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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109년 만에 드디어 종지부

임시국회 마지막 날, 호주제 폐지 골자 민법개정안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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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97번째 세계 여성의 날' 닷새 앞둔 값진 선물

2월 임시국회가 개원되던 날 본회의장 모습
사진출처: 미디어참세상자료사진

97번째 ‘세계 여성의 날’을 엿새 남겨놓은 2일, 뜻 깊은 소식이 전해졌다. 2일 오후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을 전체 의원중 161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국회는 의원 296명 가운데 235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161, 반대 58, 기권 16표로 개정안을 가결했다.

지난 달 28일 늦은 밤, 국회 법사위에서 15명의 의원 가운데 11명의 찬성으로 민법개정안이 통과되어 무난한 본회의 통과가 점쳐졌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에 숨을 죽이며 국회 본회의에 관심을 기울이던 많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학생 이유림씨는 “당연한 일이고 너무 기쁘지만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다”는 소감을 전하며 “남녀를 막론하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환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법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서 2008년 1월 1일부터 호주제 폐지, 친양자제도 (자녀가 생부와 관계가 단절된 뒤 양부나 계부를 맞게 될 경우 새 아버지의 성(姓)을 따르고 호적에도 그의 친생자(親生子)로 기재, 법률상 친자녀와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도입, 부모 협의하에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는 길이 열리게 됐다. 또한 이혼한 여성이 6개월간 재혼하지 못하게 된 어이없는 민법규정도 함께 삭제됐다.

지난 해 말, 여야 각 당은 2월 임시국회 내에서 호주제 폐지를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바 있지만 2월 임시 국회 막바지까지 호주제 폐지안 통과는 진통을 겪었다. 특히 법사위 소속인 주호영 의원등은 새로운 신분공시제가 마련돼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분공시제가 확정될까지 호주제 폐지를 미뤄야 한다는 지연전술을 펼쳤지만 결국 역사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일제 입김으로 도입돼 지속되어온 남성중심 호주제

이로써 1896년 조선민적법, 1909년 조선통감부 민적법, 1958년 대한민국 민법을 통해 일제 강점기부터 110여년간 지속되어 온 부계 호주 제도는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됐다. 폐지를 반대하며 호주제는 우리 민족의 고유 미풍양습이라는 주장들이 일부 유림과 보수진영에서 나왔지만 호(戶)와 구(口)를 파악하는 국세조사의 기능, 봉건적 신분을 확인 하는 기능 등을 수행했던 고려와 조선의 호적제도 아래서는 ‘두 세살 먹은 아들이 호주가 되고 그 아들의 보호자인 엄마가 호주 밑으로 입적’되기도 하는 어이없는 현행 호주제와 달리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고 남편의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 외조) 뿐만 아니라 아내의 사조도 함께 기재되었었다.

2일 철폐된 남성 위주의 호적제는 일본의 입김으로 제정된 1896년 "호구조사 규칙과 세칙"으로 도입됐고 1909년 일제 통감부의 민적법 제정으로 확고해졌다. 그러나 일본은 2차대전 패전 후 반민주적이며 헌법위반이라는 이유로 호주제를 폐지했으나 오히려 대한민국 정부는 민법 제정과 개정을 통해 남성 중심의 호주제를 강화해 나갔다.

호주제 폐지를 위해 지난하게 진행됐던 싸움들

이에 맞서 여성운동 진영은 1950년대부터 가족법, 민법 개정운동을 전개했고 1991년 가족법 개정, 1997년 동성동본 헌법 불합치 결정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어 2000년에는 ‘호주제 위헌소송 원고인단 모집’과 함께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113개 여성단체의 참여로 함께 발족해 구체적 철폐 투쟁에 나서게 됐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싸움은 지난한 경과를 겪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가 결성된 후 위헌소송 원고인단은 각 구청에 이혼여성 자녀입적 신청 등을 제출했으나 모두 불수리 처분을 받았고 2000년 11월 28일 드디어 ‘호주제 1차 위헌 소송’이 제기됐다. 다음 해인 2001년에는 서울지법 북부지원과 서부지원 지원장이 호주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으나 법무부는 ‘호주제 합헌’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 사회의 권고안도 수차례 제출된 바 있었다. UN인권이사회는 99년 11월 `호주제가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로 규정짓는 가부장적 사회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강화시킨다'며 호주제의 폐지를 권고했고 2001년 5월, UN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부계혈통만 인정하는 호주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따른 여아 낙태, 직장내 성폭력과 성희롱의 만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저임금과 고용불안 심화 등 한국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한국 정부에 이를 시정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결국 호주제 폐지 여론은 점점 힘을 얻었고 2003년 부터는 행정부에서도 호주제 폐지 의견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여성부는 ‘호주제 폐지및 가족별 호적편제 도입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호주제 위헌’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법무부 또한 2003년에는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미루기로 일관했던 헌재도 2003년 말부터 2004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공개변론을 펼쳤고 지난 달 3일 헌법재판소는 마침내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및 778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남아 있는 과제, 목적별 신분등록제

'새로운 신분등록제도의 쟁점과 대안'긴급 토론회
사진출처 : 미디어참세상 자료사진

그러나 오늘의 값진 성과에도 불구하고 ‘호주제 폐지가 전부’는 아니라는 지적이나오고 있다. 지난 1월 10일 대법원은 호주제 폐지에 대비한 새로운 신분공시 방안으로 '혼합형 1인1적 편제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그간 제시됐던 '가족별 편제방안', '개인별 편제방안', '목적별 편제방안'이 혼합된 것이다. 대법원은 '신분정보의 철저한 보호', '다양한 가족형태의 보호'를 기본원칙으로 밝히고 있지만 이 방안은 극히 미흡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법원이 제시한 신분등록원부는 가족사항이 포함된 1인1적부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보네트워크센터등 여러 단체들은 “가족정보는 개인의 신분사항에 필수적인 사항이 아니”고 “개인의 가족정보는 개인의 정보임과 동시에 가족구성원의 정보이며 민감한 개인정보로서 공개될 경우 사회적인 차별의 위험이 대단히 크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법원이 제출한 안은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을뿐더러 신분등록부가 현실과는 괴리된 이성애적 핵가족만을 정상가족을 규정하고 차별의 소지를 만든다는 설명인 것이다.

현재 여러 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목적별신분등록실현연대, 민주노동당 등은 '신분등록부, 신분변동부, 혼인등록부, 혼인변동부‘와 같이 목적(사건)별로 공부(신분기록부)를 따로 둬 개인 신분정보 보호에 중점을 두는 목적별 편제를 현행 호주제 폐지와 민법 개정안에 따른 신분공시 제도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2005년03월02일 18: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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