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교실

2010/02/18 01:27 잡기장

 

 

한창 일본 드라마를 많이 보던 시절, 구보즈카 요스케 때문에 봤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게 표류교실 이라는 드라마이다. 내용이 정확히 생각나진 않는다. 지루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냥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서 계속 참고 봤다. 결론이 뭘까가 궁금해서.

 

무슨 이유에선지 학교전체가 미래로 가게 되는 데, 그냥 굉장히 끔찍하고 황량한 미래여서 내내 우울한 드라마였다. 구보즈카 요스케는 거기서 뭐 좀 쿨하게 나오는 선생이었고, 꽃집 아가씨인가? 를 좋아했는 데 그 여자도 어쩌다 같이 미래에 놓이게 되었다. 학생들 몇명하고. 미래의 환경은 그냥 사막이었다. 자세한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괴물이 있어서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갔었다. 반지의 제왕처럼 정말 무기도 없고 대항수단도 없는 대책없는 애들이 괴물과 사막에 놓여있는 것이었어서, 그냥 마주치면 죽는 그런 식이었다.

 

 

드라마가 끝날 무렵이었나, 혹은 마지막 회였나에서 드디어 그 꽃집 여자가 구보즈카 요스케의 품에서 죽는다. 구보즈카 요스케는 죽은 여자를 안고 철철 울면서, 눈 앞에 있는 괴물한테 말을 한다. 긍까, 자기도 100% 곧 죽는 거다. 그 순간 그만하라고 했던가 부탁을 했던가 그런 류의 말을 한 후에, 구보즈카 요스케가 울면서 외쳤던 말은 "우리들은 약하단 말이야!!" 였다.

 

 

그 드라마는 쉬이 잊혀졌다. 그런데 그냥 그 말이 자꾸 생각이 나곤 했다. 그 때 그 대사에서 뭔가 많은 생각을 했었고, 또 지금도 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무력하고 기가 막힌가. 죽기전에 한 말이 앙탈 부리듯이 우린 약하단 말이야! 라니. 하지만 그 순간에 그것만큼 인간적인 외침이, 가장 설득력있는 외침이 뭐가 있을까. 그 당시의 내가 그 대사를 기억하는 건, 그것이 아마 계속 내가 외치고 싶던 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약하단 말이다!

 

이렇게, 그들에게, 또 내 자신에게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강한 척과 모든 이성을 거칠게 마구 내려놓고, 그냥 나는 한없이 약하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하지 못한 말을 그 드라마에서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하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약하니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어제밤에 재정상태를 확인해보니, 이번달말까지 써야할 돈을 벌써 다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놀라서 왜 그랬지 하고 보니까, 뭐 그럴만했다. 머리도 망쳐서 다시 했고, 입원하면 돈 더든다길래 A형간염주사도 비싼데 맞았고.. 등등 또 이번달은 내 기억에 뭔가 스트레스가 증폭되어서 계속 맛있는 걸 먹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식재료비도 많이 쓴 것 같고.. 아무튼 그랬다.

 

걱정 좀 하다가 하루종일 집에서 Criminal Minds를 보면서, 요새 한창 하고 있는 목판화를 파냈다.  온 집안이 나무가루로 난리가 난 상태고, 덕분에 기침도 좀 나고. 그래도 이거 뭐 다 끝나야 치우니까 우선은 방치해 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근데 막 그러고 있다가 생각해보니 뭔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는 드라마도 그렇고, 그걸 보면서 하루종일 조용히 칼을 들고 부모가 목을 조르고 있는 그림을 파내고 있다는 건 정말 변태적인 일이었다. 누가 보면 소름끼치겠다 싶었다.

 

어제는 재정상태를 확인도 안하고, 아직 정신이 불안정하니까 다시 춤을 매일 추자! 라고 생각했는 데, 뭐 안되게 됐다. 근데 그러면서도 카드로 그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오늘 같은 하루를 보내는 나는 분명히 굉장히 정신적으로 큰 위협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하루종일 그 때에 관련된 그림들에 둘러쌓여서 그런 그림들을 계속 생산하고 있으니,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 그 일을 자극 받고 부모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마비상태에 익숙한 내가 정말 괜찮은지도 계속 혼자 체크해가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요새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거쳐야할 과정이니까, 그렇게 하나하나 파내 가는 것이다.

 

 

아까 그냥 나무판 막 파다가 정말 뜬금없이 표류교실과, 구보즈카 요스케와, 그 대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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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01:27 2010/02/18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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