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님의 [노마디즘의 수난] 에 관련된 글.

EM님의 지난 포스트들을 두서없이 읽다가, 평소 관심있게 지켜보던 주제를 발견하고 트랙백.

 

노마디즘에 관한 천규석-이정우-홍윤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논쟁들은, 사실 들뢰즈나 네그리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들에 익숙한 사람이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천규석 류의 비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들뢰즈가 강조하는 유목적 사유(노마디즘)는 결국 후기자본주의의 자본의 운동 양태에 대한 서술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손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진정한 노마드는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경계를 가로지르며 모든 곳에 침투하고, 결국 맑스의 표현대로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중에 녹여버린다"(<공산당 선언>)

 

이정우 씨의 처절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노마디즘에 대한 이러한 접근을 원전에 무지하고 철학에 충실하지 못한 이들의 단순히 '오해'로  치부하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해' 자체가 들뢰즈주의자들 자신에 의해 생산되어 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설령 천규석 씨 개인은 들뢰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를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치자. 하지만 그렇다면 들뢰즈의 철학을 "후기자본주의 여피yuppi의 철학"(<신체없는 기관>)으로 몰아붙이는 지젝의 비판에는 어떻게 답할건가? 들뢰즈의 원전을 충실히 검토하는 지젝의 논리 자체는 천규석 씨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천규석 류의 비판에 대한 대답은  "책이나 더 읽고 와라"가 아니라,  들뢰즈-가따리 철학의 어떤 부분이 이러한 광범위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 부분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데 있다.(이정우 씨 역시, 들뢰즈  천규식 씨의 비판 논리가 여타 다른 '진지한' 철학자들의 들뢰즈 비판과 겹쳐진다는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루머처럼, 그가 진정으로 노린 적은 <천의 고원>의 번역자 김재인씨였을까?)

 

내가 볼 때 여기서 들뢰즈에 대한 오해의 원인은,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노마디즘'과 현실에서의 '유목민', '유목주의'의 간극에 존재한다. 이정우 씨의 말대로, 노마디즘은 이동성/유동성의 증가에 대한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연결되는 문제이다.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살기를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노마디즘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이진경 씨의 말대로, 우리는 "이동성"과 "유목성"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물리적인 이동성의 증가가 유목성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윤리적 삶의 태도로서의 유목성은 물리적인 이동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아마도 "노마디즘은 삶의 태도의 문제이며, 물리적인 이동성과 구별된다"는 이러한 주장이 들뢰즈 자신의 원래 주장에는 더 잘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러한 들뢰즈주의자들의 해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우선, 노마디즘을 후기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현실적인 물리적 이동성의 증대와 혼합하여 사용함으로써 그간의 오해를 부채질한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들뢰즈주의자들 자신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적 분석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효성을 상실한다는 주장을 위해, 후기자본주의의 변화(유동성/이동성/혼종성의 증가)를 들뢰즈 철학의 적극적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제와서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개념이라고 후퇴하는 들뢰즈주의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들에게 오늘날 들뢰즈의 정치 철학이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바로 앞서 노마디즘과 상관없다고 선언한 이동성/유동성/혼종성의 '현실적' 증가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구체적인 현실 차원에서 이동성을 '통한' 지배가 이동성에 '대한' 지배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인 반-과학기술주의를 선언하는 비릴리오의 논리가 더 솔직해보인다.(물론 그의 결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두번째로 현실적 차원에서의 이동성의 증가와 철학적 차원에서의 노마디즘이 상관없다고 선언하는 들뢰즈주의자들의 반론은, 결과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노마드적 삶의 자세에 대한 호소"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만약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추구해야할 "다르게 살기", "다르게 사유하기"에 불과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의 사상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단지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보기를 권하는 지침서에 불과하단 말인가?(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들뢰즈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들뢰즈주의자들의 반론은, 후기자본주의의 물리적인 이동성/유동성/혼종성의 증가와 들뢰즈의 철학적 노마디즘이 가지는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철학적 노마디즘이 후기자본주의에서 어떤 "현실적 양태"로 등장할 수 있는가를 "적극적으로(positively)" 제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애석하게도, "철학자" 들뢰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두거나 유보적 입장을 견지한다. 예컨대, 흔한 오해들과는 달리 그가 물리적인 이동성/유동성/혼종성의 증대를 긍정적으로 보았는지조차,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오히려  들뢰즈 자신은 감금에 기반한 훈육사회를 대체하는, 끊임없는 이동을 기반으로 한 통제사회(the societies of control)의 등장을 문제삼지 않았던가? 문제는 이후 들뢰즈주의자들의 작업이 이러한 현실 자체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현실 차원의 변화와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노마디즘을 손쉽게 뒤섞어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푸는 해법은, 들뢰즈의 문제의식을 통해, 이동성/유동성/혼종성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후기자본주의의 배치assemblage를 정교하게 검토하고, 이 속에서 노마드적 삶의 양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제시하는 데 있다.(이는 분명 산업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석한 맑스와 맑스주의의 작업에 비견되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들뢰즈 자신은 이러한 물음에 완결된 형태의 답을 내려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답은 앞으로의 실천 속에서 "생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가 궁극적으로 강조했던 것은, 통제사회(후기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분석과 저항양식의 탐구는 올곧이 새로운 세대의 몫으로 남아있으며, 자신의 이론/철학은 이를 위한 하나의 "연장통"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기존의 들뢰즈 연구 진영에서 이러한 "진지한" 들뢰즈주의적인 작업보다는, 이동성/유동성/혼종성의 증가를 손쉽게 노마디즘과 연결시키려는 유혹 속에서 동요해왔으며, 결국 천규석 씨나 지젝의 비판은 그러한 지적 게으름의 결과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들뢰즈주의자는 아니지만 들뢰즈의 사유 방식에 호의적인 나로서는, 이번 논쟁들이 들뢰즈의 입장에 대한 비생산적인 공격과 방어를 빗겨가서, 앞서 밝힌 "진지한" 들뢰즈주의적인 작업들을 촉진하는 촉매제로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연... 무리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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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4 02:02 2006/07/14 02:02