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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관한 이야기

Name  
   류은숙  (2005-04-18 19:28:34, Hit : 1311, Vote : 39)
Subject  
   가방에 관한 이야기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이 만원계 사이트를 시작할 때는 이틀에 한번은 갱신하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이런 저런 일 때문에 그게 잘되지 않는군요. 이 사이트가 타이와 버마·타이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하기는 하지만 소수민족문제, 이주자 문제,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기를 바랬는데요. 꼭 이 문제와 관계된 얘기가 아닐 지라도 기회 날 때마다 계원 여러분들이 많이 찾아주시고 글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반드시 글을 올려야지 하면서도, 번역할 엄두가 안나(책상에 쌓인 일 때문에) 예전에 끄적거리다 만 미완성의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일명 '가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참세상의 필진참여 요청에 얼떨결에 응하고, 또 칼럼의 제목을 정해달라는 요구에 얼떨결에 '가방'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내가 인권단체에서 일하기 때문에 인권분야에 관련된 글을 써달라는 것이 분명할 텐데 '인권'을 넣어 제목을 짓지 않은 까닭은, 오랜 경험이지만 '인권'을 넣으면 소위 작명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암울하고 매력없는 그런 제목이 되기 십상인지라 책이나 자료집 제목, 행사제목을 정할 때도 항상 '인권'은 소제목에 가서 붙지, 큰 제목에 붙는 일이 별로 없다. 현실에서의 인권의 지위와 처지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인권'을 제쳐놓고 제목을 고민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가방'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꿈보다 좋은 해몽을 했다. '언니, 좋아요, 세상에 '가방'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인권을 상징하는 거 맞죠?'
그말을 듣고 보니 사람들이 들고 있는(또는 가지지 못한) 각양각색의 가방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내내 들고 다녔던 가방은 6학년이 되자 옆구리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새가방을 사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집에 있는 실과 바늘로 그 두꺼운 고무가방을 꿰매어 들고 다녔다. 그리고 꿰맨 쪽을 항상 몸에 붙게 들어서 남이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나머지 한쪽 옆구리가 터졌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남이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실로 꿰맨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당시 화장품 외판원 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하루는 집에 오시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버스에서 어떤 아가씨가 어머니 가방을 들어줬는데 가방이 하도 더러워서 손수건을 깔고 무릎에 놓아서 너무 무안했다고 했다. 365일 그 가방을 들고 일을 나가야 했던 어머니는 가방을 세탁할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가방보다는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들고 다니던 때, 멋쟁이 아가씨이던 이모는 절대로 보자기를 드는 법이 없었다. 이모는 핸드백 외에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가씨가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 내심 생각하곤 했다.

오랜 세월 사상을 이유로 감옥에서 인생을 보내야 했던 한 장기수 선생님은 가족에게도 잊혀졌고, 출소 후 쓸쓸이 돌아가셨다. 그분의 가방이 오랫동안 사무실 귀퉁이에 있었다. 언제라도 가족이 찾으면 유품으로 드려야 한다고 누군가 맡아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아직까지 그 가방을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다.

대학 신입생이 되던 해, 나는 과외아르바이트란 걸로 난생 처음 큰 돈을 만져보면서 여대생에 걸맞는 멋진 디자인의 빨간색 가방을 샀다. 그리고 그 가방을 들고 교보문고를 지나 미대사관 앞을 지나다가 가방 좀 보자는 전경들의 요구에 순순히 가방을 보여주었다. 겉으로만 만져보던 전경은 속도 봐야겠다고 했고, 지퍼를 열어서 가방 속을 샅샅이 보았다. 나는 아무 부끄럼 없이, 가방을 열어 보여주었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몰랐던 때, 공권력이 요구하는 일에 스스럼이 없던 때였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 만든 난민인권홍보용 포스터에는 다양한 사람 모형이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속에서 난민을 찾아보라고 한다. 저마나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지만, 빈 손으로 서있는 사람, 그 사람이 난민이라는 설명이다. 삶의 터전을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난민이다.

인권교육을 하면서 자신을 이주노동자라 생각하고, 가방을 꾸려보라 했다. 초과요금을 물지 않을 정도의 가방을 상상으로 꾸려보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여권, 가족사진, 카메라, 비상약품, 좋아하는 음악 CD등을 그 가방속에 넣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가방을 꾸리고 나면 가방속에 넣어갈 수 없는 것을 찾아보라 한다. 소위 시민권이란 것, 인권이라는 것은 그속에 하나도 없다.

인권이란 가방은 어떤 것일까. 정작 가방을 챙길 수도 없고, 가방을 가졌으나 필요한 게 들어있지 않을 수 있고, 제각기 능력대로만 가질 수 있고 꾸밀 수 있는 가방이라면 인권이란 이름이 붙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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