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킬링필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우리에게 생소하고, 과거 크메르왕국의 유산인 앙코르와트라는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역사에 좀 더 관심 있는 사람은 1970년대 후반 약 200만 명의 국민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킬링필드'를 언급하기도 한다.

 

나 역시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킬링필드 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는데 문득 어떻게 1/3에 달하는 국민들이 희생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흔히 정치적 탄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일반 국민들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는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걸 감안하면 (인종이나 종교도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200만 명씩이나 살해되었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킬링필드를 알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1984년작 영화 '킬링필드'이며, 근래의 여행객들은 현지의 유명한 박물관인 툴슬렝 박물관에서 그 역사의 잔혹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도 왜 200만 명 씩이나 죽었는가에 대해 자세한 답을 얘기해주는 곳은 없다. 역사적으로 내막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대량학살이 어디 한 두 건이겠냐마는 캄보디아는 생소하기 때문에 호기심이 더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이 얘길 했더니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유재현, 그린비)란 책을 추천해주었다. 이 책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에 드리운 아픈 역사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다. 식민지 지배와 내전의 역사를 겪은 건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보는 것은 낯설지 않다.이 책에 킬링필드에 대한 내용이 있어 정리해보았다. 

 

 

(질문1) 원리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폴포트가 집권한 1975~1978년까지 사망한 캄보디아인 : 약 200만 명 추정. 그 수치의 진실은?

 

(답) 이 수치는 영국 학자 키너가 당시 난민촌 1,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조사에서 나온 수치이다. 그런데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다. 1998년 인구조사 결과 캄보디아 인구는 1142만명인데, 1979년 학살이 지난 후 인구를 560만 명으로 추산하면(75년에는 710~780만으로 추정. 3년간 약 150만~200만명 사망) 약 20년간 인구증가율은 100%에 가깝고, 79년 인구를 610만명으로 추산할 경우 증가율은 87%에 가깝다. 이는 남한의 베이비붐시대 1955~1974년까지의 유례가 없던 인구 증가율 61.3%과 비교했을 때, 1979~1991년까지 전쟁 상태에 있던 캄보디아에서 이런 인구 증가율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말해, 사망자 수를 과장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질문2) 그렇다면 사망자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답) 결론부터 얘기하면 식량난으로 인한 아사자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인구를 750만명으로 추정한다면, 1인당 하루 150그램의 쌀을 기준으로 필요한 식량은 41만 톤인데, 당시 자급률이 20%선에 불과하였고, 해외에서의 지원도 턱없이 모자랐다. 때문에 대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예견된 것이었다. 

 

(질문3) 식량난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답) 2차 인도차이나전쟁(1960~1975년 베트남전쟁) 때 북베트남에 보급로를 지원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미군의 비밀스러운 폭격에 시달렸는데 국제사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미국이 캄보디아를 대상으로 1960년대 말 실시한 비밀폭격은 무려 23만 회 출격에 폭격지는 113,716곳에 이르고 투하된 폭탄의 양은 275.6만톤이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양과 맞먹는 양이다.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투하된 폭탄으로 인해 식량 수출국이었던 캄보디아는 오히려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과 유실된 농토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20%대로 떨어졌고, 캄보디아에 세워진 미국의 괴뢰정권이 물러간 1975년 이후 미국의 식량 지원이 끊겨 대량 아사자가 발생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질문4)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킬링필드의 진실은 무엇인가?

 

(답) 킬링필드 학살에 관한 이미지는 베트남이 심어놓은 것이다. 베트남은 통일 이후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그 때 베트남이 펼친 전술은 킬링필드의 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침공을 정당화할 명분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학살과 고문의 대표적인 박물관인 툴슬렝 박물관 역시도 당시 베트남이 설립한 것이다.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건물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글이 없이 사진이나 고문기구, 해골과 같은 이미지로 채워져있고, 이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성에 앞선 놀라움과 증오를 안겨주는 장치로 베트남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결론)

 

물론 당시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사실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확한 역사적 관계를 알지 못하면 원인 분석에 오류가 발생한다. 원인 분석의 오류는 끔찍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방해하고, 다시 그런 역사가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즉,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잘못된 원인으로 잘못된 결과를 끌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부터 제거하는 것이기에 무척 중요하다.

 

킬링필드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대량학살, 정치적 탄압만이 진실은 아니며, 그것은 일면일 뿐이다. 이런 결론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세력을 경계하고, 생각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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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23:54 2010/03/2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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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연기에 대한 두가지 해석

1) 삼세양중인과설 : 삼세에 걸쳐 생사를 반복 (전통적, 종교적 관점)

2) 한 생각이 찰나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남 (수행적 관점)

 

O 12연기

: 과거 2가지(무명,행), 현재 8가지, 미래 2가지(생,노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8가지는 과거의 결과물 5가지(식,명색,육입,촉,수), 미래의 원인 3가지(애,취,유)로 다시 나뉜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무명 : 어리석음 (괴로움의 근본 원인)

: 의지작용

: 업식.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근본 종자. 흔히 '나'라고 오해하는 것.

명색 : 명은 용도, 색은 형상. 나무토막은 형상은 같아도 땔감, 지팡이, 매 등으로 용도가 달라진다. 사람마다 같은 형상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

육입 : 6가지 감각기관 (6근 : 안의비설신의)

: 명색과 육입의 만남 (인식작용)

: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감각, 느낌. 저절로 일어나는 반응. ex) 뱀을 봤을 때의 거부감. 수는 긍정적(쾌)이거나 부정적(불쾌)로 나눠진다. 덤덤한 경우도 있다.

