개 다 챙겨왔다.)까지 제공하는 세심한 서비스. 게다가 기내식은 이렇게 귀여운 일식 메뉴들과 맛있는 빵과 케익이였다. 구름 위에서 먹는 모밀국수라! 기내식이 다 그렇 듯 크게 맛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기꺼이 먹지 않을 수 있으랴...

식사가 대충 정리 되니, 조도를 낮추고 취침 모드다. 나는 화이트 와인으로 노곤해 진 몸으로 북라이트를 켜놓고 쿠션과 담요를 있는 대로 끌어다 푹신한 좌석을 만들고, 푹 파뭍혀서 방현석의 '하노이에 별이 뜨다'를 읽었다.
이륙 시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벌써 절반이다. 믿을 만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가는, (약간 마초적인 처투이긴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구한 독립투쟁의 역사, 제국주의 점령군을 최초로 이긴 피식민지 국가, '혁명'의 20세기 최후의 국가... 호치민은 위대하고, 베트남 민중은 훌륭하며, 한국군은 미국의 사주로 베트남 전쟁에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채 몇 장을 넘기지 않아 편하지만은 않은 감정의 동요가 몰려온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치민, 미국인들이 '사이공'이라 불렀던 그 공간으로 가는 길에라도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해서.
별 준비도 생각도 없었던 나의 베트남 여행에 조금이라도 고민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달까.


나의 안락한 비행기... 일기장, 물, 커피, 화이트 와인의 풍족함이란 ^^


 

하늘을 나는 것은 참 특별한 겸험이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 태국에 갔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일생에서 가장 멀리 까지 가본, 적도를 넘어 자카르타까지 가는 7시간의 비행에는, 꽤나 지쳤지만, 여전히 이렇게 빠르게 바다를 건너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인 것 같다.
사실, "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속도가 중요한 것일지도... 쾌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다"는 행위의 낭만을 즐길 수 없다. 단지, 빠르게,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행기라는 것이 발명되었을 뿐인 것 같다. 빨리 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타보기 전에 어떤 상상을 했던, 어떤 로망들을 덧씌워 홍보를 했던, 내가 원하는 목적지 까지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들은 '이동'에만 관심을 두는 듯 하다.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는 KTX도, 부산에서 후쿠오카 까지 3시간 30분 만에 주파하게 해주었던 비틀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앞으로도, 더 빠른 이동수단이 나오겠지만, 낭만적이거나 쾌적한 방향으로는 전혀 발달하지 않겠지. 무엇을 도입하고 보편화시킬지 결정하는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몫이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혹은, 우리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모두가 불편할 지라도...
여행의 로망, 나는 것의 로망, 바다를 건너는 것의 로망 따위는, 초호화 크루즈 여행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감상 속에서나 담보되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의 이해 따위가 아니라, 모든 이의 로망이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전혀 다른 생활 패턴을 실험해 보는 수도 있겠다. (하지만, MS에 맞서 오픈오피스와 모질라를 사용하는 것만 해도, 꽤나 불편한 걸 어찌하란 말인가...)

호치민 땅을 밟다.

착륙 즈음이 되니 창 밖으로 메콩 삼각주가 보인다. 흙빛 강물이 거대한 흔적을 남기며 흐르고 있다.
태국과 라오스에서 메콩 강을 질리도록 보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태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가던 9 시간의 스피드 보트는 정말 죽음이어서, 메콩 강을 별로 더 보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강은 그냥 강, 열대림이 우거진 사이를 흐르는 큰 강이었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이곳의 메콩강은 생활의 터전이었다.

