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렬 씨가 교수신문에 투고한 기 드보르 관련 기사 한 편.

 

http://www.kyosu.net/?news/view/id=10749

 

공부를 하다보면 특별한 이유없이 관심이 가는 사상가가 몇 명 있게 마련인데, 내게는 기 드보르가 그런 존재이다.(아마도 그의 풍운아 같은 삶에 끌렸던 걸까?) 덕분에 드보르 관련해서 글도 한 편 쓴 경험이 있다. 결국에는 그 글 덕분에 드보르에 대한 미운정-고운정을 모두 떼버리고 말았지만..:)



기본적으로 양창렬씨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두 가지 점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우선 양창렬 씨의 우려와는 달리,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드보르가 아카데믹한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조건부로" 환영한다. 사실 드보르 사상의 아카데미화는, 이번 저작집 출판 훨씬 이전에 진행되어왔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드보르를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보드리야르의 선조로 자리매김하려는 흐름이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켈너&베스트나 맥도널드 등의 연구가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이러한 미국 쪽 움직임과는 달리, 정작 드보르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그의 사상을 진지한 논박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선동문 내지는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뤄왔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두 입장 모두 드보르 사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재전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그의 사상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그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가졌던 실천적 측면을 무화시켜버린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사상을 일종의 몽상 혹은 진지한 철학적 모색의 문턱 바깥에 놓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평가절하하려 애쓰는 꼴이다.

 

이번 전집 출판은, 아마도 프랑스 내에서 드보르에 대한 이론적-학술적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이 미국의 경우에서처럼 순수한 학문의 대상으로 화석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드보르의 사상이 이론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그가 프랑스 학계에서 받아온 푸대접과 비교해볼 때 분명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은 이러한 긍정적인 논쟁의 촉발이 어떻게 아카데미즘으로 귀결되지 않고 상황주의적 문제의식의 현실적-실천적 재전유로 연결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한편으론, 상황주의 운동이라는 현실 운동과의 결합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드보르가 문제제기했던 지형 자체가 완전히 변화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드보르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과연 아카데미즘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으로, 드보르가 말년에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상업 방송인 카날에서 찍게 한 행위를, 양창렬 씨처럼 "전용의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이는 드보르의 말년 저작들에서 점점 뚜렷이 나타나는 회의주의-비관주의의 귀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상황주의의 가장 매력적인 개념 중 하나인 전용(detournement)은, -흔히 잘못 이해되듯이- 피지배자가 기존의 제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용의 핵심은 새로운 의미의 생산을 통한 기존 권위의 '해체'에 놓여져 있다. 따라서 드보르의 말년 행적을 전용의 실천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드보르 자신이 스스로의 영화를 카날에게 찍게 행위가 가져오는 새로운 '의미'의 창출과 전복성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드보르의 말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이러한 전복성은 그다지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전쟁의 이점은, 그것이 적어도 바보 같은 낙관주의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란 그의 유명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전쟁터인 현실 속에서 언제나 극한을 사고하고자 하는 이였고, 이러한 그의 경향 때문인지 말년에 갈수록 그의 작품 속에서는 우울함과 비관주의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존의 비판적 정신을 잃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오히려 비판의 '정신' 만큼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말년의 드보르는 그 자신의 건강 상의 문제(그는 심각한 알콜 중독 휴유증을 겪고 있었다)와 미디어와 국가 기관의 괴롭힘(그는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레보비치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오랫동안 수사 받았다)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이러한 어려움이 그로 하여금 엉뚱한 선택들을 하게 만들었으리라... 결국엔 자살까지도..

 

 

암튼..드보르 영화의 DVD 출간 소식은 작년에 <씨네 21>이라는 잡지를 통해 엉뚱하게 접했지만, 전집 출간 소식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아주 반가운 소식으로, 뱅상 카우프만이라면 아마도 믿을 만한 전집을 내놓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의 사상을 문자그대로 해석하려는 상황주의자의 후예들이나 보드리야르의 원조 정도로 치부했던 미국 사상가들과는 달리, 카우프만은 드보르의 이론을 여러 비판 사상적 흐름들(특히 벤야민 등)과 결합시키면서 해석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닌 자다.(그의 글을 읽어본 건 두 어편 밖에 되지 않지만 매우 인상깊은 글들이었다.) 기회가 닿는대로 구입해 읽어보는 수 밖에.. 하지만 되도록이면 빨리 영어번역본이 나와 주기를..:)

 

 

 

덧.

사실 상황주의와 기 드보르는 그 중요성에 비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이 있다면 몇 개에 걸쳐 포스팅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아 이 기회에 그의 사상을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개의 웹사이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로 세상을 뒤흔든지 40년 가까이 되었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해체된지도 30년이 넘었건만, 세상에는 여전히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사상을 수용하고 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이 남아있다.(특히 예술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들은 주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몇몇 사이트를 살펴보자.

 

 http://www.nothingness.org/ 

상황주의와 관련한 사이트 중 가장 유명한 사이트이다.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의 저작들 중 상당수를 담고 있다.(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저작권과 작가 개념에 반대했으며, "표절할 수 있는 권리"를 항상 주장했기에 그들의 모든 저작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상황주의 관련 자료 뿐 아니라 평의회공산주의-아나키즘 등과 관련된 여타 다른 자료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좋은 사이트이다.

 

 http://situationist.cjb.net/ 

역시 온라인 상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웹사이트이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체 이후, 드보르와 주요 활동가들의 저작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사이트의 핵심은 방대한 링크. 링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최근에는 연결이 안되는 링크가 많아졌지만....-.-)

 

 http://www.akpress.org/ 

드보르의 영어판 선집 등을 출판한 영국 출판사.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자료 외에도 다양한 평의회공산주의 관련 저작들을 출판한다. 공식적 루트로 책을 공급하기보다는 팜플렛 중심으로 출판하는 '지하' 출판사이기 때문에 여기서 출판된 책들은 아마존 검색에서도 안 걸리는 경우가 많다.  

 

 http://www.jutier.net/contenu/6751.htm 

<스펙타클의 사회>의 영어판 번역본에는 3가지 판본(인터넷에 떠도는 것까지 합친다면 4가지 판본)이 있으며, 각각의 번역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안타깝게도, 그 중 가장 문제가 많다는 73년(?-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어 번역본을 본 사람들은 드보르의 난해한 문체에 학을 떼곤 하지만, 사실 불어원문을 보면 드보르 자신은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 사이트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 불어본 전체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도 조금씩이나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과 드보르의 문제의식을 검토하고 이를 예술운동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집단이 있다.

 http://foruma.co.kr/

 <포럼 a>라고 이름붙여진 위의 홈페이지에 가면, 다양한 예술작품들과 함께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 관해 쉽게 설명된 '한글'논문들을 찾아볼 수 있다.

 

 흠.. 이 사진 속의 드보르는 언제나 멋지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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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5 09:09 2006/07/25 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