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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25
    날이 싸늘해졌다.
    daybreak_

날이 싸늘해졌다.

의대에서는 찬 바람이 불면 여럿 마음이 서늘해진다.

 

본4 국시도 다가오고,

인턴들 레지던트 시험도 다가오고,

4년차들 전문의 시험도 다가오고,

 

그리고 본3 연말 고사도 다가온다.-_-

 

이제 슬슬 딴짓 그만하고 공부만 열심히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괜히 이렇게 저렇게 올해를 돌아다보게 된다.

나는 올해 뭘 했나, 누굴 만나서, 뭘 보고, 뭘 배웠나.

 

그냥.

토요일에 세미나 뒷풀이에서 술을 마시는데 그날따라 술이 참 잘 들어가더라.

소주도 잘 들어가고, 정종도 잘 들어가고,

금요일에 페어웰에서도 많이 마셔서 토요일에도 뭔가 멍때리는 마음으로 세미나에 갔는데,

막상 가니깐 정신도 깨고, 술은 또 왜케 잘 들어가던지.

그닥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냥 적당히 마시고 종로에서 대학로까지 멀쩡히 걸어 들어왔지만,

 

그냥 좀 우울했던 것 같다.

 

 

1.

가끔 하는 생각인데 나는 참 산다는걸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스운 소리겠지만,

나는 가난도 잘 모르고, 부서지는 가족도 잘 모르고, 기본적으로 아프다는걸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산다는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경험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책을 읽어서 나온 말들은 너무 가벼워 보여서,

나는 내가 어디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우선 당장은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해야겠지만,

결국 깊어지려면 사람을 만나고 내가 많이 겪어야 할텐데,

글쎄.

 

 

2.

제대하고 뭐할꺼냔 질문에 운동하면서 살고 싶다는데,

무슨 운동이 하고 싶냐고, 내가 하고 싶은게 있어야 운동이든 뭐든 되는거 아니냐 물었던건,

사실 물음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시간되는대로 집회에 나가고, 세미나를 하고,

뭐 내가 의대생이니깐 결국은 보건의료에 관련된게 제일 많긴 하지만,

그냥 여기저기 운동의 언저리에 기웃기웃하다보면, 이렇게도 시간이 참 잘 간다.

 

다 관심 있고, 재밌고 하니깐 하는건데,

내가 진짜 나중까지 이 언저리에 있고 싶다면,

내가 하고 싶은게 있어야 할 것 같다.

막연하게 노동자, 민중, 자유, 평등, 건강, 뭐 이런거 말고,

좀 더 구체적인 무언가.

 

내 질문이 있어야 되는데,

쉽지 않다.

 

 

3.

왜 쉽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나는 참 나밖에 모르는 것 같다.

 

의대에 다닌다하면 다들 살인적인 경쟁적 분위기나, 학점 경쟁, 뭐 이런 게 힘들단 얘길 하는데,

사실 난 그런 걸로 힘들어본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내 기준이 있고, 내 목표가 있고, 나는 맨날 나랑 경쟁한다.

내가 스스로 여기까지 봐야돼, 이만큼 하자, 정해놓곤 거기에 후달후달.

 

옆에 애가 얼마나 공부하는지, 나보다 몇 개 더 맞는지, 이런 생각 안드는게 참 편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참 주변에 관심이 없구나, 싶었다.

 

그래, 나는 참 남일에 관심이 없다.

그냥 적당히 맞장구도 잘 칠 수 있고, 얘기 듣는 것도 좋아하고,

한번 들은건 안 까먹으니깐 어쩌면 남들보다 더 관심 많아보이기도 하는데,

근데 내가 진짜로 누군가에 그렇게 관심 가져본 적이 있나 싶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내가 너무 사람을 가려서 문제라고 했다.

좋은 사람은 한번을 만나도 정들고 좋아하고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데,

그 이외의 사람은 백번 천번을 만나도 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렸을 땐 그냥 친구들 가리지 말고 두루두루 잘 놀아라 하는 말이었는데,

그때부터 10년도 더 지났는데 울 엄마는 며칠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너무 사람을 가리고, 아무데도 빠져들지 않는다.

외로워질꺼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절망에 분노하고,

당사자가 아니라면 결국 연대하고 지지하는 입장인건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한다는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나날이 든다.

 

어떤 마음이어야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져야 되는걸까,

아니면 그렇게 동화되는게 아니라 나는 여기 있으면서 그 아픔을 바라보는 걸까,

아니면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 그 '옳음'을 믿으며 투쟁하고 싸우는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이런저런 고민들이 복합적이다.

 

무언가 직접 뛰어들게 되면 좀 다른게 보일까.

언제나 한걸음 건너서만 바라보는데 익숙해서 그런지,

어떻게 그렇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도 내 문제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빠져들지 못하고 우선 생각하는 거.

 

정신과 교수님은 나한테 모든걸 이해하려고 들지 말라고 했다.

니가 이해가 되거나 안 되거나 그 사람들이 거기서 그러고 있다는 거.

 

 

4.

동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하고 싶은게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같이 고민하면서 살아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잘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고,

몇 안 되는 후배들을 보면 내가 더 알아서 잘해주고 싶기도 하지만,

그냥 곁에서 비슷하게 살아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앞에 생각이랑 겹치는건데,

이게 '내 일'이고, 이게 '내 사람'이고, 나는 그런게 참 어렵다.

 

그래, 지치지 않으려면 이럴때나 저럴때나 함께할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나는 왜 그런걸 잘 못 할까.

 

적당히 맞는데도 있고 안 맞는데도 있겠지만,

그래도 쨌든 어떤 이름 아래 뭉쳐서 소속감을 가지고, '우리'가 열심히 하는거,

  

아 모르겠다.-_-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좀 울적했다.

 

 

지금 뭔가 좀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나는 어디든 닻을 내려야되는데, 지금 좀 붕 떠있나 보다.

 

학교에 내려야 열공할텐데, 엄한 길에서 헤매이고 있다.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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