입국 심사를 하는 공무원들은 황토색 옷감에 붉은 바탕 황금색 별을 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환전소에 대한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터라, 공항에서 환전을 해, 베트남 화폐 '동'을 확보했다. 베트남 화폐는 가치가 너무 떨어져 1000동 이하의 돈은 거의 쓸모가 없다. 덕분에 엄청난 지폐 다발을 손에 쥐게 되었다. 환전 창구에서 여행자 거리인 '팜응우라오 '로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 지 물어봤더니, 택시를 타라고 한다. 그럴 순 없지. 여행지에서, 더구나 어느 정도 교통수단이 갖추어져 있는 도시 내에서는 가능하 한 걷거나 로컬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나의 또 하나의 로망 (이 로망을 지켜내느라 여행 끝무렵에는 꽤 피를 보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와는 달리, 로컬 버스 정류장은 공항 앞 편한 장소에 있었다. 택시를 타라는 기사 아저씨들을 물리치는 게 더 힘들다면 힘들었지. 이미 이 때 부터 겨울 옷을 구겨 넣은 나의 베낭은 꽤나 무거워져 있었지만, 처음 탄 베트남의 버스는 그리 붐비지도 않아 창 밖을 구경하며 그리 멀지 않은 팜응우라오에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일행과 조우하다.

생각 해 보니, 처음 가보는 외국의 도시에 혼자 도착해 본 적은 처음이다. 여러 도시들에서는 일행과 함께였고, 혼자 했던 여행이라고 해도, 이미 한 번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방콕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서 별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었던 것 같다.
팜 응우 라오 거리 롯데리아 앞 오후 네 시. 20일도 전에 베트남으로 날아온 친구와 블로그를 통해 어렵게 소통하면서 잡은 약속은 이렇게 낯설고 나에게 별 정보가 없는 도시에서는, 너무나 못미덥게 느껴진다. 무거운 베낭을 내려 놓고 20분 정도 거리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모또?" "룸?"하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여행자 거리라는 곳에선 자연스러운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가이드북을 뒤적이고 있었다.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점점 불안해진 나는, 혼자 숙소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 슬슬 걱정이 몰려올 때 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쪽에서 왠지 낯설지만 반가운 친구와 후배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로 나타났다. 휴.. 다행이다. 나를 잊은 건 아니구나. 전쟁박물관에 다녀왔다는 그들을 따라,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아 숙소에 도착했다.

이 골목이 참 마음에 든다는 그들의 감상을, 나도 알 것 같았다. 좁다란 골목에는 생활의 느낌이 물신. 여행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각종 노점 식당이 군데군데 숨어 있고, 사람들은 대체로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무관심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이 동네 홍반장이라고 할 만한 언니야 (이름을 까먹었다 --;)는 특유의 오지랍으로 우리를 챙겨주었다. (아니, 사실은 친구들을 챙겨주었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후에 혼자 이 거리에 돌아왔을 때, 그 언니야는 홍반장의 친절을 혼자 있는 나에게는 베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

작은 창문과 큰 더블 침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 나름대로 옷장 까지 갖춘 4달러 짜리 숙소에 묻어들어갔다. 방에서 조금 쉬면서 짐도 조금 풀고 과일도 깎아 먹으며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의 지난 여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장 고무적이었던 사실은, 거의 모든 숙소에서는 휴지와 수건, 비누 등을 제공한다는 점이었다. 태국이나 라오스에선, 싼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하노이에서 시작해 주요한 도시들을 돌아 호치민까지 내려온 이들은, 내일 밤 기차를 타고 스무시간을 넘게 달려 다시 하노이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베트남에서 7일을 머무를 나 보다 며칠 먼저 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충 생각해 두었던 일정에 대해서 조언을 구했다. 해변 휴양 도시 무이네는 딱히 볼 것은 없겠지만, 휴식을 위해서는 괜찮을 것이고, 메콩삼각주 투어는 가능하면 일일 투어 정도로 가서, 하룻 밤 정도는 자고 오라는. 그래야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도 볼 수 있을 거라고. 귀가 얇아, 혹은 친구의 의견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의견에 따라 이후 일정을 잡았다. 역시, 믿길 잘했다고 아직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

