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건조 오징어

분류없음 2012/07/18 03:32

하려는 일이,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정신을 담보로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어제는.

 

지금 일을 다니는 곳에서 가정폭력, 파트너폭력 등을 겪는 여성 생존자들은 아주 대단히 드물게 만나게 된다. 이 도시에서 생존하려는 그녀들은 대개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으로 "가게 되어 "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존하려는 그녀들을 지원하는 전문 분야들은 (대부분) 결혼하였거나 남성과 함께 사는 혹은 살았던 여성들, 아이를 대동하는 여성들을 지원대상으로 한다. 이 놈의 헤테로섹슈얼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싱글 여성은, 사실혼 관계로 살더라도 아이가 없는 여성들은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이등 시민인 것 같다. (레즈비언 여성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도 그래서 그 여인이 어제 우리 일터로 오게 된 것 같다.

 

어제 그 여인을 장장 두어 시간이 넘도록 만나 받고나니 진이 다 빠졌다. 내내 우느라고 티슈 한 통을 다 써버린 이 여인을 섣불리 위로할 수도 냉정하게 질문하고 답만 받아적을 수도 없는 그 곤란함이 나를 내내 애워싸고 있었다. 아니, 그 곤란함의 정체는, 언어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사람 사이라는 게 어수룩한 언어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힘들다는 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남자친구에게 경제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적으로 착취당하면서도 그래도 외롭기 때문에 그와 함께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녀를 내 머리와 이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가로젓고 있었지만 내 심장은 그녀를 위해 그렇게 함께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지션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체류신분도 그렇고

과연 내가 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루하루 그렇게 버텨내는 것도 무척 버거운데

어제처럼 내 정신과 심장의 힘을 써버리고 나면

바닷가에 널린 물오징어가 된 기분이다. 곧 마른오징어가 될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살이라는 게 생각처럼 생각만큼 되는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 그렇게 여기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2012/07/18 03:32 2012/07/18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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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12/08 00:35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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