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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Main Theme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그 날, 극장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무언가 마음속에 응축되고 있던 것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자막에 이르러서 결국은 강하게 결집하여 나의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고야 말았다.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들 속에 또렷이 새겨져 올라가던 ‘풍문여자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내 고교시절의 기억들.
나는 실제로 수많은 효신과 시은과 민아와 지은이와 연안이....그리고 그 영화 속의 아이들과 똑같은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다사다난한 18세를 보냈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친구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을 보며 나는 때론 어떤 죄책감에 가슴 아프다가 때론 어떤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 성큼 다가와서 크게 남겨진, 또렷한 충격이었다.

여고, 열여덟

스무 살이 되고도 우리 더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열여덟!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까? 너무 지겨울까? 죽음이 있기에 짧은 인생이 의미 있는 걸까?
-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 중에서-


열여덟. 열여덟은 성장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나이이다.
열여덟에 세상은 갑자기 성큼 다가오지만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하루빨리 끼어들고 싶던 세상의 모습은 상상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보다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추하고,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학교에서 배워왔던 도덕적인 삶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렇게도 혐오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떤 친구는 자신을 더욱 혐오하였고, 어떤 친구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남에게는 철저하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를 세워가면서 닮아가던 모습 그대로 어른들의 모습을 내면화해 갔다.
우리들은 이렇게 달라져 가는 서로를 목격하고, 혼란 속에 서로 충돌하고는 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한 편으로는 빨리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워지는 것이 바로 열여덟 우리의 세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마 나도, 나의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다.
여고에서 동성 커플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감정과 관계가 깊다. 여고에 커플이 많은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여자 아이들만 있어서 남자 같은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이 시기에 남자들과 나눌 수 없는 세밀한 감수성의 영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감수성의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환일기는 그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서 나의 혼란과 감정을 끊임없이 친구들과 공유하고, 확인하고자 했고 그 안에는 남자 아이들은 오로지 ‘남자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감수성과 고민이 솔직하게 담기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보다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감수성과 이야기들이 있기에, 여고에서의 커플 친구는 이상적 남자 친구를 대체하기 위한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따라 그때까지의 순수한 감수성과 연대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갈등해야 했다. 세상에 길들여지기 위해, 세상이 금기하고 거부하는 현재의 내 감정, 내 삶과 단절할 것인가 그대로 버텨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볼 것인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진실.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아니다 없다.
있다는 진실. 없다는 진실. 없다는 거짓. 있다는 거짓. 진실은 거짓.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도 나도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효신의 시는 열여덟의 갈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 진실이 거짓이 되고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는 세상임을 애써 가리면서 세상에서 규정한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맞추어, 세상에서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호명에 따라 길들여져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논리를 거부한 효신은 결국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시은은 갈등했고, 그래서 효신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시은은 함께 빠져들어 가던 물 속에서 둘의 다리를 묶고 있던 끝을 풀고 혼자 물 위로 올라온 것이다.
효신이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고, 시은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열여덟에 주어진 갈등의 상황에서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택한 친구들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도, 영화를 보면서 같은 죄책감에 빠졌었다.
영화를 보면서 응어리졌던 그것의 실체가 바로 그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여고’‘괴담’일 수 있는 진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장의 발걸음.

효신과 시은의 다정하던 한 때. 옥상위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둘만의 교감을 나누던 두 아이의 모습 위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듯한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지는 햇살, 초록색 지붕, 아무렇게나 입은 교복과 행복한 웃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해 그들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공간인 지붕 위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해 보이듯, 음악은 평온하지만 왠지 슬픈 듯, 불안하다.
그래서 이 장면과 음악은 그들과 같은 열여덟, 여고에서의 한 시기를 보낸 우리에게 그 때의 순수한 감수성과 거친 혼란을 잊지 말라는 듯 오랫동안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은아, 드디어 새날이 밝았구나. 어때, 기분이? 널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니? 새해 첫날에 내 얼굴도 보고 영화도 보고 손잡고 말야 헤헤... 눈이 왔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넌 어땠니? 난 감동 그 자체였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모든 붉은 잎들의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잎들 바람은지고 물도 맑은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것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뒤에 숨은 붉은 열매들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은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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