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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6호] 선거 전술 - 기본원칙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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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전술 - 기본 원칙 

 

 


  선거 전술의 기본 원칙에 대해 상술하기 전에 먼저 의회민주주의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 보자.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는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최초의 자본주의 강국들에서 계급투쟁이 무르익어 가는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다. 20세기에 이들 나라들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거듭 발전함에 따라 식민지 세계로부터 초과이윤을 착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국 노동자계급을 달래는 개량책으로 이 거대한 초과이윤의 일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개량과 양보조차도 노동자계급의 투쟁 없이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의 연장선에서 그 투쟁이 의회 선거와 결합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등)의 개량주의적 타락과 함께, 양보와 개량을 따내기 위한 투쟁 자체가 이들 ‘노동자’ 정당의 정치적 실천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본의 양보 여지가 커지고 이들 노동자 정당의 의회주의가 고착화되면서 노동자계급 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더욱더 강화되었다.

 

  노동자계급이 의회와 선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한 혁명가들은 이 환상을 걷어내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대중이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무가치함과 그 야바위성을 볼 수 있게 해 줄 전술을 제출, 운용함으로써다. 혁명가들의 의회 및 선거 전술에서 그 바탕을 이루는 기본 원칙이 초기 코민테른(스탈린주의가 지배하기 전인 1919-22년 시기의 코민테른)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 기본 원칙 가운데 여기서는 선거 전술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1. 대선이나 총선 등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혁명가들의 전술은 선거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걷어내고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의식을 발전, 강화시키는 데에 그 일차적 목표가 있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자본가계급에 기반을 둔, 또는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후보나 정당을 지지하라고 호소, 선동하는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자임하는 세력이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 아래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부르주아 후보에게 표를 찍으라고 선동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자본가계급과는 전혀 무관한 세력인 것처럼 스스로를 내세우는 자유주의 시민운동에 바탕을 둔 정치집단(예컨대 박원순 후보진영이나 녹색당 같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실제로 똑같은 부르주아 정치세력임에도 단지 은폐되어 있을 뿐으로, 이들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사회주의자들은 선거가 제공하는 연단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후보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사회주의 후보의 공약은 사회주의 강령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 사회주의 강령을 구체적 정세에 맞춰 적용한 바로서의 <행동강령>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같은 행동강령이 없는 사회주의 후보 전술이란 기만이며, 따라서 행동강령의 정립은 사회주의 후보 전술의 전제이다.

 

3. 사회주의 선거 캠페인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지지자들(선진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쪽으로 획득하고 그들을 조직화하고 노동자계급 속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당선은 언제나 이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선거 캠페인 자체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요구들을(가장 기초적인 생존권적 요구들이라 하더라도) 쟁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대중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한편 집권해서 또는 의회 진출을 통해 무언가 변혁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부나 의회 같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활용해서 그러한 목적을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부각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기초 위에서의 당선만이 승리일 수 있으며, 정부나 의회 무대 내에서의 사회주의 전술 운용을 위한 확실한 토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 표를 분열시키는 것”이 될까봐 우려하거나 그러한 악선동에 영향 받아 후보 내는 것을 꺼려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개량주의자들이 당선되어 기만적인 국가기구에 들어가는 것보다 선진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쪽으로 새롭게 충원되고 조직화되는 것이 계급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일이다. 특히 총선의 경우 개량주의자들이 우세한 노동자계급 밀집 지역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 노동자계급 표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자제되어선 안 된다. 가장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사회주의 선거 캠페인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4. 조직 규모나 주체 역량의 문제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후보를 낼 수는 없지만, 다른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 후보가 있을 때 비판적 선거 지지의 형태로 노동자 공동전선을 가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결정 기준은 이 개량주의 정당의 노선과 정책이 아니라 그 후보가 노동자계급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개량주의자들이 친노동계급적 공약(예를 들어 정리해고제 폐지)을 내걸고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어서 당선될 수 있겠지만, 자본가 체제 안에서 그러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설사 그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크게 제약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에게 이 점을 환기시키고 경계시켜야 하며, 그러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 개량주의자들과 그들의 노동계급 기반 사이에 생겨나는 모순을 활용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모순 때문에 개량주의 정당을 상대로 한 공동전선의 운용이 가능해 진다.

 

  이 전술은 그러한 후보가 노동자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직(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이나 노동조합)을 대표하여 출마하는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비판적 선거 지지란 후보의 강령을 비판하는 기초 위에서 그 후보에게 표를 찍으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사회주의 강령은, 후보에게 제기하는 요구안의 형식으로 수행되는 사회주의 선전의 토대가 된다. 이 강령이 개량주의자들의 강령보다 우월함을 설명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이 과거에 했던 제한적인 약속들마저도 이행하지 못해온 이력을 알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비판으로 노동자 대중들이 쉽게 이 개량주의 당을 버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 당이 자신의 최근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할 노동자계급의 대중행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개량주의자들과 공동전선을 하면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행동강령을 정면으로 내건다. 그리하여 개량주의 후보 및 정당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조금도 자제하지 않는다.

