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0

2010/02/10 03:39 잡기장

언제부턴가 매일 루시드폴 노래를 듣는다. 몇 개 좋아하는 노래가 있지만, 보통은 그냥 전곡이 들어있는 폴더를 랜덤으로 돌린다. 걸어다니면서도 듣고, 까페에서도 듣고, 책을 읽을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멍하니 있을 때도 듣는다.

 

그렇게 듣다가 순간순간 그 목소리가 그 톤이 그 멜로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오늘은 문득,

벽에 붙여놓은 내그림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가슴을 이 정도로 후벼팔 수 있는, 그렇게 소용에 닿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

 

Edvard Munch 

 

서경식씨의 책을 읽다가, 거기서 잠깐 나왔던 아우슈비츠 출신의 어떤 지식인이 많은 희망의 메세지를 전했지만 마지막은 자살이었다는 얘기를 보았다. 거기서 작가의 죽음의 느낌에 대한 얘기가 정확하진 않지만, 뭔가 내려놓았구나 라는 것이었다는 기억이 난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부분 전체가 참 가슴에 절절히 남았다.

 

그토록 기억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무리 오늘 하루가 희망차고 즐거웠더라도 기억은 그냥 습격하는 것이다. 예고 없이 문득 그냥 습격 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에너지가 차고 넘쳐도 항상 그 습격에 맞설 에너지를 비축해두지 않으면, 곁에 있던 죽음이 훅 하고 덮치는 것이다. 오랜만에 케테 콜비츠의 판화를 보면서, 이 사람에게 죽음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면서, 그 죽음의 기운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Edvard Munch

 

 

 

한때 미국 드라마나 영화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뉴욕 얘기가 나오면 진저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특히나 거의 동경이거나 화려함의 상징으로 등장하기에 그 모든 은유까지도 견디기가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모두가 좋은 추억을 만들고 꿈을 꾸어대는 그런 곳에서는 절대로 나쁜 기억 같은 것을 만들면 안되는 것이구나.

 

 

오늘 발레를 마치고, 간만에 산책에 나쁘지 않은 날씨와 공기 속에서 나는 또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나의 과민반응이든, 세상에는 너무 엄마와 아빠에 대한 얘기가, 가족에 대한 얘기가 너무나 많아서 나쁜 기억 같은 것을 만들어서는 안되었던 거구나. 그러면 무조건 지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전부터도 요즘도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에 대해서 자주 떠올려보곤 한다. 그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보다 훨씬 더 자주 강도높은 기억의 습격을 받았을 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살 생각을 했을까.  그냥 갑자기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을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쫓는 시늉도 많이 해봤겠지. 그냥 그 기억이 덮치도록 내버려두기도 하고.. 사실 기억에게 덮쳐지는 기분이 나쁘기만 하다는 것은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덮쳐짐은 뼛속까지 괴롭기도 하지만, '엄마의 품속' 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기도 하다. 거기가 더 익숙한 공간이기에, 그 동안의 저항과 발버둥은 얼마나 부질없었는 가를 촉각적으로 확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그 침잠이 반가울 때도 있는거다. 이제 내 자리 찾은 것 처럼 막 반갑기도 한거다.  희망의 메세지 만큼 낯선 것이 또 있으랴.

 

Edvard Munch

 

오늘도 이렇게 흘려보내버려도 되는 걸까 아무것도 안해도 될까 하는 죄책감.

나는 그냥 기억과 싸우는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자기 정당화, 어쩌면 진실, 어쩌면 과도한 자기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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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03:39 2010/02/10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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