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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 장화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나에게는 굳이 그 내용이나 영화적 완성도를 따지지 않아도 분위기에 취해 몇 번이고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이 영화적 완성도가 낮다는 뜻은 아니다.)
<해피투게더(춘광사설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벨벳 골드마인>, <헤드윅>이 그렇고, 여기에 최근 <장화, 홍련>이 추가되었다.
이들 영화가 가진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여기서 그것들을 꼽을 필요는 없겠고 우선 한 가지는 이 영화들이 앞으로 내가 쓰고자 하는 OST 목록에 모두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 모두는 어떤 결정적인 장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 순간, 보는 이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동화시키는 음악을 지니고 있다.

장화와 그 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영화 <장화, 홍련>은 원작에서 무능하면서도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있는 가부장과 그 가부장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여성들끼리의 대립 구도라는 봉건적 소재를 그대로 가져온 반면 사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장화를 통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뗀 모든 구성원에게 죄책감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도록 함으로써 원작을 배신하고 있다.


영화에서 장화는 장화이자 계모이자, 친 엄마이며 홍련을 사랑하지만 홍련을 계속 죽이는 존재이다. 장화가 지닌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홍련을 끔찍이도 아끼게 하지만 지나간 잘못을 돌이킬 수 없듯 여전히 자신은 결정적 상황에서 홍련과 함께하지 못하는 과오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친엄마는 계속 장화의 곁에 나타나 장화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장화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계모가 앗아간 친엄마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스스로 계모가 되어 아버지의 곁에 머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화의 행동은 장화 혼자만의 고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있던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장화를 통해 끊임없이 죄책감의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계모도, 사건이 있던 날 놀러왔던 삼촌과 외숙모도 모두 장화로 인해 그 날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혼잡하고 분열된 장화의 정신 상태처럼 완전히 일그러져 버린 이들 가족이 지닌 죄책감의 근원을 후반부에 가서야 시간을 거슬러 올라 보여주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그 날, 집을 나서던 수미가 잠시 멈칫했다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복받치듯 음악이 흘러나온다.

‘자장가’,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장화, 홍련> OST 앨범에는 같은 곡조로 이루어진 음악이 하나는 ‘자장가’로,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으로 실려 있다.
어쩌면 따사롭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로운 창가에서 엄마가 수미에게 들려주었을 이 ‘자장가’가 무책임한 아버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뗀 수미에게 너무나도 무겁고 힘든 죄책감의 짐이 되어 남겨진 것이다. 그래서 이 음악은 더욱 더 마지막 장면의 수미의 모습을 안타까워보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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