 

5. 사회주의자들이 독자 후보를 낼 수 있는 기반이 안 되어 제도권 개량주의 정당 후보에 대해 비판적 선거 지지를 할 경우 그러한 비판적 선거 지지가 상당 기간에 걸쳐 되풀이 하여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불가피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판적 선거 지지 전술이 결코 개량주의 후보에 대한 항상적이고 자동적인 승인 같은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전술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운용하면 전술이 전략으로 탈바꿈해 버릴 위험성을 안게 되는데 이러한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 전술은 또한 개량주의 정당의 집권을 노동자계급이 실제로 경험해 보아야만이 개량주의와 단절시킬 수 있다는, 따라서 일단 개량주의 정당이 집권토록 하는 데에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필요성이 있다는 관점으로 전락할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전술 운용은 언제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해야 한다. 부르주아 정부들 간의 ‘정권교체’(‘진보적 정권교체’까지 포함하여)가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지배를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전에 특정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정권 타도’나 ‘정권 퇴진’ 같은 공허한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개량주의 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지켜주거나 확대해 줄 수 있다는 위험한 환상을 유포하는 것이 된다.
  또한 개량주의 정당에게 집권하여 사회주의 강령을 받아 안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결코 사회주의자들의 슬로건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량주의 정당이 공공연한 부르주아 정당보다는 ‘차악’이라는 이유로 노동자계급에게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그러한 개량주의 정당이 집권하면 반드시 자본의 공격에 맞선 반격 또는 방어의 한 형태가 되어줄 것이라는 위험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개량주의 후보가 당선되어 부르주아 노동자 정부가 들어서면 애초 계획된 자본의 공격이 용이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자들의 행동강령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은 단지 일시적으로 끝날 것이다.

 

6. 자본가계급이 계급투쟁의 분출을 꺼뜨리기 위해 선거를 이용하는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투쟁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직접행동이 더 우월하고 중요함을 제기해야 한다. 이 경우 선거 보이콧이 필요하다. 혹은 제도권 정당들에 맞서 전투적 투쟁 대표자들(파업위원회, 공장평의회 등등)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전술로서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보이콧 전술을 실행하는 상황은. 선거 참여가 노동자계급을 현재 전면화 되고 있는 투쟁(예를 들어 부르주아 질서를 넘어설 기세를 띤 혁명적 봉기)으로부터 명백히 분리시키는 상황이거나, 또는 대중들이 선거의 반혁명적 의도를 명확히 간파할 수 있는 상황(1905년의 러시아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지지할 수 있는 후보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반드시 선거 기권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계급 후보가 없을 때(개량주의 정당 후보조차)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에 동조적인 후보라는 이유로, 또는 노동조합 등 노동자 조직의 공식적 지지를 받는 후보라는 이유로 부르주아 정당 후보(한국에서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야권단일화 후보나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 후보 같은)에게 투표하라고 노동자계급에게 권할 수 없다. 따라서 선거 기권이 불가피할 경우, 모든 후보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반대를 표시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손상시키는 등의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선거 기권에 따르는 수동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이 특정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조직의 행동강령에 대한 지지도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7. 사회주의자들이 비혁명적 정당들한테 비판적 지지를 보낼 경우 이는 그 당이 노동자계급과 맺는 관계를 근거로 해서 보내는 것이다. 후보 개인의 견해나 대중들 사이의 덕망이 비판적 지지의 근거로 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노동운동 내 이른바 ‘우파’ 후보에 대당하는 ‘좌파’ 후보라는 것이 지지를 차별화할 근거가 될 수도 없다.

 

8. 중도주의 후보의 공약이 여타 후보의 공약보다 좀더 낫다는 것을 근거로 중도주의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자들은 마찬가지로 반대한다. 중도주의자라 함은 혁명적 입장과 개량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집단을 말한다. 중도주의가 (일시적으로나마) 노동자계급의 지도부 위치에 있을 때는 이러한 동요가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중도주의 조직(주로 연합조직)이 결성되곤 하는 사회적 위기의 조건 때 특히 그러하다.
  보통 중도주의 조직의 공약은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으로부터 취사선택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때문에 개량주의 공약보다 질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인데 왜냐하면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의 우월성은 그 요구들 각각이 그 자체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요구들이 하나의 통으로 권력 장악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누적적인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혁명 전략의 단지 한 부분만을 포함한, 그리고 이것을 개량 전략의 일부분 -- 즉 자본가계급과의 협조 전략 -- 과 뒤섞은 그러한 선거 공약을 내거는 당은 노동자계급을 재앙으로 이끌 당, 투쟁의 결정적 계기에서 분열로 이끌 당이다.

 

  유의미한 노동계급 세력들이 개량주의와 진정으로 단절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쪽으로 이탈해 나올 때 중도주의 후보가 이러한 단절을 대표하는 경우, 그러한 ‘투쟁 후보’에 대해 원칙적으로 비판적 선거 지지를 보낼 수 있다. 이것은 그러한 후보가 개량주의 정당 내 공공연하게 반동적인 상대 진영에 대항하여 출마하는 후보일 경우와, 개량주의 정당의 ‘공식’ 후보에 대항하여 출마하는 후보일 경우 모두에 적용된다. 중도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내 중요한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경우(설사 그들이 선거에서 일정 정도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라도), 또는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 그러한 비판적 지지를 보내서는 안 된다.

