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일들

분류없음 2016/02/23 02:22

 

1.

얼추 일 년 전, 꽃개의 일터에 잠시 머물렀던 중년 여성 클라이언트가 있다. D라고 해두자. 요 몇 주 연속으로 일요일 오버나이트 근무 시간, D는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전화를 한다. 처음에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지금은 클라이언트를 더 받을 수 없다고 말한 뒤 Distress Centre 와 Crisis Line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다음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그 다음 주에 전화했을 때에도 역시 클라이언트를 더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D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게 느껴졌다.

 

네가 머무는 곳에 스탭이 없니 / 응, 있는데 별로 도움이 안돼 / 그래도 그들한테 얘기해, 그게 그들의 일이야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온 몸에 경련이 오고 어지러워 /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거니 / 응, 그런 것 같아 / 그러니까 스탭에게 알려야 해. 아니면 직접 911에 전화를 해. 미안하지만 나는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어. 잘 알잖아 / 병원에는 가기 싫어. 병원 사람들은 나를 거칠게 다뤄.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 정말 미안해. 스탭에게 바로 말해,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셔봐, 그래, 잘한다, 그리고 크게 내쉬어 / … / 괜찮니? / 응, 조금 괜찮은 것 같아 / 자, 이제 일어나서 스탭에게 가. 따뜻한 차를 달라고 해. 바깥 바람도 쐬고. 다시 돌아오면 괜찮을거야. 차도가 없으면 바로 911을 불러. 알았지? / 알았어, 고마워

 

전화를 끊고 잠시 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D의 목소리다.

 

꽃개야, 나 스탭한테 얘기했고 지금 따뜻한 차를 받아서 방으로 왔어. 이제 이거 마시려고 해 / 그래 잘했어. 한꺼번에 마시지 말고 천천히 씹는 것처럼 한모금씩 마셔. 사이사이에 숨을 계속 크게 내쉬고. 알았지? / 알았어. 그런데 너 남편 있니? / … 아니 … / 남자친구는? / … 난 그런 데 관심없어.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 그럼 여자친구가 있는 거야? / 반복하지만 그런 주제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내 사적인 영역의 일이니까. 너도 잘 알겠지만 지금 난 일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너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지 / 아, 미안해.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고. 너도 너 자신을 챙겨 / 응, 그래 고마워. 잘 자

 

전화를 끊고나니 허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약간 얄밉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어쩌랴, 그게 그 사람이 아픈 이유인 걸.  지난 밤에는 전화가 안왔다. 살짝 걱정이 됐다면 거짓말?

 

 

2.

아편류 (Opiates) 중독이 정말 징하긴 징하다. 밤새 아편 금단 (opiate withdrawal) 에 시달리는 클라이언트 한 명을 신경썼더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원래는 외과 수술 이후 뒤따르는  진통을 다스릴 목적으로 아편류 향정신성의약품 (가령 코데인이나 모르핀) 을 처방받았는데 거꾸로 그 처방받은 진통제 (아편류) 에 중독된 거다. 그 중독을 치료할 목적으로 메타돈 (methadone; 역전 치료, reversing treatment) 치료를 받았는데 이제는 되려 메타돈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메타돈 그 자체가 원인으로 되는 중독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양반은 작은 물병에 메타돈을 넣어 가지고 다니며 먹는 눈치다. 물론 의사처방은 없다. 처방전 없이 그 약을 어떻게 구했을까 궁금하지만 답이 뻔해서 묻기도 참 민망하다. 메타돈이 다 떨어지면 처방받은 다른 약 (역시 아편류) 을 줄기차게 잡수시는데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바로 지난밤이 그런 상황이었다. 아주 예전에 모그룹의 회장님께서 폐암치료 중에 맛을 들이신 모르핀을 구하는 게 귀찮고 번거로워 아예 종합병원을 통채로 사들였다는 그런 풍문이 있었다. 꽤 개연성이 있어보인다.    

 

 

3. 

"retard". 들으면 신경쓰이는 단어. 사람들이 본인을 언급할 때 혹은 타인을 언급할 때 저 단어를 쓰면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지난밤에 한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나누다가 본의 아니게 심경고백 (self-disclose) 같은 걸 하게 됐다. 니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왜냐하면 ---

 

영어로 말할 때 버벅대거나 같은 단어를 반복하거나 깨진 영어 (broken English) 를 구사할 때가 제법 있다. 원래 한국말도 잘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머리속에서 한국어-영어 컨버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주로 그런다. 대체로 당황하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것이 사람인가 싶은 기본예절이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오히려 911에 전화할 때는 대단히 차분하고 또박또박 말하는 편이다. 이렇게 버벅대다가 저 단어로 나를 면전에서 지칭하는 사람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사실 듣는 것 그 자체로는 큰 느낌이 없다. 영어로 하는 욕은 아무리 센 걸 들어도 그냥 영어다. 욕처럼 안들린다. 영어니까. 내 모국어가 아니니까. 단어 그 자체보다는 상황과 맥락,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된다. 한국어였다면 "니미럴시펄새끼" 라는 말을 듣기만해도 소름이 끼쳤을텐데. 어쨌든 저 단어 ("retard") 는 덜 떨어진 놈, 얼간이, 저능아, 칠푼이 따위로 옮길 수 있겠는데 막상 또 한국어로 옮겨놓고 보면 글자 자체로는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정신적/신체적 장애를 극단적으로 얕잡아 일컫는 말이란 걸 대번 알 수 있다. 대화를 나눈 그이는 남들에게 저 말을 들으면 화가 나서 펀치를 날리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남들에게  자기엄마에 대해 말할 때 저 단어를 쓴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복잡했다. 

 

어쨌든 저 단어는 "정말로 덜 떨어진" 사람들이 쓰는 것 같다는 게 내 관찰과 경험의 결과. 우리는 서로 다르게 기능할 뿐이다. 다를 뿐이다. We're just differently abled.

 

 

2016/02/23 02:22 2016/02/2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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