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검토서의 재구성

2008/05/19 14:46 편집자–되기

* 제가 일하는 출판사 블로그 '출판/편집 이야기' 게재용으로 작성된 글을 옮겨 온 포스트입니다.

 

 

소믈리에는 처음 만나는 와인마다 맛을 보고, 와인 시음서를 작성합니다. 와인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충분히 검토해서 작성한 시음서는 뒤에 손님에게 와인을 추천하는 데 기본 잣대가 됩니다. 편집자들은 원고를 검토하고 원고검토서를 작성합니다. 소믈리에가 함께 내놓는 음식과 와인이 어울리는지 생각하듯이, 이 원고가 우리 출판사의 정신, 우리가 내온 책들(합쳐서 도서목록!)과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고, 그 와인이 손님의 요구, 상황, 분위기를 채울지 고려하듯이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이 원하는 책인지, 또 독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책인지를 고민합니다.
여기 제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쓰는 원고검토서의 양식이 있습니다. 불과 A4 한 장짜리이지만, 그 안에는 꽤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담긴 원고검토서는 한 원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오늘은 원고검토서 작성법을 통해, 원고 검토가 어떻게 출간 결정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국내 필자가 쓴 (조금은 불완전할 수도 있는) 원고를 검토하는 일과 이미 외국 출판사의 편집과 독자들의 검증을 거친 해외 도서를 검토하는 일은 세부적으로는 많이 다릅니다만, 여기에서는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임을 감안, 포괄해서 서술하겠습니다.


제목과 검토자 의견 :원고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제목',
원고의 운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검토자 의견'

원고검토서의 최상단에 위치합니다.
제목
원고 제목을 정확하게(해외 도서는 원제도 꼭!) 적습니다. 실제 편집이 시작되어 제목이 확정될 때까지, 보통 이 이름으로 계속 불리게 됩니다. 이름 없는 사람은 딱히 뭐라 부르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타인과 관계 맺기도 어려워집니다. 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만 있고 제목이 없는 원고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 남기 어렵습니다.

검토자 의견
모든 보고서 작성의 원칙은 한 가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라. 결론을 알면 뒤에 따라오는 각종 정보를 훨씬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고검토서에도 ‘검토자 의견’이 맨 위의 오른쪽, 제일 시선을 받기 좋은 곳에 자리합니다. 원고검토서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고, 장점과 단점을 똑같은 비율로 쓰고, 출간에 관한 가부간의 의견을 쓰지 않은 검토서는 아무것도 검토하지 않은 바나 같습니다. 결정은 윗선에서 하더라도, 검토자 자신의 판단이 꼭 들어가 있어야, 그 검토서가 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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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 : 원고 사양, 지은이 약력, 콘셉트, 목차

원고 사양
편집자는 책의 출판에 드는 비용을 어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검토자는 책의 판형과 장정 방식뿐 아니라, 원고 분량(번역서의 경우 서양어는 1.5배, 일본어는 1배, 중국어는 약 2배 정도 페이지가 늘어납니다), 사진 수, 원색 및 흑백 사진의 수까지 세부 정보를 모두 파악해서 완성될 책의 정확한 이미지를 그려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정보들이 이 책을 대량 생산(책은 한 번 쓰인 내용을 무한복제해서 내놓는 대량 생산품입니다)할 가치가 있는지, 제작 단가와 가격 결정의 기초 정보가 되어 줍니다. 완전 원고를 언제 입수할 수 있는지에 관한 정보, 즉 스케줄도 적절한 출판 시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유용한 정보입니다.

지은이 약력
물론 지은이의 이름부터 정확하게 적어야 합니다.  전공이나 현재 직위와 함께 이전 저술 경력, 수상 경력,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되어 독자에게 어필할 만한 특이한 이력을 적습니다. 출간시 특판 가능성 등이 있다면 그 역시 포함하면 좋습니다.

콘셉트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원고가 한마디로 정리 안 된다면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원고 자체가 정리가 안 된 원고이거나, 검토자가 제대로 내용 파악을 못했거나. 후자의 경우라면 원고를 다시 꼼꼼히 읽어야 할 것이고, 전자라면 출간을 포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콘셉트가 명료한 원고일수록 그만큼 내용이 상세하고, 논지가 힘 있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콘셉트는 새롭고 참신한 요소를 담고, 친숙하지 못한 세계를 열어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말해 주면서 출간에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차
원고를 보기에 앞서 책 전체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해줍니다. 목차를 보면 책의 구성이 주제를 어떻게 지지하고 확대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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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의 외부 : 어떤 독자가 읽을 것인가? 비슷한 책은 어떤 것이 있는가?
출간했을 때, 어떤 위치,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대상 독자
책을 좋아하다 못해 책을 만드는 이야기가 궁금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처럼 꾸준히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알아봐 주는 독자, 의외로 세상에 많습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이 세상의 모든 독자를 위해 책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꼭~ 읽고 싶은 독자, 이 책이 저~엉말 필요한 독자, 그 전엔 몰랐지만 이 책을 읽고 지인~짜 감동할 독자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독자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위에서 책의 콘셉트는 단순할수록 좋다고 말씀 드렸지요? 대상 독자란 그 단순명료한 특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준비된 독자’지요. 대상 독자는 1차 대기독자층과 2차 타깃 독자층, 3차 주변독자층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기입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1월 출간한 『에도의 몸을 열다』의 경우 1차 대기 독자층은 일본 근대사 연구자 및 일본학 관련학과 학생으로, 2차 타깃 독자층은 18세기 연구자 및 시각이론 독자층으로, 3차 확대 독자층은 문화사 독자층으로 점차 확대해서 선정했습니다. 대상 독자를 미리 선정하는 일은 어느 정도 주관적이고, 경험에 근거하기 마련이지만, 편집자 역시 한 사람의 독자로서 불특정 다수 독자의 관심과 이해를 추체험하고, 그 대상 독자의 취향과 요구에 맞추어서 책을 만들도록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 된답니다.