 

9. 계급투쟁의 발전으로 인해 지역적 또는 전국적 차원에서 ‘계급 프라이머리’(노동자 예비선거)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그리고 진정으로 대표성을 갖는, 노동자 조직들의 전원회의(토론회, 집담회 등) 개최를 제기할 수 있다. 어느 노동자 정당 후보가 이번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할지, 어떤 요구들을 내걸어야 할지를 토론하여 결정하는, 그러한 ‘노동자 프라이머리’에 대한 요구이다. 이러한 전술을 위한 선전· 선동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환상이 가장 강한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시험대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전원회의 또는 ‘노동자 예비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행동강령을 제기하고, 가능한 경우 독자 후보를 내놓는다. 이러한 회의체가 진정으로 대표성을 갖고 민주적일 경우에는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채널을 통해 사회주의 후보를 출마시킬 때보다 사회주의 선전 선동에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회의체가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대표성을 갖는다는 조건 하에서 회의체의 결정에 따라 부르주아 선거에서 자신의 후보를 철수시킬 수 있고, 결정된 ‘노동자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보낼 수 있다.

 

10. 오직 일관된 사회주의 정치만이 철저히 노동자계급 독자적인 정치를 담보할 수 있다. 비혁명적인 일체의 정치 흐름들(현재 통진당에 대당하는 ‘진보좌파정당’ 흐름, ‘노동자계급정당’ 흐름, 범좌파블록 등등의 중도주의적 흐름까지 포함하여)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와 손잡는 계급협조(예를 들어 민주대연합/ 야권연대)로 흐를 속성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이 그 같은 정치 흐름들을 향해 제기할 기본 요구는 ‘자본가계급과 단절하라!’이다. 이 요구는 개량주의 노동자 정치세력들의 인민전선 정치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독립성을 파괴하는지를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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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6호] 평조합원운동과 혁명정당 건설 운동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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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조합원운동과

 

혁명정당 건설 운동으로 나아가자!
 

 

- 통진당 반대투쟁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향 -

 

 

고민택

 


  한국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과 역사는 2011년 1월 3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이하 대대)에서 최종적 파산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날 대대에서 2012년 선거방침과 함께 정치방침을 정하기 위한 안건을 다루도록 되어 있었지만 회의 도중에 참으로 어이없게도 ‘의결 정족수’ 미달 사태가 일어나 토론조차 진행되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만 것이다. 물론 정족수 미달 자체는 파산의 원인이 아니라 최종 결과일 뿐이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민주노총을 통한 정치세력화, 그의 딴 이름이었던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지난 2007년 대선을 경유하면서, 나아가 2008년 분당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때 이미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통진당이 등장하기까지 민주노총이 앞장서 추진한 이른바 ‘진보대통합(당)’ 시도는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연속적 과정에 불과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라는 말처럼이나마 ‘진보대통합’을 시도하려다 ‘민주대연합’만 키웠는가 하면 끝내는 자본가정당과의 통합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날 대대의 모습은 민주노총에 의한 정치세력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것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이제부터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새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한 운동과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

 

  안건 심의가 무산되고 난 후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선거방침은 중집에서 결정하는 것이 기존 관례”였다는 것과 나아가 “정치방침은 조합원 총투표를 묻는” 방식을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는 사실상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를 밀어붙이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영훈 위원장은 2월 5일 통진당 “2012 총선승리 전진대회”에 참여하여 “통합진보당이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발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그 뒤 민주노총은 ‘중집회의’에서 ‘대대’에서 무산된 안건을, 중집위원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 통과시켰다. ‘대대’에 상정된 안건이 무산되었다면 다시 ‘대대’를 소집하여 거기에서 토론을 진행하고 찬반을 묻는 것이 당연한 절차임에도 ‘대대 안건’을 ‘중집’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지은 것이다. 동시에 민주노총 ‘상집’에서는 위원장이 대대’에서 언급한 ‘조합원 총투표’도 아닌 ARS 전화를 통해 정치방침에 대한 조합원 의사를 묻겠다는 결정까지 내렸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은 ‘선거방침’은 물론 ‘정치방침’까지도 사실상의 ‘통진당 배타적지지’로 최종 확정지었다.

 

  이로써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말았다. 사실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요구는 통진당이 성립되기 이전, 이른바 ‘진보대통합(당)’ 논의가 무성할 때, 즉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진보대통합(당)’이 성사된다고 해도 그 ‘진보대통합(당)’이 당시 민주당(현재 민주통합당)과 민주대연합(야권연대/반MB선거연합 등)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겨냥한 요구였다. 그러나 현실은 민주대연합은 더욱 활개를 치게 되었으며, 마침내 통진당이 등장하는 사태로까지 진행되었고, 끝내는 그 통진당을 민주노총이 또 다시 사실상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가버리고 만 것이다.

