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개의바람

분류없음 2016/01/15 04:24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 글쎄. 좋은 일이면 괜찮으려나 - 직장 상관에게 뭔가를 따로 보고한다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냥 얘기했다. 열정적인 상관은 바로 조치를 취하거나 이런저런 주문사항을 추가하는 것을 목격했고 복지부동하는 상관은 왜 그걸 나한테 얘기해,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면서 봉합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는데 그럴 땐 마치 군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 군대가 대부분 그런 식이란 걸 익히 들어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 꼭 가봐야 아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군대 그 자체이므로. 

 

 

몇 달 전부터 옳지 않은 일이 회사에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시프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람을 직접 케어하는 일이다. 24시간 내내 서비스 이용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니 사람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그 가운데에는 근무자들이 인지하는 일도, 인지하지 못하는 일도, 사건사고가 일어나야만 알게되는 일도 있다. 모든 일을 다 근무자들이 인지하고 개입할 순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게 그렇다. 그만큼 "구멍"이 있을 수 있다. 촘촘하게 잔신경을 쏟아 일을 하면 그 구멍이 작아지거나 드물게 된다. 듬성듬성 손놓고 있으면 그 구멍은 어느새 크게 벌어져 블랙홀로 변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비스유저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이내믹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런 게 참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한편으론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일을 방기하고 대충대충 뭉개는 요령도 원하든 원하지않든 자연스레 알게 되니 그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몇 달 전부터 일어났던 옳지 않은 일은 서비스유저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무자들 내의 문제였다. 바로 내 앞의 시프트에서 발생하던 일이라서 나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매니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편으론 그들에게 내가 알고 있다는 암시를, 매니저가 알 수도 있다는 암시를 여러 번 주었다. 일의 방법과 방편을 여러 번 바꾸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누군가가 매니저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매니저가 알고 있는 이상 이미 내 손을 떠난 셈이다. 기다렸다. 매니저가 개입할 수 있는 시간과 그가 그의 리소스를 이용해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12월 말이 지날 때까지 가시적인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달 초 일을 하던 와중에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나로 하여금 이젠 매니저에게 직접 리포트할 때가 다가왔다, 는 결심을 굳히게 만든 일이었다. 그 결심을 굳힌 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악몽을 꾸고 과거의 환기-플래시백에 시달렸다. 만약 매니저가 이 건을 심각하게 다룬다면 그 둘은, 나의 동료 둘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매니저에게 리포트함과 동시에 이 건을 스무스하게 다룰 수 있는 두 가지 솔루션을 들고 매니저를 만나기로 했다.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약속시간을 컨펌하고나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 낮에 매니저를 만나고 돌아왔다. 미팅에 가져간 주제는 서너 개 정도였는데 첫째 주제를 다루자마자 매니저가 먼저 그 심각한 건에 대해 물었다. 우회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아는대로 말하는 수밖에. 매니저는 화가 무척 많이 났고 심각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는 근거를 몇 가지 제시했다. 평사원인 나로서는 알지 못했던 근거들이었기에 그냥 가만히 들었다. 이젠 내 손을 완전히 떠났다. 만약 당사자들이 매니저의 결정에 불복해 보다 높은 상급자에게 이 사실을 가져가거나 혹은 소송을 제기하면 아마도 나는 증인 역할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시끄러운 일이 생기겠지. 하지만 변화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변화를 허락하는 건강한 조직문화에서 일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최소한의 바람이다. 

 

 

속이 편하지 않지만 이제는 잠을 잘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몹시 찼고 감기기운이 일었다. 걱정이다. 건강하자. 몸도 마음도. 

 

2016/01/15 04:24 2016/01/15 04:24
tags :
Trackback 0 : Comment 0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ys1917/trackback/1147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