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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영화 <밀애>의 포스터가 극장에서 내려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더 늦기 전에 ‘오늘만은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간신히 표를 한 장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4,5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썰렁한 극장에 혼자 어색하게 앉아서 나는 두 시간 내내 미흔의 감정을 따라가느라 참으로 힘든 감정의 노동을 버텨내야 했다.
힘겨운 두 시간을 보내고 극장을 나온 후 뒤늦게 참석한 회의 자리에서는 어떠한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멍하게 회의를 끝내고 나오자 어느 새 연흥극장에는 <밀애> 대신 새로운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 <밀애>의 상영장에서 미흔의 삶과 사랑 그리고 상처에 짓눌린 가슴을 받아 안았다.

여자, 엄마, 남자

이혼 후 한결 밝고 씩씩해진 우리 엄마는 어느 날 우리 앞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한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엄마의 새로운 남자’. 그건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면서도 솔직히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엄마의 이혼 후 엄마와 우리 세 딸. 이렇게 여자만 넷이서 살던 집에 익숙치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고, 그 남자가 풍기는 석연치 않은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불편함은 그 남자에 대한 엄마의 태도였다.
엄마는 그 새로운 남자에게 독상을 차려주고, 바쁘다고 우리에게는 해주지도 않던 반찬을 새로 만들어 주었으며, 따끈따끈한 밥을 사기그릇에 담아 정성스레 내어 주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태도에 매우 짜증이 났다.
왜! 도대체 왜! 엄마는 남자라는 존재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새로운 남자를 데려와 저렇게 지극정성을 보인단 말인가! 질리지도 않았나,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남았는가, 도대체 남자에 대한 믿음이란 게 다시 생기냔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나서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엄마의 의지가 아닌, 그 남자에 의해서.
엄마는 한 동안 매우 슬퍼했다. 자식들 앞이라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부쩍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며 신경질적이 된 엄마는 온몸으로 다시 자신의 빌어먹을 팔자를 원망하고 있었다.


미흔.

나는 미흔을 보며 내내 엄마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에 불과한 그 알량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이상 상처받거나 구속당하기 싫은 미흔과 인규의 게임이 오히려 가슴 아프도록 안타까워보였다.
요즘은 쿨한 사랑법이 워낙 유행이라 모 잡지에서는 ‘친구끼리 섹스를 즐기는 법’ 같은 것까지 소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쿨한 사랑을 하겠다는 명분 좋은 구실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에 굳이 구속되기도, 상처받기도 싫은 이들의 회피 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 가족, 결혼.
인간의 삶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골치 아픈 주제들로 인해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미흔이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짊어진 채 억눌려왔던 욕망의 탈출구를 찾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인규가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의 줄타기 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즐기고 있을 것이다.

‘쉼터’의 여자

매일 맞으면서도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멍가게 ‘쉼터’의 여자.
미흔과 ‘쉼터’의 여인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에 깊숙이 공감할 수 있는 두 여인은 아쉽게도 도로변에서 헤어졌다.
미흔이 차라리 인규가 아니라 ‘쉼터’의 여인과 훗날을 함께했다면 둘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독사진. 그리고 ‘무상한 것을 위하여’

혼자 남은 미흔은 빨간 옷을 입고 사진관을 찾아가서 웃는 얼굴로 자신의 독사진을 필름에 남긴다. 나는 두 시간 가량의 이 영화에서 이 장면만이 유일하게 편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미흔은 이제 새로운 자신을 찾고 자신 있고 당차게 홀로서기를 해나갈 것이다.
물론, 미흔은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쯤 미흔에게는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과 욕망과 관계에 관한 새로운 힘이 생성되어 그녀의 사랑을 신선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미흔에게 공감을 느꼈던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지금 다시 한 번 찾아온 사랑에 그 힘을 적극 활용해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듯이.
영화 마냥 내내 우울한 OST의 마지막 트랙처럼, 결국 나 역시 사랑, 그 ‘무상한 것을 위하여’ 새롭게 도전하는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축복할 수밖에...

<밀애> OST 들으러 가기! (이 문장을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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