 

  통진당 등장 이후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요구는 민주노총을 향한 요구로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통진당 자체가 이미 자본가정당인 국참당과 통합을 해버린 상태에서 이제 민주노총이 통진당에 대한 조직적 입장과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즉 민주노총의 선거/정치방침을 정하는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게 된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민주노총의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결정을 막기 위한 ‘선언운동본부’의 활동과 ‘10만조합원 서명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또 바로 이런 정황 때문에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 진보신당, 사회당’을 모두 ‘진보정당’이라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통진당만 진보정당이라고 하고 싶었겠지만 그럴 경우 반발이 훨씬 강해질 것은 물론 잘못되면 통진당을 진보정당이라고 규정하는 데 제동이 걸릴 것을 우려해 진보신당과 사회당을 끼워 넣은 것이다. 즉 진보신당과 사회당을 진보정당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통진당을 진보정당으로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통진당/배타적지지 반대운동의 한계

 

  이제 현실은, 민주노총은 4. 11 총선에서 실질적으로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를 결정한 상태다. 사실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 통진당을 진보정당에서 제외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통진당을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동안 진행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역사를 전면 부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존재하거나, 그게 아니면 통진당 자체를 자본가정당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통진당이 압도적으로 자본가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둘 모두 그러기에는 한계가 있거나 무리한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의 현실은 통진당을 진보정당에서 제외하더라도 그 대안이 곧 진보신당과 사회당(또는 이 둘의 통합당)에 대한 지지, 지원을 결정하는 것밖에 없는데, 민주노총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에는 주객관적으로 어떤 설득력도 명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선언운동본부’도 통진당이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현실적 한계 때문에 즉각적 대안을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노동자 정치 세력화 평가’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되풀이 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현재와 같다고 해서 민주노총이 추진하고 있는 통진당에 대한 지지와 잘못된 정치세력화 방향을 그대로 가게 놔둬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통진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라거나 또는 ‘어떤 당을 지지할 것이냐’를 따지는 수준의 논쟁 구도 자체를 먼저 전복시켜야 한다. 또한 지금 ‘선언운동본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대 소집’ 요구도 절차상으로는 그럴 수 있겠지만 사태를 실질적으로 바꾸어 낼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설령 ‘대대’가 다시 열린다 해도 기존 프레임(틀)과 패러다임을 그대로 둔 채는 몸통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변죽만 올리다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선언운동본부’ 토론에서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 정당’, ‘혁명정당’을 별다른 매개 없이 곧 바로 대입시키거나 잘못된 매개를 통해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어떤 매개를 거쳐 그러한 주장을 할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대중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계급의 기본적, 원칙적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의 일부로서의 정치조직, 또는 노동자계급 속에서 먼저 동의한 일부와 노동조합 바깥의 정치세력이 결합한 형태로서의 정치조직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지난 10여년의 과정을 거쳐 이를 근본적으로 논의해야하는 현실과 지금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사실 100년이 넘도록 아직도 논쟁 중인 쟁점이며 무엇이 정답인가를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만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다고 이 논쟁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현실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역사와 논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그동안 민주노총이 구 민주노동당과 일대일 대응, 직접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구체적 역사적 현실이 그것을 가능할 수 있도록 한 때문이다. 알다시피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특정 정파의 노선이나 목표이기 전에 대중 자신의 요구이자 바람이었다. 또한 그를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서는 기존 부르주아 정당이 아닌 노동자가 다수로 참여하는 별도의 (제도권)정당을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그 별도의 정당이 어떤 (성격의)정당이냐의 문제는 거의 중요치 않게 다뤄졌다는 데 있었다. 어쨌든 민주노동당도 출범 초기에는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라기보다는 87년 이후 성장한 대중적 노동운동의 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측면이 보다 더 강하게 다가섰던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립될 수 있었다. 혁명 세력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다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는 혁명 세력이 처음부터 타의나 강제에 의해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배제당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이 정식 출범하기 전인 1999년 8월 23일 열린 제15차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당 창당에 따른 민주노총의 방침’ 중 “1. 일반원칙 1) 민주노총은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고양하고 대중조직으로서의 자체 정치사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2) 민주노총은 기존 부르주아와 보수정당이 아닌,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대의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제 정치조직에 민주노총 조직원(조합원 및 각급 상급단체 임명직 간부)이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3) 민주노총은 제 정치조직과의 관계에서 대중조직 고유의 상대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 정치조직과의 연대, 지지, 지원을 강화하되 그 구체적 내용은 조직의 결정에 의한다.”를 채택함으로써 위의 사실을 뒷받침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지난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서 노동조합과 정치조직과의 관계 설정 문제는 바로 위 일반원칙을 되살리는 수준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위 일반원칙은 그 뒤 비록 사문화되었지만 아직 폐기되지는 않았다. 민주노총(대의원)에게 통진당이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결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주장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중심으로 한 운동은 한계가 뚜렷하다. ‘선언운동본부’의 현실을 보더라도 이미 알 수 있다. 나아가 단지 현실적 한계 때문만이 아니라 그 운동이 갖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즉 그 운동을 중심에 놓을 경우 의도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논쟁과 실천이 지난 과거를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다시 말해 프레임과 패러다임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에 갇히는 효과만을 낳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민주노총 대대는 제 정파 사이의, 더 정확하게는 이미 충분히 관료화된 상층 간부 사이의 의미 없는 정쟁터가 된 지 오래다. 어떤 면에서 민주노총 대대는 부르주아 의회 이상으로 대중과 괴리되어 있으며 대중으로부터 자립해 있다. 그 정도가 심해 대대를 겨냥하여 아래로부터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낸다는 것 자체가 무망한 일이다. 아니 그럴수록 대중에 대한 직접 정치를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뿐이다. 이는 단지 특정 정파의 패권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특정 정파를 떠나 모든 정파에게 일반화 되어 있다. 이른바 3분립(국민파, 중앙파, 현장파)구도나 좌/우 구도조차도 벌써 무너진 상태다. 오직 조합주의, 개량주의 정치를 둘러싼 현실적 이해관계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결과와 무관하게, 대중들에게 운동으로서, 요구와 주장으로서 그래도 객관적 설득력이 있는 것은 일반원칙을 최대한 되살리자고 말하는 것 정도이다. 그 이상의 운동과 주장은 각자 알아서 펼쳐 나가야 한다.

