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은 누구인가
- 까탈스런 나에게 단 한 번도 호감을 주지 않았던 그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의 일이다. 박원순이 백두대간 종주를 중단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수염이 유달리 덥수룩해 보였던 그는 안철수의 지원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나는 박원순을 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경원을 찍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정치평론가들이 투표율 60%가 넘으면 박원순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나는 55%만 넘어도 박원순이 낙승할 것이라고 보았다. <시선집중>이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나는 그렇게 공표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는 끝내 투표에 기권해 버렸다. 어차피 당선될 것인데 내 표까지 그에게 헌정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 박원순의 백두대간 종주 행사는 전액 <...코오롱>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인상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상에서 좀처럼 진실성은 물론 평균인 정도의 솔직성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느 언론사 창립행사에서 나는 그와 함께 축사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일부러 자리를 멀리 해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나에게는 유명인을 기피하는 이상증세가 있다.
나는 그의 저서를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약력에 단국대학 졸업이 누락되어 있다. 그는 몇 개월 다닌 서울대(사회계열) 학력은 반드시 기입해 놓았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서울법대’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입해 놓은 것도 있다. 4년씩이나 다니고 졸업한 ‘단국대학 사학과’를 자기 삶에서 배제하는 그를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인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천안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경원의 질문에 ‘북한의 소행으로 본다’고 태연하게 답변했다. 나는 둘 중의 하나, 즉 그의 인상이 맘에 들었거나 아니면 천안함 답변만 제대로 했더라면 기꺼이 투표장에 나갔을 것이었다.
최근 박원순은 종편 A와의 인터뷰에서 이석기 의원의 국가보안법 적용에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자주민보> 존폐 문제에 지자체장으로서 권한 행사를 기피하더니, 슬며시 일처리를 사법부에 전가해 버렸다. 그는 다른 종편과의 인터뷰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청구는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2011년 박원순 시장 선거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통합진보당 청년당원들이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한국 법조계에서 ‘시대의 변론’으로 회자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것이다.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사건(1986년) 1차 변론서의 서두 문장이다. 아래 두 글을 읽어 보자.
“1차 변론서의 초안은 박원순이 담당했다... 그러나 박원순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고를 일별한 조영래는 아무 말 없이 덮어 둔다... 변론 기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조)영래는 자신이 직접 펜을 들었다.”(안경환 저, 『조영래 평전』, 323쪽)
“1차 변론요지서의 초안을 필자가 잡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다시 쓰다시피 재작성했는데...이 1심 변론요지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박원순 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441쪽)
당시 조영래는 39세였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대변호사였다. 반면 박원순은 30세의 무명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1차변론서의 초안을 자기가 ‘잡아 주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런 사소한 것들을 더 중시한다. 박원순은 대부분의 학·경력이 석연치가 않다. 서울시장 당선 전 그는 방배동 60평 아파트에 월세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얼마나 책이 많은지 아파트 거실까지 마치 도서관 서고처럼 층층이 책꽂이를 나열해 놓은 것을 보았다. 때문에 거실이 매우 어두침침해 보였다. 아파트에 자기 혼자 사는 것도 아닐 터인데 어떻게 거실까지 다 자기 책으로 메워놓은 것인지? (참고로 나는 내 방 말고는 집에 책을 쌓아 놓지 않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작은 배려 때문이다.)
위에 적었듯이 박원순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라는 책 제목을 달았다. 여기서 ‘이들’이란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이 되고는 이석기에게 ‘국가보안법 유죄’를 단죄하는 발언을 했다. 박원순은 이와 별도로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라는 저서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다. 혹시 그의 반생에 걸친 저술과 운동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나는 재벌 돈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자기 야심과 함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더 보기
- 까탈스런 나에게 단 한 번도 호감을 주지 않았던 그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의 일이다. 박원순이 백두대간 종주를 중단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수염이 유달리 덥수룩해 보였던 그는 안철수의 지원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나는 박원순을 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경원을 찍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정치평론가들이 투표율 60%가 넘으면 박원순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나는 55%만 넘어도 박원순이 낙승할 것이라고 보았다. <시선집중>이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나는 그렇게 공표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는 끝내 투표에 기권해 버렸다. 어차피 당선될 것인데 내 표까지 그에게 헌정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 박원순의 백두대간 종주 행사는 전액 <...코오롱>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인상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상에서 좀처럼 진실성은 물론 평균인 정도의 솔직성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느 언론사 창립행사에서 나는 그와 함께 축사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일부러 자리를 멀리 해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나에게는 유명인을 기피하는 이상증세가 있다.
나는 그의 저서를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약력에 단국대학 졸업이 누락되어 있다. 그는 몇 개월 다닌 서울대(사회계열) 학력은 반드시 기입해 놓았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서울법대’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입해 놓은 것도 있다. 4년씩이나 다니고 졸업한 ‘단국대학 사학과’를 자기 삶에서 배제하는 그를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인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천안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경원의 질문에 ‘북한의 소행으로 본다’고 태연하게 답변했다. 나는 둘 중의 하나, 즉 그의 인상이 맘에 들었거나 아니면 천안함 답변만 제대로 했더라면 기꺼이 투표장에 나갔을 것이었다.
최근 박원순은 종편 A와의 인터뷰에서 이석기 의원의 국가보안법 적용에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자주민보> 존폐 문제에 지자체장으로서 권한 행사를 기피하더니, 슬며시 일처리를 사법부에 전가해 버렸다. 그는 다른 종편과의 인터뷰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청구는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2011년 박원순 시장 선거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통합진보당 청년당원들이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한국 법조계에서 ‘시대의 변론’으로 회자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것이다.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사건(1986년) 1차 변론서의 서두 문장이다. 아래 두 글을 읽어 보자.
“1차 변론서의 초안은 박원순이 담당했다... 그러나 박원순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고를 일별한 조영래는 아무 말 없이 덮어 둔다... 변론 기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조)영래는 자신이 직접 펜을 들었다.”(안경환 저, 『조영래 평전』, 323쪽)
“1차 변론요지서의 초안을 필자가 잡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다시 쓰다시피 재작성했는데...이 1심 변론요지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박원순 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441쪽)
당시 조영래는 39세였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대변호사였다. 반면 박원순은 30세의 무명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1차변론서의 초안을 자기가 ‘잡아 주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런 사소한 것들을 더 중시한다. 박원순은 대부분의 학·경력이 석연치가 않다. 서울시장 당선 전 그는 방배동 60평 아파트에 월세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얼마나 책이 많은지 아파트 거실까지 마치 도서관 서고처럼 층층이 책꽂이를 나열해 놓은 것을 보았다. 때문에 거실이 매우 어두침침해 보였다. 아파트에 자기 혼자 사는 것도 아닐 터인데 어떻게 거실까지 다 자기 책으로 메워놓은 것인지? (참고로 나는 내 방 말고는 집에 책을 쌓아 놓지 않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작은 배려 때문이다.)
위에 적었듯이 박원순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라는 책 제목을 달았다. 여기서 ‘이들’이란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이 되고는 이석기에게 ‘국가보안법 유죄’를 단죄하는 발언을 했다. 박원순은 이와 별도로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라는 저서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다. 혹시 그의 반생에 걸친 저술과 운동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나는 재벌 돈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자기 야심과 함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