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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의 ‘The Hours', 세 여인의 다른 시대 같은 시간

‘디 아워스’의 ‘The Hours', 세 여인의 다른 시대 같은 시간



주체할 수 없는 우울이 아주 화창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때가 있다.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작은 바람결에 밀려 서서히 떠다니고 햇살은 따사롭게 머리 위로 내려와 미세한 바람과 함께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날, 홀로 어딘가엘 다녀오다 잠시 머문 공원에서 작은 새들이 포로롱 내려앉아 풀 잎 위를 뛰어다니는 정경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고여 당황했던. 그런 날이 있다.
그 시간만큼은 도심을 쌩쌩 달리는 차들의 소음도,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수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잠시 오로지 그 평화로운 정경에 빠져 갑자기 내 삶에 대해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고 있는 것들과 숨기고 있는 것들.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 놓지 못하고 내 삶이 이어지고 있음에 대한 작은 분노와 그 안에 갇혀 있는 내 욕망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그렇게. 화창한 어느 날.

브라운 부인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남편과 무뚝뚝한 인사를 나누고 모처럼 마음먹고 남편의 생일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려 해도 케이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브라운 부인. 그래도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귀여운 아들, 그리고 뱃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단란해 보이는 가정인데 왠지 이들의 평화는 불안해 보인다. 브라운 부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남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그저 평범하게 남편과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에서 아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살고 있을 뿐인데 그녀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델러웨이 부인


델러웨이 부인.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는 에이즈에 걸린 평생의 친구 같은 애인 리처드가 있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애인 샐리도 있다.
그녀의 본명은 클라리사 이지만 소설 속 델러웨이 부인의 남편이 리처드였으므로 그녀는 자신을 ‘델러웨이 부인’이라 부르는 리처드를 통해 클라리사로서의 삶과 동시에 ‘델러웨이 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안식처이자 동시에 도피처였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삶’에의 욕망과 동성애자로서의 삶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자기 정체성이 모두 존재하고 있었기에 실제 부부는 아니지만 평생을 서로 아껴주었던 리처드의 존재는 그녀를 ‘평범한’ ‘누군가의 아내’, ‘델러웨이 부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클라리사 혹은 ‘델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공허는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그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식이 있던 그 날, 리처드는 ‘우리 둘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 곁을 떠나버린다.
이제 클라리사는 오로지 클라리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


클라리사에게 리쳐드가 있듯,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소중한 동반자 레너드가 있다. (아니, 사실은 리쳐드와 클라리사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델러웨이 부인'의 삶을 살았으므로 서술은 거꾸로 되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레너드가 있듯 클라리사에게 리쳐드가 있다'로. 클라리사와 리쳐드의 관계는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관계를 모방하고 그 역할을 뒤집은 것이다.)
리처드는 ‘보통 사람 같은 부부 생활을 하지 않을 것과 작가로서의 길을 가려는 자신을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버지니아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돌보며 살아가는 삶을 택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이른 죽음, 오빠의 잦은 성폭행 등으로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버지니아에게 ‘남성이면서도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리쳐드는 아마도 그녀의 아픈 기억을 보상하고 치유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권력의 폭력적 속성이 극단적으로 결집되어 휘몰아친 전쟁의 광풍과 결국 그에 동조하고 마는 리쳐드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성들의 시간

브라운 부인은 남편의 생일 케이크을 엉망으로 준비하다 갑자기 찾아온 친구의 불임 소식을 듣고는 그녀에게 연민의 마음을 담아 조용히 키스한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도 없이 살아왔고, 자신이 결혼을 하는 이유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결혼을 해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며 살아왔다.
그녀에게는 여성으로 호명된 주체로서의 삶이 아닌 온전한 ‘그녀 자신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키스를 계기로 한 삶의 전환은 브라운 부인과 친구 키티의 키스에서 뿐만 아니라 리쳐드가 죽은 후의 클라리사와 샐리의 키스, 버지니아와 언니 바네사의 키스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이 영화에서 여성간의 키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지 동성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여성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 연민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그 감정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햇살이 물 위에서 만나 반짝거리던 어느 날 버지니아는 평화로운 강물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 삶을 마감했다.
브라운 부인과 클라리사가 다른 시대를 살면서도 버지니아의 고민과 우울의 시간을 공유했듯이, 남성 중심의 사회와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여성들과, 또한 여전히 자신에 대해 고민할 기회조차 찾지 못한 채 가슴 한 구석에 뭔지 모를 허전함과 우울증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 날의 모든 여성들에게도 버지니아와 클라리사, 브라운 부인의 시간이 공유되고 있다.
마치 버지니아가 몸을 담근 강물처럼, 고요한 듯하지만 격정적이고 멈춰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여성들의 시간이.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버지니아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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