 

  배타적지지 자체를 유지하면서 배타적지지의 대상을 누구로 또는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배타적지지는 과거에도 별 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늘날 ‘진보정당’이 그나마 현재와 같은 수준밖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배타적지지 방침이 민주노총 조합원을 부르주아 정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없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수동화시키는 부작용이 더욱 컸을 뿐이다. ‘진보정당’이 민주노총을 수단으로 대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더 나아가 혁명세력의 성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파를 떠나 활동가 대부분을 ‘진보정당’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진보정당’의 성장조차 왜곡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배타적지지를 통해 민주노총 조합원을 정치화시킬 수 있다거나 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지난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실 통진당을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나 통진당을 결성해서는 안 된다거나, 결성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너무도 당연하다. 통진당이 성립되기 이전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일어났던 것도 그 때문이다. 통진당을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곧 통진당이 진보정당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 통진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훨씬 더 부족하며 따라서 아직은 진보정당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진당은 진보정당이냐, 아니냐 이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통진당이 자본가정당의 한 분파와 통합한 정당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통진당이 가장 앞장서서 민주통합당과의 민주대연합(야권연대/후보단일화/반MB선거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해 현재의 통진당을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 통진당 반대는 곧 민주대연합을 반대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지금 진짜 문제는 통진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민주노총이 규정한 대로 통진당, 진보신당, 사회당이 모두 진보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3 진보정당’ 모두를 한꺼번에 부정할 수 있는 현실적 동력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 ‘진보정당’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과 세력이 아직 대중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원순, 안철수, 나꼼수 현상이 대중들에게 더 친숙하며, 더 대중들 가까이 있다는 데 있다. 즉 ‘아니지만, 그 무엇은 아직 없는’ 상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라도 ‘없는 현실을 있는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의 요체가 여기에 있으며, 그 성패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다.

 

 

평조합원운동과 혁명정당 건설

 

  먼저 평조합원의 직접행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운동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운동은 과거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키는 운동과는 질을 달리한다. 지금의 민주노총이 자본가 정당과 손잡는 민주대연합을 하더라도 한국노총과 같은 어용노조로 규정할 수는 없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과 근본적으로 달라서가 아니다. 현 정세가, 지금의 계급관계가 87년 이전의 상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아래에서의 정세가 아니다. 또한 민주노총 조합원이 경험 없는 (초보)노동자들이 아니다. 숱한 투쟁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이미 ‘진보정당’ 10년 이상의 역사를 함께 했다. 평조합원운동은 바로 거기에 기초해야 한다. 민주노총을 분화하여 정파 노조로 재편하려 하거나 민주노총 자체를 이른바 적색노조로 만들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평조합원운동을 크게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하는 속에서 진행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다.

 

  첫 번째 전망은 평조합원운동은 노동조합을 전투적으로 재편시키는 것과 맞물려서 진행시켜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을 노조관료 지도부에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다수 노동자(조합원)를 노조관료 지도부에게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자연히 평조합원운동을 일으킬 토대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대상이다. 노동조합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노동조합이 갖는 이중적 성격은 노동자가 갖는 이중적 성격과도 연동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한편으로는 지배체제의 한 기제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체제가 노동자에게 가하는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다만 그 정도는 정세와 역량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은 일반적, 일상적으로 노동자계급의 가장 기본적, 원칙적 조직이라는 것이 이제까지 드러난 역사이다.

 

  두 번째 전망은, 평조합원운동은 평의회 건설운동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혁명 세력이 주장했던 의회주의, 사민주의, 대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즉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분리시키는 양날개 전략은 파탄 났으며 이것이 바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가 실패한 결정적 원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동시에 아직 한국의 현실에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의회를 통한 수권(집권)전략은 이미 서구에서 실패로 끝났으며 한국만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즉 평조합원운동은 방금 말한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에 그치지 않고 평의회 건설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절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곧 평조합원운동이 방어에서 공세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점을 기본적, 원칙적으로 예비/준비해야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담지체로서의 평의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 과제 또한 실패로 끝날 수 있다.