: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욕구. 수에서 쾌는 갈애로 이어지고, 불쾌는 혐오로 이어진다.

: 행동

: 습관이 되어 미래의 씨앗이 된다.

: 유의 씨앗이 싹이 되어 나온다.

노사 : 괴로움이 생긴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던 사람(식이 이미 형성된 사람)이 담배(명색)를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육입,촉) 순간적으로 피우고 좋다는 느낌(수)이 일어나고, 그 느낌은 피우고 싶다(애)로 이어진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면(취) 그게 다시 습관으로 쌓여(유) 업식이 두터워지게 된다(생,노사->식)

 

그렇다면 담배를 처음 접한 사람은 피우고 싶은 근본종자가 없는데, 왜 피우게 되는가? 근본적으로 담배가 해롭다는 걸 모르기 때문(무명=어리석음)이다.

 

O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는 것

: 계율을 지켜 애(하고싶은 마음)에서 취(행동)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 씨앗이 맺히지 않게 한다

: 선정.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림. 알아차림은 수(찰나의 느낌)를 알아차려 수에서 애(욕구)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한다. 마치 부싯돌이 부딪히는 것을 느끼면 불이 붙을 솜을 당장 치우는 것과 같다. 계는 이미 불이 붙은 솜을 끄는 것과 같다면 정을 닦는다는 것은 계를 지키는 것보다 쉽다. 왜냐하면 계를 지키는 것은 생긴 욕구를 계속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꺾이기 쉽다. 

: 계와 정을 닦으면 새로운 싹이 열리지 않아 식이 점차 소멸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을 해결하고, 또 다른 식을 만들지 않는 방법은 무명의 타파이다. 어리석음의 타파(존재의 참모습 파악 => 연기법:무상과 무아를 아는 것. 통찰력: 결과를 아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완성이며, 해탈(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과 열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에 이를 수 있다. 무지로 인해 시작되는 것을 중지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확연히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지혜의 증득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선정(명상)을 닦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명상을 할 때는 욕구를 막을 수 있지만 명상을 하지 않으면 결국 욕구에 끌려가게 되고, 욕구에 끌려가면 해탈이란 있을 수 없다. ex) 라즈니쉬 계열과 같이 명상만을 강조하는 경우. 또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계만 강조하면 형식주의가 되고, 이중행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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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7 22:57 2010/03/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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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불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 중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는 절, 그 입구에 서있는 무서운 형상의 조형물, 각종 불상들과 산신령을 모셔놓은 법당부터 시작하여 죽으면 지은 복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사상, 가족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할머니들의 신심깊은 오체투지까지 기복신앙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게다가 욕심을 버리라는 교리는 마치 경쟁을 회피하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600여 년전, 인도의 한 수행자-붓다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정립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때로는 국교로 인정받아 위세를 떨치고 때로는 박해를 받아 명맥만을 유지한 채 갖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이 불교의 변천사라 한다면 과연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엇이고 그 가르침이 탄생한 배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불교가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대안이라는 시각이 늘어가는 요즘, 기복신앙이 아니라 원리이자 과학으로서의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작을 확인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정신이 살아있다면 형식이 바뀜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의 불교의 모습은 정신을 잃고 형식을 강조하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 정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년에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불교대학을 들으면서 얻게 된 불교에 대한 이해는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바꾸게 만들었는데, 한 마디로 금으로 치장된 부처님상에 쏠려 있던 시선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법,法)'으로 옮겨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음의 작용하는 원리를 알고,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은 자연스레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는데, 부처님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인간 붓다 -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이다. 산뜻한 느낌의 노란 표지와 만만찮은 두께는 묘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붓다의 가르침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적용가능한 살아있는 것이란 느낌과 함께 하지만 그 내공만큼은 책의 두께처럼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책의 내용은 책 모양처럼 쉽고 명쾌하며 현실과 밀착되어 있었다.

 

<인간붓다를 읽고 있는 흠겸>

 

감명깊게 읽었던 한 구절이 있다. 왕자로 태어난 붓다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는 과정이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우리가 보통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일 때, 바뀐 가치관에 따른 삶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기존 가치관에 회의를 갖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새로운 가치관은 '심정적 동조 혹은 논리적 정리에 의한 가치관'으로 하나의 이론에 불과합니다. 

 

둘째, 새 가치관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당위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과거에 형성된 욕망 중심의 가치관으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상태입니다. 만약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당위적 삶으로서의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욕망 중심적인 삶의 가치관을 극복해 갈등이 완전히 제거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남을 위해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면서부터 비로소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삶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가치관이야 말로 '삶이라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주는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치관의 변혁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옮고 그름'에 대한 잣대로 바라보던 세상을 '욕망과 그에 따른 결과'로 바라보게 된 인식의 전환이었다. 책에서도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왕의 공격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왕이 상징하는 것은 욕망의 세계이며, 자신이 쌓아온 욕망을 완전히 극복함으로서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흔히 하는 오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 책은 단순히 붓다의 삶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붓다가 출가한 이후 겪었던 갈등과 모순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고, 붓다가 그것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괴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일종의 고도의 자기계발서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도 탁월한 효과를 준다는 지인의 말씀은 공감가는 말이다.

 

마치 기술자가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잘 알게 되면 고장을 수리하는 것을 넘어서 응용이 가능하듯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도 마음의 작용원리를 잘 알아 감정이나 욕구에 휘둘리지 않게 되면 자신을 더 크게 쓸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아주 현실적이고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깨달음이란 것이 자신을 위함이 남을 위함임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니 긴장감이 높아지는 현 정세에 꼭 필요한 배움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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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9 13:13 2010/03/1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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