베트남에서의 첫 밤은 술과 함께 ^^

친구들과 함께 한 이틀 (만 하루 반?)은 그냥 친구들의 일정에 맞추기로 했다.
해외에서 함께 놀아 보는 흔치 않은 기회를 살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나의 여행 일정은 꺼꾸로 돌아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처음 낯선 도시에 발을 딛고, 도시를 탐색하고, 숙소를 (조금은 힘들게) 잡고, 길을 헤매기도 하면서 차차 적응을 하기 시작하고, 여행의 말미에는 적당히 뒹굴거리면서 쇼핑도 하고 지난 여행도 추억하면서 도시의 곳곳을 다시 돌아다녀 보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엔 정 반대라고나 할까. 이미 베트남과 호치민에 익숙한 친구들을 따라 어려움 없이 뒹굴거리고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지난 여행의 추억을 나누어 갖다가, 출국하는 날 혼자서 가장 많이 헤매고 다녔다는 말이다. ^^

여하튼, 이 날은 이미 어둑해진 시간에 밖으로 나와 골목에서 감동적으로 맛있는 '퍼 가 (닭 쌀국수)'를 먹고 - 이 국수를 꼭 다시 먹고 싶었는데, 결국 일정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뭐, 이미 조류독감은 안중에도 없었고... - 또 골목에서 맛있는 '까페 스와 다' (연유를 넣은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감동적으로 맛있었던 노점 닭국수~와 나의 일행들



카페 스와 다 제작 과정. 먼저 연유를 잔에 충분히 담는다... 길거리 카페에서


두개 다 내가 베트남에서 먹은 음식들 중 최고 수준이었는데, 이 역시 이미 현지인화 되어 있었던 친구들 덕이리라. 그리고, 친구의 친구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다가 귀국하신 분과 그의 부인, 그리고 역시 한국에서 일했던 친구분)을 만나서, 무려 승용차를 타고 호치민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얻어먹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친구가 완수해야 할, 교육에 쓸 아오자이를 사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에서 자활을 하는 그녀는, 교육용으로 쓸 만한 아오자이를 사오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왔던 것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생존 베트남어에 능통한 상황. 여행의 즐거움 덕분에 말문이 트였는지, 말문이 트였기에 여행이 즐거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주 즐거워 보였다. 한국어를 쓰시는 베트남 분들과도 베트남어 대화(?)를 자주 시도하던 그들과, 나도 이틀 동안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한국말을 하고 지냈다.

친구의 친구들이 승용차를 타고 떠난 뒤에 숙소가 있는 골목에 들어가니, 홍반장 언니가 또 우리를 반겼다. 이미 몇 시 경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나가는 길에 약속을 해 둔 터였다. 이 언니는 너무 많다는 우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6리터나 되는 생맥주를 거의 강매시키더니, 술판을 벌이자 가끔씩 나타나서 술을 따라줄 뿐이었다. 하지만, 즐거운 느낌. 게다가, 맛있는 과일(구아~라는 이름의, 감 맛이 나는 초록 열매였다.)을 직접 깎아 먹여주는 서비스도 잊지 않았고, 지나가던, 동네의 다른 친구 (아주 화려한 18세의 이 아가씨의 이름도 역시 까먹었다. 후에 이 골목을 찾았을 때도 나를 반겨 주었는데...)를 불러다 앉혀주기도 했다.

전쟁박물관 감상 후기가, 이 술자리의 주요한 주제였다. 나도 마침 방현석의 책을 읽으며 온 터라, 박물관을 아직 보지 못했어도, 이것 저것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사실, 전쟁박물관은, 호치민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마지막 날 본 박물관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곱씹게 되었다.


2리터 짜리 생맥주의 세 병의 정체


과연 다 마실 수 있을까 걱정되던 2 리터 짜리 생맥주 통이 다 비었다. 이미 시간은 너무 늦어, 골목길에 자리를 깔고 앉은 우리는 충분히 민폐를 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조금 아쉬운 감이 있어, 방에 들어가서, 그 때 까지 후배의 가방 속에서 베트남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던 '참이슬' 팩을 또 비웠다. 내가 비행기에서 집어온 땅콩과자를 안주 삼아...
그동안 속도 좋지 않고, 너무 바빠서,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에서의 첫 밤엔 술이 술술 들어갔다.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여행 이야기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 골목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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