 

  물론 평조합원운동과 평의회 건설 운동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평의회는 노동조합만을, 즉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하여 건설할 수 없다. 전체 노동자계급, 즉 훨씬 더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를 포괄해야 한다. 그러나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조직노동자, 즉 그들이 속해 있는 노동조합을 배제하고는 평의회 건설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편 평의회 건설은 혁명적 시기, 혁명적 정세에나 가능하다는 주장도 주의해서 말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평의회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정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일상적 시기에는 평의회 건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평조합원운동과 평의회 건설 운동 사이에 만리장성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 의회주의에 대한 거부와 그 대안은 혁명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건설도 함께 있다. 노동조합도 그렇지만 평의회 역시 그 못지않게 계급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혁명정당 건설 운동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평조합원운동 그 자체를 일으키는 것과, 평조합원 운동이 지향해 나가야 할 전망, 즉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평의회 건설 운동을 앞장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혁명정당의 존재와 역할이 필수불가결하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노동자계급정당’,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결집체’ 등으로는 현 정세를 돌파할 수도, 통진당 반대 투쟁을 힘 있고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도,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펼칠 수도 없다. 기껏해야 통진당보다 무엇 하나 나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왜소함만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역사와 계급에게 필요하고 필요할 때 그에 맞는 운동과 투쟁을 펼치지 않고, 자기 조직이 처해 있는 조건에 맞춰 역사와 계급을 끌어다 맞추려는 것은 성공할 수도 없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니 현재의 조건에서는 오히려 통진당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통진당 반대투쟁과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또 다른 의회주의로 갈아타는 것을 저지하고, 나아가 2012년 투쟁이 ‘반MB 선거심판론’으로 왜곡되는 것을 또한 저지해야 하는 것이 현 정세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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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6호] 한국판 점령운동을 쌍용차 희망텐트촌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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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점령운동을 쌍용차 희망텐트촌에서부터!
  

 

 

임천용

 

 

  2008년 이래로 세계 자본주의는 더욱 격화되는 공황속에서 각국 노동자민중에 대한 자본의 위기전가 공세를 통해서만이 그 숨통을 이어갈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긴축과 구조조정”이라는 형식으로 대변되는 대중에 대한 자본의 전면적인 고통전가는 노동자민중들의 일상적 삶을 파괴하며 한편으로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누적시켜왔다. 이러한 대중들의 누적된 불만과 분노는 대중투쟁을 촉발시키며 아랍의 혁명적 대중반란과 남유럽의 대규모 대중시위와 노동자 총파업으로 나타났고 미국에선 대중시위와 광장점거가 결합된 점령하라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1%에 맞선 99%의 대안 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점령하라 운동은 탐욕스런 월가의 금융자본에 반대하는 투쟁을 넘어 체제에 도전하는 반자본주의운동으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 바야흐로 현 세계정세는 위기관리에 실패한 자본의 지배에 대항해 분노한 계급대중들의 반격이 시작되는 형국이다. 세계자본주의에 긴밀히 연동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08년 경제대통령을 자임하며 위기를 해결하겠다며 나선 이명박정권은 부자감세, 고환율 유지 등 친기업정책과 노동관계법 개악, 일상화된 구조조정 등 노동탄압정책으로 일관하며 노동자대중들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다. 1% 자본가들이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놓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쫓겨나서 거리로 내몰렸다. 물가와 전세 값, 대학등록금은 가파르게 올랐고 청년실업자들은 거리를 배회했다. 대중들의 불만과 분노는 높아져갔고 급기야  희망버스운동과 같은 대중투쟁으로 분노가 폭발했다.

 

  작년 한해를 투쟁으로 뜨겁게 달구었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운동은 사기저하로 한동안 침체되어 있던 계급대중들에게 자신감과 투쟁의지를 불러 일으켰다. 단사에 갇혀있던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를 공장의 담을 넘어 전 사회적, 정치적 의제로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가 밑바탕이 됐다. 야권연대 세력들을 비롯한 제도정치권은 정치적 떡고물을 얻고자 달려들었고 이들이 주도한 국회권고안을 통해 한진중공업 문제는 일단락 됐지만 이 운동은 이후 정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며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쌍차 희망텐트촌의 두 가지 흐름

 