유사도서
대상 독자를 선정했다면, 그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이 이 원고의 유사 도서라 할 수 있습니다. 유사도서 목록을 파악하면, 이 분야에서 어떤 책이 나왔고, 또 어떤 책이 더 필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존 출간 도서와 어떻게 구별 지을지 그 독자들의 취향과 기초 지식을 파악해서 고민할 부분이 생겨납니다.  

포지션
유사도서 목록을 보면, 이 책이 어디에 자리 잡을지 좀더 분명해집니다. 인문/철학 등의 포괄적인 대분류가 아니라 정확한 세부 분야를 제시해야 합니다. 실제 서점 분류방식에 따라 1~3분야 정도를 선정해서 적습니다.
포지션을 정할 때는 출판 전체 시장에 관한 언급뿐 아니라 우리 출판사의 도서목록에서는 또 이 책이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원고라면, 우리 출판사의 책 가운데 이 원고와 형제자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책과 같은 분야로 선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이템에만 치중해 자사 도서목록에서 기존 도서가 없는 장르로 생뚱맞게(!) 내놓는 경우, 독자들에게 우리 출판사의 색깔이 무엇인지 혼선을 주게 됩니다. 단, 기존 도서가 없더라도 여러 권의 책(혹은 시리즈)이 함께 준비된다면, 미개척 분야에 진출해 우리 출판사의 외연을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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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의 장단점과 시장에 대한 고민 : 강점과 약점은 비단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
책으로서 지니는 가치와 마케팅적 가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함.

강점과 약점
원고의 장점만 나열하는 것은 제대로 된 검토서라 말하기 힘듭니다. 순수한 장점은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취약점이 될 수도 있거든요.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적고, 할 수 있다면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서 저자와 의논해 원고를 보완하거나, 편집/마케팅상 고려할 점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

마케팅 포인트
원고 검토를 편집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케터와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 가는 책은 확실히 그 생명력이 다릅니다. 보는 눈이 다른 만큼 더 많은 고민이 담기니까요. 앞에서 작성한 정보를 가지고, 이 책을 시장에 언제 내놓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켜서, 독자에게 어떤 책으로 노출시킬 수 있을지 마케터와 미리 상의하는 일도 출간 결정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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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점검 : 이전의 항목에서 다뤄지지 않은 내용, 강조할 내용을 기입.
세부 내용 중심으로 명료하게 적어야 함.

검토 내용
콘셉트만으로 파악하기 힘든 세부 내용도 적습니다. 검토자는 감상을 배제하고 핵심 내용을 객관적으로 요약해야 합니다. 문체, 구성, 내용의 독창성, 주장의 시의성, 완성도 등을 중심으로 기입하되, 특히 아이템 자체의 가능성을 중시해서 적습니다.

하지만 회사 내의 다른 분들을 설득하기 위한 글임을 가정(기본적으로 출간에 긍정적인 의지를 가질 때 원고검토서를 작성하는 법입니다)해서 흥미롭게 읽히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흥미를 위해서는 책 안의 내용에만 머물지 말고, 사전조사를 통해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원고가 자리한 분야에 관해 신문기사나 학계 동향 등을 파악해서 적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저자 홈페이지를 찾아본다든지, 검색을 활용해서 저자의 다른 글, 인터뷰 등을 확인해 본다든지 하면 좋습니다. 외서라면, 외국 출판사의 홈페이지나 아마존 서점의 서평과 등수를 확인한다거나 다른 학술지에서 제공한 서평 등을 확보한다던지 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원고검토서는 어느 정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도, 상상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검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회사 내의 다른 동료들이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한 자료를 갖추고, 이 원고가 변신해서 태어날 책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원고검토서의 목적입니다. 검토서 양식을 두고 빈칸 채우는 법을 알려드리다 보니 글이 좀 딱딱하고 지루해지지나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책을 써서 출판사에 투고하고 싶은 분, 또 출판사에서 어떤 책을 내는지 알고 싶던 독자들의 실질적인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데 작은 도움이나마 되면 차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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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14:46 2008/05/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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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종호  2009/06/29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중한 정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데 저는 바벨탑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사람인데, 종교나 역사, 환타지적 요소가 모두 포함 되어있는데 어느 부류에 속하는 책이 될까요? 출판사 마다 다르다고 보면 되는지 아니면 가장 잘 팔릴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 둘다인지? 전문인으로써 조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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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강이  2009/06/29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별 것 아닌 정보들이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은...제가 문학은 잘 몰라서... 전문가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고요. 일반적인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종교나 역사, 환타지적 요소가 모두 포함된 소설 가운데 노 선생님께서 모델로 삼는 유사 도서가 있으시면, 서점에서 그 책이 어느 분류로 들어 있는지 살펴보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원고가 완성된 다음에 어떤 분류로 가는 게 좋을지 다시 한 번 점검하셔야겠지만, 무엇보다 노 선생님이 정말 쓰고 싶은 원고가 어떤 것인지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부분류에 있어서는, 분명 출판사마다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문학 전문 출판사, 철학 전문 출판사처럼). 선생님의 원고와 성격이 잘 맞는 출판사, 선생님 원고와 성격이 비슷한 출파낫에 출간 제의를 하시는 게 좋고요... 가장 잘 팔릴 수 있는 분야에 두는 게 많지만... 최근 인터넷 서점에서는 상세 분야를 복수로 설정할 수도 있어서, 대분류만만 정확하게 지정해도 좋습니다.
  3. s  2013/06/22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