  12월 7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평택공장 앞에 희망텐트를 치고 투쟁에 돌입하면서 시작된 한국판 점령운동인 쌍용차 희망텐트투쟁은 세계적인 ‘점령하라’ 운동의 영감과 직접적으로는 희망버스운동의 비판적 계승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희망버스운동이 사회적 이슈화한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문제를 계급대중들의 총단결 투쟁전선으로 더욱 확장 발전시켜야 된다.
쌍용차 희망텐트촌 운동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서 주요한 관심사로 부상했다. 쌍차 노동자들의 자살이 파악된 것만도 20명 째를 넘겨버린 상황에서 쌍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는 척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정리해고의 폐해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상황은 금속노조처럼 정치권에 기대어서 해결하려는 경향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를 목표로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들 스스로의 투쟁으로 해결하려는 두 가지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는 금속노조로 대표되는 공식 노동조합 질서에 희망텐트촌 운동을 종속시키고 궁극적으로 민주당 등의 야권연대에 기대려는 흐름이다. 이 흐름은 지난해 희망버스 운동에서 금속노조가 소속 사업장인 한진중공업 투쟁에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반성 속에서 쌍차투쟁만큼은 금속노조가 주축이 되어서 “해결”하려는 시도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금속노조가 총선을 앞두고 면피를 위한 수준의 투쟁에 한정하면서 쌍차투쟁을 총선 이후 국회로 가져가서 야권연대에 힘입어 8.6합의 수준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쌍차지부는 이미 2009년의 8.6합의는 무산되었다고 선언하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금속노조의 경우 쌍용차 사측이 “2010년 9월부터 무급휴직자 복귀와 공장이 회복되어짐에 따라 해고자를 우선 복귀 시키겠다”는 합의를 1년 넘게 마힌드라 자본이 지키지 않고 있음에도 8.6합의를 폐기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국회 환노위가 쌍차문제 등 노동 현안 해결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제안했지만 한나라당의 거부로 물거품이 된바 있다. 금속노조가 여전히 8.6합의 폐기를 선언하지 않는 이유는 6월에 야당이 다수당이 되면 국회에서 8.6합의 수준에서 일정한 타결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희망버스 운동이 내걸었던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그리고 이에 근거한 한진 정리해고 철회 요구조차도 자본주의에서는 해결 불가능한 요구로 주장했던 일단의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있었다. 이들처럼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민주당 등 자본가 야당에게 기대어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은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동계급 자신의 투쟁으로 쟁취할 생각이 없다면 자본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쌍차 희망텐트촌 투쟁은 무엇이란 말인가? 
  쌍차 동지들은 8.6합의를 체결하는 동시에 2009년 공장점거를 풀었지만 사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이에 쌍차 동지들에 대한 연쇄적인 사회적 타살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쌍차 77일 점거파업이 쌍차자본에 의한 치밀한 회계조작에 의한 법정관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회계조작으로 시작된 정리해고와 공장 점거파업, 그리고 공장점거를 풀면서 만들어진 8.6합의는 이미 무산된 것이고 쌍차노동자들은 원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데 두말할 나위가 없다. 쌍차를 인수한 마힌드라 자본에 의해서 8.6합의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쌍차투쟁의 관건은 금속노조가 이미 무산된 8.6합의를 쓰레기통에서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쌍차 정리해고 철회하고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는 노동계급적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희망버스 운동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흐름이다. 쌍차 희망텐트촌 운동에서 이 흐름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발걸음”과 “쌍용차 희망텐트 노동자참가단” 두 가지로 나타났다.
  희망발걸음의 경우, 재능지부 1500일 투쟁을 진행하고 1월 30일부터 서울 혜화동 재능학습지 본사에서부터 평택까지 11일 동안 쌍차 1000일 3차 포위의 날을 앞두고 전국의 투쟁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며 300km를 행진했다. 희망발걸음은 30여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을 포함해서 매일 100여명이 행진에 참여했다. 희망발걸음은 투쟁을 시작한지 7년이 넘은 코오롱 정투위 동지들부터 새해 벽두부터 파업투쟁을 시작한 세종호텔 동지들까지 함께 했다. 이러한 연대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려내고, 사업장은 다르지만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맞선 노동자들의 동질감을 형성시켜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희망발걸음 도중에 세종호텔 자본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의 노동조합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핵심간부 징계수용 등 아쉬운 점이 있지만, 투쟁사업장 동지들이 세종호텔 노조 지지 시위를 가기 몇 시간 전에 타결된 것이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폐투쟁위원회 동지들은 1월 30일부터 2월 11일까지 전국의 사업장을 돌면서 투쟁에 연대하고 쌍용차 3차 포위의 날을 선전해 나갔다. 지난 해 희망의 버스를 진행할 때 쌍용차 동지들이 먼 길을 걸어서 한진중공업 투쟁에 함께 했던 것처럼 노동자적 방식으로 연대한 것이다.
  쌍용차 희망텐트 노동자참가단의 경우, 쌍용차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2월 1일부터 11일까지 2차 전국 순회를 진행했다. 1차 순회 때와 마찬가지로 2차 순회 때에도 쌍차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1%에 맞선 99%의 투쟁이라는 것, 그리고 쌍차 노동자들의 전원복직,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철폐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국의 노동자들을 만나 나갔다. 특히 2차 순회 때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10%에 해당하는 5만부의 타블로이판 선전물을 노동자들에게 직접 나눠주었다. 그리고 쌍차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투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안정기금 마련을 위한 CMS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조직, 미조직 노동자들의 연대로 공식 노동조합 운동의 압력을 넘어서자

 

  이러한 흐름들에 의해서 2월 11-12일  쌍용차 3차 포위의 날이 진행되었다. 전차 포위의 날처럼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무대에 서는 것이 금속노조 등의 관료들에 의해 정당화 되었다. 쌍용차 문제는 결국 국회가 바뀌고 나서야 청문회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쌍용차 희망텐트촌과 같은 투쟁들은 야권연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요식행위 정도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노동자 계급 스스로 독자적인 요구를 내걸고 자본가 정권에 맞서 투쟁할 의지도 결여되어 있었다. 이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조금 더 온화한 자본가 야당이 노동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노동자들을 민주대연합을 위한 표 찍는 기계로 사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사활적인 투쟁과 요구를 단지 야권연대를 위한 들러리로 앞세우고 국회와 정권이 바뀌면 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자본가들의 대변인에 불과한 민주당은 2017년까지 비정규직을 절반으로 줄이고 해고요건도 강화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사탕발림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있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과거에 그러한 정부에 맞서 투쟁했던 노동조합들이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그 정권들의 후신들과 반이명박 전선이라는 명분으로 함께하는 것은 기필코 저지되어야 한다.
  노동조합과 다르게 희망발걸음은 희망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여러 경향의 단체와 개인, 그리고 투쟁사업장의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다. 폭넓은 참여라는 측면에서 장점이다. 노동조합 밖에서 노동자 투쟁을 지지 지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외부세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목표로 먼 걸음을 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필요가 있다. 투쟁사업장 동지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희망버스 운동 때 그랬던 것처럼 공식 노동조합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자 조직이 관료화 되어버리고, 노동자 투쟁을 노동자계급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과 함께하는 야권연대에만 목메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뒤늦은 아쉬움이긴 하지만 지난해 희망버스 투쟁 때, 한진 문제 국회권고안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금속노조의 합의에 맞서 한진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다시 설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주었어야 했다. 현재 한진중공업은 정투위 출신 지회장을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투위 동지들의 복직 유예기간에 현장은 사측으로 넘어가 버리고 지난해보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 여전히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버스 운동의 성과가 정치인들에 의해 국회권고안이라는 형태로 정리되어버림으로써, 한진 정투위 동지들이 주체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면서 조직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난 경험에서 보듯이 희망발걸음은 공식 노동조합과의 불가피한 긴장관계를 애써 외면할 필요가 없다. 민주노총 등 공식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파업과 같은 노동자적 방식으로 함께하고 투쟁했다면 희망버스나 희망발걸음은 부차적 위치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3차 포위의 날까지 보여주었던 희망발걸음, 그리고 노동자참가단 활동의 실천적 의의는 공식 노동조합의 지침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조합원들의 관성을 깨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고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다.   
   

 

 

한국판 점령운동으로 나아가자
 
  국제적인 점거운동의 한국판이 형성되어질지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되어지지 않았다. 희망발걸음은 희망버스 운동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하나의 시도이고, 노동자 참가단도 새로운 시도다. 특히 희망발걸음은 “비정규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향한 99% 희망광장”을 제안하고 있다. 1000일을 넘은 쌍차투쟁의 희망텐트촌이 점거운동의 시작일 수 있고, 어쩌면 거리농성투쟁 1500일이 넘은 재능지부 동지들의 천막농성장이 점거운동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그뿐만 아니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사업장 동지들의 투쟁이 한국판 점거운동의 시초일 수 있다. 힘들지만 끈질기게 노동계급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해온 노동자들이야말로 한국판 점령운동의 선구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정리해고, 비정규직 사업장 동지들의 투쟁은 지루한 투쟁이 수년씩 전개되면서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린다. 이러한 투쟁들은 상급 노동조합에서도 손 놓아 버리고 정치권에서도 도저히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본의 경제위기 속에서 물가 폭등, 등록금 폭등, 빈익빈 부익부 등 사회 양극화 심화는 자본가 정치인들로 하여금 친서민적 이미지 제고의 주요한 수단으로 노동문제를 다루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 내내 개점휴업 상태로 있던 민주노총 등의 노동조합에서 총파업투쟁을 결의하고 있는 것도 주요한 변화의 흐름이다. 민주노총의 하반기 파업 선언이 정치권의 야권연대를 촉구하기 위한 압박용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조합원들을 조직해서 이명박 정권과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반격의 시작일지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선거국면에서 야권연대를 응원하고 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야권연대에 맞서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직면할 것이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끊임없이 야권연대로 몰아갈 것이다. 이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운동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인 연대를 지속적으로 펼쳐감으로써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본질을 폭로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총 파업 결의가 간부들만의 파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이 되고 관료적 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아래로부터 조직해 나가야 한다.
  이미 미국의 점거운동은 롱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항만노동자들과 미조직 노동자들 공동의 투쟁으로 항만을 봉쇄하기까지 했었다. 이에 맞서 기성 노동조합 관료들은 자본가들의 앞잡이가 되어 파업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에서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 관료들은 미국식 노동조합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고,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정한 수준을 넘지 않게 하기 위해 통제하고 판에 박힌 투쟁만을 전개한지 오래되어 버렸다.
  이러한 투쟁방식에 제동을 거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2012년 정세는 지난해 희망버스의 압력을 상회하는 점거운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의 활력이 노동조합 운동에 공급됨으로써 낡은 지도력을 대체해나가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공식 노동조합들이 자본가 정당과 단절할 것을 끊임없이 선전하고 선동해 나가야 한다. 자본가 정당과 단절해야만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가 자본가 야당에 돌아가지 않고, 노동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성장으로 축적될 수 있다. 총선과 대선을 관통하는 현 시기에 노동조합 운동과 정치운동에서 드러나는 모든 투쟁이 자본가계급의 입장과 노동자 계급의 입장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라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문제는 결코 다른 계급에 의지해서 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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